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퇴근길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데 어께 띠를 두른 교인들이 행인들에게 홍보물을 나눠주고 있었다. “예수 믿고 천당 가십시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이런 구호와 함께. 그런데 홍보지를 받아 지나가려는 데 건장한 남자 한 분이 필자를 보는 순간 “아! 선생님!”하고 아는 채를 했다. 필자도 몇 십 년 만에 만난 옛 교우(?)가 반가워 “아이구 오랜만입니다”라고 악수를 했다.

십여 년 동안 같은 감리교에서 권사직을 맡아 일했던 분이다. 그런데 이분, 다음 말씀이 “선생님도 이제 교회 나와 천당 갈 준비나 하셔야지요?” 그랬다. 신호가 바뀌어 급히 인사를 하고 건너오기는 했지만 말을 어떻게 저렇게 할까 섭섭한 생각이 가시지 않았다. ‘당신도 이제 나이께나 먹었으니 죽을 준비나 하라’는 뜻인가? 같은 말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른데 어떻게 60도 안 된 사람에게….


필자와 기독교는 묘한 인연이 있다. 사립학교에 근무하다보니 학교설립자인 교장이 장로였었고, 어쩌다 같은 교회에 다니게 됐다. 주일학교부장까지 맡아 일하던 필자는 그 뒤 전교조 관련으로 해직되면서 몰라도 될 여러 가지를 알게 되고 개인적인 존경심이 바뀌어 감정적인 앙금까지 남은 채 직권 면직 당한다.

순진하게도 평소 존경하던 교장선생님(장로님)은 우리가 요구하는 ‘참교육의 열정을 이해해 주시고 오히려 함께 하지 않을까?’ 할 정도로 평소 존경해 왔다. 그러나 결국은 참교육이라는 갈림길에서 서로 각각의 길을 걷게 됐다. 그 후 기독교에 대한 상처는 쉬 회복되지 못하고 그 때의 감정이 아직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다.

▲ 전두환 축복 조찬기도
ⓒ 오마이뉴스

개인적인 감정 때문만이 아니다. 기독교의 역사는 전혀 민족적이지도 못하고 민주적이지도 못하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기독교 한 종파는 군수산업을 해 돈벌이를 하고 있지만 여기선 그 얘긴 덮어 두자. 그 외에도 최근 사립학교법이며 기독교인이 경영하는 이랜드의 파업사태를 보면서 기독교가 이렇게 막나가도 될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멀지 않은 지난 역사에 황사영의 백서사건을 보자. 1801년 천주교 신자였던 황사영(1775-1801)이 신유박해를 피해 충북 제천의 한 토굴에 숨어 지내던 중 한국 천주교의 위기와 이 땅을 천주교의 나라로 만들기 위해 청나라와 서구 열강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장문의 편지를 작성한다.

신앙의 자유도 좋고 천주교선교도 좋다. 그러나 백서에 담은 내용을 보면 '청이 조선 조정에 압력을 가하거나 조선을 아예 한 성으로 편입시켜 천주교를 공인하거나, 프랑스 등 서양의 천주교 국가들에게 호소하여 군사 수만과 군함으로 조선을 협박하거나 정복해서 천주의 나라를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다. 자신이 믿는 종교를 위해 나라를 외국에 바치는 행위를 어떻게 봐야 할까? 백성들이야 전장에서 죽든 말든 천주교만 전파된다면 나라고 역사고 필요 없다는 종교는 제정신이 있는 사람일까?

종교재단이 운영하는 사립학교 부정과 비리를 두둔하기 위해 '사학법 개악을 막자'는 사람들을 마귀로 규정하는 기독교인들은 천사인가 악마인가? 부패한 사학 편에 서서 사학을 바로 세우자는 시민들을 마귀로 단정할 권리는 진정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것일까? 식민지시대에는 또 무슨 짓을 했는가? 1936년 6월 감리교 총리사 양주삼 목사는 총독부에서 신사 참배에 응할 것을 밝히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등이 신사참배를 결의했다. 장로교도 이에 뒤질세라 1938년 9월 제27차 총회(총회장:홍택기 목사)에서 신사참배를 가결했다.

『신사가 종교가 아니요 …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 에 신사참배를 솔선 여행(勵行)하고 추히 국민정신 동원에 참가하여 비상 시국 하에서 총후(銃後) 황국신민으로서 적성(赤 誠 )을 다하기로 함』 십계명을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저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하난미도 십계명도 헌신짝처럼 버리는 것이 진정한 예수의 제자일까?

황국신민화정책을 실시하기 위해 조선여성을 동원했을 때 고황경, 김활란, 이숙종, 조기홍 등 대표적인 기독교 여성 지도자들은 ‘대세순응론’을 들고 나와 미나미 총독이 추진하는 어용단체에 협력해 동족을 내선일체, 황국신민을 만드는데 앞장섰다.

일제 때만 아니다. 광주시들이 전두환 부하들의 총칼에 무참히 난도질당할 때, 전두환을 위한 용비어천가를 불렀던 목사님들은 아직도 눈이 시퍼렇게 살아 있다. 1980년 8월6일 원한을 품고 죽어간 무고한 시민들의 피도 채 마르기 전, 롯데호텔에서 기독교 지도자라는 분은 「국가와 민족의 장래를 위한 조찬 기도회」를 열었다. 이 기도회에서 문만필 목사가 사회를 맡고 설교에 한경직 목사, 기도에 정진경 조향록 김지길 목사와 김인득 장로가 맡았다.

이들이 하나님께 『이 어려운 시기에 막중한 직책을 맡아서 사회 구석구석에 존재하는 악을 제거하고 정화할 수 있게 해준 데 대해 감사한다.』고 기도했다. 이 조찬기도회는 KBS와 MBC를 통해 현장 중계됐으며 다음날 두 번에 걸쳐 녹화 중계 했다.

한경직 목사는 박정희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에서 '박정희 = 모세'라고 찬양했던 바로 그분이다. 양의 탈을 쓴 종교지도자들은 회개해야 한다. 교회지도층의 카멜레온 같은 삶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어렵다. 1972년에는 「대한기독 교연합회」 등에서 유신헌법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국가보안법수호 국민대회를 열고, 2001.부터 연이어 3년 동안 세 차례에 걸친 미군철수반대와 숭미집회를 열기도 했다.

1년간 약 1억1300여만원의 십일조를 내는 조모목사의 경우 연간 약 11억3000만원의 소득있다는 말이다. 이 목사에게 국가는 세금 한 푼도 매기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현대판 골품제를 적용하겠다는 것인가? '종교법인법 제정 추진 시민연대' 이드(52) 사무처장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종교인이 세금을 내지 않는 나라가 한국"뿐이라며 "한국 종교계는 헌법 11조 국민평등권을 위배하고 있고 헌법 38조에 납세의 의무까지 위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오마이뉴스 2007년 7월 11일)

종교와 자본, 종교와 권력이 손잡으면 종교가 교의를 따라갈까? 멀쩡한 사람도 권력의 맛을 보면 ‘맛이 간다’(?)고들 한다. 역사적으로 불교가 권력 화됐던 지난날을 우리는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물론 사람이나 종교도 시행착오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종교인이나 단체가 개인이나 국민 앞에 저지른 죄악을 회개할 줄 모르고서 어떻게 신자들을 천국으로 안내할 것이며 본인은 천국을 보장받을 수 있을까? 2000년 전에 예수님은 말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회개 없는 천국은 없다. 한국교회가 살 수 있는 길은 회개를 통한 양심회복부터 해야 한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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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독교의 교리나 가르침에는 많이 공감을 합니다. 그래서 소위 기독교인들이라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회손할때마다 아쉽죠.

    어쩌면 스스로 회개할 생각이 없기 때문에 기독교에 귀의하는지도 모르겠네요.

    2008.10.28 01:05 [ ADDR : EDIT/ DEL : REPLY ]
    • '교회에만 예수가 없다'는 말이 왜 나왔겠습니까?
      제 생각에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워 왔느니라'는 말은 교회에서 세상을 향하는 소리가 아니라 먼저 교회에 해야할 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008.10.28 12:13 [ ADDR : EDIT/ DEL ]
  2. 종교 이야기 나오면 의견 달기로 약속드린 게 기억나서 장황하게 써 봅니다. 선생님의 글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만, 황사영백서 부분에 대해 황사영을 위한 변호를 좀 하고자 합니다. 물론 저도 황사영의 태도를 전적으로 지지하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도 변호해 주지 않으면 그의 죽음이 너무 억울할 것 같아 이리 적어봅니다. 댓글이 너무 길어 죄송합니다.

    임진왜란 때 왜군에 맞서 싸운 것은 민중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들이 모두 나라를 구하기 위해 싸웠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자기 가족과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일어났던 것이지요. 물론 서산대사의 승병처럼 호국의 정신을 담은 의병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선조 왕은 이들 의병의 무력이 성장하는 걸 경계해서 의병장들을 역도로 몰아 죽이기도 했습니다. 김덕령 장군의 옥사가 그 보기 중 하나입니다. 이순신 장군도 늘 선조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받았다는 정황이 전해져 오기도 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노량해전에서 전사한 걸 두고도 스스로 목숨을 버린 것 아니냐는 설도 그래서 생긴 것이지요. 전쟁이 끝나고 논공행상을 하는데, 선조는 1등공신에 추천된 이순신을 끝내 거부하다 결국 할 수 없이 권율, 원균, 이순신 세사람이 1등에 책록되는 웃지 못할 일화도 남겼습니다.

    황사영 사건의 발단은 신유박해입니다. 신유박해는 정조 사후 남인 세력을 척결하기 위한 노론의 음모에 의해 1801년 발생한 사건입니다. 역사는 신유사옥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황사영은 매우 영민하여 정조 임금이 직접 16세의 어린 그의 손을 잡고 "스무살이 되거든 나를 찾아오라. 그러면 내 너를 중히 쓰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명주로 정조가 잡았던 손목을 감고 다녔다고 합니다.

    그런 그가 정조가 죽은 후 연이은 노론의 공격으로 정약종과 정약용 형제를 비롯한(황사영은 정약용의 조카사위였음) 천주교도들이 대거 참화를 입게 되고 자신도 쫓기게 되자 충북의 배론에 숨어 비단에 글을 써서 로마교황청에 전달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미수에 그치게 됩니다. 비단에 썼다고 해서 백서라 불리는 이 문서는 의금부에서 압수해 보관하다 1896년에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졌다고 합니다.

    황사영은 로마교황청에 한국교회의 급박한 사정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는데, 그 내용 중에 청국과 프랑스의 무력시위를 요청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신유박해를 통해 대부분의 천주교도들이 목이 잘리고 씨가 마르게 된 상황, 배론이라는 오지에 은신한 채 언제 잡혀 죽을지 모르는 상황, 이런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오판에 따른 과도한 상상력을 만들어내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황사영을 변호하는 차원에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수많은 동도들을 죽이는 조선을 황사영이 과연 조국이라고 생각했을까? 그리고 당시에 조국 혹은 민족이라는 개념이 있었을까? 의심을 해봅니다. 혹은 이성계는 전주 이씨였을까? 그가 말갈족 출신이며 정권을 위해 전주 이씨라는 명문세가가 필요했던 건 아닐까? 하는 확인되지 않은 엉터리 같은 질문도 던져 봅니다.

    굳이 황사영을 변호하는 차원에서 말씀드리자면, 20세기 이후에 생겨난 민족주의나 애국주의로 백서사건을 해석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물론 비교 자체가 곤란한 측면도 있겠지만, 광주항쟁 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담아 비밀리에 서방으로 알리고 이것이 우리나라가 아닌 외국에서 시비거리가 되고 했던 것이 거꾸로 민주화에 기여한 공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과도하게 민족주의적으로 해석하면 이런 것 조차도 배국배족이 되는 오류가 생길수도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황사영의 상상력이 오바했다는 건 일정 사실입니다.

    아래는 교회사연구소 문헌 중 황사영에 대한 기록을 퍼온 것인데 참고가 될만 해서 붙입니다.

    황사영(1775∼1801).

    1. 인물 : 교회창설 초기 지도적 신도중의 하나이며 순교자. 자는 덕소(德紹), 본관은 창원(昌原)이며 남인(南人) 명문의 출신이다. 부친 황석범(黃錫範)과 모친 이씨(李氏) 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정5품 정랑직(正郞職)을 역임한 바 있으며, 모친은 이동욱(李東郁)과 8촌간인 이동운(李東運)의 딸이다.



    그는 1790년(正祖 14년)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여 정조(正祖)의 특별한 격려를 받았고, 정조가 그의 손을 잡아주기까지 하였으므로 그는 이것을 표시하기 위해서 손목을 명주로 감고 다녔다 한다. 그는 과거에 급제한 직후 정약용(丁若鏞)의 맏형인 정약현(丁若鉉)의 딸 명련(命連, 마리아)과 결혼하였다.



    그는 1791년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았으며 정약종(丁若鍾), 홍낙민(洪樂敏)과 함께 천주교 신앙에 관하여 진지한 토론을 한 후, 알렉산데르(Alexander)란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하였다. 그의 영세 직후인 1791년 10월(음)에 신해박해(辛亥迫害)가 발생하여, 그의 많은 친척과 친우들이 천주교를 배척하였다.



    그러나 그는 천주교를 “세상을 구제하는 좋은 약”(救世之良藥)으로 확신하며, 조상에 대한 제사를 포기하고 신앙생활을 계속하였다. 조상에 대한 제사의 포기는 관직에의 진출을 단념함을 뜻하는 일이었다. 그는 주문모(周文謨) 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 주 신부를 최인길(崔仁吉)의 집에서 만난 후 주 신부의 측근인으로 활동하였고, 주 신부가 조직한 명도회(明道會)의 주요 회원이 되었다. 즉 그는 남송로(南松老), 최태산(崔太山), 손인원(孫仁遠), 조신행(趙信行), 이재신(李在信) 등 5인과 함께 명도회의 단위 조직 중 하나를 구성하여 이를 인도하고 있었다. 앞날이 촉망되던 양반인 그가 대부분이 양인이었던 이들과 함께 어울려 신앙생활을 다져나가고 있었다는 사실은 매우 주목할 만한 일이다.



    그는 1796년 이승훈, 홍낙민, 유관검(柳觀儉), 권일신(權日身) 그리고 최창현(崔昌顯) 등 당시 교회의 주요 인물들과 함께 주문모 신부와 협의하여 북경의 주교에게 해로(海路)를 통한 서양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하였다. 청년 황사영이 이와 같은 당시 교회의 극비상황에 간여하고 있음을 보면, 교회 내에서 그의 위치가 상당히 중요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1798년 이후 자신의 향리인 경기도 고양(高揚)을 떠나 서울에 이주하여 애오개[阿峴洞], 북촌(北村) 등지에서 거주하였다. 그는 서울에서 신도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지냈고,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며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직전에는 가장 활동적인 교회지도자로 부상되어 나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정약종 등 교회 지도자들이 체포되었고, 황사영에 대한 체포령도 내려졌다.



    그는 1801년 2월(음) 초순 체포를 피하여 서울 도성(都城) 안을 전전하다가 상복(喪服)으로 변장하고, 스스로는 이상인(李喪人)이라 자처하며 피신 중에 만난 김한빈(金漢彬)을 따라 충청도 배론[舟論]으로 피신하였다. 김한빈은 전라도 고산(高山) 출신으로 충청도 청양(淸陽)에 이주했다가 서울로 다시 옮기어 살던 중 신유박해를 만난 인물이다. 김한빈은 충청도 청양인(淸陽人) 김귀동(金貴同)이 지방에서 일어났던 박해를 피애 제천(堤川)에 피신하고 있음을 알았으므로 황사영을 김한빈의 처소로 인도했던 것이다. 제천으로 피신한 황사영은 김귀동의 집에서 은거하며, 자신이 겪은 박해상황을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김한빈을 1801년 3월(음) 서울로 보내 박해의 진행과정을 알아오게 하였다. 그는 제천에서 교회의 재건방안을 생각하거나, 시작(詩作)으로 소일하고 있었다. 이 때 그가 작성한 기록들은 ‘백서’(帛書)를 쓰는데 있어서 기본적 자료가 되었다. 한편 박해를 피해 떠돌아 다니던 황심(黃沁)은 김한빈이 제천으로 떠났음을 탐문하고서 김한빈을 만나기 위해 제천으로 왔다. 황심은 이미 1798년과 1799년 쇄마구인(刷馬驅人)의 명색으로 북경에 가서 주문모 신부의 서한을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했던 인물이었다. 8월 26일(음) 황심을 만나 황사영은 박해의 경과와 교회의 재건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비단에 적어 북경 주교에게 발송하려 하였다.



    그러나 그가 작성한 이 백서는 황심의 체포로 인해 사전에 발각되었으며, 황사영 자신도 1801년 11월 5일(음)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그의 묘소는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부곡리에 소재해 있는 것으로 최근 확인되었다. 한편, 그의 처형 이후 황사영이 소유했던 가산은 적몰(籍沒)되었고 그의 노비(奴婢) 5인은 관노비로(官奴婢)로 몰수되었다. 그리고 그의 숙부 황석필(黃錫弼)은 경흥(慶興)으로 정배되었으며, 그의 처 정명련은 제주도 대정군에 정배되었다. 그리고 그의 아들 황경한(黃景漢)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죽음을 면할 수 있었으나 추자도(秋子島)에 정배되었다가 하(下)추자도 예초리에서 성장하였다.

    2.황사영 백서 : 백서는 비단에 씌어진 글을 뜻하는 보통명사이다.



    <황사영 백서>는 1801년 당시 천주교회의 박해현황과 그에 대한 대책 등을 북경의 주교에게 건의 보고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압수당한 비밀문서이다. <황사영 백서>는 가로 62cm, 세로 38cm의 흰 명주에 작은 붓글씨로 씌어진 것인데, 모두 122행 1만 3,311자에 달하는 장문으로 되어 있다. 이 백서는 ‘서론’, ‘본론’, ‘결론, 대안제시’ 등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서론’은 1행부터 6행까지로서, 여기에서는 1785년 이후 교회의 사정과 박해의 발생에 관해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본론’은 7행부터 90행까지로서 전체 분량 중 거의 70%에 해당된다. 본론에서는 신유박해의 전개과정을 자세히 서술하고 있다. 특히 황사영은 여기에서 자신이 직접 목격했거나 전해들은 교회관계 사건들을 정리해서 보고하고 있다. 즉 그는 최필공, 이중배, 김건순, 권철신, 이안정, 이가환, 강완숙, 최필제, 오석충, 정약종, 임대인, 최창현, 홍교만, 홍낙민, 이승훈, 김백순, 이희영, 홍필주, 조용삼, 이존창, 유항검, 윤지헌 등의 체포와 죽음을 증언하고 있으며, 주문모 신부의 활동과 자수 및 죽음에 대해 비교적 자세히 밝혀 주고 있다.



    한편, 91행 이하의 ‘결론’ 내지 ‘대안제시’의 부분에서는 먼저 박해로 인한 교회의 피폐상과 박해의 종식에 관한 강한 열망을 표현해 주었다. 그리고 청국교회와의 연락을 쉽게 하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고 이에 이어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논하고 있다. 즉 그는 조선의 종주국인 청(淸)의 위력에 의존하여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안을 먼저 제시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청국이 종주권(宗主權)을 행사하여 청나라 황제의 명으로 조선이 서양인 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해 주기를 요청하였고, 더 나아가서는 청국의 감호(監護)를 요청하며, 조선을 청의 한 성(省)으로 편입시킴으로써 조선에서도 북경에서처럼 선교사의 활동을 보장받아 보기를 희망하였다. 또한 그는 서양의 무력시위를 통해 신앙의 자유를 얻는 방안도 제시하였다.



    즉 그는 서양의 배 수백 척과 병사 5, 6만명을 동원하여 조선에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강박해 주기를 희망하였다. 이어서 그는 박해로 인해 교회의 규칙을 지킬 수 없음을 호소하며 대소재(大小齋)의 관면을 청하는 내용의 글로 백서를 끝맺고 있다. 이 백서의 발신자는 황심 도마(多默)로 되어 있다. 황심은 이미 조선교회의 편지를 북경주교에게 전달한 바 있었던 인물이므로, 황사영은 그의 이름을 빌어 조선교회의 사정을 보고하고 대책의 마련을 호소하고자 하였다. 백서가 작성된 곳은 배론의 김귀동 가(家)였다.



    그가 백서에 씌어진 사실들을 수집 정리하고 구상하기 시작한 때는 자신이 배론으로 피신했던 1801년 2월(음) 전후로 파악된다. 그는 피신 중 박해에 관한 사실을 김한빈 등을 통해 계속 수집하였고 이를 기록해 두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26일(음) 황심을 만나게 되자 그날 밤 이를 최종적으로 정리하여 황심 편에 북경으로 발송하려다 미수에 그쳤던 것이다. <황사영 백서>는 1801년 압수된 이후 의금부에서 계속 보관해 오다가 1894년 옛 문서들을 파기할 때 그 원본이 우연히 발견되어 당시 조선교구장이던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에게 전달되었다.



    뮈텔 주교는 1925년 7월 5일(음) 로마에서 거행된 조선순교복자 79위의 시복식 때 이 자료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선물하였고, 현재 교황청 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백서의 사본은 발각 당시부터 작성되기 시작해서 ≪벽위편≫(闢衛編), ≪신유사학죄인 사영 등 추안≫(辛酉邪學罪人嗣永等推案)을 비롯한 몇몇 자료에 재수록되어 있다. 한편 뮈텔 주교는 백서의 원본을 로마로 발송하기 이전 이를 실물 크기대로 동판에 담아 인쇄하여 학계에 배포하였다. 또한 한국 교회사연구소에서는 1966년 이를 활판본으로 간행하였다. <황사영 백서>의 번역본은 1925년 뮈텔의 프랑스어 역본(譯本), 1946년 야마구찌 마사유끼(山口正之)의 일본어 번역본, 1976년 정음사에서 간행한 윤재영(尹在瑛)의 한굴번역본 등이 있다.

    황사영은 “천주교 신앙이 백성과 나라에 해가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지만, 조정에서 이를 반드시 금지시키고자 하니, 천주교를 힘써 지켜보고자 하는 의도”(邪學罪人嗣永等推案)로 이 백서를 작성하였다. 그는 박해로 인해 죽어간 자신의 동료들에 관한 기록을 철저히 남기어 그들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않기를 바랐다. 또한 그는 박해의 상황을 철저히 기록해서 전달함으로써 조선교회의 재건에 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자 하였다.



    ‘본론’의 기록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특징 때문에 <황사영 백서>는 신유박해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한편, 그는 ‘대안제시’의 부분에서 많은 문제점을 드러내 주었다. 1801년 당시 조선의 사회에서는 청나라의 정통성과 문화를 부인하는 북벌론적(北伐論的) 배청감정(排淸感情)과 함께, 청국의 문물을 적극적 주체적으로 수용하려는 북학론(北學論)이 공존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방안으로 조선을 청국에 종속시켜 보고자 하였다. 그의 이 발상은 북벌론자는 물론이고 북학론자에게도 수용될 수 없는 주장이었다. 또한 그는 서양선박과 병력의 파견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그의 발상을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서양선박과 선교사의 파송을 요청한 바 있었던 초기 교회의 경험에, 박해라는 극한상황에 대처하기 위한 무력의 요소가 결부되어 제시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당시 사회에 널리 유행되고 있던 해상세력(海上勢力)의 조선침략에 관한 위기의식과도 일정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발상은 달레(Dallet)의 표현대로 “지나친 상상에서 나온 유치한 계획이며, 저 시대에 있어서의 한 몽상(夢想)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는 급박한 박해의 상황 때문에, 조선왕조가 존재하는 한 신앙자유의 획득이나, 자신을 포함한 신도들의 생명유지가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조선왕조의 존재를 부정해 보려는 ‘몽상’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의 ‘대안제시’가 ‘몽상’의 일종이었다 하더라도 그는 이 ‘몽상’ 때문에 많은 비판을 받았고, 이 ‘몽상’은 그의 죽음에 있어서 직접원인으로 작용하였다. 한편,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황사영의 ‘대안제시’를 반민족적 행위로 규탄하고 있다. 그러나 근대 민족주의가 성립되지 않았던 상황 아래서 제시되었던 그의 ‘몽상’을 반민족주의로 규정하는 데에는 재고가 요청된다. 그러나 그의 ‘대안제시’는 마땅히 비판을 받아야 한다. 그는 신앙의 자유라는 좋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무력의 사용, 국가생존권의 부정이라는 좋지 못한 방법을 사용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3. 황사영 백서사건 :

    <황사영 백서>가 발각됨으로 말미암아 야기된 천주교탄압 사건으로서, 신유박해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된다. 이로써 주문모 신부의 자수와 처형 이후 소강상태에 들어갔던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다시 크게 일어났다. 1801년 9월 26일(음) 황사영이 체포됨으로써 이 사건은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 또한 이들의 체포에 앞서 황심과 가까웠던 옥천희(玉千禧)가 체포되어 이들을 함께 국문하게 되었다. 사건이 발생한 직후 황심, 옥천희, 김한빈 등 관련인들은 형조에서 취조를 받았고, 사건의 주범인 황사영은 의금부에 구금되었다. 황사영에 대한 신문은 10월 9일(음)에 시작되었다. 그의 신문이 체포 이후 10여일간 지체되었던 것은 사건의 중요성으로 인해 이 사건과의 관련사항을 파악하고 사건에 대한 대안을 사전에 마련하려 했기 때문이다. 신문은 주로 ‘대안제시’의 반역적 요소를 추궁하는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그리고 황사영 개인 및 그 사건과 관련된 인물들을 찾아내려 하였고, 백서의 사본이 청국에 전달되었을 가능성 등을 집중적으로 신문하였다.



    신문의 결과 황심과 김한빈은 10월 23일(음) 서소문 밖에서 처형되었다. 황심에게 적용된 죄명은 모역동참죄(謀逆同參罪)였으며, 김한빈은 지정은장죄(知情隱藏罪)가 적용되었다. 그리고 11월 5일(음) 이사건의 중심인물인 황사영은 궁흉극악 대역부도죄(窮凶極惡大逆不道罪)로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었다. 또한 김귀동 및 그 밖의 관계자와 가족들이 처벌됨으로써 이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한편, 조선 조정에서는 1801년 10월(음)에 파견된 동지사에게 천주교 탄압의 정당성을 설명하는 진주사(陳奏使)의 임무도 부여해주었다.



    이때 파견된 진주사 조윤대(曺允大)일행은 토사주문(討邪奏文)과 함께 <황사영 백서>의 내용을 16행 923자로 축소하여 청국의 예부(禮部)에 보고하였다. 이 축소본을 흔히 <가백서>(假帛書)라 부르고 있다. 이 가백서에는 청국의 조선 감호책(監護策)이나 종주권(宗主權) 발동 등에 관한 내용은 완전 삭제시켰으며, 서양선박의 요청사실과, 월경통신(越境通信) 등의 사실을 이조흉계(二條凶計)로 지적하였다. <황사영 백서>가 발각된 이후 청국인 주문모 신부의 처형 사실이 청국에 알려질 가능성이 높다고 조정에서는 판단하게 되었다. 이에 조선정부는 진주사를 파견하여 신유박해 전반에 관한 청국의 이해를 촉구하고, 주문모 신부의 처형에 따를 수 있는 청국측의 반발을 예방하고자 하였던 것이다. 진주사 조윤대의 파견은 <황사영 백서> 사건을 외교적 측면에서도 마무리짓는 것이었다.

    [참고문헌] 黃嗣永帛書, 한국교회사연구소,

    2008.10.28 12:13 [ ADDR : EDIT/ DEL : REPLY ]
    • '국가주의'라는 말의 정의를 다시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라를 위해... 운운하는 그런.... 왕조사관에서가 아니라 민중사관에서 역사를 보면 해석이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호국불교니... 하는 그런 이데올로기도 마찬가지고요.
      황사영에 대한 파비님 자료 잘 읽었습니다.

      2008.10.28 12:17 [ ADDR : EDIT/ DEL ]
  3. Zune

    기독교의 일그러진 모습들... 스스로 돌아보고 종교인의 참자세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생각해보며 잘못된 것들은 바로 잡아야 한다고 말하면, 그 내부에서 오히려 질타를 받는 마당인데, 더이상은 그들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 조차도 헛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김용택님께서 지적하신 부분을 신도가 의문을 제기하면 마귀들렸거나,시험에 들린거라고 하고,더나아가 "저게" 우리까지도 시험에 들게 한다며 갑자기 차갑게 대하며 왕따시키고... 그나마 깨어있는 목사님이 그런 내용을 설교를 통해 교인들에게 알리면, 교단내에서 "이단"이라며 내치는 현실이니...

    2008.10.28 15:10 [ ADDR : EDIT/ DEL : REPLY ]
    • 그렇지요?
      그런데 왜 상식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종교에 매달리는지...?
      또 바꾸려고 생각들을 안 하는지...?
      옛날 절대교황의 시대 종교개혁을 시도했던 루터 같은 이는 정말 대단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2008.10.29 07:03 신고 [ ADDR : EDIT/ DEL ]
  4. 김현우

    종교에 대해 편견은 없지만 종교가 세금을 안내는 이유는 바로 정치로부터의 자유를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미국 종교계도 세금을 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종교가 정치색을 띠게 되면 세금을 안낼 이유가 없어지게 되죠. 그래서 미국의 한 종교운동가는 정치인 지지발언을 했다가 그때부터 미 법무부에 의해 과세가 판결되었습니다. 종교계 세금 부과 문제는 일의 인과관계를 잘 살펴봐야지 이렇게 감정적으로 대응하면 안되는 문제인 것 같습니다.

    2012.02.05 14:21 [ ADDR : EDIT/ DEL : REPL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