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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댁의 자녀는 어떤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by 참교육 2011. 3.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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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를 키워 본 사람치고 ‘우리 아이가 천재가 아닐까?’하고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있을까? 학생이 문제를 일으켜 학교에 호출을 당한 학부모들이 담임과 마주 앉아 하는 말. “우리 아이가 착한데 친구를 잘못만나서...’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하늘이 두쪽이 나도 우리 아이만은...!’ 이게 부모의 마음이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세상이 변해도 너무 변한다. 공기도 물도.. 사람도... 인심도...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문화도.... 이렇게 급변하는 사회에서 학부모인 나는 얼마나 변하고 있을까? 내 아이가 변하는 변화 속도에 내가 따라가지 못하는 문화지체현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세상의 모든 부모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의 자녀는 장차 커서 어떤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십니까?”

세상에는 참 별별 사람도 다 산다.

                          <이미지 출처 : '교육희망'에서>

인정도 의리도 없고 양보와 타협도 없는 머리만 비상하게 잘 돌아가는 사람.
인내심이 부족해 쉬 좌절하거나 포기하는 사람.... 원칙도 없이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
부정과 비리는 보면 분노하기는커녕 않고 손익을 계산해 적당히 자신의 설 곳을 찾는 사람.... 

노동의 가치를 모르고 돈이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황금만능주의자... 민족의식이나 전통문화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조차 없이 제 잘난 맛에 사는 사람. 부모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커녕 자식으로서 권리만 주장하는 사람....


세상 어느 부모치고 자기 자식이 이런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부모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 모든 부모의 기대와는 상관없이 이렇게 인간미도 없이 돈의 노예가 된 사람도 있고 극단적인 감각주의로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100점만 받으면 모든 것을 용서하며 자녀를 양육하던 부모들... ‘인성같은 거야 문제될 게 뭐 있어? 커서 철들면 그런 거야 문제없어...’ 라며 공부만 잘하기를 바랐던 부모... 그 아이가 자라서 부모도 이웃도 안중에 없이 오직 자신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리라고 누가 상상이라도 했을까? 그러나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랐던 부모의 의지와는 달리 우리 주변에는 이런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사랑하는 부모가 내 자식은 이런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역경을 만나면 불굴의 투지로 해결하려는 투지와 용기를 가진 사람.... 불의를 보면 손해를 무릅쓰고 자신의 일처럼 나서서 해결하려는 사람... 작은 행복에 감사하고 만사에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는 사람... 우의와 의리를 존중하고 스스로 결정한 일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 남의 생각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주관을 떠나 객관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 사람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역지사지로 사리를 판단하는 사람... ‘좋은 게 좋다’가 아니라 시시비비를 가려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

‘공부만 잘해 출세하고 돈만 많이 벌면...’ 오직 성공(?)만을 바라고 자신의 모든 것을 투자(?)한 부모들... 자기 자식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못하고 내가 어렸을 때 못다 이룬 꿈을 대신 해결해 줄 자신의 분신으로 생각하며 살아 온 부모들. 자식이 갖고 싶어 하는 것. 하고 싶어 하는 일이 있으면 어떤 희생을 감수해서라도 반드시 해주어야 부모 노릇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부모. 성적만 잘 받을 수 있다면 돈을 어떻게 마련해서라도 자녀의 의사와 무관하게 등 떠밀어 대여섯 군데 학원을 보내기를 불사하며 자녀를 양육해 온 부모들.....


자식사랑으로 말하면 동물의 세계도 사람에 못지않은 지극한 모성애는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다. 자녀가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 걸 원하는 대로 다 해주는 것이 부모로서 할 일을 다 했다고 생각하는 부모의 양육관은 옳은 것일까? 옛날에는 어땠을까? ‘오냐, 오냐 내 새끼...!’가 아니라 차가울 정도로 매섭고 단호했다. ‘귀한 자식 매로 다스려라’라든지 ‘손자 귀여워하면 할아버지 상투를 든다’는 말에서 옛 어른들의 자녀 교육방식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겉으로 ‘오냐 오냐..’하고 키우는 것과 아무리 사랑스러워도 ‘속’을 보여주지 않는 교육은 다르다. 더구나 학교나 학원과 같은 전문교육기관이 없었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전통과 원칙에서 벗어나지 않고 양육하는 것이 부모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믿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부모의 자식사랑은 다르지 않다면 오늘날 젊은 부모들이 귀기울여야할 교육방식이 아닐까?


학교교육은 완벽한가? 학교나 학원에서 협동이란 ‘서로 마음과 힘을 하나로 합함’ 이라고 배우고 인내란 ‘괴로움이나 어려움을 참고 견딤’이라고 배워 얼마나 학습됐는지 시험을 쳐 만점을 받았다고 치자. 만점을 받은 그 아이는 과연 협동이나 인내심이 체화된 인격자가 됐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협동이나 인내를 포함한 양보니 타협과 같은 사회성은 의미를 깨달았다고 체화되지 않는다. 인지와 체화는 다르다. 안다는 것과 나의 것, 내 인격의 일부가 돼, 실천으로 연결되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사회성은 어떻게 인격으로 체화될 수 있는가?

모든 학습이 그렇듯이 경험이란 인지의 기본이다. 교실에서 지식의 전달은 직접경험이 아닌 간접경험을 통한 인지과정이다. 지식이나 기술은 간접경험을 통해 인지, 습득 가능하다. 그러나 한 개인의 인격은 머리로 인지됐다고 해서 그 사람의 인격으로 체화될 수 없다. 머리만 있고 가슴이 없는 현대 지성은 이렇게 간접경험을 통한 이상형 인간으로 정형화된 것이다. 인간으로서 기본적으로 해야 할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 그 일을 구분이 안 되기 때문에 수많은 정치인과 학자들이 성공의 문턱에서 불명예 퇴직하는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자주 볼 수 있다.

어린이에게 놀이는 학습이다. 놀이를 통해 사회성을 배우고 그 때 형성된 사회성은 평생 살아가는데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체험이요, 인격형성의 과정이다. 사회성이 없는 인간. 머리는 있고 가슴이 없는 사람!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사회구성원이 아니라 개인적인 존재로서 사회구성원이 된 사회는 우리의 현실에서 그 적나라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누구의 책임일까? 당연히 일차적인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 물론 사회성을 학습할 기회를 빼앗은 교육학자. 또 교육과정 편수관 또한 그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점수 몇 점이 인생의 전부라고 어린 자식을 하루 대여섯 개 학원으로 등 떠밀어 내 보낸 부모들은 과연 자식을 제대로 키운 것일까? 교육은 학교만 하는 게 아니다.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함께 하지 않는다면 교육다운 교육은 불가능하다. 부모의 왜곡된 사랑으로는 자녀들은 하루가 다르게 관념화되고 이기적인 인간으로 자란다는 걸 부인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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