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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역사

이승만이 건국 대통령이면 4·19는 민란인가?

by 참교육 2023.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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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구세력들이 이승만 건국 대통령만들기에 나섰다

인간을, 포로도 아닌 동포를, 이렇게 처참하게 학대할 수 있을까 싶었다. 6·25전쟁의 죄악사에서 으뜸가는 인간 말살 행위였다. 이승만 정권과 그 지배적 인간들, 그 체제 그 이념의 적나라한 증거였다. 얼마나 많은 아버지가, 형제와 오빠가, 아들이 죽어갔는지... 단테의 연옥과 불교의 지옥도 그럴 수 없었다. 단테나 석가나 예수가 한국의 1951년 겨울의 참상을 보았더라면 그들의 지옥을 차라리 천국이라고 수정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리영희 선생이 쓴 한국현대사 산책에 나오는 글이다. 아직도 이승만을 대한민국의 국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부산정치파동이나 국민방위군 사건을 알게 된다고 해도 그런 말을 할 수 있을까? 195011월 중공군의 개입으로 6·25 전쟁의 전세가 악화되자 이승만은 국민방위군 설치법을 제정하여 군인과 경찰, 학생을 제외한 만 17세 이상 40세 이하의 남자를 제2 국민병에 편입하고 이들을 국민방위군으로 조직하였다. 정부는 국민방위군 운영 일체를 이승만(李承晩)의 유력한 정치 기반으로 역할 하던 대한청년단과, 청년방위대에 일임하였다.

<‘국민방위군그들은 누구인가>

195111·4 후퇴 때 제2국민병으로 편성된 국민방위군 고위 장교들이 국고금과 군수물자를 부정처분하여 착복함으로써 12~2월 사이에 500,000명에 달하는 국민방위군으로 징집된다. 이들 가운데 아사자, 병사자, 동사자가 약 50,000-90,000여명에 이르렸고 동상으로 인해 손가락과 발가락 뿐만아니라 손과발까지 절단난 200,000여명이 넘는 동상자들을 나오게 한 사건이 국민방위군사건이다.

적군도 아닌 대한민국의 젊은이가 부정부패와 인명경시로 전투에 참여는커녕, 총 한 번 못 만져보지 못한 장병이 77~ 12만 명이 후방에서 굶어 죽고, 얼어 죽고 전체의 80%가량이 폐인이 되다시피 했다. 이승만 정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역사학자 유영익 교수도 국민방위군 사건은 장정 9만 명가량이 동사, 아사, 병사한 천인공노할 사건이라고 개탄했다.

<임시수도 부산에서 발췌개헌통과시키고...>

우리나라 개헌은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발췌개헌이 처음이다. 이승만이 195274일 부산의 피난국회에서 정부수립 이후 첫 번째의 헌법개정이다. 이승만은 재선이 어려워지자, 6·25전쟁 중인 19511130일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1952118일에 국회는 정부의 개헌안을 부결했고, 417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에 반대하는 의원들을 주축으로 의원 123명이 발의한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제출되었다. 74, 군경(軍警)들이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가운데 국회의원들은 기립하는 방식으로 투표하여 출석 의원 166명 중 찬성 163, 반대 0, 기권 3표로 발췌개헌안을 통과시켰다.

<2차 개헌 사사오입 개헌’>

권력에 취하면 이성을 잃는다. 권력에 취한 이승만도 1954년 본인의 영구 집권을 위해 초대 대통령에 한해 중임을 제한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개헌안을 국회에 제출, 당시 재적의원 203명 중 찬성한 의원이 135, 반대한 의원이 60, 기권이 7명으로 개헌 정족수에 1표가 부족해 부결이 선포했다. 헌법 개정에는 국회 재적의원 203명의 3분의 2135.333……명 이상의 찬성표가 필요하였고, 이 개헌안에 대해 찬성 135표가 나와 부결이 선포되었다. 그러나 이틀 후 여당인 자유당과 정부에서는 사사오입의 논리를 주장하며 개헌안이 가결되었음을 선포했다. 위헌이자 무효가 되어야 하는 개헌이었다.

<보도연맹 학살사건>

이승만은 19506.25 전쟁 중에 어린이와 여성, 노인을 가리지 않고 당시 남한 인구의 5%에 해당하는 113만 여명을 아무 법적 절차도 없이 경찰서로 연행하여 모진 협박과 고문을 가한 것도 모자라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 폐광산, 공동묘지, 교통호, 해변가 등에 철사 줄, 통신용 삐삐선 등으로 묶어 끌어다 총살시킨 사건이 보도연맹사건이다. 국민보도연맹에 가입하였다는 이유로 약 500여명, 인민군 점령기에 협조내지 동조하였다는 이유로 1,500여명이 넘는 선량한 양민을 경찰에 지시하여 집단학살했다.

<윌슨 미 대통령에게 위임통치 청원하다>

우리는 자유를 사랑하는 2천만의 일흠(이름)으로 각하께 청원하노니 각하도 평화회에서 우리의 자유를 주창하야 평화회에 모인 열강으로 하여곰(하여금) 먼저 한국을 일본의 학정 하에서 장래 완전 독립을 보증하시면 아직은 한국을 국제연맹 통치하에 두게 하시옵소서... 각하께서 잘 주선하야 한국 인민으로 하여곰 천부의 자유를 찻게(찾게) 하시며 한국 인민으로 하여곰 자기가 원하는 정부(독립정부)를 자기들이 건설하고 그 정부 하에서 살게 하시기를 바라나이다.” 191933일 이승만-정한경이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제출한 청원서이다. 신채호 선생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라고 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자>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 된 공위(共委)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남방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통일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 있어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주기 바란다미군정기인 194663일 이승만이 삼남 지방을 순회하던 도중에 전라북도 정읍군(현 정읍시)에서 한 발언이다. 이승만은 나라가 두 동강이 나더라도 대통령이 될 수만 있다면.... 나라가 분단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분단체제의 희생자... 조작된 간첩들>

19481019일에 발생한 여순사건을 계기로 나타난 괴물이 국가보안법이다. 조작 간첩 사건의 최초 피해자들은 이승만 정권의 정적들이었다. 국회프락치 사건(1949)과 성시백 사건(1950), 그리고 국제공산당 사건(1952)...을 통해 이승만은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논리로 정적을 제거한다. 이승만의 만행은 ‘4·3 제주항쟁(1947.~ 1954), 여순 사건(1948), 국회 프락치 사건(1949), 문경 양민 학살 사건(1949), 보도연맹 학살 사건(1950), 거창 양민 학살 사건(1951), 산청·함양 양민 학살 사건(1951), 부산정치파동(1952)’...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제주 4·3항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031015일 대한민국 정부가 확정 발표한 제주4·3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제주 인구의 9분의 1에 달하는 3만 여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승만 정부가 주도한 강경진압작전으로 제주도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다. 미국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이승만 정권은 미군정의 작전명 빨갱이 사냥(Red Hunt’)을 그대로 계승하여 19481117일 제주도에 한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규모 군사력과 우익단체 회원들을 파견하여 초토화 작전, 제노사이드의 군사작전을 전개한다.

194731일에서 1954921일에 이르기까지 공식 사망자만 14,032, 시민사회의 조사로는 적게는 3만에서 많게는 8만으로 추정되는 제주도민이 희생되었다. 제주 4·3항쟁은 끝난 것이 아니다.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자행된 3·15 부정선거와 이로 인한 4·19 혁명의 유혈진압(186명 희생), 보도연맹 학살(희생자 4934) 등 각종 민간인 학살 등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런 이승만을 박민식 국가보훈부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의 한평생은 누구도 쉽게 걸을 수 없고 아무도 감히 폄훼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 그리고 참된 지도자의 시간.”이라고 추앙했다.

<이승만의 양민학살>

살인마라고 하면 사람들은 유태인 수백만명을 학살한 독일의 아돌프 아이히만을 생각하겠지만 나는 아이히만에 버금가는 이승만을 연상한다. 동국대학 강정구 교수는 한국전쟁의 첫 단계인 작은전쟁시기인 19482.7구국투쟁에서 6.25전쟁까지의 양민학살이 있었다. 이 전쟁기간은 주로 제주 4·3항쟁이나 여순항쟁과 같은 인민항쟁, 유격대투쟁, 38선상의 남북충돌로 특징화할 수 있는데 이 기간에 10만 명에 가까운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이 기간의 양민학살은 주로 인민항쟁에서 발생하였고 또 유격대 소탕전의 과정에서 청천벽력작전을 구사하였으므로 주로 산간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이 학살을 당하였다.”고 했다.

<이승만이 건국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이유>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정권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은 1백만 명 수준에 이른다. 전남북 지역의 약 20만 명, 보도연맹 학살의 30만 명 등을 포함하여 함평, 문경, 대구, 부산, 함양, 산청, 거창, 충무, 거제 등 민간인 학살은 전국적, 조직적, 체계적인 현상이었다. 4·19 이후 남한 전역에 걸쳐 구성된 유족회, 국회진상조사단의 조사 등으로 이들 민간인 학살·만행에 대한 역사적 진실이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했으나 5·16쿠데타 이후 이들 유족회는 대부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어 침묵을 강요당해왔고 역사적 진실 또한 은폐되어왔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은 이렇게 시작한다. 4·19혁명이 왜 일어났는가? 이승만은 4·19혁명으로 하와이로 망명해 생을 마감했지만 죽어 환국 후 이승만은 1960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명령을 내려 186명 사망자와 6026명 부상를 내고 하와이로 망명해 죽은 후 대한민국 국립묘지에 안장, 죽어서 도 호사를 누리고 있다.

이승만은 왜 반공이 필요했는지는 그의 행적을 보면 안다. 이승만의 민간인 학살 중심에는 희대의 악법 국가보안법이 있다, 이승만은 1948815일 단독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해 121일 헌법 위에 군림하는 무소불위의 국가보안법을 제정한다. 조봉암 김구, 신익희 송진우, 박헌영, 여운형 장준하...는 왜 의문의 죽음을 당해야 했을까?

정의법치를 강조하는 윤석열 정부는 이제 터놓고 독재정권, 학살자 미화에 팔을 걷고 나섰다. 대통령 윤석열, 법무 한동훈, 보훈 박민식... 이들은 백선엽이 친일을 하지 않았다고 하고 홍 장군 흉상 철거, 백 장군 친일 행적 삭제, 이승만 기념관 건립과 국립대전현충원 홈페이지에서 백선엽 장군에 대해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명시한 문구를 삭제했다. 이승만이 국부요 건국 대통령이면 4·19혁명은 민란이라고 헌법을 개정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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