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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교육자료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은 아이들에게

by 참교육 2010.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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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옮겨놓을 '훈화자료'는 필자가 고등학교 재직시절 학생들에게 세상을 보는 안목을 길러주기 위해 수업 시작 전, 혹은 수업 중에 들려 주던 얘깁니다. 인성교육이 실종된 교육,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도록 가르치지 않는 교육을 교사로서 아이들에게 세상을 보는 안목을 길러주자는 고육책으로 학생들의 눈치(인문계에서는 교과서 밖의 얘기를 하면 어김없이 '선생님 공부합시다'라는 항의를 받게 된다)를 봐가며 해줬던 얘깁니다. 
여기 옮기는 글들은 제가 교단에서 시간날때마다 들려줬던 얘기라서 진부한 면도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변화의 사각지대인 학교에는 2~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게 별로 없습니다. 제 홈페이지(http://chamstory.net/)를 닫으면서 여기에 옮겨 놓습니다

학생들에게 "왜 학교에 다니니?"하고 물어 보면, 대부분의 학생들은 "훌륭한 사람이 되려고요!"라고 대답한다.
훌륭한 삶을 이해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다음 질문에서 본색이 들어 난다.

"어떤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냐?"
"공부를 열심히 해서 의사가 되는 거예요." "판사가 되겠어요."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될 겁니다." ……

'물론 그래야지. 좋은 직장을 갖고 경제적인 능력이 있는 생활인이 되는 것, 그것이 선결 조건이다. 그러나 그것이 훌륭한 사람의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다. 훌륭한 사람의 삶은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욕구나 충족시키면서 사는 평범한 삶이 아니라 보다 고차적인 질 높은 삶을 사는 것이다.

정말 훌륭하게 사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인지 알아 볼 필요가 있다. 훌륭한 삶은 이기적(利己的)인 삶이 아니다. 자신이 가진 것 중 가장 소중한 것을 그것이 필요한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 이러한 삶을 실천하는 것이 훌륭한 삶임을 사회적 가치로 자리 매김 해야 우리의 사회가 보다 질 높은 사회가 될 수 있다.

시간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시간을! 지식이 필요한 사람에겐 지식을! 돈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자신이 가진 돈을 나누어주면서 사는 것이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삶이다. 버스에 먼저 앉은 좌석권 하나도 몸이 불편한 사람이나 노인에게 양보해 주지 못하고 사는 삶일 때야 그것이 어떻게 훌륭한 삶이라 할 수 있겠는가?

물질 문명의 시대, 감각주의 시대를 살면서 훌륭한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인격을 갈고 닦아야 하는 것이 가장 선결 문제다. 욕망의 존재로서의 인간이 이기적인 인간의 심성을 바꾸지 않고서는 이타적(利他的)인 삶이 가능할 수가 없다.

순수한 마음, 책임감, 용기 있는 행동, 정직한 품성, 인간에 대한 애정, 자신에 대한 객관적이고 냉철한 자기 비판과 수련, 자연과 사회를 변증법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합리적인 사고, 판단력, …….

보다 소중한 것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 아닐지? 사람이 사회 속에 살아가기 위해서는 갖춰야 할 것이 너무도 많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용기 있는 사람-

구약성서 사무엘 서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성에 두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부자였고 한 사람은 가난하였습니다. 부자에게는 양도 소도 많았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품삯으로 얻어 기르는 암컷 새끼 양 한 마리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이 새끼 양을 제 자식들과 함께 키우며 한 밥그릇에서 같이 먹이고 잘 때는 친딸이나 다를 바 없이 품에 안고 잤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부잣집에 손님이 한사람 찾아 왔습니다. 주인은 손님을 대접하는데 자기의 소나 양이 아까워서 그 가난한 집의 새끼 양을 빼앗아 대접을 했습니다.
나단이라는 선지자가 다윗 왕에게 와서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듣고 있던 다윗 왕은 대단히 노했습니다.

"저런 죽일 놈! 세상에 그럴 수가 있느냐! 그런 인정머리 없는 짓을 한 놈을 그냥 둘 수가 없다. 그 양 한 마리를 네 배로 갚게 하리라."
듣고 있던 나단 선지자가 말하기를 "임금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권력의 상징이요 생사의 여탈 권을 잡고 있던 다윗 왕에게 "당신이 바로 그 사람" 이라고 말 할 수 있었던 사람이 나단 선지자이다.

권력 앞에서 진실을 말 할 수 있다는 것! 우리는 그것을 용기 있는 행동이라고 한다.
용기 있는 나단 앞에 다윗 왕은 "내가 하느님 앞에 죄를 지었소 !" 하고 회계한다.

다윗 왕이 저지른 죄란 무엇일까?
다윗은 어느 날 밧쎄바라는 여인이 목욕하는 장면을 훔쳐보고 그녀에게 정욕을 품고 그의 권력을 이용하여 그녀를 취한다. 그녀가 임신을 하자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하여 변방에 근무하고 있던 그녀의 남편 우리야를 불러서 동침하게 한다. 우리야는 충직한 신하였기 때문에 근무 중에 아내의 방에 들어가지 않는다는 법률을 지켰다.

다윗은 자신의 불륜을 숨길 수 없게 되자 우리야를 전방에 보내 죽을 수밖에 없는 전투에 참가하여 죽게 한 후 밧쎄바와 혼인한다. 우리야의 아내였던 밧쎄바와 다윗왕의 사이에 태어난 아이는 하나님의 노여움으로 죽지만 그 후 다시 태어난 아들이 솔로몬 왕이 된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 왕에게 나타난 것은 다윗의 불륜행위를 감추기 위해 정부의 남편을 전쟁에 보내 죽게 한 바로 그 시기이다. 가난한 사람의 양을 뺏은 '죽일 놈'이 바로 다윗 왕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나단과 같이 권력 앞에서 진실을 말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신분상 모든 불이익이나 생명까지도 내어놓을 각오가 되어 있을 때 가능하다.
물론 이 경우 다윗 왕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이나 진실을 받아들이는 다윗 왕이 인간다운 자질을 가졌다고 전제했을 때 가능한 이야기이다.

-정의로운 사람-

3·15 의거는 이승만 독재 정권의 부정선거에 항거하여 일어났으며 4·19 혁명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3·15의거 때에는 총알이 날아오는 거리를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진실을 외치던 젊은이가 있었기 때문에 4. 19혁명이 가능했던 것이다. 애기봉에 묻혀 있는 3·15 의거 사망자 16명을 포함한 사상자 49명은 중고등학생을 비롯한 구두닦이소년등 대부분 피끓는 청소년과 불우한 청년 노동자들이었다.

총칼 앞에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에 항거한 사람, 그런 사람을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삼벌초의 항전에서부터 동학농민전쟁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일제 식민지 시대에 상해와 만주에서, 그리고 3·15와 4·19 혁명에서 자신의 생명을 던져 조국을 지킨 의로운 분들을 기억하고 있다. 그 분들은 자신의 부귀영화를 위해 목숨을 던져 이름 없는 이국 땅에서 혹은 고문으로 혹은 감옥에서 굶주림과 고통으로 죽어간 것은 아니다.

훌륭한 사람은 자신의 이익을 찾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친구를 위해, 이웃을 위해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거나, 조국을 위해 때로는 처자식을 돌보지 못하거나 부모님의 병간호나 임종까지도 지켜보지 못하는 불효자가 되면서 까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외로운 투쟁의 길을 걷을 걸어 온 사람들이다. 온갖 고문과 투옥 그리고 죽음까지도 불사하고 투쟁한 사람을 우리는 정의로운 사람이라 부른다.

전봉준, 조헌, 김천일, 유관순, 신채호, 그리고 이름 없이 숨져간 수많은 의사 열사, 어려운 이웃을 위해 자신의 재능이나 가진 것을 아낌없이 나누며 사는 사람……
훌륭한 사람이 되는 길은 자신의 안일이나 부귀 영화나 명예를 위해 살아가는 그런 사람은 아닌 것이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 살아가는 사람은 자신의 행위에 대한 보상을 바라고 하는 일은 아니다. 근시안적인 행복관을 가진 사람은 자신이나 혹은 자기 가족의 안일이나 부귀 영화를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아 살아가지만 조국의 해방과 민주화를 위해 자신의 행복이나 명예를 초개(草芥) 같이 버릴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고통을 회피하려는 본능적인 욕구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상의 실현을 위해 자신을 불태우는 열정이 보다 큰 자아를 완성시킨다는 것은 그들의 삶을 통하여 배울 수 있는 것이다.(1996.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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