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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정치

4·19혁명의 씨앗 마산 '3·15의거' 기억하세요

by 참교육 2025. 3.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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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3·15의가 65주년입니다

용서망각은 다르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했다. 315일 오늘은 경남 마산에서 일어난 3·15 마산의거 65주년을 맞는 날이다. 우리 국민들은 마산 3·15를 기억하는 국민이 얼마나 될까? 3·15 마산 의거는 1960년 이승만의 3.15부정선거에 3인조 5인조 부정선거에 항거한 시위에 경찰이 집단 발포하여 다수의 희생자가 발생한 유혈 민주화운동이다.

3·15부정선거에 항의한 마산시민의 저항

장기집권에 눈이 어두워진 이승만이 투표함 교체, 개표 시 표 바꿔치기 등 모든 투표구에서 자유당 후보 득표율이 85% 이상이 되게 할 것’... 등을 지시한 부정선거 행동 지침이다. 이승만의 자유당은 대선 직전 민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유세 기간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이승만의 당선이 확정된 거나 마찬가지였지만 당시, 85세의 고령에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던 이승만 사후를 대비해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한 부정선거 계획을 세운다.

1. 4할 사전투표 : 선거 당일 자연 기권표와 금전으로 매수하여 기권하게 만든 전체 유권자 4할 정도의 표를 미리 자유당 지지표로 만들어 투표함에 넣어둔다.

2. 3인조 5인조 공개투표미리 짜둔 3인조, 5인조 별로 조장의 확인 아래 투표하여 자유당 선거위원에게 보여준 다음 투표함에 넣는다.

3. 완장부대 활용자유당 완장을 찬 사람들을 여러 투표소 주변에 배치시켜 심리적으로 압박하여 자유당에게 투표하도록 유도한다.

4. 야당 참관인 축출민주당 측 참관인을 매수해 참관을 포기시키거나 여의치 않을 경우 구실을 붙여 투표장에서 축출한다.

'3·15 부정선거의 양상

투표함의 30%정도를 이승만 이기붕으로 미리 채워놓고, 선거 전에 미리 이기붕 표로 채우거나 이기붕 표로 채워진 투표함으로 바꿔치기, 선거 전에 미리 이기붕 표로 채우거나 이기붕 표로 채워진 투표함으로 바꿔치기, 선거에 익숙하지 않은 국민들을 지도한다며 3~5인씩 한 조로 투표하게 한 것. 물론 각 조의 조장은 당연히 자유당 후보를 찍게 유도하기도 했다. 사람들에게 재물을 뿌리면서 자유당 투표를 독려하거나 심지어 죽은 사람의 이름을 선거인 명부에 올리기까지 했다.

대통령직에서 두 번씩이나 쫓겨난 이승만

개인이든 국가든 부끄러운 일은 덮고 감추려는게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수구 세력들은 부정선거를 하다 국민에게 쫓겨난 이승만을 국부(國父)’라고 자랑질이다. 이승만은 1919년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하다 1925323, 그를 임시대통령직에서 탄핵했다. 이승만은 외교를 빙자하고 직무를 떠나 5년 동안 원양일우(먼바다 한귀퉁이)에 편재해서 난국 수습과 대업 진행에 하등 성의를 다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부정선거 원흉이 국부라는 수구세력들...

1960315일 자유당정권에 의하여 대대적인 선거부정행위가 자행되었던 제4대 대통령선거와 제5대 부통령선거 결과는 당연히 이승만과 이기붕이 당선되었다. 그런데 선거 결과, 조작을 너무 열성적으로 한 나머지 이기붕의 득표율이 99%를 찍고, 일부 지역은 총유권자를 넘긴 115%가 나오기도 했다. 당황한 그들은 이승만 80%, 이기붕 70%로 줄여서 발표하는 어이없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한다.

유권자들은 이 기막힌 부정선거에 투표권을 우롱당한 이승만 정부의 만행에 마산시민과 학생들이 거리로 뛰쳐나온다. 시위대를 해산시키려던 경찰은 무차별 발포와 체포·구금으로 경찰과 충돌하게 된다. 1·2차 마산 시위에서는 마산시내 8개 고등학교가 모두 참가 하자 당황한 경찰이 무차별 총기를 발사. 80여명의 사상자(14명 사망)가 발생하고 주모자로 구속된 26명은 공산당으로 몰려 참혹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

부정선거에 항의한 3·15의거를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4113·15의거 후 행방불명이 됐던 마산상고 입학생(당시는 41일이 개학일이었다) 김주열군의 시신이 27일 만에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마산중앙부두에 떠올랐던 것이다. 최루탄이 박힌 시신으로 떠오른 처참한 모습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시위는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사상자 13 부상자 183명 희생자를 낸 3·15의거

419일 경찰이 대통령 관저인 경무대로 몰려드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하였고, 발포 이후 시위대는 무장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이며 맞섰다. 전 국민적 저항과 군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에 봉착한 이승만이 426일 하야를 발표함으로써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몰락하고 과도 정부를 거쳐 615(6·15 개헌)에 제2공화국이 출범하였다. 4·19혁명은 이렇게 3·15의거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다.

4·19혁명은 어느 날 우연히 일어난 민중의 저항이 아니다. 장기집권에 눈이 어두웠던 이승만정권은 3·15선거 승리를 위해 공무원을 통한 선거운동 망을 조직하고, 전국 경찰에 지시하여 이를 감시·독찰하는가 하면 야당 선거일에 학생들의 소요가 두려워 일요일인 228일 등교를 지시하기도 했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해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며 자유당의 독재와 불의에 항거해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 된 2·28대구학생의거. 그리고 경찰의 총칼에 맞서 부정선거에 항거한 3·15마산의거가 없었다면 어떻게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한 오늘의 대한민국이 가능했겠는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인간의 존엄성, 자유, 평등은 선열들의 피흘려 싸운 결과라는 사실을 우리 국민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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