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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주둥이의 자유를 달라’는 김지하! 그 입 다물라

by 참교육 2009. 5.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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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소설가 황석영 씨가 "이 대통령이 중도적 생각을 뚜렷하게 갖고 있는 것"으로 판단해 돕기로 했다고 말해 파란이 일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을 '중도'라고 규정한 황석영씨의 발언을 비판한 이는 김지하 씨뿐만 아니다.

서강대 손호철교수도 프레시안에서 ‘MB를 둘러싼 엇갈린 행보’라는 글에서 ‘황석영씨가 개인적 인연이든, 노벨문학상에 대한 욕심에서 이대통령을 돕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 대통령의 현 노선이 중도노선이라는 식으로 현실을 호도해서는 안 되며 그것은 작가로서의 생명이 끝나는 길’이라고 질타한 바 있다.

                                                    <사진 : 경향신문에서>

학자로서 양심과 지조를 지키면서 살아 온 손교수야 황석영을 비판하는 데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그러나 김지하는 누군가? 1970년대 민주화운동의 상징이었던 김지하는 1991년 5월 명지대 강경대군 치사사건으로 촉발된 분신 정국을 맞아 조선일보(5월5일자)에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라는 제목의 칼럼을 기고해 그를 사랑하던 사람들에게 배신의 쓴 잔을 안겨 준 장본인이 아닌가?

당시 노태우 정부는 운동권 배후에 분신을 조장하는 세력이 있다며 ‘강기훈 유서 대필사건’을 수사하는 코미디 정국을 연출하고 있을 때 “젊은 벗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며 민주세력의 가슴에 비수를 꽂았던 사람이다.

김지하가 노태우로부터 어떤 특혜나 밀약이 있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하는 건 ‘오적’, ‘타는 목마름으로’ 등을 통해 박정희의 서슬 퍼런 군사정권에 비수를 들이대 민초들의 신앙(?)의 대상이 됐던 인물이 김지하다. 그런 인물이 학살정권의 손을 들어줌으로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못을 박았으며 처절한 배신감을 느끼게 했는가를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1991년 5월, 그 뜨거웠던 시절! 강경대열사의 죽음으로 촉발된 반정부 시위는 급기야 한진중공업 박창수 열사가 의문사로 이어지고 이에 항거한 박승희·김영균·천세용·박창수·김기설·윤용하·김철수·이정순·정상순 김귀정에 이르기까지... 꽃같이 숨져간 열사들의 죽음..., 정원식장관의 ‘달걀 세례 작전’과 박홍총장의 ‘배후론’으로 숨막히는 정국을 노태우의 손을 들어 준 절묘(?)한 배신자가 바로 그 김지하 아닌가?

배신자는 죄인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배신자가 부끄러워하는 풍토가 아니다. 역사에서 배신자는 패배자가 아닌 승자로 오늘날에 와서는 출세와 존경의 대상으로 추앙까지 받고 있다. 배신의 역사. 그 변절의 뿌리는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육신의 지조를 외면하고 태종 이방원의 편에서 권력과 야합한 자들은 여기서 논외로 치자. 5천년의 역사를 팔아먹은 을사5적을 비롯해 일제 때 왜놈의 앞잡이가 된 배신자.

국민의 주권을 도둑질한 박정희 편에 선 무리와 광주시민을 학살한 전두한 노태우의 앞잡이들.... 정의니 신의란 일고의 가치조차 없다며 팽개치는 무리가 있는가 하면 불의한 권력과 손잡고 부귀영화를 선택한 정치인, 경제인 언론인 종교인까지 배신의 뿌리는 질기고도 깊다.

배신자가 존경받고 사회지도자로 군림하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시비를 가리는 사람’을 빨갱이로 몰고 자신은 물론 자식 대에 까지 낙인을 찍는 사회는 희망이 없다. 밀수를 했건 도둑질을 했건, 변절을 했건, 배신을 했건, 유명인사만 되면 능력 있는 사람으로 추앙 받는다. 이완용의 자식들이 아버지 재산을 되찾겠다며 소송을 하는 사회니 ‘변절이니 신의가 대수냐?’면 할 말이 없다.

그러나 피해자가 불구자가 되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데,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가 가슴에 한을 품고 살고 있는데 변절자는 너무나 떳떳하고 당당하다. 이재오 김문수 박노해 양성우 그리고 김지하.... 그들은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가?

배신자가 존경받고 사는 사회는 미래가 없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과 권력을 잡고 천방지축으로 내닫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사회에서 민중이 설 곳은 어딘가? 황석영의 아첨을 말하자는 게 아니다. 그는 처음부터 이명박과 코드가 맞는 사람이었고 그는 이명박에 아첨해 오던 한 통속이다.

그러나 ‘타는 목마름으로, 오적,.. 등으로 민주주의를 갈망하던 시민들에게 희망을 주던 사람이 변절해 쥐구멍이라도 찾아야 할텐데 “정치가, 대학교수, 공공기관 등의 책임 있는 사람들에게는 자기 경륜을 지키기를 요구해도 작가·예술가들에게는 주둥이(말·표현)의 자유를 줘야 한다”니 변절한 문인에게 면죄부라도 주자는 말인가? 젊은이들 보기가 부끄럽지도 않은가?

- 아래 글은 1991년 5월 조선일보에 실렸던 김지하의 칼럼입니다.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
                                       -김지하-
은 벗들!
나는 너스레를 좋아하지 않는다. 잘라 말하겠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 당신들은 잘못 들어서고 있다. 그것도 크게!
이제나저제나 하고 기다렸다. 젊은 당신들의 슬기로운 결단이 있기를 학수고대하고 있었다. 숱한 사람들의 간곡한 호소가 있었고, 여기저기서 자제요청이 빗발쳐 당연히 그쯤에서 조촐한 자세로 돌아올 줄로 믿었다. 그런데 지금 당신들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정권보다 큰 생명
생명이 신성하다는 금과옥조를 새삼 되풀이 하고 싶지는 않다. 하나 분명한 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생명은 출발점이요 도착점이라는 것이다. 정치도 경제도 문화도,심지어 종교까지도 생명의 보위와 양생을 위해서 있는 것이고 그로부터 출발하는 것이지 그 반대는 아니다.

근본을 말살하자는 것인가? 신외무물이 무슨 뜻인가? 당신들 자신의 생명은 그렇게도 가벼운가? 한 개인의 생명은 정권보다도 더 크다. 이것이 모든 참된 운동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당신들은 민중을 위해서! 라고 말한다. 그것이 당신들의 방향이다. 당신들은 민중에게 배우자! 라고 외친다.

그것이 당신들의 공부이다. 민중의 무엇을 위해서인가? 민중이 생명의 보위, 그 해방을 위해서일 것이다. 당신들이 믿고 있는 그 해방의 전망은 확고한가? 목적에 대한 신념은 과학적으로 확실한가? 만약 그것이 기존의 사회주의라면 그 전망은 이미 끝이 났다. 만약 그것도 아니라면 민족이 패망하는 극한 상황도 아닌터에 생명포기를 요구할 정도의 목적의 인프레션 따위는 있을수도 없으며 다만 뼈를 깎는 기다림과 겸허한 모색이 있을 뿐이다.

모색하는 자가 매일 매일 북치고 장구칠 수 있는가? 도대체 그 긴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 왜 덤비는가?
모색과정에도 위기에 대한 긴급한 행동은 있을 수 있다. 하나 그때의 행동은 달라야 한다. 어떻게 달라야 하는지 당신들은 분명히 알고 있다. 그런데 지금 당신들은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당신들은 민중에게서 무엇을 배우자고 외쳤는가? 어떠한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과 삶의 존중,삶의 지혜를 놔두고 도대체 무엇을 배운다고 하는가?
어느 민중이 당신들처럼 그리도 경박스럽게 목숨을 버리던가? 당신들은 흔히 지도 라는 말을 쓴다. 또 선동 이란 말도 즐겨쓴다.

스스로도 확신 못하는 환상적 전망을 가지고 감히 누구를 지도하고 누구를 선동하려 하는가? 더욱이 죽음을 찬양하고 요구하는가? 제정신인가,아닌가? 과학 이란 말을 자주 쓴다. 그것이 과학인가? 그보다도 더 자주 정치 라는 말을 쓴다.
그것이 정치인가? 분명히 못박아 말하지만 정치란 도덕적 확신에 기초한 엄밀한 이성과 수학의 세계다.

자살 전염 부채질

당신들에겐 분명 그것이 없다. 없으면 없는 대로 학생운동 본연의 순결한 정의감,그리고 대안적 정열이 요구하는 바대로,그리고 혼란한 전환기에 대응하는 확률적인 모색의 태도로 전시민적인 요청에 대답하는 합당한 행동을 선택하라. 그런데 지금 당신들 무슨짓을 하고 있는가?

전환기는 필연이 아니라 우연이 지배하는 것이 특징이다. 실수하기 안성맞춤이다.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 지금 당신들은 조심성이 있고 없고의 차원을 훨씬 넘어섰다. 당연한 얘기지만 고전적인 마르크스레닌주의나 주사파의 스테레오타입마저 이미 이탈했다.

철부지라는 말도 정확하지 않다. 당신들은 지금 극히 위태롭다. 생명은 자기 목숨이라 하더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무서운 것인데 하물며 남의 죽음을 제멋대로 부풀려 좌지우지 정치적 목표아래 이용할수 있단 말인가? 그럴수 있다고 대답하는 모양인데,그렇다. 바로 그 대답에 당신들의 병의 뿌리가 있고 문제의 초점이 있다.

지금 당신들 주변에는 검은 유령히 배회하고 있다. 그 유령의 이름을 분명히 말한다. 네크로필리아 시체선호증이다. 싹쓸이 충동,자살특공대,테러리즘과 파시즘의 시작이다.

이미 당신들의 화염병은 방어용 몰로토프 칵테일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파괴력에서가 아니라 상황과의 관계상실과 거기에 실린 당신들의 거의 장난기에 가까운 생명말살충동에서다. 당신들의 그 숱한 죽음을 찬미하는 국적불명의 괴기한 노래들,당신들이 즐기는 군화와 군복,집회와 시위때마다 노출되는 군사적 편제선호속에 그 유령이 이미 잠복해 있었던 것이다. 당신들은 맥도날드햄버거를 즐기며 반미를 외치고 전사를 자처하면서 반파쇼를 역설했다. 당신들의 구호와 몸짓은 이미 순발적 정열을 이탈하여 의식화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이미 오래전에 일본 전학연의 몰락의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이 모순을 어찌할 셈인가? 그런데 한술 더 떠 지금 당신들 무슨 짓을 하고 있는가?

자살은 전염한다. 당신들은 지금 전염을 부채질하고 있다. 열사호칭과 대규모 장례식으로 연약한 영혼에 대해 끊임없이 죽음을 유혹하는 암시를 보내고 있다. 생명말살에 환각적 명성을 들씌워 주고 있다. 컴컴하고 기괴한 심리적 원형이 난무한다.

종교냐 유물 이냐

삶의 행진이 아니라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고 있다. 그것이 해방의 몸짓인가? 무엇을 해방할 작정인가? 귀신인가?

절정은 당신들의 그 혼을 분리하는 굿에 있다. 시체가 당신들 것인가? 왜 탈취하려 하는가? 그 시체의 주인공이 조선시대의 사대부집안의 그 가족도 없는 종인가? 왜 가족을 무시하는가? 그러나 그보다 더 치명적인 것은 당신들의 그 기괴한 이원론이다. 당신들은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인정하고 있다. 당신들의 결정적 파탄의 증거다. 묻겠다. 당신들의 신조는 종교인가? 유물주의인가? 육신을 경멸하고 영혼의 찬란한 해방을 광신하는 고대종교인가? 육신의 물질성만을 주장하는 속류 유물주의인가? 도대체 어느쪽인가?

도대체 그놈의 굿판에 사제노릇을 하고 있는 중과 신부의 정신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악령인가? 성령인가? 저는 살길을 찾으면서 죽음을 부추기고 있는 이른바 진보적 지식인들은 선비인가? 악당인가? 당신들은 지금 굿에서의 이른바 불림 을 행하는 모양인데, 불림 에는 조건이 있는 법이다.

영매는 자기목적이 없어야 하고 불림 의 대상은 귀신 이 아니라 신명 이어야 한다. 검은 귀신이 아니라 밝은 신명이라고 주장하겠지. 그러나 젊은 벗들! 귀신은 영육분리의 형상이지만 신명은 영육합일,몸과 함께만 현상한다네! 그래서 신명은 곧 생명이라네.

당신들의 귀신숭배는 더욱이 급진적 폭력을 동반함으로써 바로 네차예프사건과 인민사원의 집단학살,그리고 연합적군 모리(삼)그룹의 산장에서의 피의 인민재판을 예고하고 있다. 죽음숭배,귀신숭배의 결과는 풍수의 표현으로 당판,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 비수터,울부짖는 터,갈기갈기 찢어지는 참혹한 종말이다. 어찌할 작정인가?

운동은 이제 끝장

젊은 벗들!

지금 곧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소름끼치는 의사굿을 당장 걷어 치워라. 영육이 합일된 당신들 자신의 신명, 곧 생명을 공경하며 그 생명의 자연스러운 요구에 따라 끈질기고 슬기로운 창조적인 저항행동을 선택하라.

나는 군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잘라 말하겠다. 내 말을 듣지 않겠다면 좋다. 할대로 해보라. 당신들 운동은 이제 끝이다! 그래도 지성인이라면,최소한 내말을 접수라도 한다면 지금 이 글을 읽는 순간 자신의 신조가 무엇인지 스스로 묻고 대답해야할 것이다.

교인가? 유물주의인가? 대답이 다행히 창조적 통일로 끝났을때,그때 우리는 현정권에 대한 효력있는 저항을 참색할수 있을 것이다. 부디 자중자애 하라. 부디 절망하지 말라. 절망은 폭력과 죽음, 그리고 종말의 서곡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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