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불교2019.05.12 07:29


오늘은 2563년 전 부처님이 오신 날입니다. ‘성불하세요...^^’ 부처님이 오신 날, 오늘은 전국 사찰에서는 일제히 봉축법요식을 열고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고 각자의 자리에서 주인공으로 살아갈 것을 서원’한다. 우리나라 불교는 삼국시대부터 한국에 상륙하여 포교가 시작되었고, 남북국시대를 거쳐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약 1천년간 국가 단위에서 밀어주던 종교였다. 왕실과 불교는 깊이 유착되어 있었고 불교는 국교와 같았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표본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5년 11월 1일 기준 종교인구수는 전체인구수 4905만 명의 43.9%인 2155만 명이다. 이 중 불교 인구는 전체인구의 35%인 8,059,624명이다. 부처님이 오신 날, 석가모니불의 생애와 부처님이 바라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알아보자.



<석가모니의 생애>

석가모니의 본래 이름은 싯다르타(達多 Siddhrtha)로서 고타마는 그의 성씨였다. 석가(釋迦 kya)족 출신의 성자라 하여 석가모니(釋迦牟尼 kyamuni) 혹은 간단히 석존(釋尊)이라 부르기도 한다. 석가족은 지금의 네팔과 인도 국경 부근에 있었던 하나의 조그마한 왕국이었으며 수도는 카필라바스투였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BC 560년경(460년경으로 보는 설도 있음)에 이 왕국의 정반왕(淨飯王 uddhodana)과 마야 부인(摩耶夫人 Mahmy)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왕궁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며,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까지 두었으나 인생고의 문제를 깊이 자각한 후 29세의 나이에 왕궁을 떠나 출가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유행사문(遊行沙門)으로서 마가다 국에 가서 여러 출가 사문들을 만나 각종 명상법을 배우고 깊은 선정(禪定 dhyna)에 드는 체험을 했으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독자적인 수행의 길을 걸으면서 극심한 고행을 통해 해탈을 얻으려는 노력도 해보았지만 몸만 극도로 쇠약해지고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는 고행을 포기했다. 수자타라는 처녀가 공양하는 우유죽을 먹고 몸을 회복한 후 나이란자나 강에서 목욕을 하고 그 물을 마셨다고 한다. 그와 함께 고행을 하던 수행자들은 그가 고행을 포기했다고 비난하면서 그에게서 떠났고, 그는 홀로 숲으로 가서 이른바 보리수(菩提樹:나중에 붙인 이름으로 avattha라는 무화과 나무의 일종) 밑에서 깊은 선정에 드는 체험을 하는 중에 깨달음(菩提 bodhi)을 얻어 부처, 즉 각자(覺者)가 되었다. 진리의 깨달음으로 인해 그의 마음은 모든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탈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석존의 성불체험이었고 불교가 시작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석존은 오랫동안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맛보면서 지냈으며 자신이 깨달은 진리(法 dharma)가 너무나 심오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설법을 주저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마음을 돌이켜 교화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석존은 제일 먼저 바라나시의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자기와 함께 고행을 하던 걸식승 다섯 비구를 찾아 그들에게 고행이나 쾌락주의의 양 극단을 피해 중도를 따라 수행할 것을 말하고 '4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와 '8가지 바른 길'(八正道)에 대한 설법을 하여 그들을 제자로 얻었다고 한다. 이것이 불교의 수도 공동체인 승가(僧伽)의 시작이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

석존의 가르침을 모아놓은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에 여러 가지로 전해지고 있으나 무엇보다도 그가 성도 후 다섯 비구들을 찾아가서 행했다고 전해지는 그의 첫 설법 내용인 사성제팔정도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을 기본으로 하여 석존의 교설과 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석존은 첫번째 거룩한 진리로서 인생의 고에 관한 고성제(苦聖諦)를 설했다고 한다. 사랑하는 자와 이별하는 괴로움, 미워하는 자와 만나는 괴로움,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괴로움, 그리고 색(色 rpa)·수(受 vedan)·상(想 sajñ)·행(行 saskra)·식(識 vijñna)의 5가지 요소들의 복합체인 인간존재 그 자체가 괴로움임을 설했다. 여기서 인간존재 그 자체가 괴로움이라 함은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신체적 요소(色),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인식(識) 등의 물질적·정신적 요소들이 모두 항시 변하는 무상(無常 anitya)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것도 항구적인 만족을 줄 수 없는 괴로운 것들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고 석존은 말한다. 뿐만 아니라 위에 언급한 5가지 묶음(五蘊)들 가운데 어느 것도 나의 불변하는 자아로 취할 것이 못 된다고 한다. 석존에 의하면 인간이란 다만 수시로 변하는 요소들이 화합하여 하나의 임시적인 존재를 산출하고 있을 뿐 인간에게는 항구불변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無我 antman)고 한다. 고·무상·무아는 그가 본 인간존재의 참된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으로, 무상한 것을 항구적인 것으로, 영원불변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데도 존재하는 것으로 전도된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2번째 진리는 고집성제(苦集聖諦)로서 고가 발생하는 원인을 밝히는 진리이다. 인간 존재와 그 삶이 고인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욕구하는 갈애(渴愛)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갈애가 계속되는 한 인간은 집착(取)을 일으켜 행위(業)를 하여 그 결과(業報)로써 사후에 또다른 고통의 존재로 태어나 같은 과정을 또다시 반복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갈애 또한 원인을 갖고 있다. 갈애는 인간의 실상을 모르는 무지(無明)와 이 무지를 조건으로 하여 생긴 전생에 있어서 누적된 업력(行)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석존은 이와 같이 고를 일으키는 '복합적 조건'(集起)들을 분석적으로 설했으며 이같은 고의 조건적 발생을 연기(緣起)라 불렀다. 무지와 갈애로 인해 인간은 과거·현재·미래 세를 통해 끊임없는 생사(生死)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3번째 진리로서 석존은 이러한 고가 멸한 상태, 즉 무지와 갈애가 멸한 상태에 관한 진리인 고멸성제(苦滅聖諦)를 설했다. 이는 고가 멸한 상태(nirodha)가 있다는 진리이며 이러한 상태를 열반(涅槃)이라 부른다. 열반은 탐욕(貪)·성냄(瞋)·무지(痴 moha)의 3독(三毒)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로서 생사의 세계를 초월한 경지를 뜻한다. 열반은 과거세에 지은 업의 소산인 현재의 몸을 지닌 채로도 실현 가능하고(석존이 성도했을 때처럼) 사후에 신체를 떠나 실현되기도 한다. 후자를 반열반(般涅槃 parinirva)이라고 부른다. 석존의 입적시에 실현된 경지이다. 이런 사후의 열반에 대하여 석존 당시부터 제기되었던 문제는 인간에게는 영원불멸의 자아가 없는데 누가 열반을 체험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석존은 열반이라는 초월적 실재의 신비를 그대로 남겨두었으며 우리의 일상적 개념으로 규정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4번째 진리로서 석존은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 또는 줄여서 도제(道諦)를 설했다. 즉 고의 종식인 열반으로 가는 길, 팔정도에 관한 설법이다. 팔정도는 정견(正見)·정사(正思)·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이 8가지 수행을 셋으로 크게 묶으면 계(戒)·정(定)·혜(慧)의 삼학(三學)이 된다. 도덕적 행위와 삶(戒), 흩어진 마음의 통일과 정화(定), 사물에 대한 올바른 통찰(慧)을 닦음으로써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석존은 팔정도를 설함과 아울러 쾌락을 탐하는 삶과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주의의 양극을 피해 중도의 길을 따를 것을 가르쳤다. 중도는 8가지 수행을 올바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태도인 것이다. 석존은 이같은 고락의 중도 외에 단상(斷常)의 중도, 혹은 유무(有無)의 중도도 가르쳤다. 즉 영원한 자아가 존재한다는 상주론(常住論)도 석존은 거부했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죽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으며 업보도 내세도 없다는 단멸론(斷滅論)도 거부했다. 그러나 존재의 조건이 계속되는 한 인간은 조건적 존재로서 존속한다. 열반이란 이렇게 조건적으로 존재하는 무상하고 괴로운 인간존재 자체가 완전히 극복된 무조건적인 세계이며, 팔정도는 무지와 탐욕 같은 인생의 조건들을 극복하여 열반을 실현하는 길인 것이다.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갈망... 그것이 오늘날의 종교가 출현하게 배경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라 무엇인가? 사후의 세계란 실재하는 것인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절대자인 신은 실존하는 것인가?... 이 모든 물음에 대해 종교는 과학적인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지만 종교를 통해 평등세상을 이루고자하는 인간의 보편적 진리는 모든 인류의 염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종교는 종교가 지향하는 가치와는 다른 자본에 예속된 물질과 타협한 세속의 길을 선택해 타락의 길을 걷고 있다. 무신론이 불교가 구복신앙 혹인 기복신앙으로 변질된 것은 이를 반증하고 있다. 다시 부처님 오신 날을 맞으며 부처님이 바라던 세상 모든 불자가 성불의 길로 가는 꿈이 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 이 글은 jesusi 홈의 글을 편집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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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정치/사는 이야기2019.01.04 07:10


“우리 조선 사람은 매양 이해 이외에서 진리를 찾으려 하므로 석가가 들어오면 조선의 석가가 되지 않고 석가의 조선이 되며, 공자가 들어오면 조선의 공자가 되지 않고 공자의 조선이 되며, 무슨 주의가 들어와도 조선의 주의가 되지 않고 주의의 조선이 되려 한다. 그리하여 도덕과 주의를 위하는 조선은 있고, 조선을 위하는 도덕과 주의는 없다. 아! 이것이 조선의 특색이냐, 특색이라면 특색이나 노예의 특색이다. 나는 조선의 도덕과 조선의 주의를 위하여 곡(哭)하려 한다.”




식민지 조선에서 혁명을 꿈꿨던 진정한 애국사 단재 신채호선생님의 어록에 나오는 얘기다. 역사가이자 독립운동가요 아나키스트이자 무장투쟁론자였던 선생님다운 모습은 그의 삶속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단재는 세수할 때에 고개를 숙이지 않고 빳빳이 든 채로 두 손으로 물을 찍어다가 바르는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마룻바닥과 자기 저고리 소매와 바짓가랑이를 온통 물투성이로 만들었다.”는 선생님. 세수를 그렇게 했던 이유는 일제가 이 땅을 지배하는 한 어느 방향으로든 허리를 굽히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21세기 지구상의 기독교 인구는 21억 명이다. 전 세계 인구의 1/4~1/3을 차지하는 기독교는 종파만 무려 38,000개다. 한국의 예수교였다면 그들이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처럼 하라’고 가르친 교조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종교인이었다면 오늘날의 세상이 이 지경이 됐을까? 대한민국의 종교인 수는 2014년 현재 불교 22%, 개신교 21%, 천주교 7%로 나타나 대한민국 전체인구의 절반이 종교인이다. 사랑을 실천하는 기독교, 자비를 실천하는 불도들이 예수와 부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을 산다면 왜 이렇게 삭막한 세상이 됐을까?


정당(政黨)이란 ‘생각이 같은 사람들의 모임’이다. 생각이 같다는 것은 정치관 즉 정치철학이 같은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선거철만 되면 철새들이 판을 친다. 소신은 바꾸기를 밥멉듯이 하는 배신자들이 화려한 전력과 일류대학에 무슨 학위를 가졌다고 유능한 사람인가? 유신헌법을 만든 전력도 스펙이고 살인정권의 무슨 장관을 지낸 것도 스펙인가? 신의를 버리고 배신을 밥먹듯이 하는 사람들을 지지하는 유권자들은 이성을 가진 권리행사인가?


교육이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일이다. 그런데 일류대학이 교육목표가 된 학교에는 교육은 뒷전이요, 시험문제풀이 전문가를 길러내는 일에 더 열심이다. 사랑과 정성으로 제자들을 가르쳐야 할 교육자들이 교육은 뒷전이요 승진을 위해 점수따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면 제대로된 교육이 가능하겠는가? 더구나 그런 점수로 승진해 교감이 되고 교장이 된 사람이 높은 사람으로 존경받고 더 높은 자리를 위해 상급기관의 눈치나 보는 사람이 훌륭한 사람으로 존경받는다면 그런 학교에 공부하는 학생들을 무엇을 보고 배우겠는가? 이를 보고 자라는 학생들은 어떤 사람이 되겠는가?


더더구나 놀라운 일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는 자식들이 시험문제풀이 전문가를 기르는 교육에 부모들이 이성을 잃고 경쟁대열에 동참하고 있다. 자녀를 무한경쟁으로 내모는 부모의 욕심은 사랑인가? 폭력인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바쁘게 100점에.... 경쟁에 휘말리는 것이 자녀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모정인인가? 올곧은 사람으로 키워야할 자녀를 일등지상주의 일류대학을 위해 어떤 희생이라도 감수하겠다는 희생이 진정한 사랑인가? 현실이 그렇다치더라도 자녀를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경쟁에 내몰 것이 아니라 모순된 현실을 바꾸는데 함께 해야 하지 않겠는가?



욕심이 만드는 세상, 고전경제학에서 중상주의, 산업혁명을 거쳐 수정자본주의, 신자유주의...로 진화해 이제는 4차산업혁명시대로 진화하고 있다. 그 혁명은 사람중심의 세상일까? 자본주의는 인간적인가? 사람이 주인이 아니라 사람이 돈의 노예가 되는 것은 아닌가? 인간의 존엄성을 최고의 가치로 믿고 자유,평등의 세상을 만들겠다는 민주주의조차도 사회민주주의, 인민민주주의, 민중민주주의, 자유민주주의...로 분화되고 있지만 그 어떤 민주주의도 그런가치가 실현하고 있다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정치든 종교든, 교육이든, 언론이든 방향감각을 잃고 방황하는 세상으로 바뀌고 있다. ‘조선의 석가가 아닌 석가의 조선’이 된 나라, ‘조선의 공자가 아니라 공자의 조선’이 되고, ‘조선의 예수가 아닌 예수의 조선’이 되고 마는 나라에 단재 신채호선생님의 죽비가 그립다. 어쩌면 오늘날의 단재는 상종 못할 꼰대 취급을 받겠지만 그런 지조와 철학을 사람들이 존경받는 세상은 영영 기대할 수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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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종교/불교2018.05.24 06:30


가족 모두가 건강하고 아들들이 잘 커 줬으면 좋겠어요.”

아들이 00대학에 합격하기를 빌고 왔어요.”

통일이 되어 남북이 하나 되기를 빌었어요.”


<사진 " 부처님 오신 날 동학사 법회> 

어떤 기자가 삭가탄신일 절에 다녀오는 불자들을 인터뷰한 답변이다. 신중기도, 관음기도, 지장기도, 백일기도, 설판기도, 석불전 기도, 생일기도, 일일기도.... 기도의 종류가 많기도 하다. 절에 다니는 신자들 중에는 부처님께 빌면 소원성취 한다고 믿고 있는 신자들이 예상외로 많다. 사바세계에서 살다보니 사람의 능력으로 안 되는 일을 전능한 신에게 기원하는 것은 불교가 전래되기 전, 민간신앙에서부터였다.

사람들은 종교를 왜 믿을까? 죽음이 두려워서...? 내세에서 영원히 살기 위해...? 천국에 가기 위해서...? 착하게 살기 위해서...? 종교란 신이나 초자연적인 절대자 또는 힘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인간 생활의 고뇌를 해결하고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추구하는 문화 체계이다. 그 대상교리행사의 차이에 따라 여러 가지가 있는데, 애니미즘 · 토테미즘 · 물신 숭배 따위의 초기적 신앙 형태를 비롯하여 샤머니즘이나 다신교·불교·기독교·이슬람교 따위의 세계 종교에 이르기까지 비제도적인 것과 제도적인 것이 있다.

엊그제는 불기 2562년 석가탄신일이었다. 불교란 고타마 붓다가 펼친 가르침이자 진리를 깨달아 부처(붓다 · 깨우친 사람)가 될 것이라는 것을 믿는 종교이다, 기독교가 절대자인 3위일체 신인 하느님을 믿어 내세에 영원히 살기 위해서... 와는 다르다. 불교의 궁극적이 목적은 기도가 아니라 깨달음(반야 · 보리)에 도달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깨달아 부처가 되는 것이 목표다. 불교가 부처님께 빌면 소원을 성취하는 종교가 아니라 부처가 되기 위해 그의 가르침을 배워 실천함으로써 더 빨리 부처가 되기 위해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기 인한 종교다.

불교가 전래되기 전 전통신앙은 인간의 유한한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보이지 않는 신을 믿고 복을 빌거나 어려움에서 구해주기를 기원하는 애니미즘 · 토테미즘 · 물신 숭배에서 비롯된다. 그래서일까? 원시시대 사람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신에게 빌면 자비하신 신이 인간의 정성에 감동해 은총을 베풀어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일까? 유한한 인간이 전능한 신에게 지성으로 구하면 얻을 수 있다는 기도= 종교라는 인식으로 굳어져 기독교든 불교든 대부분의 종교는 구복(求福) 혹은 기복신앙(祈福信仰)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또 불교신도 중에는 부처님을 신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지만 사실이 아니다. 기독교는 삼위일체신인 전지전능한 3위일체의 하느님을 믿는 종교지만 불교는 신을 믿는 종교가 아니다.


<사진 : 속리산 법주사>

불교의 부처(붓다)는 신이 아니다. 불자들은 그의 가르침 즉 부처=이라고 인정하고 배워 실천하려고 노력하지만 부처가 인간의 기도를 들어주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 왜 불자들은 부처님께 빌면...’ 소원성취를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을까? 짐작컨대 불교나 기독교가 전래 되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토착민의 정서에 영합하거나 부처님을 믿으면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인센티브를 포교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이 아닐까?

속리산 법주사에 가면 12억이라는 거금을 들여 높이 33m, 두께 132mm, 무게 150t, 3미크론의 두께의 황금 옷을 입힌 금의 무게만 해도 21300돈중( 80kg)의 거대한 미륵불이 서 있다. 법주사는 이 부처님이 녹이 슬고 색이 바래 100kg의 순금으로 개금불사를 다시 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 청동미륵대불은 높이가 12층 아파트와 같은 33m, 무게가 점보비행기와 맞먹는 160t으로 청동입상(立像)으로는 세계 최대 규모라고 한다. 거대한 불상을 세워 그 앞에 가서 빌면 영험이 더 있는가?

싯다르타는 법(다르마)을 인정하였으나, 그 안에서의 총합적인 나(아트만)의 존재는 인정하지 않았으며, (무아) 오히려 영원한 나에게 집착하기 때문에 번뇌가 따른다고 하였다.(일체개고) 싯다르타는 수행에 의해 진리를 체득하고 망집을 단절한다면 일체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열반(니르바나)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했다. 내가 믿는 불교는 이런 싯다르타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종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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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종교와 마르크스... 하면 무슨 생각이 드세요? 참 어울리지 않은 이름. 사람들은 마르크스는 종교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마르크스는 종교는 사회에 해악을 전염시킨다고고 생각하고 헤겔 철학비판이라는 책에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며 부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알고보면 마르크스와 종교 특히 마르크스와 불교는 공통점이 참 많다.

<붓다와 마르크스>

공산주의란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악마로 알고 있는 체재 순응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야 말할 가치도 없겠지만 사실은 마르크스가 추구한 이상이나 부처님이 추구한 이상은 같은 점이 많다. 불교는 엄밀히 말해 기독교처럼 전지전능한 조물주를 신앙하는 종교가 아니다. 중생들이 어떤 괴로움도 없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극락세계와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이상향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둘 다 생산 수단 공공화 및 중앙 집중적 계획체제에 바탕을 두고 사용을 위해 물건을 생산하는 체제이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실적(행위)에 따라 분배를 받는 사회주의나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공산주의는 불교의 극락과 이상향은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와 부처님은 다같이 인간의 평등, 계급 없는 세상...’ 꿈꾸던 사상이다.

<불교과 공산주의의 같은 점과 다른 점>

마르크스와 붓다는 다같이 인간의 평등, 계급 없는 세상...’ 꿈꾸던 분들이다. 그러나 불평등을 만든 원인에 대해서는 두 분의 생각은 많이 다르다. 붓다는 불평등의 원인을 인간의 욕망이, 마르크스는 계급사회가 만든 결과로 본다. 당연힌 해법도 같을 수가 없다. 부처님은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를 통해,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을 통해 이상향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불교를 비롯한 종교는 마르크스를 적대시하고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을까?

<불교와 마르크시즘이 만나지 못하는 이유>

마르크스는 인간의 평등을 믿은 사상가요, 붓다는 인간의 평등이라는 교의(敎義: doctrine)를 가르친 인류 역사 최초의 사상가였다. 마르크스는 역사발전의 단계설에서 불교는 민주주의가 보편화된 평등 사회를 옹호한다. 마르크스나 붓다는 다같은 계급 없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목표가 같은데 왜 서로 적대시하고 대립과 반목으로 평행선을 달리고 있을까? 붓다와 마르크스가 다같이 계급 차별이 없는 사회를 이상사회라고 간주하면서도 약육강식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해결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수행을 통해 해탈을 꿈꾸는 불교와 계급투쟁을 통해 평등사회를 건설하려는 마르크스는 어쩌면 영원히 만나지 못하고 달리는 철도처럼 영원히 평행선을 달리지 모른다. 인간의 욕망이 역사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계급투쟁이나 고()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하는 탐, , 치라는 삼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교는 어쩌면 인간 그 자체가 안고 있는 태생적인 한계가 아닐까?

<불교는 종교인가?>

불교는 중생들이 알고 있는 것 같은 인간 외부에 별도의 신을 인정하지 않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는 절대자를 숭배하거나 도움으로 고통 없는 이상향을 찾는 종교와는 다르다. 그러나 비유신론적 종교로서 불교와 과학적인 사상으로서 마르크시즘은 신 중심의 세계관을 부정하고 물신화를 비판하는 사상이란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아널드 토인비는 불교와 서양의 만남은 20세기의 가장 의미심장한 사건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극락과 공산주의라는 동상이몽을 꿈꾸는 이 두 사상은 현대과학인 유전자 변형기술로 이종교배를 할 때만 만남이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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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정치/정치2016.05.20 07:00


일체 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습니다. 화엄경의 핵심사상인 이 말은 "세상사 모든 일은 마음먹기에 달려있다"는 뜻입니다. 원효스님이 의상스님과 함께 중국으로 유학을 가다가 어느 초막에서 하루 밤을 새웠는데 그 날 밤에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개울에 가서 물을 마셨답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다시 물이 마시고 싶어 어제 밤에 마신 물이 생각나 그곳을 바라보니 해골들이 여러 개 널려 있었다고 합니다.

<이미지 출처 : BOOK REVIEW>


그 순간 지난밤에 맛있게 먹었던 물이 올라오는 듯 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원효스님은 세상이 훤히 밝아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즉 한 생각이 나면 온갖 만물이 생겨나고, 한 생각이 멸하면 만물이 소멸한다는 것입니다. 이 해골바가지 속의 물에 대한 일화에서 보면 똑같은 물인데, 모르고 마셨을 때는 감로수가 되었으나, 썩은 해골바가지 물인 줄 알고 나니 속이 뒤틀린 것입니다.


같은 말이라도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다는 뜻입니다. 일체유심조는 불교신자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사람들이 세상사 마음 먹기달렸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좋은게 좋다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좋은 게 좋은 것이 아닙니다. ‘좋은 것은 좋고 나쁜 것은 나쁜 것입니다. 이렇게 지식인의 특권인 비판조차도 부정적으로 본다며 세상사는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하는 이데올로기가 되고 맙니다.


가난한 사람도 가난이 내 팔자라고 받아들이라는 뜻이 된다면 빈부격차를 정당화시킬 수도 있습니다. 불평등사회에서 '못배우고 못났으니 가난하게 사는것은 어쩔 수 없다'는 체념은 강자의나 부자들의 이데올로기입니다. 사람들이 순수했던 농업사회에서는 심은대로 거두는 세상이지만 정치권력이 부의 배분을 하는 사회에서는 옳지 않은 이데올로기입니다. '이익이 되는 것이 선'인 자본이 지배하는 세상에 '팔자소관' 운운하는 것은 가난을 정당화하는 운명론자를 만드는 논리입니다. 


일체 유심조라는 화엄경의 핵심사상도 '이현령비현령'이 되는 세상에는 온갖 지배이데올로기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한다거나 못 올라갈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혹은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와 같은 말이 그렇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하다는 것은 개인의 잘못만이 아닙니다.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농사를 열심히 지었는데 농업국과 FTA를 체결해 정부가 쌀을 헐값으로 수입해 버리면 농민들이 농산물을 제값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정부가 쌀을 수매할 때 가격을 얼마로 책정하는가에 따라 농민들이 더 가난해질 수도 있고 약간의 인건비라도 건 질 수도 있습니다. 자판기 커피 한 잔에 400원이고 밥한 공기에 200원입니다. 이 가격을 놓고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이런 현상을 두고 일체 유심조를 말하면 바른 해석이 되겠습니까?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는 자본의 논리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눈만 뜨면 보이는 TV화면에 나오는 광고.. 이광고들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을까요? 과자 속에 들어 있는 첨가물이 얼마나 건강을 해친다는 걸 소비자들은 계산하지 못하고 사먹고 있습니다. 이런 과자를 먹고 성인병에 걸리면 누구 잘못일까요? 일본산 생선과 국산을 속여서 파는데 무조건 상인의 말만 믿고 사 먹으면 건강이 부지하겠습니까? 공기청정기니 바퀴벌레 약이 광고 선전처럼 좋기만 할까요?


소비자들은 옥시라는 제조회사에서 파는 가습기 살균제를 믿고 쌌다가 수백명의 어린이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아이들이 먹는 과자류에 든 식품첨가물은 아이들의 건강을 지켜 줄까요? 우리가 먹고 있는 유전자변형식품은 소비자들의 건강을 지켜 줄까요? 상품을 장기보관하기 위해 투여한 방부제며 수입산 일본상품에 방사능이 없는지 확인하고 사먹을까요? 심지어 학교 교훈에까지도 성실, 근면이라는 자본의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아는 부모들이 몇이나 될까요?



착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는 착한 사람이 대접을 받습니다. 그러나 나쁜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세상에는 순진한 사람, 착한 사람은 희생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내게 이익이 되는 것이 선이라는 자본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에 소중한 자신을 지키며 살기 위해서는 어떤 교육이 필요할까요? 나의 건강을 오염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지식보다 지혜가 필요합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는 원론이나 지식만으로는 상업주의가 만연한 세상에 살아가기는 너무 어렵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학교는 지식의 양으로 사람의 가치를 서열매기는 시대착오적인 평가를 그쳐야 합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키우는 교육, 옳고 그른 일, 해서 될 일과 하면 안 되는 일이 무엇인지 분별할 수 있는 철학을 가르쳐야 합니다. 시비를 가리는 사람이 나쁜 사람이 되는 세상에는 일체유심조와 같은 성구조차 악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착한사람이 피해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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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신을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10년마다 한 번씩 벌이는 우리나라 인구센서스 결과 2015년 우리나라 전체 종교인 2497만 명 중 불교 신자는 1073만 명(42.9%)이다. 다음이 개신교로 861만 명(34.5%), 천주교는 514만 명(20.6%)이다. 2013년 세계에 분포되어 있는 신자 수는 1635314000명으로 인구 대비 25.9%. 기독교인이 21억명, 이슬람교인 13, 불교 3.76, 힌두교 9억 명 순이다.


극락세계를 지향하는 불교나 천국을 이상향으로 믿는 기독교 신자들이 교조의 가르침대로 실현하고 있다면 오늘날 우리 사는 세상이 이렇게 됐을까? 재미있는 것은 우리나라 정치인 10명 중 7명이 종교인이라고 한다. 그들이 믿는 신의 뜻대로 살겠다는 의지와 가르침에 따라 정치를 했다면 우리나라가 이토록 도덕이 무너지고 사회의 양극화로 인한 멘붕세상이 됐을까?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불신사회가 됐을까?


'종교'''자와 ''자의 합성어이다. 자는 으뜸, 기둥, 근본이라는 뜻이며, 자는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이란 의미다. ‘이 세상에서 가장 먼저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 교육의 으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학교에서는 왜 가장 먼저 가르치고 배워야 할 종교를 가르치지 않을까? 제주도에 수학여행을 다녀 온 학생에게 제주의 역사를 물어 보면 대답을 못하듯, 종교인들에게 종교가 무엇인가라고 물어 보면 똑 부러지게 대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종교가 이 세상에 나타나게 된 이유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때문이다. 자연에 대한 공포, 사후세계에 대한 두려움이 내세를 준비하기 위해 신을 찾게 된 것이다. 이들이 비록 형식은 다르나 사후세계를 준비하는 종교인으로서 교조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겠다는 것이 불교요, 기독교, 힌두교, 이슬람교, 유대교, 자이나교... 등 수많은 종교가 있다. 이러한 종교인들은 살아가면서 본래의 뜻이 사라지고 기복 또는 구복신앙으로 바뀌기도 하고 권력의 이데올로기 역할도 해 오고 있다.


종교가 추구하는 이상향은 같지만 그들이 믿고 따르는 교조와 교의는 다르다. 특히 불교는 신을 섬겨 신의 뜻에 따라 극락왕생하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의 도움을 스스로 부처가 되기 위해 수도하는 종교다. 기독교의 신이 31체의 절대자라면 불교에는 신이 없다. 그 대신 스스로 깨달은 자가 되어 죽음을 초월한 존재가 되는 것이 불교가 추구하는 신앙이다. 오늘은 먼저 불교에 대해 알아보자.


세계 230여개국의 74억 인구 중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신자는 약 37600만여명이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모니는 지금부터 2500년 전 샤카족의 중심지인 카필라 왕국(현재의 네팔)에서 국왕 슈도다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인간의 삶이 생로병사가 윤회하는 고통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자각하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29세 때 출가하였다. 처음에는 다른 수행자의 수행법을 따라하거나 고행을 하였으나 이는 무의미하고 중도가 긴요함을 알았다. 부다가야의 보리수 밑에서 선정을 수행하여 35세에 완전한 깨달음을 성취하고 부처(붓다-깨달은자, 佛陀)가 되었다. 이후 인도의 여러 지방을 편력하며 교화에 힘썼고, 쿠시나가라에서 80세로 입멸하였다.


바로가기 ▶ 

석가모니의 삶고 사상.hwp



불교의 핵심 사상은 3법인 4성제

삼법인이란 : 모든 존재는 변하고 있다제행무상(諸行無常)과 

모든 사물은 실체가 없다제법무아(諸法無我) 

열반의 세계만이 고통이 없는 진리의 세계이다라는 열반적정(涅槃寂靜)

이 가운데 열반적정은 모든 것은 괴롭다라는 일체개고(一切皆苦)로 대체되기도 한다.


4성제란아함경(阿含經)에 나오는 원시 불교 가르침으로 불교 기본 교의 가운데 하나다. "(· Satya)"는 진리 또는 깨우침을 뜻하지요. 사성제"네 가지 높은 깨우침(Ārya: 높은, Satya: 깨우침)" 또는 "네 가지 고귀한 진리(Four Noble Truths)"라는 뜻인데, 고제(苦諦) · 집제(集諦) · 멸제(滅諦) · 도제(道諦)4가지 진리 또는 깨우침을 의미한다. 흔히 이 네 가지를 간단히 고집멸도(苦集滅道)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러한 진리를 깨우치는 방법이 8정도요. 깨달은 자, 부처가 되는 길이 이 8가지 실천덕목이다

  1. 정견(正見): 바르게 보기
  2. 정사유(正思惟) · 정사(正思): 바르게 생각하기
  3. 정어(正語): 바르게 말하기
  4. 정업(正業): 바르게 행동하기
  5. 정명(正命): 바르게 생활하기
  6. 정정진(正精進) · 정근(正勤): 바르게 정진하기
  7. 정념(正念): 바르게 깨어 있기
  8. 정정(正定): 바르게 삼매(집중)하기 


연기법 - 연기법(緣起法)을 원인과 결과의 법칙 또는 줄여서 인과법칙(因果法則) 혹은 인과법(因果法) 또는 인연법(因緣法)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는 전생과 현생 그리고 내세를 업인에 의해 환생하게 되는데 6개의 세계에 다른 모습으로 태어나게 된다고 믿는다. 6(六道)란 불교에서 중생이 깨달음을 증득하지 못하고 윤회할 때 자신이 지은 업()에 따라 태어나는 세계를 6가지로 나눈 것으로, 지옥도(地獄道) · 아귀도(餓鬼道) · 축생도(畜生道) · 아수라도(阿修羅道) · 인간도(人間道) · 천상도(天上道)를 말한다.


지옥도(地獄道): 욕계의 지하세계에 속하며, 무거운 악업을 저지른 자가 가는 곳이다.

아귀도(餓鬼道): 욕계의 지표세계에 속하며, 재물에 인색하거나 음식에 욕심이 많거나 남을 시기 · 질투하는 자가 가는 곳 또는 항상 밥을 구하는 귀신들이 거주하는 곳이며, 인간세계와 장소가 겹친다. 그러나 인간의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

축생도(畜生道): 욕계의 지표세계에 속하며, 온갖 동물들이 사는 곳이며, 인간세계와 장소가 겹친다.


아수라도(阿修羅道): 욕계의 지표세계에 속하며, 아수라가 사는 곳이며, 인간세계와 장소가 겹친다. 구체적인 거주처에 대해서는 심산유곡이라고 하는 의견도 있고, 바다 속이라는 의견도 있고(수미산과 지쌍산 사이의) 바다 밑이라는 의견도 있다.

인간도(人間道): 욕계의 지표세계에 속하며, 인간들이 사는 곳, 즉 인간세계이다.

천상도(天上道): 욕계의 천상세계와 색계와 무색계의 모든 하늘[]들을 통칭한다. 이 세계의 중생(유정), 즉 이 세계의 사람들과 존재들을 천인(天人) · 비천(飛天) · 낙천(樂天) · 천신(天神) · () · () 또는 데바(deva)라고 한다.

 

http://chamstory.tistory.com/1447



부처 - 현재불 : 석가모니불, 미래불 : 미륵불, 과거불 : 아미타불

부처님이 한분 뿐일까요? 경전에 보면 35불, 53불, 1천불, 1만 3천불로 표현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불교의 종파

우리나라 불교의 종파.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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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종교2015.12.28 06:54


학교는 왜 종교교육을 하지 않을까?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가 지난 20129월부터 12월까지 ()글로벌리서치에 의뢰해 조사한 ‘2013년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의식조사를 보면 우리나라 국민들의 55.1%가 종교를 갖고 있고, 44.9%가 종교가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종교별 현황을 보면 개신교(22.5%) 불교(22.1%) 천주교(10.1%) 기타종교(0.5%)로 나타났다.



전체 국민의 절반 이상이 어떤 형태로든 종교를 갖고 있다는데 학교에서는 종교 교육을 하지 않고 있는 이유가 뭘까? 이런 국민들에게 특정 종교인들이 찾아가 나눠준 종교서적을 읽거나 그들의 선교를 들으면 어떻게 반응할까? 학교에서는 윤리와 사상 시간에 동양과 한국윤리사상이라는 단원에서 한국윤리사상의 흐름이나 유교, 불교, 도교...에 대해 서양윤리사상단원에서 그리스도교윤리사상에 대해 가르치고 있지만 종교의 본질이나 제대로 된 종교교육을 찾아보기 어렵다.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준이나 철학이 필요하다. 사관이 없이 배우는 역사란 지식만 암기할 뿐, 현실에서 종교를 만나면 제대로 판단을 하지 못하고 신비주의에 빠지거나 가정이 파괴되는 경향을 종종 보게 된다. 예수와 석가모니가 공자가 언제 어느 나라에서 태어나 무슨 말을 남겼고.... 이렇게 배운 지식 정도로는 종교가 무엇인지 그 종교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이 무엇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지난 1월 터키를 여행하던 고교 자퇴생 김 모 군이 터키와 시리아의 접경 지역에서 행방불명됐다가 이슬람 수니파 원리주의 무장단체(IS)에 가입했다는 언론 보도가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사건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다. 이 청년이 종교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었을까? 아니 알고 있었다면 IS에 가입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 청년뿐만 아니다. 살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종교를 찾고 종교관이 없는 사람이 종교에 빠지거나 가정이 파괴되는 비극적인 사례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종교란 무엇일까? 자구적으로 해석하면 종교란 으뜸, 기둥, 근본이라는 뜻의 가르치고 배우는 교육을 의미한다. 인간이 생, , , 사의 문제, 죽음에 대한 공포를 초월적인 힘으로 해결하겠다는 노력이 종교라는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유한한 인간이 인간의 능력 밖의 문제를 신에게 의존해 그 절대자에 대한 외경이 예배라는 형식으로 나타난 것이 종교가 아닐까? 대부분의 종교는 현세의 무상을 내세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과정으로 보고, 보다 도적인 삶의 보상으로 내세의 삶이 결정된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기독교의 천국과 지옥으로 불교의 윤회사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신은 존재하는가? 죽음 후의 세계, 내세란 정말 있기나 한 것일까? 이 지구상에는 21억의 기독교, 13억의 이슬람교, 힌두교 9, 유교와 불교 각각 4... 그밖에도 아프리카의 토속신앙 등 수많은 종교가 있으며 무신론자도 11억 정도가 살고 있다. 종교는 정치 및 경제 문화에서 존재하는 사회 질서 안에서 악을 선으로 바꾸려는 노력과 실의에 빠진 사람에게 삶에 대한 희망을 준다는 긍정적인기능도 있지만 인류의 역사는 종교가 만든 살육과 전쟁의 역사 속에 살고 있다.


"종교는 억압을 정당화 하는 장치다. 그러나 동시에 억압으로부터의 피난처이기도 하다. 종교적 고난은 현실적 고난의 표현인 동시에 현실적 고난에 대한 항의다. 종교는 억압받는 피조물들의 한숨이며, 심장 없는 세상의 심장이며, 영혼 없는 상황의 영혼이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종교의 부정적인 기능이다. 오역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종교는 사회의 기존 질서를 간접으로 영속시키고, 기존의 문명을 유지하도록 조장하는 이데올로기 기능도 부인할 수 없다.


<이미지 출처 : koreamonitor>

역사를 일컬어 승자의 기록이라고들 한다. 종교도 예외가 아니다. 오늘날 ‘IS’가 악의 축이 되어 테러와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모습을 보면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세계를 자기네 종교를 정당화하기 위한 헤게모니 쟁탈전과 같은 양상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불교나 유교가 지배이데올로기로 기능했던 지난 역사를 보면 그렇다. 오늘날 공유사상인 기독교가 사유사상의 자본주의와 공존하면서 기독교의 교리와는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는 모습에서 타락한 종교의 얼굴을 만난다.


해탈을 위해 세속과 결별한 불교가 승과제도를 두고 권력이 됐던 불교, 처음부터 지배이데올로기를 마다하지 않고 권력과 손잡은 유교며 억압자가 된 기독교는 정말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을 이 세상에 실현할 수 있을까? 환속한 불교가 억압자 구실을 하듯이 예수의 가르침과는 정반대를 걷고 있는 기독교는 이미 종교의 본질적 기능을 외면하고 있다. 유신정권의 박정희나 전두환를 위한 조찬기도회에서 종교가 약자의 보호자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자비 없는 불교며 사랑없는 기독교는 그 화려한 사원이나 교회 안에는 기도라는 공허한 구복신앙만 남아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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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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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정치2014.01.08 06:56


 

▲ 박창신 신부(오른쪽)가 문규현 신부와 함께 지난 22일 ‘불법 부정선거 규탄과 대통령 사퇴 촉구 시국미사’에 참여하기 위해 군산 수송동성당에 입장하고 있다.(한겨레신문)

 

나라 어느 한 구석도 조용한 곳이 없다. 전북 군산시 수송동 성당에서 열린 ‘불법선거 규탄과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미사’를 시작으로 불법선거를 규탄하고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일파만파로 번지고 있다.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정부 부처가 조직적으로 개입한 증거가 속속 드러나자 천주교에 이어 개신교와 불교 그리고 정치적인 입장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던 원불교까지 대선무효와 박근혜대통령 사퇴를 촉구하고 나섰다.

 

문제의 발단은 지난 대선 때 국가정보원의 선거 개입 때문이다. 국정원이 조직적으로 올리거나 퍼나른 트윗글이 무려 2천 91만건에 이르고 국방부와 국가보훈처 그리고 안전행정부까지 대선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자 시민단체를 비롯한 종교계가 나서 대통령 사퇴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는 광주지역의 개신교·천주교·불교·원불교·천도교 등 5대 종단이 동참하고 서울 조계사에서는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승려들이 국가기관의 불법 선거개입 관련자 처벌과 박근혜 정부의 대국민 사과를 촉구하는 시국선언으로 이어지기 시작했다. 종교단체의 시국선언과 대통령의 사과요구를 두고 보수적인 종교지도자들은 “북한을 옹호 하는듯한 시국미사는 국론을 분열시키고, 사회를 어지럽히는 망령된 행위로 엄히 규탄’ 받아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미지 출처 : 오마이뉴스>

 

종교 지도자를 비롯한 종교인들의 정치참여, 비난 받아 마땅한 일일까? 혹자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거론하고 혹자는 내세를 준비하는 사람들이 왜 ‘세상일에 감놔라 배놔라’ 하느냐며 사제복을 뒤집어 쓴 종북세력‘이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있다. 어떤 이들은 "정의구현이라는 이름 아래 종교를 이용한 간첩활동"이니 "신부탈을 쓴 좌익 쓰레기" 운운하며 노골적인 비방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구약성서 사무엘서에 보면 이런 얘기가 나온다.

 

'어떤 성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한사람은 부자였고 한사람은 가난하였습니다.

부자에게는 양도 소도 많았지만 가난한 이에게는 품삯으로 얻어 기르는 암컷 새끼 양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 새끼 양을 제 자식들과 함께 키우며 한밥그릇에서 같이 먹이고 잘 때는 친딸이나 다를 바 없이 품에 안고 잤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부잣집에 손님이 하나 찾아왔습니다.

 

주인은 손님을 대접하는데 자기의 소나 양을 잡기가 아까워서 그 가난한 집의 새끼 양을 빼앗아 대접을 했습니다.'

 

나단이라는 선지자가 다윗왕에게 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듣고 있던 다윗왕이 괘심한 생각이 들어 "저런 죽일 놈!,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런 인정머리 없는 짓을 한 놈을 그냥 둘 수 없다, 그 양 한 마리를 네 배로 갚게 하리라." 듣고 있던 나단이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나단선지자가 지적한 부자란 바로 다윗왕이다. 다윗은 자기 부하의 아내였던 밧세바를 범하여 임신하자 전쟁터에 나가있는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를 불러들여 밧세바와 동침하게 하여 자신의 죄를 덮으려고 했지만 그것이 여의치 않자 우리야를 사지로 밀어 넣고 끝내 죽게 만든다.

 

 

다윗의 범죄를, 그것도 왕의 앞에서 새끼양을 빼앗은 파렴치한으로 비유해 지적한 나단의 용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나단이라는 사람은 왜 절대권력자인 군주 앞에서 목숨을 걸고 바른 말을 했을까? 권력을 정당하게 행사하지 못하면 그것은 곧 폭력이다. 폭력을 보고 침묵하거나 분노하지 않는 사회는 정의가 무너진 사회다.

 

                                                  <이미지 출처 : 금강뉴스>

 

신라 진평왕 때 원광법사는 세속 5계를, 고구려 때 당태종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일어 선 이는 승병이다. 고려 숙종 때 승려들로 조직된 항마군이며 몽골 장수 살리타이를 물리친 이는 다름 아닌 승병출신의 김윤휴다. 승병장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대사 유정이 그렇고 기허대사 영규스님 또한 나라의 위기에 처했을 때 경전을 덮고 일어서지 않았는가?

 

속세를 떠나 수도를 하는 승려나 내세를 준비하는 기독교 사제들도 똑같은 국적을 가진 국민이다. 외적의 침략으로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나 독재권력의 횡포로 민초들이 숨막혀할 때 종고 지도자들은 모른 채 하지 않았던 자랑스런 과거를 우리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피흘려 지킨 민주주의가 또다시 위기를 맞고 있다. 민주주의를 수호해야할 국가 기관이 선거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나 국민들의 주권회복운동이 벌어지고 있다. 국가기관의 정치개입에 대한 저항은 시민단체와 학계, 종교계에 이어 미국, 독일, 캐나다,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이탈리아, 중국, 일본.. 등등 세계 곳곳에서 박근혜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거리시위가 끊이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를 지켜야 할 국정원과 안전행정부 그리고 국방부와 국가보훈처까지 나서서 국민의 주권을 유린하고 있는데 종교인들은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과거 우리선조들이 그랬듯이 종교인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할 때마다 가장 먼저 일어나 나라를 지켰다. 중생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는데, 주권이 유린되고 있는데, 불의를 보고 분노하지 못하고 침묵으로 일관하는 종교는 종교로서의 책무를 다하고 있는 것일까?

 

 

                                     <이미지 출처 : 민중의 소리>

 

고려대 학생의 ‘여러분 안녕하십니까?’라는 대자보 하나가 ‘안녕하십니까’ 신드롬이 되어 전국으로 번져가고 있다. 대자보 신드롬이 대학에서 중고등학교로 중고등학교에서 초등학교로까지 번져나가는 이유가 무엇일까? 대자보 현상은 우리사회가 사회양극화를 비롯한 이념간의 갈등, 학벌사회의 모순 등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는가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정의가 실종되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게 선이라는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에 누가 행복할까? 안녕하지 못한 시민, 안녕하지 못한 학생들... 안녕하지 못한 학부모와 직장인들... 국민들이 행복하지 못하다는데 문제를 풀어야할 정치는 깊은 수렁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불의를 보고 침묵하거나 권력의 비위를 맞추는 일은 종교인들이 할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실종되고 권력이 남용되면 피해는 결국 병든자와 소외된자, 힘없고 가난한 자의 몫이다. 다윗과 같은 폭력을 저지르는 독재권력이 나타난다면 종교지도자는 어떻게 처신하는 게 옳을까? 불의를 보고 침묵하는 것은 중립이 아니라 가해자를 돕는 것이라고 했다.

 

종교인 들이 바라는 이상세계는 힘 있는자나 없는자, 가난한 자나 부자, 남자나 여자, 어린이나 어른 모두가 평등하게 사는 세상이다. 정의가 강같이 흐르는 세상, 불의가 발붙일 수 없는 세상... 그런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는 게 종교가 지향하는 세계요 중생들이 원하는 세상이 아닌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처럼 하라”고 성서는 가르치고 있다. 이웃이 핍박당하고 있는데, 배고파하는데, 편하게 잠잘 곳도 없는데... 불의한 권력 때문에 고통 받고 있는데, 입으로는 사랑과 자비를 말하면서 모른 채 하는 종교는 종교로서의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믿어도 좋을까?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오실 세계는 우주공간 밖의 어떤 세계가 아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 사바세계다. 박근혜정부는 국민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들겠다고 약속하고 대통령에 당선 됐다. 경제정의를 실천하고 복지사회를 건설해 국민 모두가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 그것이 박근혜후보가 약속했던 공약이요, 우리 국민 모두가 바라고 꿈꾸는 희망이다. 우리사회는 지금 그 꿈이 실현되고 있는가?

 

▶ 이 기사는 '맑고 향기롭게' 2014. 1월 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김용택의 참교육 이야기-책 보러 가-10점
김용택 지음/생각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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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녀를 표현할 때 남자에게 '계집애' 같다고 하면 모욕적인 언사가 되고 여자에게 '치마를 둘렀으니 여자지, 남자못지 않다'고 하면 칭찬이 된다. 보통 '남자답다'는 표현은 진취적이고 이성적인 남녀를 가리키고 '여자답다'고 하면 다소곳하고 소심하다는 뜻으로 통한다.

우리사회의 뿌리깊은 남존여비의 풍속은 민주주의를 사는 시민의 의식 깊숙히 까지 남아 있다.

오늘은 종교의 여성관에 대하여 살펴 보자.

인류 역사를 50만년으로 본다면 49만 5천년 이상은 모계중심사회였으나 정착하여 농경생활이 시작되고 사유재산과 계급이 발생한 이후는 부계중심사회로 바뀐다.

종교는 계급사회 이전에는 자연에 대한 공포나 경외에서 출발하지만 계급이 발생한 후에는 체제유지이데올로기로도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기독교의 여성관>

기독교는 여자에게서 남자가  태어나는 게 아니라 남자의 갈비뼈에서 여성이 탄생한다. 
기독교의 남녀 불평등은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에베소서) 에서는 보는 바와 같다.
생리나 출산 때 출혈을 부정하다고 보고 부정한 죄가 벗겨질 때까지 근신해야 한다고 했다.(레위기) 

여성은 이브의 타락에서 악의 생겨난 근원으로 생각하고 인간사회의 불행과 비참함은 여자의 범죄 댓가라고 보고 있다.
<사진 : 다음 이미지 검색에서>

여성의 해산 고통은 남자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한 죄의 댓가라 보고 오늘날 에덴 동산에서 쫒겨나 인간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된것도 여성의 원죄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남자는 완전한 하나님의 모습'으로, 여자는 '잘못 태어난 열등하고 불완전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이성적 능력이 열등하고 도덕적으로 의지와 자기 절제능력이 열등한 존재'로 태어났다고 했다.

<불교의 여성관>

불교에서도 남자승려인 비구의 계율은 250가지만 지키면 되지만 여승인 비구는 업장이 두텁다 하여 348가지 계울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남자는 부처가 될 수 있으나 여자는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배제되고 보살에 머물러야 한다.

                                                       <사진 : 업장소멸의식-출처 다음 이미지검색에서>

비구니는 마땅히 비구로부터 구족계를 받아야 한다. 비구니는 반달마다 비구에게 가서 설법을 들어야 한다. 
                                                       
일 가까운 곳에 비구가 없으면 비구니는 안거를 하지 못한다....에서 보듯 불교의 남녀 차별은 기독교에 못지 않다.   

<유교의 여성관>

가장 남녀불평등을 강조한 종교는 유교이다. 삼강오륜에서 부부유별은 물론 축접제, 전족,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결을 강조하고, 혼례식도 올리지 않은채 죽은 정혼자를 위해 수절을 강요하고 있다.

죽은 남편따라 죽는 것이 열녀가 되어 여성의 갈 길이라 가르치고 재가금지는 물론 칠출(칠거지악)을 강조한 것도 유교문화의 잔재이다. 여성이 가족의 공유물로서 출산이나 노동력의 제공자인 하급노예 시대가 바로 종교가 기여한 공로(?)라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이슬람교의 여성관>

이슬람교는 남자와 여자가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서로를 돕고 사는 일부일처제가 아니라 한 남자가 여럿 여자를 데리고 살 수 있다는 코란 경전의 근본 교리 때문에 대부분의 이슬람권 나라에서 여자들은 남자의 종속물처럼 간주되고 있다. 심지어 여자는 남편의 허락이 없이는 나다닐 수도 없고 친척 남자의 동행이 없이는 혼자서 산보조차 할 수 없다.

간통을 했다는 혐의를 받는 여자는 아버지나 오빠 등 가족 성원이 죽이더라도 소위 명예 살인(Honor Killing)이라는 이슬람교 법(Sharia)과 교직자들(Mullah)의 가르침 때문에 벌을 받지 않는다.

<여성이기 이전에 사람으로 살기 위해서는...>
 
그 밖의 종교도 여성에 대한 차별은 다른 게 없다. 더욱 불행한 일은 여성 자신이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이면서 오히려 운명적으로 수용하면서 여성이 더욱 남자편이 되어 스스로 굴레를 만들어 운명적으로 살아 온 것이다. 여성은 육체적인 힘이 남성보다 약하니까 열등하게 태어났다거나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이데올로기에 스스로 희생자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남존여비의 사회에서 남자중심의 도덕이나 가치체계가 종교를통하여 더욱 운명적으로 수용하고 체계화 되어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자본주의 모순의 근원은 남여 불평등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성이 상품화된 사회구조 아래서는 유능한 남성은 화폐가치로 평가되고 경제적인 소득의 고하가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가치체계를 만들어 놓았다. 

어늘날은 어떤가? 남녀평등이 헌법에 보장된 사회에서 여성은 여성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누릴 평등한 삶을 살고 있는가? 성이 상품화된 사회에서 여성은 인간으로서보다 성의 대상이 되는 구조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계급구조는 능력(돈, 미모, 귀속지위...)이라고 포장된 불평등이 남여 불평등에 기인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종교가 본질적인 기능 즉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기능을 너머 역사적으로 체제이데올로기의 수호자의 역할을 해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성이 남성의 미완성품이 아닌 인간으로서 인격적인 존재가치를 인정할 때 종교가 만들어 놓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여성 해방과 함께 인간 해방이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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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없음2011.01.05 07:15



며칠 전 저는 제가 운영하는 블로그의 독자로부터 필자를 아끼는 따뜻한 마음이 담긴 소중한 이-메일 한 통을 받았습니다. 왜 대책없이 기독교를 비난하느냐고요.... 제가 000님의 진정성이 담긴 이-메일을 받고 어떤 형식으로라도 해명이랄까 변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제 글에 대한 필자로서의 책임 때문입니다.

제가 저의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통해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글을 적지 않게 썼던 게 사실입니다. 그것이 질문하신 분의 표현처럼 ‘적지 않은 영향력'으로 비쳐졌건 아니면 ’악의적인 비난‘으로 비쳐졌건 간에 글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의무감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나는 왜 기독교를 비판하는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기독교만 비판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데올로기가 된 종교. 하느님의 뜻(신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거부하고 부정한 권력(그 권력이 식민지 종주국이든, 주권을 도둑질한 쿠데타의 주역이든, 주인을 살해한 살인정권이든간에...)의 시녀가 된 종교를 싫어합니다. 무소유사상의 종교가 교의를 거부하고 현실과 손잡고 신자들의 눈을 감긴 종교는 모두가 싫습니다. 특히 예수를 팔아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이비 교회지도자를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사진 :웃는 돼지의 쉼터에서>


제가 권력이 된 기독교(개신교와 천주교를 포함한...)를 싫어하게 된 이유는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하는 목회자를 보고난 후부터입니다. 국민의 주권을 빼앗은 독재자를 위해 또 광주시민을 죽인 살인자를 위해 ‘권력을 위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다’며 축복을 하는 목회자를 보고 저 사람들은 예수를 판 가롯 유다의 후신이거나 양의 탈을 쓴 늑대라고 확신했습니다.

권력의 편에서 약자의 목을 조르는 양의 탈을 쓴 교회 지도자들. 하느님 대신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기독교 지도자들. 부자들의 편에서 가난한 자의 숨통을 조이는 권력가가 된 목사와 신부들. 좀 더 넓게는 공유사상의 예수를 사유사상으로 정당화시켜 천민자본주의와 손잡은 변절한 목회자들, 종교 지도자들... 그들이 예수님을 팔아 스스로 존경을 받는 기독교나 불교가 싫었기 때문에 침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서양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십자군전쟁에서부터, 가까이는 중동전쟁에서 기독교 국가의 잔인성에 몸서리를 쳤습니다. 이스라엘의 편에서 아랍을 악의 화신으로 규정하고 무기를 팔아먹는 기독교 국가인 미국. 그 미국에 편에 서서 사랑을 말하고 정의 운운하는 이명박류의 기독교인들... 우리 역사에도 황사영의 백서사건에서부터 식민지시대 민족을 배신한 부끄러운 기독교 역사며 불의한 권력의 시녀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건국초기의 변절한 기독교 지도자들....

타락한 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정부가 무소유를 교의로 삼는 종교단체에 왜 그렇게 많은 특혜를 베풀고 면세까지 해 주겠습니까? 타락한 자본주의와 손잡고 체제이데올로기의 수호자 역할을 하는 종교는 기독교든 불교든 그것은 교의와 무관한 억압자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이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종교를 파트너로 삼고 시혜를 베풀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역사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말 천주교의 박해는 무엇을 말해줍니까? 현대에도 해방신학이 왜 권력의 미움을 받고 있는지... 민중 신학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압니다. 악행을 일삼는 종교지도자는 내세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그들이 진짜 지옥이 있다고 믿는다면 권력의 편에서 억압자가 되어 약자의 숨통을 조이겠습니까? 진짜 하느님이 살아 있고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믿는다면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반대의 삶을 살기를 자원할 리 있겠습니까?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더러 천국을 말하고 지옥을 논할 자격을 주었단 말인가? 권력의 시녀가 되어 약자의 숨통을 조이면서 어떻게 사랑을 말하고 정의를 외칠 수 있단 말인가?’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평신도의 귀에도 하느님의 진노하신 목소리를 듣는데 권력의 맛을 알고 있는 사이비 목자에게는 하느님의 진노가 들리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내가 침묵할 수 없는 이유>

진부한 얘기지만 한 가지 예를 들고 제 변명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술 취한 운전자가 좌충우돌 계속 사람들을 치어 죽이고 있다면... 다친 사람을 구해주는 일과 술 취한 운전자를 운전석에서 끌어내리는 일 중 어떤 일이 선차적일까요? 따뜻한 성당에 앉아 하느님께 기도하는 일과 눈보라치는 거리에서 약자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시위에 나서는 일 중 어떤 일이 먼저일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기도하기 전 하느님은 자녀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필요한 지 다 알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순을 온몸으로 투쟁하지 않고 방안에서 기도만 하라고 가르치는 목자는 신자들을 바른 길로 이끄는 목회자일까요? 자본이나 권력이 약자의 목을 조를 때 자본주의가 저질러 놓은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한 자선행사를 하는 일과 체제 모순을 개선하기 위해 투쟁에 나서는 일 중 어떤 일이 선차적일까요?

고백컨데 저는 기독교에 대해서 또 자본주의에 대해서 학문적으로 논리적인 체계를 갖춰 주장할 만큼 배우지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손잡고 가난한자와 소외받은 자들의 숨통을 조이는 모습을 보고 침묵하는 게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침묵한느 것은 하느님께 죄를 짓는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체제모순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나는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확신을 하게 됐습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치리라’ 예수님의 질책이 저를 침묵할 수 없게 만든 사연입니다.

* 어쩌다 지워져서 다시 올렸습니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인성교육자료2010.11.23 21:49


지난 2006년 8일 일이다. 전남 순천의 선암사 경내에서 태고종 총무원 쪽 승려와 선암사 쪽 승려들의 모습을 보는 국민들은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부처가 되겠다고 수도하는 분들이 죽봉으로 치도 때리고 막가파들이나 할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폭행을 하게 했을까? 이날 몸싸움 과정에서 5명의 승려가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직원과 26명의 승려가 경찰에 연행되는 추태를 보였다.


자비를 실천해야할 수행자가 이해관계 때문에 상대방에게 폭행을 가하는 저들이 ‘수도를 하는 사람들이 할 일인가?’ 의심이 간다. 싸움의 발단이란 게 총무원장이 누가 되느냐 주도권 다툼인데 막강한 재산이 걸려 있는 문제 때문이다.  

불교의 추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고려시대 불교의 번성과 타락상, 일제시대 친일불교,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의 ‘정화운동’과 비구 대처의 폭력적 종권다툼, 1980년 신군부에 의한 ‘10·27법란’과 군사정권에 순응했던 승려들….

        <선암사 승려들으 몸싸움-사진 SBS에서>

기독교는 어떤가? 기독교는 ‘사랑’과 용서’을 부르짖으면서도, 근대 세계사의 절반을 피로 물들이고 지금도 그 행위는 계속되고 있다. 서기 1096년부터 시작, 무려 200년동안 계속된 십자군 전쟁이 그렇고 이스람권 문화와 기독교 문화 간의 충돌은 지금도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보복이라는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

도대체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문제를 말하려면 ‘신(神)이란 실제로 존재하느냐?’는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 BC. 6c 이후 그리이스의 자연철학 이래로 모든 철학의 가장 첫 물음은 ‘세상(만물)의 근원은 무엇인가?’였다. ‘물질과 정신 중 무엇이 근원적인가?’ 이것이 신학을 비롯한 철학의 근본문제요 사물을 보는 관점의 차이다. 이 질문에 대해 ‘물질은 정신과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존재 한다‘고 보는 유물론과 ’물질은 정신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념론으로 나뉘어 진다. 유물론에서 보면 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관념론에서는 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유물철학에서는 신이란 ‘인간이 만들어 낸 존재‘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관념철학에서는 신이나 영혼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유물론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스탈린은 ‘물질, 자연, 존재는 의식 외부에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이고, 물질은 감각, 표상, 의식의 원천이므로, 물질이야말로 제 1차적인 것이다. 의식은 물질의 반영이고 존재의 반영이므로 2차적인 것이고 파생적인 것이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정신이나 영혼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관념론이 아니면 종교란 존재할 수가 없다. 기독교가 공산주의와 공존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종교는 신과 인간이 공존하는 현세구복적인 종교였다면, 서양의 기독교는 내세 지향적이다. 불교가 ‘스스로 부처가 되기 위한 고행의 과정’이라면 기독교는 우주의 창조주요, 전지전능의 신을 믿고 따르는 유신론의 입장에 선다. 공통점이 있다면 불교에서는 제화갈라보살(과거불), 석가모니불(현세불), 미륵불(미래불)이 존재하는데 반해 기독교는 성부인 야훼와 성자인 예수와 성신인 성령이라는 절대적인 신이 있다는 정도의 차이일까? 아니 불교가 무소유의 사상이라면 기독교는 공유사상의 차이정도가 아닐까?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부처님이나 예수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른다는 이들이 부처님과 예수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대승불교의 경전인 <반야바라밀다심경>에는 ‘색즉시공.공즉시색,일체유심조‘라고 말이 있다. ’색(空)과 공(空)이 다르지 않고 공과 색이 다르지 않아,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공(空)인데 소유를 버리면 부처가 될 수 있는데 서로 많이 가지려는 불자는 부처의 제자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지향하는 세계 천국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공산주의의 이상과 닮았는데 공산주의는 기독교를 부인하고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자본주의 세계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외피는 불교니 기독교니 하는 다른 형식으로 남아 있지만 교의는 실종되고 없다. 무소유를 지향하고 보시를 통해 중생을 구제한다는 불교가 그 많은 재산을 두고 다툼을 벌이는 것은 불교사상과는 거리가 멀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또한 ‘이 땅에 천국을 건설하라’는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자본의 논리를 정당화하고 있으니 ‘교회 안에만 예수가 없다’는 주장이 나올 법도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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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인성교육자료2010.11.21 19:34



길가는 사람을 잡고 ‘어디를 가느냐?’고 묻어보면 대답 못할 사람이 있을까?
그런데 ‘당신은 왜 삽니까?’ 이렇게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할까?
언젠가 고등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그런 질문을 했던 일이 있다. 그런데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죽기 않으니까...‘, 먹기 위해서...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서, 훌륭한 배우자를 만나기 위해서...’ 등등 이런 대답이 대부분이었다. 과연 그럴까?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는 인간이 사는 목적이 겨우 죽지 않으니까, 먹기 위해서... 사는 것일까?    


인도를 걷다보면 보도블록 사이에 이름 모르는 잡초가 뚫고 올라오는 생명의 신비를 본 일이 있다.

누가 씨앗을 뿌린 일도 없고 돌보는 이도 없는데, 더구나 여름 그 뜨거운 열기를 이기고 앙징스런 작은 꽃을 피운 모습을 보면 생명의 신비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이름 모르는 들꽃에서 태풍과 폭우를 보면서 ‘사람이란 도대체 무엇이며 왜 사는 것일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2억분의 일(정자 수)이라는 경쟁을 뚫고 탄생한 존재. 지구상에 탄생한 6,882,639,202명(2010.11.20일 현재) 중의 하나인 나! 우연히 지구상에 태어났다가 먹고 자고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세월이 지나면 늙어 흙에 묻히고 마는 그런 존재가 인간인가? 인생이란 무엇인가? 본능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세월이 지나면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삶의 전부일까?

르네상스 거장, 독일의 괴테는 인생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구름 속을 아무리 보아도 거기에 인생은 없다. 반듯하게 서서 자기 주위를 보라! 자기가 인정한 것을 모두 붙들 수가 있다. 귀신이 나오든 말든 나의 길을 가는데 인생이 있다. 그렇게 앞으로 나아가는 데는 고통도 있고, 즐거움도 있으리라. 어떤 경우에도 인생은 완전한 만족이란 없는 것이다. 자기가 인정한 것을 힘차게 찾아 헤매는 하루하루가 인생인 것이다.' 결국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것, 자기 몫만큼의 인생을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리라.」고 설파했다.

어떤이는 인생의 허무를, 또 어떤이는 사랑의 위대함을 노래한다. 인생이란 끝없이 행복하기만 하다는 사람. 부족함이 없이 모두 갖추고 불편없이 일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또는 일신상의 병마와 평생동안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자기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나 지구상에 던져진 하나의 생명. 그 귀한 목숨이 왜 살아야 하는지 궁구하다 종교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

기독교에서는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 난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본다. 전지전능한 신의 피조물인 인간은 신의 뜻에 따르고 신의 영광을 찬미하는 것이 삶으 ㅣ목적이며 영원한 삶을 찾는 길이라고 믿는다. 불교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업인(業因)으로 3도 육계를 윤회하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은 ‘태어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고통(四苦)에서 헤어날 길이 없는 존재라는 것이 불교의 인간관이다. 인생이 고통이라는 것을 깨닫고 3법인 사성제 8정도를 통해 해탈의 길을 찾는 것. 그게 인생으로서 가장 중요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본다.

지구상에 태어난 68억8천만명의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가지 각색이다. '돈을 벌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돈을 버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의 한평생은 길어야 100년인데 ’먹고 마시고 즐기자, 조금이라도 더 늙기 전에 즐기며 살자'는 사람도 있다. '출세를 위해, 명예를 위해 물불 안 가리고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워 죽지 못해 사는 사람'도 없지 않다. 목적 없이 달리는 선수는 하루 종일 달려도 우승할 수 없다. 사람으로 태어나 ‘왜 사는 지’, ‘살아야 할 이유도 없이 죽지 않기 때문에 살아도’ 좋은가?

사람은 왜 사는가? 삶의 목적을 말하라면 개인의 가치관을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정말 아무 생각없이 의미 없이 죽지 않으니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돈을 모으는 재미로, 혹은 자식을 위해 나의 모든 걸 희생하며 사는 사람도 있다. 어떤 이는 명예욕을 채우기 위해, 또는 예술에 심취해 사는 사람도 있다. 내 한 몸 사라지면 그만이라며 먹고 마시고 즐겁게 살다 세상을 하직 하겠다는 사람도 있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피눈물을 흘리게 하는 사람도 있다.

내가 태어난 것이 우연이든 필연이든 그런 문제는 자연과학이 밝힐 문제니까 여기서 거론하지 말자. 내 의지와 무관하게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나는 세상에서 내가할 수 있는 일을 하자.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도록 내가 가진 것, 내가 알고 있는 것, 그걸 세상에서 필요한 사람에 게 나눠주며 살 수 없을까? 내가 힘든 것은 다른사람도 힘들고 내가 행복한 것은 다른 사람도 행복하다. 나 아닌 다른 나에게 작은 사랑을 나누며 삶의 허무를 극복할 수는 없을까? 훗날 그런 사람 덕분에 우리는 행복하게 사고 있노라는 얘기를 들을 수 있도록....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종교2010.11.16 00:13



교회가 사회 봉사비로 쓰는 자금이 한해 예산의 6.2%에 불과하다(한겨례신문 1993.7.4.)고 한다. "일부 목사들의 월수입이 수천만원으로 전체 예산의 3.8%가 교역자들의 생활비로 쓰여 왔고, 일부 대 사찰의 승려들이 외제 고급승용차를 타고 일년내내 특급호텔에서 지낸다"는 한겨레신문의 보도는 신앙인이 아닌 사람들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다.

1993.10.28. 24:00에 예수가 이 땅에 재림할 것이라고 예언하여 성인 남녀는 물론 청년학생들까지 집을 팔고 학업을 포기하고 예수의 재림을 준비하고 있다가 예언이 빗나가자 가정파탄과 충격으로 자살까지 한 사람도 있었다. 몇년전 미국에서는 수백명의 사이비 종교인들이 집단자살한 일도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예수의 재림을 예언했다가 빗나간 사건이 있었다.

도대체 종교가 무엇이기에 하나 뿐인 생명이나 전 재산 까지 바쳐 가면서 빠져 들 수 밖에 없을까?
종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좀더 상세히 알아보자.

종교가 인간세계에 나타난 것은 인간이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초기 종교는 자연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나타났다. 그 후 죽음이나 공포를 해결하기 위해 자연이나 절대자를 찾게 된 것이다. 어떤 철학자는 종교를 "무지와 공포의 소산"이라 표현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종교를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통치 수단으로 기능하며 피지배자의 억압 수단이 된다고 비난하는 학자도 있다.

단군(제사장) 왕검(지배자)의 명칭에서도 볼 수 있듯이 원시시대는 종교의 수장인 무당이 정치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던 때가 있었다. 이를 제정일치시대라고 한다.
이 시대는 호랑이, 곰과 같은 동물, 오래된 고목이 특정 부족의 수호신으로 숭배하는 토테미즘이 종교의 기능을 했다. 계급이 생기면서 지배자의 야망은 인민의 지배수단으로서 종교를 권장하기도 하고 국교로 인정하여 현실의 고통은 내세의 영생복락을 위해 현실을 희생하라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민중의 정치의식이 낮은 시대는 원시종교나 샤머니즘이 지배수단으로서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으나 점차 민중의 정치의식 수준이 높아지고 비판의식의 향상 되면서 체계적인 신앙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삼국시대 불교는 민중의 정치의식을 마비시키고 현실세계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하여 내세의 준비를 위해 끝없는 희생과 인내를 강요하게 했다.


불교의 교의를 한번 살펴보자. 불교에서 붓다(Buddha)는 한자어로서 진리를 깨달는 자를 가리키는데, 불교에서는 불타, 즉 카필라국 정반왕과 마야부인의 사이에서 태어난 고다마 싯달타의 도움을 받아 깨닫는자(부처)가 된다. 오늘날 불교도는 이 깨닫는자(부처)가 되는 게 신앙의 목표다.

신앙의 대상은 국보(불,법,승)인데, 부처가 되기 위한 과정인 3법인(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숙정)과 사성제(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와 8정도(정어, 정사유, 정정, 정명, 정정진, 정염, 정견 정업)를 통해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노력여하에 따라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불교가 사회와 문화 전체에 미친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고난에 찬 삶을 살면서 창조적인 세계관을 갖지 못하고 운명론적인 세계관을 갖도록 하는 것은 현실의 질서를 유지 존족하기를 바라는 지배자의 논리에 일정정도 기여했던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의식수준과 민중의 각성은 불교가 지배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노정(露呈)하자 시, 서, 악, 역, 예, 춘추 등 6가지 경전사상을 기초로 한 인(仁)의 도를 가르치는 유교가 등장하게 된다. 유교에서 논어는 공자의 교훈과 행동을 기록한 책으로 모든 경전의 근본사상인 인(仁)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인(仁)이란 극기복례(克己復禮)로 극기는 이기심을 이기는 것이요, 복례는 예법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인의 실천강령을 삼강오륜(三綱 - 군의신강, 부의자강, 부의부강. 五倫 - 군신유의(임금과 신하간), 부부유별(부부간), 부자유친(부자간), 붕우유신(친구간), 장유유서(노소간)이라고 하는데, 상호간의 예의를 기본으로 한다. 특히, 임금과 부모를 동일시하여(군사부일체) 봉건지배 질서를 정당화하고 충효사상(忠孝思想)을 고취하였다.

                                                   <사진자료 : 한중일전통정원홈에서>

이성적이고 전통적인 공자사상에 대립하여 나타난 삶의 현실을 의미한 도(道)의 실천을 주장한 도교는 노자와 장자가 대성시킨 종교이다. 우주의 본체가 도요, 상대 세계를 초월한 절대 평등과 무차별의 본체를 인정하는 것을 기본원리로 가르친다. 도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가르침으로 하는 노장철학을 받아들이고 음양오행설과 신선사상을 가미하면서 불로장생의 술(術)을 구하고 주술기도 등을 행하는 종교로 자리 잡는다.


민중의 입장을 강조하는 도교는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이 유교에 비할 수 없다는 약점 때문에 크게 번성하지 못하고 소수의 양심적인 지식인이나 소수의 민중들에게 초라하게 살아남는다.
그 후 서구의 민주주의가 유입되면서 봉건적인 지배질서가 붕괴되고 그 공백을 채워주는 또 하나의 지배이데올로기로서 기독교가 들어 온다.


유태민족의 민족종교인 유대교에 뿌리를 둔 기독교는 우리나라에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는 개신교와 천주교로 각각 다른 경로를 통해 유입된다. 기독교의 교의는 전통윤리가 미개문화로 매도되면서 문화 혹은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뿌리내린다.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한 절대자인 여호와 하나님과 구세주로 세상에 왔다가 인간에 배척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와 성령의 3위 일체 신을 믿는 기독교는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아들로 천국을 보장받고 영생을 누리는 구원을 받는다는 종교다.

세상의 끝날 예수가 재림할 때 알곡과 쭉정이로 구분해 쭉정이인 죄인은 지옥 불에, 알곡인 의인은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다는 가르친다. 그날(재림)은 하나님 외에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항상 준비하고 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기독교는 '권세는 위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다'와 같은 성구에서 보듯, 지배자에게 순종하는 운명론적인 삶을 강요하는 운명론적 세계관이라고 비판하는 학자도 있다.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해석하는 학자들은 현실의 모순을 ‘하나님의 뜻이요, 현실은 내세의 준비과정’으로 가르쳐 현실 긍정적이고 순응적 삶을 강요한다고 비판한다.

그 외의 힌두교는 인도의 굽타왕조때 범서, 비서 등을 기초로 한 바라문교의 사상을 고치고 변경하여 고유한 인도 민족신앙과 결부시켜 발전한 종교로서 범신론, 다신론, 유신론, 무신론을 수용하면서 원시적인 경배와 요가를 통해 인간의 참된 자아를 추구하는 종교이다.

조르아스트교는 기원전 60년경 조르아스트가 창시한 종교로서 젠드 아베스트란 경전을 갖고 있다. 조르아스트교의 교의는 이 세상은 선(善)과 악(惡)이 싸우는 전쟁 마당이며, 아후라 마즈다라는 선신(善神)과 앙화 마이뉴라는 악신(惡神)이 대립하고 있는데, 근검 역행의 노력으로 악신을 이기고 선신이 승리한다는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


이슬람교는 회교라고도 하며, 마호메트에 의해 창시된 종교이다.
이슬람은 복종이란 뜻이며, 인간은 신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슬람교라 명명했다. 이슬람교는 아라비아 고유의 민족신앙, 그리스트교, 유대교의 교의를 흡수하여 알라를 믿는 신앙을 말한다.

그들의 경전인 코란에 의하면 알라, 천사, 예언자, 경전, 내세 심판, 예정에 대한 신앙 등 6신과 5행(다
섯가지 의무, 즉 알라예배, 모하멧 
트 믿음, 1일 5회 기도, 자선, 9월 단식, 메카순례)을 요구하는 종로서 4억 5천의 신도가 있다.

유대교는 기원전 15세기경 모세가 애굽을 탈출하여 40년간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종교적 체험에서 비롯된 종교로 모세 율법을 기초로 하여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민이며, 천국이 지상에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는 종교이다.

유대교가 모태이면서 예수를 
                                                                   <이슬람교도의 예배모습>

크리스도(구세주)로 믿는 개신교와 이땅에 다른 크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 유대교는 구약 성서만을 믿는다.

이제 개략적으로 살펴본 종교의 공통점은 개인의 영생과 축복에 초점을 두고 개인의 수련과 반성, 도덕적 인격의 완성 등에 관심을 둔다. 특히, 대부분의 종교는 운명론적인 세계관을 갖는 것이 특색이다. 절대자에게 복종하고 순응하며 현실 질서에 복종하는 세게관은 강자의 논리로서 창조적이고 개척의욕을 마비시키고 신의 의도를 추종하는 삶을 강제받는다.

종교의 현실 감각의 마비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여 진취적이고 주체적인 삶의 저해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민중중심의 종교가 양심적인 신앙인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해방신학이나 민중교회나 민중불교 등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는데, 이들은 지배권력에 의해 반체제 세력 또는 전통에 대한 도전세력이라는 이단(異端)으로 분류되어 탄압을 받는다.

기독교 발생 당시의 이스라엘 상황을 신학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해석하려는 시도 없이 전통신학이란 이름으로 다른 해석을 거부하는 것은 종교의 경직성을 보여 주는 또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전통신학에 대한 도전은 식민지적인 상황에서 예수의 정신을 오늘날 다시 살려 내야 한다는 시도로 상당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데 해방신학이나 민중불교와 같이 신의 본성을 현실에 맞게 재해석하여 지배논리가 아닌 민중시각에서 신앙화하려는 시도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민중종교의 공통점은 내세를 위한 준비단계로서의 현실이 아닌 이 땅이 하나님의 나라요, 극락으로서 구현시키려는 노력이 종교의 당면한 과제로 받아들이고 있다.

인간이 신의 노예로서 현실 감각을 마비시키는 이데올로기의 희생자가 되거나 지배 논리로서의 종교의 역할은 당연히 거부되어야 한다. 이제 종교는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해방과 인간의 주체적인 삶을 위한 인격 수양의 과정으로서 재정립되어야 한다.

목사나 승려의 교세확장이나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자기논리로 상대종교를 적대시 하거나 폐쇄적인 사고방식은 분단시대에 또 하나의 38선을 긋는 민족의 비극을 강화하는 역할을 하게 됨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정치2010.10.23 07:37


- 종교의 여성 -

남녀를 표현할 때 남자에게 '계집애' 같다고 하면 모욕적인 언사가 되고 여자에게 '치마를 둘렀으니 여자지, 남자못지 않다'고 하면 칭찬이 된다. 보통 '남자답다'는 표현은 진취적이고 이성적인 남녀를 가리키고 '여자답다'고 하면 다소곳하고 소심하다는 뜻으로 통한다.

우리사회의 뿌리깊은 남존여비의 풍속은 민주주의를 사는 시민의 의식 깊숙히 까지 남아 있다.

오늘은 종교의 여성관에 대하여 살펴 보자.

인류 역사를 50만년으로 본다면 49만 5천년 이상은 모계중심사회였으나 정착하여 농경생활이 시작되고 사유재산과 계급이 발생한 이후는 부계중심사회로 바뀐다. 종교는 계급사회 이전에는 자연에 대한 공포나 경외에서 출발하지만 계급이 발생한 후에는 체제유지 이데올로기로도 작용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사진출처:한겨레 21>
기독교는 남자가 여자를 낳는 역사 즉 남자의 갈비뼈에서 여성이 탄생한다는 논리를 비롯해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에베소서) 에서는 보는 바와 같다. 생리나 출산때 출혈을 부정하다고 보고 부정한 죄가 벗겨질 때까지 근신해야 한다고 했다.(레위기) 그리고 여성은 이브의 타락에서 악의 근원으로 생각하고 인간사회의 불행과 비참함은 여자의 범죄(선악과를 남자에게 권유한) 댓가라고 보고 있다.

여성의 해산 고통은 남자(아담)를 유혹하여 죄를 짓게한 죄의 댓가라 보고 오늘날 에덴 동산에서 쫒겨나 인간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된것도 여성(이브)의 원죄에 있다고 보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남자는 완전한 하나님의 모습'으로, 여자는 '잘못 태어난 열등하고 불완전한 존재로 규정'하고 있다. '정신적으로도 이성적 능력이 열등하고 도덕적으로 의지와 자기 절제능력이 열등한 존재'로 태어났다고 했다.
                                                   <사진출처;한겨레 21>

불교에서도 남자승려인 비구의 계율은 250가지만 지키면 되지만 여승인 비구는 업장이 두텁다 하여 348가지 계울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남자는 부처가 될 수 있으나 여자는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배제되고 보살에 머물러야 한다.

가장 남녀불평등을 강조한 종교는 유교이다. 삼강오륜에서 부부유별은 물론 축접제, 전족, 정조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자결을 강조하고, 혼례식도 올리지 않은채 죽은 정혼자를 위해 수절을 강요하고 있다. 죽은 남편따라 죽는 것이 열녀가 되어 여성의 갈 길이라 가르치고 재가금지는 물론 칠출(칠거지악)을 강조한 것도 유교문화의 잔재이다. 여성이 가족의 공유물로서 출산이나 노동력의 제공자인 하급노예 시대가 바로 종교가 기여한 공로(?)라 해도 지나친 표현이 아니다.
                                                         < 사진출처 ; 한겨레 21>
더욱 불행한 일은 여성 자신이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희생자이면서 오히려 운명적으로 수용하면서 여성이 더욱 남자편이 되어 스스로 굴레를 만들어 운명적으로 살아 왔다. 여성은 육체적인 힘이 남성보다 약하니까 열등하게 태어났다거나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남존여비의 사회에서 남자중심의 도덕이나 가치체계가 종교를 통하여 더욱 운명적으로 수용하고 체계화 되어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자본주의 모순의 근원은 남여 불평등에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성이 상품화된 사회구조 아래서는 유능한 남성은 화폐가치로 평가되고 경제적인 소득의 고하가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가치체계를 만들어 놓았다.

즉 자본주의의 계급구조는 능력이라고 포장된 불평등이 남여 불평등에 기인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여성이 남성의 미완성품이 아닌 인간으로서 인격적인 존재가치를 인정할 때 종교가 만들어 놓은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여성 해방과 함께 인간 해방이 가능할 것이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종교2009.03.16 07:41



 "선생님! 연세가 쉰이 넘은 선생님께서 교회에 나가신다고요?"
 법(신) 없이도 사실 분이 '왜 갑자기 하나님이 필요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언젠가 저와 함께 교회 다니시던 분이 제게 하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대통령탄핵반대 집회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15년도 훨씬 지난 옛날, 교회에 함께 다니던 H권사님이 길에서 어깨띠를 하고 "예수 믿읍시다" "예수 믿고 구원받읍시다"하며 홍보물을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저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선생님은 노인이 다되셨네요. 이제 연세도 있고 한데 준비 하셔야지요. 교회에 다시 나오십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본지 10년 정도 세월이 더 지났으니 머리카락이 하얗게 된 걸보고 '노인이 다됐다'는 말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제 죽을 때가 다 됐으니 회개하고 죽을 준비를 하라'는 말은 기분 좋게 들리지 않았답니다. 


 교회 얘기가 나왔으니 필자의 지난 얘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1989년 전교조결성으로 나라 안이 온통 시끌벅적했을 때입니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던 학교(사립)의 교장이 필자가 다니는 교회에 장로이기도 했습니다. (필자의 당시 교회직분은 초등부부장을 맡은 권사였다) 대부분의 학교가 그랬지만 전교조 출범 당시 사립학교의 경우 학교비리와 관련해 문제를 제기했고 필자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전교조도 미운데 자기 학교 비리까지 문제제기를 했으니 교회에서인들 예쁘게 보일 리 있었겠습니까. 필자도 교장의 뜻은 아니지만 전교조 교사 5명이나 해직시킨 교장이 고울 리 없어 한달 정도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뒤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총회를 열어 저를 제명처분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30년이 넘게 교회에 다닌 중진(?) 권사(감리교회의 권사는 장로교회의 장립집사 정도 될까?)를 본인의 소명기회도 주지 않고 징계처분을 했다는 것이 못내 서운하고 못마땅했습니다. '죽을 준비나 하라'던 그 권사는 당시 필자와 같은 권사였는데 예의 그 교장과 같은 입장에 서서 우리를 참 괴롭게 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특히 전교조에 대해 악의적인 선전을 한 장본인이었고, 징계(?)과정에서 '전교조는 빨갱이다'라는 주장을 하고 다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는 일,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가 동료교인을 징계하면서 본인도 출석하지 않은 상황에서 징계한 것도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대통령시절 군사정권을 축복하는 조찬기도를 자청하고 최근에는 국가보안법철폐반대를 하는 모습이 예수님의 정신을 실천하는 길인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문익환목사님이나 문규현신부님과 같은 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는 에수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저만의 생각이겠습니까?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편지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군에 갔다 오면 사람된다'는 속설에 대한 오해와 같은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선생님처럼 착하신 분이 오히려 멀쩡한 아이를 군대 보내 '권력에 복종하는 순종적인 인간'을 만들듯이 법 없이 살 수 있는 선생님 같으신 분이 '하나님이 두려워 눈치를 보면서 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돼서 말입니다.

 종교란 무엇인가? 까마득한 옛날, 자연에 대한 신비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인간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신)가 있을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무서운 병으로 고통을 받거나 죽음의 공포는 신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고 그 보이지 않는 절대자가 죽음의 문제까지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은 신의 영역이고, 죽음의 문제는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종교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겨난 거라고 봐야겠지요. 다시 말하면 종교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신의 도움이 필요해 생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절대자를 믿고 따라야 하는 데 그 '절대자의 실체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 그게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생사길흉화복을 좌우하는 '신(神)이란 어떤 존재일까? 아니 그러한 신이란 과연 있기나 한 것일가? 하는 문제를 놓고 '유신론이니 무신론이니 또는 삼위일체 신이 진짜 신이니 예수는 신이다. 아니다 선지자일뿐이다... 신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인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부처가 되는 길밖에 없다..... 내가 믿는 종교만이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느니... 하는 논쟁이 지금도 그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쟁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식의 끝없는 논쟁으로 결론이 쉽게 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나 마호메트나 부처나 공자나...어떤 신앙의 대상도 마찬가지지만 그걸 본 사람, 그러니까 전한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에 따라 신의 모습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거지요. 공자의 가르침을 놓고 주자만이 해석할 능력이 있다고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자학이니 성리학이라 하고 왕양명이 해석한 걸 양명학이라 하지 않습니까? 불교도 참선을 중시하는 선종과 경전을 중시하는 교종, 그리고 선교종(선종+교종)도 있고 조계종, 천태종, 일붕선교종, 진각종, 여래종, 일승종, 미타종, 미륵종, 원효종, 태고종, 정토종 등...이 있지 않습니까?

 폐일언하고 선생님이 믿기로 했다('교회에 나간다'와 '예수가 하나님이다'하고 믿는 것은 다른 뜻이지요)는 그 신. 그 기독교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 우선 기독교를 말하기 전 제 얘기를 잠간 해야할 것 같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지요. 성경을 처음 읽어 본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일이지만 그 감동을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모습을 목격한 저로서는 인간의 허무함을 뼈 속 깊이 느끼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목사가 되는 길을 몰랐기 때문에 그 길을 가지 못했지만 성직자가 돼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던 일이 있었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다른 종교도 그렇지만 기독교는 종교자체가 곧 권력이었던 과거가 말해주듯 상당부분 이데올로기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이 어때서요?'할지 모르지만 그건 순진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고 돈이나 권력은 인간의 신념까지 바꿔놓을 수 있는 마력을 가지고 있더군요. 옛날 저와 함께 시민운동을 함께 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 중에는 지금 청와대에도 있고 정부쪽 고위직에도 있는 걸 봤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옛날 하던 말과 지금 하는 소리는 같은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변절을 했더군요. 그거지요. 권력의 맛. 돈의 맛을 알면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기독교도 초기에는 처절한 탄압을 받았지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제정일치시대를 거치면서 초기의 정신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예수의 뒤를 따라 십자가에 그것도 거꾸로 매달려 죽지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 교황(베드로의 후계자=교황)은 곧 왕 중의 왕이 되지 않았습니까? 유럽 제국의 왕을 임면할 수 있는... 권력이 장기간 집권을 하면 부패하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중세의 기독교가 얼마나 타락했으면(면죄부를 팔아먹는...) 루터나 쯔빙글리 같은 이들, 토마스 뮌쯔 같은 이들이 목숨을 건 저항을 시작했겠습니까?

 종교개혁을 성공한 마르틴 루터는 민중을 배신한 대가(?)로 오늘날 개신교의 종주가 되지만 예수의 뜻을 따르겠다고 권력과 타협을 거부한 토마스 뮌쯔는 처형을 당하지 않습니까? 천주교에서 아니 유대교에 뿌리를 둔 기독교는 천주교에서 그리스 정교회, 국공회,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여호와의 증인 등 엄청난 파벌이 만들어지고 각 종파들은 전쟁을 치르듯이 숫자를 늘려 세력 확장해 나갔습니다. 공유사상인 기독교가 자본주의와 타협을 신의 뜻이라고 호도하면서 권력의 맛. 세상의 맛을 알고 스스로 권력이 되기를 거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교회를 나가면 됐지. 뭘 그리 복잡하게 따지고 드느냐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나의 삶을 맡긴다(신앙)는 것은 그렇게 함부로 그리고 단순하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 온 삶을 부인하고 신이 가르쳐 준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말씀처럼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을 한다' 또는 '신자'란 어떤 의미를 다고 있는가? 진정한 신앙인은 중생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중생(거듭난다)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건방지게 앞으로 목사님을 통해 하나님을 쉽게 자세히 배우실 기회가 있는데 왜 제가 이런 얘길 하는가 하면 목사님이 가르쳐 주실 한느님과 제가 말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다르게 느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40년이 넘게 기독교에 몸담고 있는(?) 저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지금부터 그 얘길 하려고 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대부분의 '신부님들이나 목사님들이 가르쳐 주는 그런 하나님은 처음의 예수님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에 따라 기독교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안경(신관)으로 예수를 보느냐에 따라 전통신학과 민중신학 또는 해방신학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처음 현재의 성서가 전부이고 그런 시각에서 예수를 해석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외경이라는 것도 있고 예수님이 절대권력을 가진 무시무시한 분이 아니라 나의 육신의 아버지 보다 더 사랑이 많으시고 인자하신 분이라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모습의 예수를 가르쳐 주느냐에 따라 신자들의 신앙을 전혀 다른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목사님이나 신부님은 현실보다 내세를 더욱 강조하고 인자하신 하나님보다 권위의 하나님, 절대자 하나님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의 모습을 보는 사람에 따라 예수님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듯이 성경도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그 뜻이 달라집니다. 물론 기록된 사실도요. 예를 들면 신약의 5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성서는 마가 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베드로의 수행원이 그것도 예수님이 죽은 후 60년이 지나 기록한 것이 최초의 신약성서인 마가복음입니다. 마가복음의 산상보훈에는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고 기록돼 있지만 다른 복음서 그러니까 마태나 누가, 요한복음에는 '그 산상보훈 앞에 '마음이'라는 말이 더 추가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 성경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일점 일획도 보태거나 빼서도 안 된다는 사람들(無誤說)이 그걸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겁니다. 이것만 보아도 기독교는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에서 부와 권력과 손잡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지요.

 이제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좀 더 깊이 살펴봅시다.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예수를 바르게 알지 못하면 신앙생활은 헛수고일 뿐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천주교, 개신교...) 선지자일 뿐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보는 사람(유대교, 이슬람교)도 있습니다.  선생님이 다니시기로 한 교회(개신교)는 예수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다'라고 믿음으로서 성립한 종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삼위일체'(성부인 야훼와 성자인 예수 그리고 성신인 성령)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성부는 무엇이고 성자는 뭔가 그리고 성령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건 절대자 야훼=예수=성령이라는 다른 이름 같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신. 삼위일체의 신을 어떤 모습을 믿어야 하는가?'
 자비의 신인 예수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복수의 신인 구약의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구약성서에 나타난 신은 복수의 신, 위엄의 신으로 나타나고,. 신약성서의 신은 죄를 지은 인간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주시는 자비스런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공포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엄부(嚴父) 아래서 자란 자녀처럼 권위에 복종하는 순종적인 신앙인이 되거나 이중인격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발 하니님이 무서워 마음에도 없는 자선을 베푸는 그런 신앙인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쓴 두서 없는 글을 마치겠습니다. 제발 제 좁은 신관(神觀)이 선생님의 신앙생활에 작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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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2008.11.25 07:56



모든 종교는 권력과 쌍생관계가 아니다. 그런데 기독교와 불교는 어떻게 거대한 권력으로 자리잡고 있을까? 대부분의 종교는 ‘약자 배려’라는 가치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우선으로 한다. 이러한 종교의 속성상 반권력적 친민중적인 성향일 수밖에 없다. 절대권력 앞에서 종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권력화(이데올로기)되거나 아니면 도태의 길을 밟는다. 역사적으로 제정일치 시대에서는 제사장이 정치적인 수장이었다. 그러나 제정분리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종교는 권력화 되어 살아남거나 아니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사진 : 속리산 법주사>
 기독교의 예수는 ‘약자와 강자가 없는 세상, 평등세상’을 만들자고 주장하다가 귀족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고 만다. 석가모니가 지향하는 세계도 계급세상을 타파하고 평등세상을 추구하기를 바란다. 초기 불교가 개인의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소승불교에서 출발했던 것은 권력의 박해를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리학이 국가지배이데올로기가 되지만 도교는 권력의 미움을 받아 크게 번창하지 못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농민을 배반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독일의 영웅이요, 역사의 승리자가 되고 토마스 뮌처(Thomas M ntzer)는 악마의 화신이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권력 앞에서 특정 종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종교가 지향하는 이상을 포기할 때 가능한 얘기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불교가 권력과 밀월관계가 유지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평등세상을 이상으로 하고 있는 종교가 권력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가 되지 않고서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은 현존하는 대부분의 종교가 약자의 억압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를 증명할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는 외세의 지배를 받아 온 동남아시아의 불교가 '중생의 구제하는 대승불교'가 아닌 '개인의 해탈을 중시하는 소승'이 득세했다는 데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부정과 비리를 저지를 수 없도록 ‘공익 이사제’나 ‘친인척비율 축소’와 같은 내용을 담은 사립학교법을 바꾸자며 삭발과 단식을 하는 성직자를 보면서 현세의 종교는 ‘처음 마음’을 버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처음의 마음을 지키려 했다면 존재자체를 보장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부정이나 다름없는 변절은 종교가 국가 이데올로기로 변하거나 구복신앙, 혹은 현세구복적인 퓨전종교가 되고 만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절대권력이나 식민지 지배 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불교가 대승이 아닌 소승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은 소승불교가 정치의식을 마비시킨 공로 때문은 아닐까?

 민중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대승불교는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 권력에 의한 착취라는 모순에 맞서야 하기 때문에 식민지 종주국이나 독재정권이 용납할 리 없다. 소수가 권력이나 부를 독점하는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불교도 세상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해탈을 위한 소승의 시대를 구가할 수밖에 없었다. 서슬 퍼렇던 권력이나 식민지배 아래서는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上求菩提), 아래로는 대중을 교화한다는(下化衆生)' 대중구제에 중점을 둔 대승불교는 뿌리를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평등사상이나 약자를 배려하는 가치가 허용될 수 없듯이 말이다.

 불기 2551년을 맞아 사원마다 연등행사를 비롯한 화려한 축제가 준비 중이다. 각 사원마다 거행되는 성대한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보면서 ‘부처님이 이 모습을 보신다면 과연 감격해 하실까?’ 부처님은 왜 저렇게 살이찌고 권위주의에 찬 얼굴을 하고 있을까? 초기불교 시절의 목불이나  철불이 왜 은불 동불 금불로 바뀌었을까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연등의 크기로 극락왕생을 배분하는 불교를 보면서 오늘날의 불교가 과거 기독교의 ‘면죄부’판매와 어지간히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설파한 철인(哲人)이 있다. 권력과 타협한 종교, 돈에 눈이 어두운 종교는 이미 종교가 아니다. 타락한 종교는 마약보다 더 무서운 효과(?)를 발휘한다. 자애로운 모습의 부처님 상이 위엄과 권위에 차고 철불이 금불로 바뀌는 과정에서 불교는 피억압자에서 억압자로 바뀌어 갔던 것이다. 종교라고 돈과 권력 앞에 초연할 수 있을까? 3법인, 사성제, 팔정도를 통해 구도의 길을 걸어야할 불도에게 승과를 두고 계급을 부여했던 일은 덮어두더라도 오늘날 돈과 권력 앞에 무너지는 종단을 보면 종교가 마약이라는 철인의 주장이 새삼스럽게 가슴에 와 닿는다.

 권력과 타협했을 때 종교는 곧 권력이 된다. 식민지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조차 없다. 군사독재정권에 기생해 그들의 무운장수(?)를 기원하던 불자들은 과연 해탈의 과정을 밟는 수도자였을까? 불의한 권력을 정당화시켜 준 대가로 종교는 안일과 치부의 길을 걸었다. 그들이 권력과 타협하고 불의에 침묵해 준 대가로 민주화를 갈망하던 수많은 인사들이 고문당하고 죽어갔다. 왜 종교재단이 면세 혜택을 누리며 치부를 할 수 있는지, 승려와 불자들은 정말 모르고 있을까? 부처는 신이 아니다. 부처는 ‘대도를 깨닫고 중생을 깨닫게 하는 성인’ 즉 해탈자다. 승려나 불자는 부처가 되기 위해 수도하거나 부처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부처님 오신 날 그 참뜻이 사바세계에서 피어나려면 특권을 포기하고 민중의 편에 서려는 진지한 고민부터 있어야 하지 않을까?

(2007년 5월 23일 썼던 칼럼입니다. 사립학교법을 개악해야 되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종교재단을 보고서..... 이건 교리와 다가르침과는 다른 민중의 억압자라는 생각에서 썼던 글입니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인성교육자료2008.11.18 13:26




나는 내 인생의 주인인가

 세상에는 별별 사람들이 함께 산다. 키가 큰 사람, 작은 사람, 뚱뚱한 사람, 홀쭉한 사람, 돈이 많은 사람, 가난한 사람, 부지런한 사람, 게으른 사람.... 능력이나 개성만 각양각색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로 인연이 맺어지기도 하고 형제나 지매로, 또 친구 사이로 만나는 관계로 인연이 되어 사는 곳이 이 세상이다. 죽고 못 사는 사랑하는 사이가 있는가 하면 서로 미워하며 법정 투쟁까지 벌이는 앙숙(怏宿) 사이도 있다.

 사람들은 어떻게 신분이나 재능이나 혈연으로 맺어져 한세상 더불어 사는 것일까? 일찍이 석가모니는 이러한 ‘개인의 운명이나 인간의 관계 맺어짐’을 업(業)이라고 풀이 했다. 업이란 원래 ‘행위’ ‘조작’ ‘일’ ‘짓’ 등의 뜻을 가진 말로 ‘전세 (前世)에 지은 악행이나 선행으로 말미암아 현세에서 받는 응보'를 이르는 말이다. 전생의 행위나 결과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이고 나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 업 사상은 수세기동안 계급사회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기독교에서도 우리사회의 불평등이나 개인의 능력이나 신분의 차이를 전능한 ‘신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도공(陶工)이 그릇을 만들 때 ‘귀하게 쓰일 그릇을 만들 수도 있고 천하게 씌어질 그릇도 만들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신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서야 자신의 처지를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합리적인 사고와 과학의 발달로 종교가 해석하는 이러한 논리는 신자들의 자우의지에 맡길뿐 과학적인 검증으로는 아직도 역부족이다.

 내게 주어진 현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주어진 현실을 보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바꿔나갈 것인가는 개인의 신념이나 철학에 달려 있다. 인생을 일컬어 ‘유수(流水)’ 같다느니 ‘나그네’나 ‘풀의 이슬과 같다’는 말로 표현한다. 흐르는 물과 같기도 하고 잠간 있다가 떠나야 하는 나그네나 풀의 이슬처럼 ‘언제 그렇게 세월이 지났는가?’ 할 정도로 빨리도 지나간다는 뜻이다. ‘죽고 나면 끝’이기 때문에 살아 있을 동안 먹고 즐기자‘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사람마다 사는 방법이나 질이 달라진다. 철학하는 사람들은 이를 두고 ‘인생관’이라고 한다. 똑 같이 100년을 사는데 삶의 질이 천차만별인 이유는 능력이 아니라 의지요 신념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는 뜻이다. 운명론자나 허무주의자가 되어 실의와 좌절에 빠져 한평생 허송세월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보람 있게 보낼 것인가는 자신이 판단할 몫이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것이다. 지난 뒤 후회하는 사람보다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종교2008.10.24 07:19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이 세상에 와서 불교나 기독교의 모습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처럼 하라!”고 가르쳤는데 사립학교법을 개악하고 세금도 내지 않겠다면서 문화재관람료는 받겠다고 생떼를 쓰는 모습을 보면 뭐라고 할까? 불같이 화를 내며 “이 독사의 자식들아…!”라고 하지는 않을까? 3법인 4성제 8정도를 통해 부처가 되라고 가르치신 부처님이 서로 지분을 많이 가지려고 몽둥이질을 하고 부자가 되어 고급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보면 과연 성 내지 않을까?

대웅전에 모셔둔 부처님은 한결같이 금 색깔이며 얼굴은 또 왜 또 그렇게 권위에 차고 살이 쪘을까? 그런 모습을 쳐다보면 평화와 자비심을 느낄 수 있을지… 수양부족인 중생의 눈에는 부처님의 덕을 가리는 사이비 승려들의 적악을 하는 것 같아 마음이 언짢다.

역사기행을 다니다 보면 다양한 불상을 만나게 된다. ‘저렇게 정성을 들여 만든 부처님은 누구를 위해 만들어졌을까?’ 이런 생각과 함께 부처님의 모습도 시대별로 다양하게 바뀌어 왔음을 알 수 있다. 누워 있는 불상, 않아있거나 서 있는 불상, 또 깡마른 부처와 뚱뚱하게 살이 찐 부처, 천진난만하게 생긴 부처와 범접할 수 위엄과 권위에 찬 모습의 불상도 있다. 철불과 동불이 있는가 하면 금동불과 금불상도 있다. 왜 이렇게 생김새가 다양한 불상이 등장하게 된 것일까?

                          
                            <반가사유상>                    <입불>                     <좌불>
세상은 보기에 따라 다르게 보인다. 탈레반이 잡아둔 한국 인질을 보고 한 편에서는 ‘일면식도 없는 가난한 나라의 어린이들을 돕고, 병든 사람들을 고치고, 사람의 생명을 살리던 착한 사람들이 사악한 테러세력이 잡고 있다’고 한다. 한쪽에서는 ‘순교는 그들이 원했던 게 아닌가’, ‘유서까지 써놓고 죽으러 갔으니 죽게 내버려두자’, ‘전지전능한 신이 왜 선교활동을 하러 간 교인들을 어쩌지도 못하는 무력한 신이 됐는가…?’라고.
왜 이렇게 상반된 반응이 나올까? 아프간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차이가 뭔지 또 아프간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 알지 못한다면 같은 사건을 두고 다르게 보일 수밖에 없다. 불상이란 불교의 신앙대상으로 창조된 부처의 모습이다. 불상은 불격에 따라 불타. 보살. 명왕. 천부. 나한 등으로 나눌 수 있다.

불타는 여래라고도 불리는데, 이를 풀이하면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불상은 재료의 종류에 따라 석불, 마애불(磨崖佛. 커다란 암벽에 부조 또는 선각 등으로 얕게 새긴 불상), 목조불, 은불, 금동불, 철불, 소조불(塑造佛. 점토로 만든 불상), 건칠불(乾漆佛. 나무로 간단한 골격을 만들고 종이나 천 같은 것으로 불상을 만든 후 옻칠을 하고 다시 금물을 입힌 것이다) 등이 있다. 불상을 생김새로만 이해해서는 불교의 진수를 모른다. 부처님은 너무도 거룩한 분이라서 모습을 형상화하는 것 자체가 자칫 그분의 성스러움을 훼손할 우려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 아는 얘기지만 초기에는 불상이 없었다. 불상을 대신해 불사리탑이나 법륜, 보리수 연화좌, 금강좌와 같은 상징물들을 부처님의 위치에 표현해 놓고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다. 부처님이 입멸한 지 500여년의 세월이 흐르기까지는 불상이 아니라 이러한 부처님의 상징물이나 사리를 모신 탑이 예배의 대상이었다. 

                     
                          <철불>          <법주사의 도금한 불상>        <금불상>  
부처님께서는 "나를 위하여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는데 왜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면서까지 불상을 만들게 됐을까? 불멸 후 500년까지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곧이곧대로 지켜왔지만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자 부처님의 불사리를 놓고 분쟁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때 향성 바라문의 중재에 의하여 사리는 8등분되어 여덟 개의 불사리 탑 및 병탑(사리를 담았던 항아리), 회(재)탑을 건립하여 사리가 모셔진 탑이라는 형상을 통해 부처님을 대하듯 숭배하였던 것이다. 불상의 기원을 보면 가장 일찍 편찬되었다고 하는 <아함경(阿含經)>을 비롯한 여러 경전을 보면 코삼비(Kaus mb)국의 우다야나왕이 향나무로 석가의 모습을 조각하도록 했다는 것이 불상조각의 시초라 볼 수 있다.

철불 법주사의 도금한 불사 금불상 무신론인 불교가 부처가 신앙의 대상이 됐다는 것부터가 불교가 지향하는 가치와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부처님이 해탈자이기 때문에 그분이 가신 길, 그분의 가르침을 받아 해탈의 길을 가자는 것이 불상을 만들고 절을 많이 하고 시주를 많이 하면 극락왕생할 것이라는 생각은 불교와는 거리가 멀다. 불교가 권력과 밀착해 승려들에게 계급을 하사하고 불전을 줘 수탈자로 만든 것은 권력의 뜻이다.

                       
                              <도금한 범어사 불상>                                       <마애사 석불>
절대왕권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불교는 왕이 곧 부처(왕즉불-王卽佛)가 되게 마련이다. 불상을 만들기 시작한 때부터 불교는 무신론에서 유신론으로 정체성을 달리했다. 다시 말하면 스스로 해탈의 경지를 터득해야 할 불교가 부처라는 신을 만들어(형상화) 구복과 기복의 길을 걷게 된다. 이렇게 시작한 처음의 불상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러한 불상의 제작과정을 보면 순수하게 민간신앙 차원에서는 목불이나 소조불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러다 국가차원에서 불교가 받아들여지고 권력과 결합하면서 철불이나 금동불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처의 표정도 처음에는 ‘깡마르고 고통에 찬 모습 -> 천진난만한 친근감이 넘치는 모습 -> 차츰 살이 찌고 근엄한 모습’으로 바뀌어 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왕이 곧 부처’가 되는 고려시대는 외모나 권위 면에서 종전의 천진난만하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어지고 위엄과 권위에 찬 모습으로 바뀌게 된다.

[소승불교와 대승불교 ]

역사적으로 국가의 흥망과 함께한 불교는 소승불교와 대승불교가 주류를 이룬다. 흥미 있는 사실은 동남아시아국가들처럼 외세의 지배를 받은 국가는 대부분 소승불교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반면, 외침을 받지 않은 주권국가들은 대승불교가 흥했다는 사실이다. 식민지 종주국은 식민지배 따위에는 관심도 없고 개인의 해탈에 전념하는 것은 식민통치에 방해가 될 리 없기 때문에 방치한 것이고 대승불교는 개인의 해탈이 아니라 중생의 아픔을 구제해야 하기 때문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 즉 식민지배의 저항에 나서게 된다. 식민지 종주국은 당연히 대승불교를 용납할 수 없었고 소승불교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교가 권력과 유착하지 않고 식민사회의 모순에 나선다면 식민지배가 순조롭지 못했을 것이라는 건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1. 소승불교 소승은 열소(劣小)한 수레라는 뜻으로 많은 사람이 함께 타고 피안(彼岸)에 이를 수 있는 큰 수레가 아니라고 한다. 부처님 입멸 후 캇사파가 중심이 되어 경전을 결집하고 계를 지키며 수행하는 전통적 보수 교단을 소승불교라고 한다. 소승은 자리, 즉 자신의 구제(해탈)만을 목표로 삼은 출가주의로 세속을 버리고 출가하여 엄한 계율을 지키고 수행해야만 해탈할 수 있다고 본다.

2. 대승불교 ‘대승’은 큰(maha) 수레(yana), 즉 많은 사람을 구제하여 태우는 큰 수레라는 뜻으로, 일체중생(一切衆生)의 제도(濟度)를 그 목표로 하였다. 이 운동은 종래에 출가자(出家者:승려)만의 종교였던 불교를 널리 민중에게까지 개방하려는 재가자(在家者)를 포함한 진보적 사상을 가진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것으로,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불교 유적인 스투파(stupa:墳墓)를 관리하고 있던 사람들이 중심이 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3. 대승과 소승은 어떻게 다른가? 내가 있는 곳이 욕계요 강건너 저쪽의 세계가 열반의 세계라면 ‘어떻게 강을 건너가느냐?’가 문제다. 소승불교에서는 출가자가 자기 위주의 독선적 사고에 빠져 석가의 근본정신을 잊어 버렸다고, 대승불교는 소승불교를 비난하고 있다. 그리고, 대승불교는 석가 본래의 정신에 되돌아와 출가자뿐 아니라 재가의 신자들도 등산을 할 수 있게 된 불교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차이다.
[불상의 모습]

왜 어떤 부처는 누워 있고 어떤 부처는 앉아 있고 어떤 부처는 서 있는가? 와불(臥佛)부터 살펴보자. 와불은 부처님이 ‘열반에 들 장소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는 형상’을 상징하고 입불은 서 있는 불상이며 좌불은 결가부좌한 자세로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것과 설법을 하는 자세’를 뜻한다. 초기는 입상이었다가 후기로 가면 앉아 있는 불상으로 바뀌는데 이는 권력화되고 권위적인 부처님으로 바뀌는 과정에서 불상의 모습도 바뀜을 알 수 있다. 보통 대웅전에서 볼 수 있는 불상은 부처님이 삼매에 드신 상태(삼매인)와 설법하시는 모습(전륜법인)을 형상화하고 있다. 반가상은 부처보다 주로 관음보살 등의 보살에 많이 쓰이며 주로 사유상 즉 생각하고 있는 자세다. 반가상은 ‘현생의 중생들의 고달픔을 생각’하는 모습을 상징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불상은 왜 그렇게 살이 찌고 권위에 차 있는가?]

초기 불상은 재료는 나무나 흙으로 만들어 진 목불이거나 토불이었다가 후기로 가면서 철불이나 금동불 혹은 금불로 바뀐다. 모습도 처음에는 고뇌에 찬 갈비뼈가 앙상한 모습,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살이 찐 건강한 모습으로 바뀐다. 불교가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게 되고 권력화되면서 외모도 그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바뀌어 온 것이다. 특히 고려시대 승과제도가 도입되고 왕사나 국사와 같은 계급을 차지하고 사원전을 받아 경제력까지 가지면서 불상의 모습도 그에 상응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우리가 불상을 통해 보는 불상은 본래의 부처님 얼굴이 아니다. 분명한 것은 불상이 권력과의 위계관계에 따라 다정다감하고 천진난만하다가 위엄과 권위에 찬 모습으로 바뀌어 왔다는 사실이다. 귀족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귀족이고 싶었고 왕 또한 살아서도 죽어서도 왕이어야 했다. 결국 왕은 살아서 부처요(王卽佛)이요, 죽어서도 부처였던 것이다.

[과거불, 현재불 그리고 미래불 ]

우연의 일치일까? 미륵불을 뜻하는 ‘미르’와 야훼 태양신(미트라(Mithra)=메시아)는 어원이 ‘미르‘로 같다. 기독교의 3위일체 신인 야훼와 예수, 그리고 성령처럼 불교에서도 과거불인 약사불과 현재불인석가불, 그리고 미래불인 아미타불이 있다. 역사적으로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 혼자이지만 교리적으로 "진리를 깨닫은자", "진리의 발견자"로서 부처님은 얼마든지 있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부처님은 오래된 성(城)을 발견한 사람에게 비유하기도 한다. 즉 자신 속의 불성을 일구어 내어 깨달음을 얻으면 바로 부처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종교가 이데올로기로 바뀌면...]

역사적으로 종교가 권력화되면서 민중의 억압자로 군림한다. 그 증거가 입불이나 좌불, 와불로 나타난다. 불상의 얼글도 자애로운 모습에서 권위에 찬 모습으로 바뀌어 간다. 지배자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종교가 필요했고 종교는 당근을 받아먹으면서 공생한다. 불교만 그런게 아니다. 대부분의 종교는 권력화되면서 그 종교가 지향하는 이념이나 교의와는 다르게 변질된다. 거대한 불상을 만들고 도금을 하고 그래서 그런 붙상이 더 영험이 있다고 호도하고 있는 것이다. 3법인 4성재 팔정도를 통해 해탈을 지향하는 불교가 부처님을 신으로 만들어 구복, 기복신앙으로 바뀌어 간다. 불의한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독재자와 민중을 호도하는 사이비 불교 지도자 때문에 애꿎은 부처님만 수모를 당하고 있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