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에 팸투어를 갔다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온 부모들이 이외로 많은 걸 보고 놀랐다. 역사 기행인지 테마여행인지 단체로 인솔해 온 여행단들의 모습도 많이 눈에 띠었다. 역사기행이 유행이다. 여행을 많이 시켜야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 선현들의 충고 때문일까? 이제는 단순히 눈을 즐겁게 하는 관광지를 찾는 여행이 아니라 역사를 만나는 역사테마기행으로 바뀌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역사기행이 인기 있는 이유가 뭘까?
역사공부든 역사탐방이든 역사를 만난다는 것은 한마디로 ‘나를 찾기 위해서...’다.
역사를 통해 나를 만난다는 것은 오늘의 시각으로 역사 속의 나를 만나는 과정이 아닐까?
구경꾼에게는 역사가 보이지 않는다.
서울중심의 역사, 문제풀이식 공부를 하는 학생들에게는 역사 지식은 있어도 역사의식은 없다. 제대로 된 역사는 나를 찾는 훈련부터 시작해야 한다. 오늘의 ‘내’가 있기까지의 가족사, 지역사, 그리고 역사의식을 기르기 위한 사실(事實)을 찾아 그 사례 속에서 해석하는 능력을 기르는 게 진정한 역사 공부다.
입시공부로 접근하는 역사공부는 고대사에서 중세, 근대, 현대의 사건 중심으로 원인, 경과, 결과로 암기하는 학습에는 역사가 보일 리 없다. 오직 내가 다른 학생들보다 얼마나 더 많은 역사 지식을 암기하고 있는가의 여부를 가려 서열을 매기는 것을 역사 공부라고 착각하고 있다.
한쪽 눈으로는 세상을 골고루 볼 수 없다. 양반의 시각에서 본 역사는 서민들의 삶이 보이지 않는다. 화성에 가면 양반중심의 역사가 아닌 특별한 역사를 만날 수 있다. 화성은 축성에서부터 일본이나 유럽의 성(城)과는 다르다. 우리나라에 수많은 성이 있지만 유독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유가 뭘까?
화성은 다른 성에서 볼 수 없는 치성, 옹성, 공심돈 등 새로운 축성법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성벽을 돌출시켜 적의 동태를 감시하거나 공격하기 용이한 공격하기 용이한 치성이나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옹성은 화성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모습이다.
그밖에도 과학적으로 축성됐다는 것과 돌과 벽돌을 성재(城材)로 주로 사용하여 외면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성곽의 기초와 축성의 견고함을 살린 성이었다는 점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내가 화성을 보고 감탄한 또 다른 이유는 화성은 성곽을 지키는 군사들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 특별한 배려를 했다는 사실 때문이다. 전망을 살피는 군사가 좌측과 우측을 관망할 수 있도록 고안한 전망대는 한쪽 눈이 아닌 양쪽 눈으로 역사를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었다.
정조임금은 지방분권의 선구자?
중앙집권적 지배체제에서 서울이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중심이요, 지방은 서울을 위한 변방에 불과했다. 그런 의미에서 정조임금은 지방분권의 필요성을 깨달은 선각자라고 해야 할까? 화성은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단순한 성이 아니다.
화성성역의괘(10권 9책)을 보면 화성이란 성곽이 건설되기 1년 전 1793년 1월, 정조에 의해 팔달산아래 새로이 조성된 신도시다. 정조는 화성신도시를 건설해 유수부를 두어 기존의 개성, 강화, 광주유수부와 함께 동서남북으로 둘러싼 수도권의 4유수부 체제를 완성시킨 것이다.
또한 정조는 화성에 농업생산력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만석거 저수지 등 수리시설과 대유둔(일면 북둔) 등 시범농장을 설치하고 여기에 최신의 수리시설과 영농기술을 적용함으로써 농업개혁의 전진 기지로 삼았던 것이다.
정조의 이러한 선견지명과 혜안은 화성이 행정 군사기능과 소비기능, 그리고 생산기능이 함께 갖추어진 도시로서 모든 시설물이 인공과 자연의 조화 그리고 신기술과 전통기술의 융합, 평상시와 비상시 기능을 상호보완적인 세련된 도시로서 역할을 감당하게 했던 것이다.
일한 만큼 임금을 지급한 군주 영조
전제군주시대 조제제도는 전세, 역(役) 그리고 공납(貢納)이 기본이었다. 전란으로 황폐화된 복구공사나 성의 축조는 주로 부역(負役)으로 채워질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공평과세가 될 리 없었고 과중한 조세로 허리를 편지 못하는, 서민들의 고통과 원성이 그칠 날이 없었다.
그런데 화성을 축조하는 공사에는 일한만큼 나라에서 임금을 지급하는... 그래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인부들이 일거리를 찾아 모여들었다. 화성축조공사에는 22개직정 184면의 장인들이 동원되었다. 평소 같으면 부역이나 혹은 조세를 면하게 하는 임금형태가 이들에게 임금으로 지급했다는 것은 정조의 애민정신과 노동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아닐 수 없다.
정조는 성을 쌓기 위해 주민들을 소개할 때 권력의 힘으로 강제로 이주시킨 게 아니다. 주민들에게는 현재 살고 있는 집의 매매가를 정당하게 쳐주는가 하면 이주비까지 지급했다. 축성 때 고생하는 인부들에게 떡, 북어, 술, 밥, 국, 생선 등을 내려주기도 하고 더위를 이기는데 쓰라고 부채, 베, 모자 심지어 약까지 나누어 주었다는 기록은 다른 군주에게서는 볼 수 없는 애민정신의 실천이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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