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는 이야기2018.02.23 06:30


코끼리는 기둥이다. 아니다 코끼리는 벽이다. 둘 다 틀렸다, 코끼리는 밧줄이다.’ 이 이야기는 불교 <열반경>에 나오는 맹인모상(盲人模象: 장님 코끼리 만지기)’ 우화에 나오는 대사들이다. 보지 못하는 이들이 코끼리를 만져보고 각자 자기가 본 것이 진실이라 주장하며 싸울 때, 왕이 쯧쯧거리면서 자기가 본 것이 전부라고 주장하는 우매함을 꾸짖는 교훈적인 내용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knowledge is power’ 1920년 프랜시스 베이컨이 쓴 <신기관>이라는 과학 선언문에 나오는 얘기다. 그래서일까? 사람들은 많이 알기 위해 태어나면서 배운다. 무의도적으로 혹은 의도적으로 가정에서, 학교에서 혹은 사회에서 배움은 끊임없이 죽을 때까지 계속된다. 눈이나 감각기관을 통해 인지되는 것, 책을 통해 알게 되는 것, 경험을 통해 혹은 부모나 선생님, 친구들로부터 들어서 알게 된 것.... 이렇게 안다는 것은 보고, 듣고 의도적으로 배워서 깨달은 지식들이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사실도 있고 사실이 아닌 것도 있다. 사람이 한평생 살아가면서 참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깨우쳐 알게 된다. 선각자들은 안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했다.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공자의 제자 자로는 선생님인 공자에게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묻자 공자는 안다는 것은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것이라고 답했지만 사람들은 알기 위해 부단하게 많은 노력을 한다.

이 세상 부모들은 내 아이가 남보다 더 많이 알게 하려고 온갖 정성을 다 쏟는다. 유아원에 보내고, 유치원에 그리고 초등, 중등, 혹은 대학에서 그것도 모자라 해외 유학을 보내 더 많이, 더 똑똑하게 키우기 위해 온갖 정성을 다한다. 그런데 공부를 하는 학생들에게 공부를 왜 하지...?’라고 물어보면 열에 아홉은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고 똑같은 대답을 한다. 부모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다.

이마누엘 칸트라는 사람. 독일관념철학의 기초를 놓은 프로이센의 철학자다. 그가 쓴 책 중에 순수이성 비판, 실천이성 비판, 그리고 판단력 비판이라는 책이 있다. 이 책 대부분이 그렇지만 특히 순수이성 비판은 난해하기로 유명하다. 오죽했으면 칸트 스타일이라는 말까지 유행할 정도였을까? 순수이성 비판이라는 글이 얼마나 어려웠으면 누군가 알아듣기 힘든 말을 하는 사람을 일컫는 대명사사 됐을까. 철학은 그래서 어렵고 고상하고 철학을 하는 사람은 이상한 사람처럼 행동하고 다니는 게 정상처럼 보이는 것일까?

다시 얘기를 시작하자. 공부는 왜 하는가? 왜 알려고 하는가? 내가 듣고 배워서 아는 것은 모두 오류 없는 진실일까? 남보다 더 많이 알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베이컨과 같은 철학자는 아는 것이 힘이라고 했지만 모르는 것 보다 낫기 위해 배워야 하는가? 칸트의 무슨 비판을 평생 동안 연구해서 달달 외웠다고 치자. 그런 비판을 알아서 무엇을 할 것인가? 물론 칸트 연구로 학위를 받은 사람이라면 대학에서 철학교수로 평생을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미지 출처: 브런치>

관념적인 지식은 행복을 보장할까? 철학을 배우고 과학과 수학을 공부하고 정치니 경제며 법과 사회를 공부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많이 알기 위해서..? 남보다 더 똑똑하기 위해서...? 솔직히 말하자. 지금 학생들이 학교에서 죽기 살기로 공부하는 이유는 내가 배우는 지식으로 살아가는데 더 행복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남보다 더 많이 알고 더 똑똑해서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다. ‘훌륭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는 부모나 학생들의 말을 대부분 틀린 말이다

배움의 목적은 남보다 내가 더 많이 알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한 삶을 위해서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태어났으니 이웃과 소통하기 위해 언어라는 문자와 대화의 수단인 말을 익혀야 하고, 먹고 살기 위해, 취업 위해 배우고, 그래서 직장을 얻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얻은 직업이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살아가기 위한... 그런데 사람들 중에는 목적과 수단이 뒤바뀐 주객전도로 살고 있는 사람들이 예상외로 많다.

아는 것도, 영화를 보고, 책을 읽고, 배우는 것도, 직장을 얻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결혼을 하고, 돈을 벌고, 종교를 가지는 것.. 이 모든 것은 다 내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다. 그런데 세상에는 행복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박근혜 정부의 국정지표는 국민행복이었지만 청년들은 왜 헬조선을 말하고, ·장년과 노년층들은 왜 디스토피아를 외치고 있을까? 대한민국에 태어났다는 이유로 자기 삶을 저당 잡혀 살고 있는 청소년들은 더 많이 알면 행복을 보장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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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정치2011.07.21 05:00



전교조가 결성될 무렵 사회는 오랜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봄처럼 여기저기서 겨울이 무너지는 불협화음이 터져 나왔다. 여성은 다소곳하고 순종적이어야 한다는 불문율을 깨고 ‘암탉이 울면 알을 낳는다.' 며 전통 가치에 반기를 들기도 하고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운명적인 틀, 금기의 틀을 깨기 시작했다.

당시 학교에서 전교조에 가입하는 교사들에 대한 교장선생님 쪽이나 사립학교재단의 저항은 예상보다 완강했다. 이런 와중에 나온 얘기. 전교조 교사들을 일컬어 ‘의식화교사’라는 재미있는 별명이 붙게 된 것이다.

                               <이미지 충처 : 다음 이미지 검색에서>

의식화란 ‘어떤 대상에 대하여 깨닫거나 생각하게 함. 특히, 계급의식을 갖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당시 전교조 교사들에게 붙여졌던 이 ‘의식화’란 ‘학생들의 정상적인 생각을 비뚤어지게 만드는 잘못된 교육‘이라는 뜻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자. ’의식불명‘이라는 말이나 ’식물인간’이라는 말은 몸은 멀쩡한데 생각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의식이 없는 사람은 살아도 죽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교육이란 곧 무의식에서 자기 생각을 갖게 하는 의식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민주주의에 살면서 ‘민주의식’이 없이 전통적인 가치관을 가졌다고 가정해 보자. 이런 사람은 대화와 타협이란 의미가 없다. 주인의식도 없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살아야 한다는 그런 사람이다. ‘평등의식’이 없는 사람은 어떤가? 사회적 지위가 높은 사람은 인격까지 높다고 보고 공과 사에 대한 구별을 하지 못한다. 건강의식이 없는 사람은 또 어떤가?

새집 증후군이니 환경 호르몬이니 그런 건 안중에 있을 리도 없다. 식자재에 농약이나 방부제가 얼마나 들어 있건 말건, 먹는 음식이니까 많이 먹으면 좋다고 생각할 것이다. ‘인권의식’이 없는 사람은 힘이 곧 인권이라고 보고 자기중심적이고 주관적인 판단으로 일관할 것이다. 몸이 아프면 팔자소관이나 운명으로 보고 운명이란 거역할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전교가 이런 별명이 붙은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독재권력과 군사문화가 만들어 놓은 전근대적인 가치관에 대한 도전. 봉건잔재와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거대한 도전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여상이 근무했던 필자도 이러한 시대 흐름에 함께 하게 됐다. 당시의 실업계 학교는 나름대로 실업교육의 기능을 감당하고 있었던 시절이었으니까 가난하지만 똑똑한 아이들도 많았다. 여자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불이익과 운명적 세계관을 강요 받아 온 아이들에게 ‘여자이기 이전에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의식화'를 시작했다.

인문학에 대한 사회학적 접근. 주름살투성이의 어머니 판화 그림이 걸리고, 낫을 든 농부 그림이 운동권 학생들의 걸개 그림으로 나타나던 그 무렵이었다. 미사어구로 덧칠한 시와 아름다운 색깔로 그려진 그림이 좋은 그림이라고 알고 있던 미적 관념에서 주름 속에 담긴 어머니의 고결한 사랑을 읽어낼 수 있는 사고의 전환이 전통예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기 시작한 것이다. 욕설이 가장 아름다운 시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김용택의 ‘섬진강에서, 문익환님의 통일에 대한 간절한 소망이 시로 읽혀지기 시작하면서 국민적 사고의 전환이 시작된 것이다.


한겨레신문과 전태일의 등장, 공포에 숨죽이고 살던 지식인이 온실의 보호를 거부하고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인 흐름은 전근대적인 유습과 반민족 세력에 의해 만들어졌던 이데올로기의 벽을 허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유교의 전통 그리고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관습에 찌든 가부장 문화를 지키겠다는 세력들은 눈이 뒤집혀 반발했다. 권력에 기생하던 언론과 종교세력, 식민잔재 청산을 하지 못하고 살아남은 권력과 독재자의 편에 서던 인간쓰레기며 군사문화에 기생해 살아남은 정치세력들까지 한통속이 되어 저항하는 힘은 가히 위력적이었다. ‘계란으로 바위치기’라고 했던가? 그러나 이러한 양심세력과 지식인이 빼든 칼은 이들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던 것이다.



80년 후반의 변혁은 어는 특정분야 특수층에서 터져 나온 목소리가 아니었다. 정치경제 사회, 문화, 노동, 언론, 종교 등 사회의 각계각층에 걸친 돌이킬 수 없는 거대한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수업 중에 교과서는 뒷전이었다. 이미 의식화의 경전이 된 ‘스스로 비둘기라고 믿는 까치에게’,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뿐만 아니라 노철(노동자의 철학)이며 철학에세이며 러시아 혁명사까지 공공연하게 교실에서 전해지기 시작했다. 시로 통일과 민족해방을 말하고 노동해방과 여성해방이 시작된 것이다. 의식화는 특정한 분야의 전유물이기를 거부했다. 대학생이며 노동자며 여성에 이르기 까지 교회에서, 노동현장에서, 교실에서, 민중교회에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폭푸이 되어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한 것이다. 

수업 중 문익환 시가 읽혀지고 김용택의 농민시를 읽어줬다. 니체나 칸트와 같은 철학자가 한 말 몇 마디가 아니라 사람됨의 철학이니 세계사철학을 듣고 길거리로 뛰쳐나가기 시작했다. 책가방을 가게에 맡겨두고 치마에 보도블록을 깨 담아 나르는가 하면 한겨레신문 무료 배달을 자청하고 나서는 여학생도 있었다. 여상에서 꿈이던 은행에 취업한 학생이 사표를 내고 노동현장에 뛰어들고 전교조 선생님을 지키겠다고 밤새워 징계장소를 지키며 유인물을 돌리던 학생들은 결코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었다.


시장실패가 수정자본주의를 불러왔듯이 민중의 의식화는 자본의 단결을 부추기고 급기야는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의 논리가 노동운동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자본의 반격이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국면에서는 변절자와 기회주의자를 양산하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게 된다. 생존권을 놓고 선택을 강요해 양심을 실험했던 게 전교조 탈퇴각서 사건이었다면 생존과 취업을 미끼로 노동운동을 무력화시키고 있는 게 자본의 공격이다. 이제 자본은 국내 재벌이 아니라 거대한 다국적 자본이 FTA라는 이름으로 국경을 무너뜨리고 있다.

전체 노동자의 50% 이상이 비정규직으로 바뀌고 청년 실업자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고 있다. 사회 양극화는 80대 20이 아닌 90대 10의 사회로 향해 치닫고 있는 것이다. 80년대 후반에는 민중의 신뢰와 순수성이 있었고 권략의 모순이 가시적으로 확인될 수 있었기게 민주화라는 개혁이 가능했다. 그러나 정보화시대에는 다수의 민중이 자본의 모순조차 확인할 수 없는 사회로 바뀌고 있다.  여기다 노동운동이며 교육운동, 시민운동을 하던 사람들의 배신과 변절....


지식과 기술은 가르쳐도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 이러한 교육이 길러 낸 사람들이 맡은 정치며 경제며 사회가 온당할리 없다. 이성도 도덕도 종교도 아닌 힘이 지배하는 세상. 최근 세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돈이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지식이며 양심이며 민족이며 그런 건 하루 아침에  다 내다 버릴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돈이면 양심도 변절도 만다 않는 자본에 마취된 사람들에게 지금이야말로 제 2의 의식화 운동이 필요하지 않을까?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정치2011.05.27 05:30



“종 앞에서 절대 무신론을 주장하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가 반역할 것이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작가 볼테르의 말이다. 친구와 나누는 얘기를 종이 들을까봐 노예를 밖으로 내보내고 난 후 친구에게 한 말이다. 노예의 각성이 두려워 진리까지 감추려했던 종교인의 속내를 보여 주는 말이다.


볼테르가 한 말에 비추어 보면 예수의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라는 말뜻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나 사람들은 자유를 누리기를 두려워한다.

왜냐하면 교육을 통해 종교나 언론을 통해 이데올로기라는 마취제로 마취시켜놓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예는 마취된 눈으로 세상을 보고 운명론자가 되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오늘날의 노예들은 기득권자의 논리를 자신의 생각이라고 착각하고 사는 사람들이 예상 외로 많다.

노예들은 마취에서 깨어날 수는 없을까? 왜 사람들은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 객관적인지 여부를 확인하려 하지 않을까? 노예의 머리에 주인의 생각을 갖고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 내가 알고 있는 세상, 그 세상은 정말 신(神)만이 아는 세상일까?

사람의 감각이나 눈으로 보이는 모든 것은 모두가 진실인가? 현상을 보고 본질이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볼테르가 노예가 알기를 그렇게 두려웠던 신은 정말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세계의 모든 사물과 현상은
물질적인 것(인간의 의식 밖에 존재하는 외부세계의 사물과 과정들)과 정신적인 것(의식에 존재하는 감각, 사상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물질과 의식을 어떻게 이해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세상을 볼 수도 있고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마르크스와 칸트>

물질적인 것이 먼저인가, 아니면 정신적인 것이 먼저인가에 따라 세상은 다르게 보인다는 것이다. 물질적인 것이 의식보다 중요하고 먼저라고 생각하는 사상을 유물론이라고 하고, 의식이나 정신이 있어 물질은 인식할 수 있다고 보는 시각을 관념론이라고 한다.

물질이 근본인가 아니면 의식이 근본인가의 여부에 따라 관념론과 유물론이라는 세계관으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
유물론은 정신이나 영혼, 사유란 인간의 의식이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 보는 반면, 관념론은 정신이나 영혼, 사유, 관념이 있기 때문에 물질이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관념론으로 세상을 보면 사람이란 신에 의해 창조되었고 육체와 의식은 인간의 육체와 별도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결국 나이 들어 늙어 죽지만 정신이나 영혼은 육체와 분리돼 다음 세상에서 살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론의 편에 선 학자들은 플라톤, 토마스아퀴나스, 칸트와 같이 의식이나 정신은 육체와 병도로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이다. 관념론자들 중에는 세계란 인식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不可知論)을 주장하기도 한다.

유물론으로 세상을 보면
물질세계는 인간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다고 본다. 유물론자들은 물질은 인간의 의식에 반영되어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의식이 먼저냐, 아니면 물질이 먼저냐에 따라 나누어지는 관념론과 유물론은 오늘날 세계를 양대 진영으로 분류, 각자의 길을 걷고 있다.

관념론과 유물론은 유신론과 무신론으로 또 효율과 경쟁, 복지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세력을 대립된다. 자유와 경쟁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세력과 복지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세력,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이념으로, 유신론과 무신론으로 분류되어 각각 다른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원점으로 돌아가 보자. 오늘날 민중들에게 마취제 역할을 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란 무엇일까? 이데올로기는 교육이나 종교, 언론을 통해 볼테르가 두려워했던 각성을 잠재우는 역할을 하고 있다. 노예의 머릿속에 든 주인의 생각 즉 기득권 세력들의 논리인 이데올로기는 교육으로, 종교로, 언론으로 피지배계급을 정당화시키고 대물림되고 있는 것이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 ‘못 오를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 ‘전생에 죄가 많아서 여자로 태어났다, 창조주인 신은 인간을 귀하게 쓸 그릇과 천하게 쓰일 그릇을 만들 권리가 있다. 현생에서 못나고 가난하고 고통스럽게 사는 것은 내세에 하나님이 더 큰 사랑을 베풀어 주기 위한 신의 뜻이다. 인생은 풀의 이슬과 같은 것이다... 권력은 위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다...

착각은 자유다. 사람들은 말한다. 교육은 사람들을 세계를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다고... 과연 그럴까? 교육이 자아를 발견하게 하고 모두가 행복하게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를 만들어 줄 것이라고...? 중세 학교가 등장하게 된 이유는 지배자를 양성하기 위해 생겨난다. 서민들의 각성과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학교가 설립된 것이 아니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왜 식민지 조선 사람들에게 교육을 시켰을까? 이데올로기를 숨겨놓고 지식이나 주입시키는 걸 교육이라고 착각해서는 안 된다. 학교가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 진짜 이유를 알 만 하지 않은가?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인성교육자료2011.01.23 09:03



인류의 역사는 '자유의 쟁취과정' 이었다고 했던가? 김재준 목사는 자유, 정의, 질서 중 제일 소중한 것이 자유라고 했다. 자유를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피를 흘리거나 감옥에서 죽어갔다.

자유란 무엇인가?

철학자 야스피스는 ' 모든 사람중에서 가장 자유로운 사람은 정신 이상자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무런 논리를 갖지 않기 떄문이다 ' 라고 했다. 일제의 암흑시대 총칼 앞에서 만세를 부르면  '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 ' 고 절규하던 사람들에게 너희들이 자유를 원하거던 정신 이상자가 되라고 할 수 있을까?

자유란 자구대로 ' 나의 의지대로 방해받지 않고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일까?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 든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행위란 있을 수 없으며 완전하고 고립된 인간도 없다. 요즈음 청소년들의 행동을 보면 자유를 너머 방종으로 치닫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본다. 자유는 ' 어떤 개인이 원하는 어떠한 일이라도 행하는 것' 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런 자유는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사진자료 : 다음 이미지 검색에서>

샤르트르는 ' 자유는 선택의 자율설' 이라고 정의하고 ' 한 인간의 욕망을 갖게 되어 자신과 자아를 위해서 선택하는 곳에서 자유가 실현된다' 고 했다. 철학자 칸트는 ' 강제없이 자립적으로 사건을 일으키는 능력 ' 이 자유라고 했고 ' 아니오  라고 말 할 수 있는 능력 ' 이라고 정의했다.

신약성서에서는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 고 했다. 사람이 안다는 것은 힘일 뿐만 아니라 곧 자유이기도 하다. 자유를 누린다는 것은 앎이며 무지는 곧 속박이기도 하다. 앎의 정도가 자유의 정도를 결정 짓는다.

자유스럽다는 것은 어떤 장애를 극복하는 것을 전제로 하며 장애가 많을수록 자유를 더 갈구하게 되는 것이다. 어떤 철학자는 자유는 삼페인으로 축하받는 어떤 상이나 표창장 같은 것이 아니라 이와 정반대로 '자유는 짐이며 혼자 달려야 하는 힘든 경주' 라고 말햇다. 

지금은 고인이 됐지만 이인모 같은 노인은 6.25 전쟁때 종군기자로 참가했다가 빨치산이 된 후 체포되어 34년간을 0.8평 의 독방에서 살았다. 그 후 남북의 화해무드에 따라 아내와 딸이 사는 이북으로 돌아갔다. 이런 삶을 살았던 이인모 노인에게서 자유란 무엇일까? 육체적 억압이나 구속만이 속박이 아니다. 자신의 사상을 진술하고 표현하는 자유가 통제되어 있는 사회는 자유가 허용되는 민주주의 사회라 할 수 없다.

고려대 강민길 교수는 ' 자유의 폭이 확대' 되는 정도가 민주화의 발전 척도 라고 했다 . 우리나라는 해방 후 정부수립 당시부터 언론, 출판, 집회, 결사, 거주이전,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까지 보장한다고 헌법에 기록되어 있었으니 수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달라고 외치다가 혹은 거리에서 혹은 감옥에서 죽은 사람도 많다.

현재 내가 누리는 작은 자유도 결코 뜻 없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피와 땀의 대가임을 알아야 한다. ' 우리는 역사에 빚진 사람들이다 ' 그런 의미에서 선조들의 희생의 대가를 누리고 있다. 이분들에게 진 빚을 갚는 길은 우리의 노력으로 자유의 폭을 확대하여 유산을 후손들에게 물려 주는 것이 아닐까?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