렌즈에 비친 세상2008.12.11 22:49



중원 고구려 비는 충주시 가금면 용전리 입석 부락에 있다. 
이 비석은 1979년 충주 지방의 문화재 애호 단체인 예성 문화연구회에서 찾아내어,
단국대학교 박물관의 학술조사단에 의해 확인된 고구려 시대의 비석이다.

비석의 높이 1.44m,폭 0.55m-0.59m이고,두께는 0.37-0.38m인데 화강암으로 만들어 진 비석이다.
1981년 3월18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비석의 모양이나 새겨진 글씨체와 형식으로 보아 만주에 있는 광개토대왕의 비와 비슷하며,
4면 모두에 글씨를 새긴 비석이다. 비석의 앞면은 10행 23자이고,왼쪽면은 7행 23자로 보여진다.




비석에 새긴 글씨는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씻기어서 모두 읽을 수는 없으나
고구려와 신라가 국경문제로 다투다가 화해를 한 기념으로 이 곳에 세원 진 듯하다.
비석에 새겨진 내용으로 보아 고구려와 신라가 화친을 하면서 고구려가 형님이되고
신라가 아우국가가 된다는 기록과,고구려의 영토가 소백산맥을 경계로 조령과
죽령에 이르게 된 다는 기록으로 보아 고구려 장수왕 때의 업적을 적은 것으로 판단되며
당시 영토 확장에 대한 정계비(국경을 정하여 적은 비석)로 볼 수 있다.


이 비석의 중요성은 고구려와 신라의 문화가 전달되는 과정을 연구 하는데에도 있다.
비문중에 고구려가 신라에게 의복을 준다는 내용도 있는데,
의복외에도 관리의 명칭이나 제도가 이런 기회에 자연스럽게 알려지지 않았나 생각된다.


충주중원지방이 고구려의 영토였다는 것은 옛날의 기록에도 있으나
이 비석으로 인하여 다시 확인되었고 이 비석이 서 있는 곳이
고구려와 신라를 통하던 중요한 통로였다는 것을 알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 비석을 발견하게 된 동기는 1979년 2월 충주의 지방사연구단체인 ‘예성동호회’에서
이 마을 입구에 있는 선돌에 글씨가 새겨져 있는 것을 보고 조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처음엔 비 전체에 이끼가 많이 끼어 있어 탁본을 하여도 글자를 해석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비문을 보면
첫째, 처음에 ‘고려대왕(高麗大王)’이라는 글자가 있는데 이때 ‘고려’는 ‘고구려’를 뜻하고,
둘째, ‘전부대사자(前部大使者)’, ‘제위(諸位)’, ‘사자(使者)’ 등 고구려의 관직 이름이 보이며,


셋째, 만주 집안시에 있는 광개토대왕의 비문에서와 같이 ‘고모루성(古牟婁城)’이 보이고,
넷째, ‘신라매금’, ‘모인삼백’, ‘신라토내’ 등 고구려가 신라를 불렀던 말이 나온다.

장수왕은 고구려 제20대왕(394~491) 왕으로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왕위에 있었으며 98세에 타계했다.

장수왕의 아들 조다(多)세자다.
장수왕이 98세나 장수하는 바람에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다.
그래서 조다의 아들 문자명왕이 할아버지인 장수왕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된다.
그래서 왕이 되지 못한 왕자. '쪼다'라는 말도 그래서 나온거라는 설도 있다. 


고구려비의 가치를 말하라면 이 비로 인하여 삼국사이의 관계,
특히 고구려와 신라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 해명될 수 있다.


한가지 이 곳 중원 지방이 장수앙대에 백제영토가 아니라 신라영토였으나
고구려 당주가 군사적 지배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이 비를 통해 알 수 있다.

- 이 기사는 2007년 여름 전교조 마산지회에서 매년 시행하는 역사탐방에서 다은 기록입니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댓글을 달아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