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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by 참교육 2011.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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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저는 제가 운영하는 블로그의 독자로부터 필자를 아끼는 따뜻한 마음이 담긴 소중한 이-메일 한 통을 받았습니다. 왜 대책없이 기독교를 비난하느냐고요.... 제가 000님의 진정성이 담긴 이-메일을 받고 어떤 형식으로라도 해명이랄까 변명(?)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제 글에 대한 필자로서의 책임 때문입니다.

제가 저의 홈페이지나 블로그를 통해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 글을 적지 않게 썼던 게 사실입니다. 그것이 질문하신 분의 표현처럼 ‘적지 않은 영향력'으로 비쳐졌건 아니면 ’악의적인 비난‘으로 비쳐졌건 간에 글에 대한 책임을 져야한다는 의무감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나는 왜 기독교를 비판하는가?>

솔직히 말씀드리면 저는 기독교만 비판한 것은 아닙니다. 저는 이데올로기가 된 종교. 하느님의 뜻(신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기를 거부하고 부정한 권력(그 권력이 식민지 종주국이든, 주권을 도둑질한 쿠데타의 주역이든, 주인을 살해한 살인정권이든간에...)의 시녀가 된 종교를 싫어합니다. 무소유사상의 종교가 교의를 거부하고 현실과 손잡고 신자들의 눈을 감긴 종교는 모두가 싫습니다. 특히 예수를 팔아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이비 교회지도자를 싫어하고 미워합니다.




                                                             <사진 :웃는 돼지의 쉼터에서>


제가 권력이 된 기독교(개신교와 천주교를 포함한...)를 싫어하게 된 이유는 ‘대통령을 위한 조찬기도회’를 하는 목회자를 보고난 후부터입니다. 국민의 주권을 빼앗은 독재자를 위해 또 광주시민을 죽인 살인자를 위해 ‘권력을 위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다’며 축복을 하는 목회자를 보고 저 사람들은 예수를 판 가롯 유다의 후신이거나 양의 탈을 쓴 늑대라고 확신했습니다.

권력의 편에서 약자의 목을 조르는 양의 탈을 쓴 교회 지도자들. 하느님 대신 돈을 우상으로 섬기는 기독교 지도자들. 부자들의 편에서 가난한 자의 숨통을 조이는 권력가가 된 목사와 신부들. 좀 더 넓게는 공유사상의 예수를 사유사상으로 정당화시켜 천민자본주의와 손잡은 변절한 목회자들, 종교 지도자들... 그들이 예수님을 팔아 스스로 존경을 받는 기독교나 불교가 싫었기 때문에 침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서양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십자군전쟁에서부터, 가까이는 중동전쟁에서 기독교 국가의 잔인성에 몸서리를 쳤습니다. 이스라엘의 편에서 아랍을 악의 화신으로 규정하고 무기를 팔아먹는 기독교 국가인 미국. 그 미국에 편에 서서 사랑을 말하고 정의 운운하는 이명박류의 기독교인들... 우리 역사에도 황사영의 백서사건에서부터 식민지시대 민족을 배신한 부끄러운 기독교 역사며 불의한 권력의 시녀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건국초기의 변절한 기독교 지도자들....

타락한 종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정부가 무소유를 교의로 삼는 종교단체에 왜 그렇게 많은 특혜를 베풀고 면세까지 해 주겠습니까? 타락한 자본주의와 손잡고 체제이데올로기의 수호자 역할을 하는 종교는 기독교든 불교든 그것은 교의와 무관한 억압자에 다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권력이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종교를 파트너로 삼고 시혜를 베풀 만큼 여유롭지 못하다는 것은 역사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조선시대 말 천주교의 박해는 무엇을 말해줍니까? 현대에도 해방신학이 왜 권력의 미움을 받고 있는지... 민중 신학이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압니다. 악행을 일삼는 종교지도자는 내세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는 사람들입니다. 만약 그들이 진짜 지옥이 있다고 믿는다면 권력의 편에서 억압자가 되어 약자의 숨통을 조이겠습니까? 진짜 하느님이 살아 있고 예수님이 재림한다고 믿는다면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전혀 반대의 삶을 살기를 자원할 리 있겠습니까?

‘이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더러 천국을 말하고 지옥을 논할 자격을 주었단 말인가? 권력의 시녀가 되어 약자의 숨통을 조이면서 어떻게 사랑을 말하고 정의를 외칠 수 있단 말인가?’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평신도의 귀에도 하느님의 진노하신 목소리를 듣는데 권력의 맛을 알고 있는 사이비 목자에게는 하느님의 진노가 들리지 않을 리 있겠습니까?

<내가 침묵할 수 없는 이유>

진부한 얘기지만 한 가지 예를 들고 제 변명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술 취한 운전자가 좌충우돌 계속 사람들을 치어 죽이고 있다면... 다친 사람을 구해주는 일과 술 취한 운전자를 운전석에서 끌어내리는 일 중 어떤 일이 선차적일까요? 따뜻한 성당에 앉아 하느님께 기도하는 일과 눈보라치는 거리에서 약자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시위에 나서는 일 중 어떤 일이 먼저일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기도하기 전 하느님은 자녀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무엇이 필요한 지 다 알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세상의 모순을 온몸으로 투쟁하지 않고 방안에서 기도만 하라고 가르치는 목자는 신자들을 바른 길로 이끄는 목회자일까요? 자본이나 권력이 약자의 목을 조를 때 자본주의가 저질러 놓은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한 자선행사를 하는 일과 체제 모순을 개선하기 위해 투쟁에 나서는 일 중 어떤 일이 선차적일까요?

고백컨데 저는 기독교에 대해서 또 자본주의에 대해서 학문적으로 논리적인 체계를 갖춰 주장할 만큼 배우지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손잡고 가난한자와 소외받은 자들의 숨통을 조이는 모습을 보고 침묵하는 게 옳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더 이상 침묵한느 것은 하느님께 죄를 짓는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체제모순으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나는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확신을 하게 됐습니다. 왜냐하면 ‘너희가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치리라’ 예수님의 질책이 저를 침묵할 수 없게 만든 사연입니다.

* 어쩌다 지워져서 다시 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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