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융통성이 없어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을 고지식한 사람이라 한다. 변칙을 허용하지 않고 타협을 거부하는 고지식한 사람. 우리 주변에는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남에게 손해를 주거나 피해를 끼치는 일없이 살아가는 그런 사람을 사람들은 고지식하다고 한다. 이런 사람을 순진한 사람라고 표현해도 틀린 말은 아닐듯하다. 순진한 사람은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그래서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사악한 세상에서는 어떤 대접을 받을까?
‘사악한 세상에서 순진하거나 정직하기만 한 사람은 바보다’
선생님들 모임에서 학교마다 교육목표가 유별나게 ‘정직’이니 ‘근면’이니 하는 표현이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얘기 끝에 나온 결론이 그랬다. 왜 ‘정직’이니 ‘근면’과 같은 그런 학교교육목표가 많을까? 식민지시대 조선학생들의 머릿속에 ‘황국신민화’라는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일제가 꺼내 든 카드가 바로 ‘근면, 정직’과 같은 교육정책이다. 천황의 백성이 된 게 감사해 목숨이라도 내놓고 싶은 생각을 갖게 하도록 만드는 식민지 교육. 조센징 학생들에게는 당연히 ‘지순, 근로, 경애, 양순, 신애... ’와 같은 체제순응적인 인간을 양성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해방 후에는 왜 정직하거나 순진한 체제순응적인 인간을 육성하기보다 정의감이 강하고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을 길러내기를 꺼려했을까?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보면 결론은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다. 식민지 시대 일제가 허용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사람은 누굴까? 민족해방을 위해 간도니 만주를 쫓겨 다니며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의 아들딸일까? 최소한 현대교육이나 경성제국대학, 동경제국대학과 같은 대학에 다닐 수 있었던 학생들은 최소한 경제력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그런 시혜를 받고 사회 각 영역에서 요직을 차지할 수 있었던 사람은 당연히 애국지사의 자녀가 아님이 분명하다.
나라를 위해 지하에서 혹은 이국땅으로 쫒기며 살아온 사람들의 자녀들이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해방정국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영역에서 주도권을 잡던 사람들의 자녀가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런 교육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들은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협조한 친미주의자들과 손잡고 재빨리 기득권층으로 재편되면서 정의감이나 민족에 대한 애착심보다 순진한 인간, 착하기만 한 인간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을 것이다. 이들은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정의감이나 민족에 대한 뜨거운 애국심을 길러주는 교육을 할 리 없었던 것이다.
말이란 의사전달 수단뿐만이 아니다. 순진한 사람들은 목적을 가지고 시도하는 악의적인 말이라도 의심 없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런 사람일수록 ‘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이 옳고 부엌에 가면 며느리 말이 옳다’는 속담처럼 상황논리에 매몰되는 경양이 강하다. 말의 성찬시대를 살면서 사람들은 말 속에 담긴 의미에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상대방의 언술에 마취되기 십상이다. 판단의 기준이 없는 사람. 순진하기만 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의 성찬에 곧잘 방향감각을 잃고 마는 것이다.
말은 이데올로기다. 상대방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말은 언어로서 구실이 아닌 상대방에게 자신의 논리를 전달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말의 상대성을 무시하고 단순히 의사 전달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순진한(?) 사람이다. 상대방이 전하는 의도를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순진한 사람은 개인적으로는 손해를, 사회적으로는 진보에 발목이 잡히고 말뿐이다, ‘크다’는 것은 ‘작은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개념이다.
‘부지런 하다’는 말도 ‘게으르다’는 말이 있으니까 존재하는 개념이다. 착한사람과 악한사람, 성실한 사람과 불성실한 사람.. 등 말에는 상대적인 개념이 있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사악한데 특정한 사람만 정직하게만 살라는 것은 바른 교육일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늘 속히고 이용당하고 손해만 보고 살아야 한다. 이제 학교도 순진하기만한 사람 근면한 사람(일밖에 모르는 사람)을 길러낼 것이 아니라 시비를 가릴 줄 알고 사리가 분명한 정의감이 강한 국민을 길러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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