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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부처님은 정말 금을 그렇게 좋아했을까?

by 참교육 2008.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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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이가 사는 청주에 들렸다가 예까지 온 김에 속리산에나 갔다 오기로 했다. 속리산에 가면 법주사 입구에서 거부감을 느낀다. 국립공원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는 정부 방침에 공원 입구를 막고 입장료를 내야한다며 지키고 있는 사원의 태도부터가 그렇다. 신라 신흥왕 때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곳에 머물렀다는 고색창연한 내력보다 경내를 들어서면 거대한 금불상(법주사 미륵대불)에 대한 위압감에 주눅들게 한다.

<사진 : 속리산 법주사 부상의 크기가 또 금으로 칠하면 더 영험으라도 있다는 듯 사원마다 경쟁적으로 크고 화려한 부처님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국보 제5호인 법주사쌍사자석등(法住寺雙獅子石燈)을 비롯하여 국보 제64호인 법주사석연지(法住寺石蓮池), 보물 제15호인 법주사사천왕석등(法住寺四天王石燈), 보물 제216호인 법주사마애여래의상(法住寺磨崖如來倚像), 보물 제848호인 신법천문도병풍(新法天文圖屛風), 보물 제1259호인 법주사괘불탱 등은 높이가 33m나 되는 금동미륵대불의 위압감에 질린다. 100여Kg(불상의 무게 160여톤)이나 되는 금으로 도금을 했다는 불상 앞에 중생은 계급적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부자 부처님에 대한 거부감은 그것 말고도 부처님 앞으로 가고 싶은 중생들을 가로막고 무엇에 필요한 지 좀 더 많은 모금을 위한 모금요원이 버티고 앉아 있었다.

부처님은 왜 이 세상에 오셨을까?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大正藏, 3, 463, 下)과 〈태자서응본기경(太子瑞應本起經)〉(大正藏, 3, 473, 下) 두 경을 내용을 합해보면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에 오신 뜻은 바로 ‘괴로움을 해결하여 안락(安樂)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함’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부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이 고통을 벗어나 안락의 세계에 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신 것이다. 이를 불교에서는 ‘중생구제’라고 한다. 바로 부처님은 사바세계의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기 위해 오신 분이다. 이를 제도(濟度)라고도 표현한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뜻을 한마디로 말하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중생은 왜 법주사 경내를 들어서면 위화감이나 위압감부터 느기니 웬 일일까?

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이 ‘중생’은 누굴까? 사전은 중생을 ‘감각이 있는 모든 생명. 지·수·화·풍 네 가지로 합성된 몸을 가진 모든 물건’이라 정의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평범한 삶을 사는 ‘민초’들이요, ‘민중’이다. 이들이 애환을 해결해 주기 위해 내놓은 화두가 ‘생노병사’ 문제일 것이다. 종교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말이란 ‘아’ 다르고 ‘어’ 다른 법. ‘생’을 강조하느냐 아니면 ‘사’를 강조하느냐에 따라 존재의 이유가 달라진다. 불교에서는 ‘생(生)노(老)병(病’)보다 ‘사(死)’를 강조한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부처님이 사를 강조하라는 가르침은 그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종교가 그렇듯이 ‘산다는 것’을 ‘허무’나 ‘무상’으로 본다. 부처님이 살아계셔서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본다면 분명히 ‘사는 것이 곧 죽는 것이요, 죽는 것이 곧 사는 것’이라고 대답하셨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잘 살지 못하면 잘 죽지 못한다’는 연기법이 이와 같은 뜻을 담고 있는 게 아닐까? ‘가난이 죄’라고 했다. 여유 있는 집에서 제대로 사랑과 교육을 받고 자란다면 평범한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도 친구나 이웃을 잘못만나 잘못된 길을 걷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다. 이런 뜻에서 보면 ‘생에 대한 애착’으로 고(苦)를 만든다는 ‘고집멸도(苦集滅道)’도 해석하기 따라 다른 뜻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생’를 강조하느냐? 아니면 ‘사’를 강조하느냐에 따라 불교의 정체성을 달라질 수 있다. 물론 불교가 중생의 삶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중생의 ’생‘의 질을 높이기보다 사원의 축적을 위해 정교유착해 온 것이다. 문제는 ’권력의 맛‘, ’돈의 맛‘을 보면 교조의 진의를 살리기 어렵다. 거대한 부처님! 황금 옷을 입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개미만한 속물(?), 인간이 굼틀거리고 지나다니는 모습을 보면 가소롭게 보시지는 않을까? 배가 고파 보지 않은 사람은 배고픔의 고통을 모른다고 했다. 가난의 애환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가난의 설움을 알 리 없다. 물론 부처님은 그런 분이 아니지만 종교지도자는 자꾸만 부처님을 속물로 끌어내리지 못해 안달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 세상이 극락보다 좋고서야 해탈이 어떻게 가능할까? 불교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부처님의 뜻을 쫒으려면 거대한 불사를 위해 서민들의 주머니를 축내는 일부터 중단해야 한다. 이와 함께 부처님이 입고 계시는 그 도금한 옷과 부처님의 얼굴에 붙은 권위를 털어내야 한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세금을 내지 않고 치부하고 있는 사원, 그 사원이 입고 있는 ‘부자'라는 옷부터 벗어야 중생이 보인다. 그런 다음, 사원이 잘 사는 길이 아니라 중생이 잘 사는 길을 제시하고 안내해야 한다. 가난할수록 중생들은 ‘이 세상은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허무주의로, ‘운명론자’로 만든다. 부처님의 팔아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이세상에서도 극락을 누리고 다음 세상도 극락왕생하겠다는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사원이 있는 한 거대한 불상에는 부처님도 영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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