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뜨고 코 베어갈 세상라고 한다.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그렇다. 갈수록 내게 이익만 된다면....’ 상대방의 기분이니 손해 따위는 생각하지도 않는다. 아니 돈만 벌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세상이다. 신문을 보기 겁나다고들 한다. 범죄의 수법도 다양하고 지능적으로 바뀌는가 하면 범법자의 연령도 점차 낮아지고 갈수록 잔인해지고 있다.


<이미지 출처 " MK>


이런 세상을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일까? 지식..? ...? 건강..? 사회적 지위...? 맞는 말이다. 그런 게 없으면 힘들고 불편하게 살아야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런 것만 가지면 만족할까? 사람 한평생을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필요한 게 많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필요한 게 시비를 가리고 판단할 줄 아는 능력이 아닐까? 세상이 너무 복잡해 어느게 진짠지 어느게 가짠지 구별하며 산다는 게 쉽지 않은 세상이기에 하는 말이다.


지식은 언제든지 배울 수 있고 돈은 노력하기에 따라 벌수도 있다. 건강도 적당한 운동과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면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먹을 간식거리를 하나 골라도 그 속에 든 식품 첨가물이 아이들에게 얼마나 해로운 것이 들어 있는지, 식당에서 사 먹는 음식은 맛만 좋다고 먹다가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고 있다. 해야 할인지 하면 안 되는 일이지 구별하지 못하고 처신하다 망신당해 사람들로부터 웃음거리가 될 수도 있다.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책에는 주로 지식만 담겨 있다. 복잡한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는 것이 힘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단편적인 지식이 아니라 쏟아지는 지식이 어떤 것이 유용한지 판단하는 능력이 필요한 시대가 됐다. 지식만 필요한 시대가 아니라는 얘기다. 진실을 안다는 것은 무엇일까? 저것은 하늘이요, 이것은 나무요... 그렇게 보이는 것만 아는 것은 참 아는 것이 아니다. 진실을 아는 것은 껍데기가 아닌 본질을 아는 것이다.


학교에는 아이들에게 국어도 가르치고 수학도 사회도 음악, 미술, 체육도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그 교과서 속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이번 국사교과서 국정화 사태에서 보듯 교과서 안에는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 자본의 논리, 혹은 지배세력의 논리와 같은 내용이 숩겨져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교과서에는 진실만이 담겨 있다고 배우면 어떤 사람이 될까? 


왜 노동자로 살아갈 학생들에게 노동 3권이나 근로기준법을 가르쳐 주지 않을까? 민주시민으로 살아 갈 시학생들에게 민의식을 길러주지 않고, 왜 헌법을 한 번이라도 읽을 기회를 주지 않을까? 역사를 가르치면서 역사를 보는 안목이나 기준, 원칙이 되는 사관이나 역사의식은 왜 가르치지 않을까? 시비를 가리고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철학은 왜 가르쳐 주지 않을까? 사람답게 사는 길을 가르치기보다 경쟁을 통해 이겨야 산다는 냉엄한 경쟁심만 키워줄까?



모르고 살아도 좋은 때가 있었다. 남도 내 맘 같은 시절, 자연의 순리에 따라 변칙이 없는 순박한 농업사회에는 그랬다. 그런데 세상이 바뀌었다. 바뀌어도 너무 많이 바뀌었다. 서로 돕고 나누며 살던 사람들이 상대방을 속이고 밟고 올라서야 살아남는 서비이벌게임시대를 맞았다. 내가 사느냐 아니면 죽느냐는 경쟁에서 이기는 자에게만 생존이 허락되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악한 세상에 착한 사람은 무시당하거나 바보취급을 받기 마련이다.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배워야 하고 나보다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하지만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선악과 시비를 분별하고 판단할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 학교는 학생들이 성인이 된 후 사회에서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정보를 소화할 수 있는 능력을 길러주어야 한다. 그래서 교육을 상품이라고 하고 경쟁과 효율을 강조하지 않았는가?


건물 임대나 주식 배당과 같은 자산으로 벌어들이는 소득이 전체 소득의 80%, 노동을 통해 얻는 소득은 20%에 불과한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고학력 아버지의 학력 대물림 확률이 90%’라고 한다. 정직, 근면하게 무조건 열심히만 배우면 인정받던 시대는 지났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야 할 학생들에게 학교는 지식을 전달해주지만 판단능력을 길러주는 지혜를 가르치지 않고 있다. 지식만 넘치도록 배우고 세상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길러주지 못하고서야 어떻게 지혜롭게 세상을 살아 갈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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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학생들을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가족들의 아픔에 함께 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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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정치2013.09.24 07:06


‘불의에 분노하라’는 책을 쓴 스테판 에셀은 ‘무관심은 악’이라고 했다. 김대중 전대통령은 '불의를 보고 침묵하는 것중립이 아니라 악의 편을 돕는 것...'이라고 했다.

 

세상이 참 요지경이다.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이게 사람 사는 세상인지 헷갈린다. 어린아이들이 들어도 웃을 뻔한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우기는 정치인이 있는가하면 경제며 교육이며 언론이며 종교까지 구석구석 썩어도 너무 썩었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이런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불의를 보고도 무관심하거나 분노할 줄 모른다는 사실이다.

 

 

텔레비전 연속극에 마취되고 야구며 축구에 얼이 빼앗긴 사람들, 얼짱이며 몸짱에 혹은 학벌에 혹은 돈에 이성을 잃은 사람들.... 나라가 잘못 되어 가고 있는데도 개인의 이익이나 안일만을 바라는 사람들, 돈이 눈이 먼 상인들은 사람이 돈으로 보이는지 남의 건강이나 생명에는 안중에도 없는 듯 불량식품을 만들어 예사로 판다.

 

나라를 지키던 군인이 백주 대낮에 총을 거꾸로 들고 주인의 권리를 도둑질한 반역자도 대통령이 됐다는 이유로 존경하고 대접받는 세상이다. 친일한 사람, 민주주의를 파괴한 사람, 심지어 시민을 학살한 사람까지 대통령을 지내고, 국민의 혈세로 경호까지 받고 있는 나라. 집권당이 자기네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 권력기관을 동원해 표 도둑질을 해도 남의 일처럼 강거너 불구경하듯 하는 사람들...

 

맹자는 ‘불쌍하게 여길 줄 아는 마음(측은지심 惻隱之心)과 부끄러워할 줄 아는 마음(수오지심 羞惡之心)과 양보할 줄 아는 마음(사양지심 辭讓之心), 그리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마음(시비지심 是非之心)은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타고 난다고 했는데.... 이제 불쌍한 사람을 보고도 측은해 하지 않고, 잘못을 저지르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양보니 시비를 가르는 일에도 관심조차 없어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불의를 보고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들은 왜 그럴까?

 

째, 진실을 모르기 때문이다. 살기 바빠 발등에 떨어진 '먹고사는 일'이 급해 한 눈 팔 겨를이 없이 사는 사람들... 진실을 알려야 할 언론은 편파왜곡보도로 이런 사람들의 눈을 감기고 있다. 불의한 세상에 법이 없어도 살 수 있는 착하기만 한 사람, 순진한 사람... 이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은 좋기만 할까?  

 

둘째, 진실은 알고 있어도 두려워서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불의한 일인 줄 알고 있어도 '내가 나서서 달라질 게 뭔가?' 혹은 '괜히 앞섰다가 손해 볼 일을 왜 내가 왜 나서는가?'라며 꼬리를 사람이 이런 사람들이다.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해 아픈 역사가 '나서면 죽는다', '찍히면 손해본다'는 기회주의 인간을 만든 것은 아닐까? 

 

셋째, 이해타산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게 선'이라고 판단하는 사람들은 이해타산으로 세상을 본다.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요, 이해타산이 판단의 기준이 돼 손해 볼 짓을 하면 바보라고 생각한다. 이들은 철저하게 경제논리로 세상을 살아가기를 좋아한다. 오늘날 경쟁만능의 이기주의 교육은 이런 인간을 지속적으로 양산하고 있다.

 

넷째, 변화와 연관이라는 관점에서 세상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눈 앞에 보이는 현상이 전부라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일수록 선입견이나 편견, 아집과 고정관념으로 세상을 보고 본질은 모르고 현상을 진실이라고 믿고 있다.

 

불의를 보고 분노할 줄 모르는 사람들...,

삶에 찌들려 앞뒤를 분멸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렇다 치고, 이해타산 때문에 불의를 보고도 침묵하거나 그들의 편에 서서 떡고물을 얻어먹겠다는 비열한 사람들로 인해 세상은 더더욱 삭막해지고 황폐해지고 있다.

 

사람들은 어떨 때 분노하는가?

보통 사람들은 자존심이나 명예 혹은 지위나 재산상의 손해를 입었다고 생각할 때 불같이 분노한다. 정치가 타락하거나 경제정책이 잘못돼 큰 손해를 보고 있어도 그런 것에는 너무나 관대(?)하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가난을 면치 못하는 사람들... 큰 손해에는 관대하면서 눈앞의 이익에는 한치의 양보도 할 줄 모르는 사람들로 인해 세상은 하루가 다르게 더 척박해지고 더 삭막한 세상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정의가 무너진 세상에 어떻게 사람답게 살 수 있을까? 

 

- 이미지 출처 : 구글 검색에서...

 

 

김용택의 참교육 이야기 - 10점
김용택 지음/생각비행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이미지 출처 : 구글검색에서>

 

‘정직, 근면, 성실’

 

지금까지 대부분 학교의 교훈이 정직, 근면, 성실이다.

 

수십억원대 국외 비자금 운용 및 탈세 혐의와 관련 사퇴한 한만수 공정거래위원장 후보자, 성접대 의혹에 연루돼 사퇴한 김학의 전 법무차관 후보자, 김용준 전 국무총리 후보자, 김종훈 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 황철주 전 중소기업청장 후보자, 김병관 전 국방장관 후보자.... 이동흡 전 헌법재판소장 후보자까지 포함할 경우 낙마한 공직인사는 박근혜 대통령 출범 한 달 새 7명이나 된다.

 

 

이들이 저지른 비리는 차마 입에 담기조차 거북한 파렴치범수준이다. 비자금 조성 의혹과 로비스트 이력, 자녀의 병력기피, 위장전입, 땅투기, 편법 재산증식...도 모자라 성접대 의혹까지... 박근혜대통령이 후보지절, 방송토론회에서 말실수라고 넘어 갔던 ‘지하경제활성화’는 말실수가 아니라 저런 사람들을 등용해 정말 ‘지하경제 활성화’라도 시키겠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학교에는 어떤 인간을 길러내고 있을까? 정직, 근면 성실한 인간을 길러내겠다는 학교. 일류대학을 나오고 해외유학에 고시합격으로 부러움을 한 몸엔 받은 수재들... 출신학교나 지역민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승승장구한 인물들이 알고 보니 이런 사람이라니... ‘학교의 우등생이 사회의 열등생’이 아니라 ‘학교의 우등생이 사회에 부도덕한 인사’가 되고 만다면 학교가 존립할 근거가 무엇인가?

 

훌륭한 사람이, 열심히 공부한 사람이 대통령도 되고 법관도 되고 장관도 된다고 믿고 있는 아이들... 지금 청문회에 나온 사람들의 살아 온 모습을 보면 얼마나 실망할까? 높은 사람이 되려면 저렇게 나쁜 짓을 많이 해야 되느냐고 묻기라도 한다면 교사들은 뭐라고 대답해야할까?

인사청문회에 등장하는 사람들만 그럴까?

 

권력을 휘두르는 고위직에 있는 사람들의 추악한 탈선과 도덕은 서민들의 상상을 초월한다. 법조계의 전관예우가 그렇고 정부 요직에 있던 자들이 퇴임 후 회사의 사외이사로 들어가 수억대의 연봉을 챙기는 현실이며 공천권을 쥐고 선거 때만 되면 비리잔치를 벌이는 국회의원들. 무전유죄, 유전무죄가 된 재벌회장들의 불법경영은 이제 죄도 아닌 당연한 현실이 됐다.

교육계는 또 어떤가?

 

                                                        <이미지 출처 : 경향신문>

 

연간 천만원이 넘는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알바를 하고 대출금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되는 자식같은 제자들을 울리는 대학. 차비도 안 되는 시간강사들의 강의료를 착복하고 있지만 고액연봉을 받은 교육자들은 그들의 아픔에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병력비리는 또 어떤가? 오죽하면 신의 아들, 장군의 아들, 어둠의 자식들... 이라는 말까지 나왔을까?

 

교육이란 학교에서만 하는 게 아니다. 가정과 사회가 혼연일체가 됐을 때 제대로 된 교육이 가능하다. 학교교육과, 가정교육 그리고 사회교육이 일관성이 없으면 아이들은 이중인격자로 자란다. 이런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사회는 아이들에게 큰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꿈이 없는 학생들... 입시가 꿈인 학생들에게 대학만 들어가면 목표가 실종돼 방향감각을 잃고 고시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현실에서 꿈과 끼를 살리는 교육이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옛날 어른들은 아이들 앞에서 삼갔다. 말이든 행실이든...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학교는 정직을 가르치는 데 사회지도층 인사는 부도덕을 가르친다면 우리 아이들은 심한 가치혼란에 빠지지 않겠는가? 커면 대통령이나 장관이 되겠다는 아이들... 높은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알고 있는 아이들은 사회지도층 인사들이 저렇게 저질적이고 퇴폐적이며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뿐이라면 어떤 생각을 할까?

 

청문회에 나와 범죄(?)를 저지르고도 처벌은커녕 거짓말이나 변명으로 일관하는 뻔뻔스런 모습을 보면 무슨 생각을 할까? 더 큰 범죄, 더 파렴치한 삶을 살아 온 후보자들 덕분(?)에 검증을 통과한 고위공직자. 그들이 내일의 주인공인 청소년들의 롤모델(Role Model)이 될 수 있을까? 사회정의를 세워 정직한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아이들의 꿈은 언제쯤 실현될 수 있을까?

 

 

안녕하세요?

불친님들과 구독자님들 덕분에 제가 운영하는 '김용택의 참교육이야기'

사단법인 한국블로그산업협회(KBBA)가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 방송통신위원회, 한국인터넷진흥원, 서울시가 후원하는 제 4회 2013 대한민국 블로그 어워드 개인부문에 문화/예술 부문 Top100으로 선정되었습니다.

투표는 3월 11일부터 31일까지 심사 및 투표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옆의 주소로 가셔서 투표 부탁드립니다.    http://snsawards.com/iblog/vote2012_01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정치2011.09.20 05:00


                                <아래 모든 이미지 출처 : 다음 이미지 검색에서>

교육자는 누구인가?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 미성숙한 인간을 성숙한 인간으로 이끌어 주는 사람? 언제부터인가 ‘교육자’란 ‘학교에서 교육과정대로 교과서를 가르치는 사람’이 됐다. 그렇다면 그 교과서에 담긴 내용은 ‘교육을 통해 길러내고자 하는 인간’을 완벽하게 양성할 수 있는 내용을 담고 있을까? 교육자들 중에는 ‘내가 지금과 같이 가르치면... 지금처럼 학교를 경영하고, 지금처럼 장학을 하면.... 완벽한 인격자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국회에서 하는 고위공직자 청문회를 보면 교직에 몸담고 있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한다. 고위공직자가 될 사람들, 청문회에 나온 사람들은 대부분 학교에서 우등생이었다. 학교가 길러낸 ‘출세(?)한 사람’ 그들은 왜 하나같이 ‘부정부패와 비리에서 자유롭지 못할까?’ ‘사회지도층 인사들 중에는 왜 병역기피, 탈세, 부동산투기, 위장전입, 이중국적소유자들이 많을까?...’, 일류대학을 나와 고위공직자나 재벌이 되면 당연히 도덕결핍증환자(?)가 되는 것일까?


교육자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대학에서 전공과목을 이수하고 교사자격증을 취득해 교단에서 교과서를 전달하는 사람’을 교육자라 한다. 그런데 그 교과서에는 진실만을 담고 있을까? ‘교과서 같은 사람’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교과서 내용에 기득권의 논리, 자본의 논리인 이데올로기가 숨겨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가르치는 교사는 얼마나 될까? 교과서만 잘 전달해 주는 교사는 완벽한 교육자일까? ‘내가 교사이니까, 전공한 지식을 교과서대로 학생들에게 주지시키는 것이 교사의 책무의 전부라고 믿어도 좋을까?

부모들은 어떤가? 자녀 교육에 대해, 학교 교육에 대해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아이들이 건강하게 잘 자라게 하기위해 영양가 있는 음식, 좋은 식자재에 관심이 없는 부모는 없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자녀가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에 담긴 내용은 어떤 것인지, 현재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를 그대로 배우면 훌륭한 인격자로 자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얼마나 고민해 봤을까? 학교에만 보내면... 학교 공부만 열심히 해 하면... 좋은 성적만 받으면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고 있을까?


학교가 길러내고자 하는 인간상은 어떤 모습일까? 학교교육을 일컬어 의도적인 교육이라고 한다. 대통령령으로 ‘교육과정’이라는 걸 만들어 교과목을 정하고 내용을 정선해 담아 연간 시수에 따라 교육법이 정한 목적을 달성하는 게 학교교육이다. 목표치에 도달한 정도, 성취도 평가를 잘 받은 학생이 교육의 목표를 잘 달성했다고 믿고 있다. 점수만 좋으면 내가 가르치는 제자가 훌륭한 인격자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교사의 믿음처럼, 학부모의 믿음처럼 자녀들은 기대하는 인간으로 성장하고 있는가?

교육이 무너졌다고 아우성이다. 위기의 걱정을 하고 수많은 교육전문가들이 나서서 대안을 쏟아내고 있다. 그러나 그런 대안들이 하나같이 효력을 얻지 못하고 수십년을 혼란과 방황을 거듭하고 있다. 전문가의 역량이 부족한 탓일까? 아니면 대안이 없어서일까? 교육이란 피교육자의 필요나 요구보다 사회가 필요한 인간,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간을 양성한다.


봉건제 사회에서는 봉건제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간을...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인간을... 사회주의에서는 사회주의가 필요로 하는 인간을... 그런 가치관을 가진 사람을 양성하는 게 교육이다.

그렇다면 자본주의가 길러내고자 하는 인간, 자본주의가 길러내 주기를 바라는 인간은 어떤 인간상일까? 자본주의 대한민국의 학교에서 길러내고자 하는 인간은 '홍익인간(홍익인간의 핵심은 '이타주의')이다. '지덕체를 겸비한 조화로운 인간의 양성'(교육법 제1조)이 교육의 목표다.

그렇다면 학교는 홍익인간이라는 교육목표, 지덕체를 겸비한 조화로운 인간이라는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가? 학교의 교훈이나 급훈을 보면 하나같이 ‘근면한 사람' '정직한 사람, 성실한 사람’이다.

지식기반사회에서는 ‘창의적인 사람’을 길러내겠다는 학교도 많이 생겼다. 그런데 학교는 그런 목표를 달성하고 있는가?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목표수정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옳다. 그런데 학교는 그럴 생각이 없는 모양이다.

식민지시대 학교는 피교육자인 학생들을 똑똑한 사람으로 길러내기 위해서라기보다 충직한 일본인(황국신민)으로 키우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정직, 성실, 근면’한 사람은 오늘날 길러내고자 하는 인간상이 맞을까? 교육수요자가 원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일까? ‘근면, 정직, 성실’은 상대적인 가치개념이다. ‘정직, 성실, 근면이란 상대적인 개념이다. 여건에 따라 전혀 다른 뜻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의식이 없는 노동자, 의무만 있고 권리가 없는 노동자에게 ‘근면한사람, 성실한 사람이 되라’는 것은 자본이 바라는 기대치이다. 정직, 성실, 근면한 인간을 양성하겠다는 것은 개인이 행복한 사람, 훌륭한 인격자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교사나 학부모가 원하는 인간상이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과정이 생략되고 결과로 승자를 가리는 사회를 막가파식 사회라고 한다. 요즈음 텔레비전을 보면 온통 서바이벌 게임투성이다. 패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승자만이 살아남는 세상. 교육을 비롯해 모든 게 상품이요, 약자는 공존이 아니라 폐기처분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가치관이 지배하는 세상으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학교는 왜 시비를 가리고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가치관을 가르치지 않는가? 사람다운 생각, 이웃과 더불어 사는 공존하는 가치보다 영어수학 점수 몇점이 더 중요한가?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 학교! 사리분별을 할 줄 알고 선악을 가릴 수 있는 세계관을 가진 인간을 양성하는 것이 불의한 권력이나 자본이 원하지 않는 인간상이기 때문은 아닐까?
 


독과점은 시장에서만 나쁜 게 아니다. 교육이 상품이 된 지 오래지만 교육수요자의 권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내 아이를 학교에 맡겼다는 이유만으로 죄인이 되는 정서가 남아 있는 사회에서 교육수요자는 아직도 죄인이다. 독과점체제가 된 공급자는 양심적일까? 시장에서 공급자는 비판받고 검증하면서 교육의 수요자는 공급자의 독과점에 순응해야 착한 수요자인가? 7차교육과정 이후 교과서가 공급자의 의도대로 바뀌고 있다. 정부가 '2009 개정 교육과정'의 초·중·고교 역사 교육과정을 고시하면서 '민주주의'라는 용어를 모두 '자유민주주의'로 바꾸어 놓았다. 영어수학과 같은 도구적인 교과는 예외로 치더라도 도덕과 사회, 정치와 같은 교과에 담긴 이데올로기는 수요자인 피교육자가 원하는 가치를 담지 못하고 있다.

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만 있는 게 아니다. 인민민주주의도 있고 사회민주주의도 있다. 그 수많은 민주주의라는 개념을 ‘자유민주주의’로 한정하면 피교육자는 민주주의에 대한 개념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는 주로 '반공'과 동일시되고, 이렇게 되면 이승만·박정희 전 대통령 등의 독재를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수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이었다고 가르쳐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걱정이다. 친일의 후예들, 수구세력이 교과서 편성권을 독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수요자는 공급자의 폭력에 속수무책일 뿐이다.


전교조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교육내용을 말하면 색깔칠을 당한다. ‘왜 아이들이나 열심히 가르치지 정치투쟁이나 하느냐?’고.. 10월유신을 한국적 민주주의요, 5·16을 혁명이라고 기록한 교과서를 열심히 가르치는 교사가 되라고... 교과서가 틀렸으니 고쳐서 바른 역사관을 갖게 하자는 교사와 틀린 교과서를 열심히 가르치는 교사 중 누가 더 훌륭한 교사인가? 누가 더 교육자다운가?

‘정치는 정치인에게 맡기고 농부는 농사나 짓고 선생들은 아이들이나 열심히 가르치라’고 한다. 비정규직법을 만들어 정규직 노동자가 불이익을 받는데.. 한미 FTA가 통과되면 죽도록 농사를 지어도 농산물 가격이 폭락하는데... 평생 노동자로 살아갈 아이들에게 자본가의 가치관을 갖도록 의식화하는 교육을 열심히 하라고 한다. 열심히 노력만 하면 출세하고 성공할 수 있다고들 한다. 죽도록 일해도 일서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라면만 먹고 돈을 모으다가 병이 걸려 병원비로 다 날리고 노숙자가 된 사람들에게 그런 말이 통할까? 기본과 원칙부터 세워야 한다. 마취된 교과서로 병든 가치관을 갖도록 갈치는 교육은 차라리 폭력이다.

- 이 기사는 경남민예총 ‘시사IN 예술人’에도 보냈습니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정치2011.08.25 05:30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이 쓴『자서전』에는 미국인들이 지켜야할 열세 가지 덕목을 제시했다. 절제,침묵,질서,결의,절약,근면,성실,정의,중용,청결,평온,순결,겸손을 미국인들이 추구해야할 아메리칸 드림의 성취 조건이란다. 이상적인 사회라면 인간으로서 누구나 지켜야 할 당연한 도리요, 건강한 국민, 자질 높은 국민의 상이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미국이 저지른 만행과 이라크에서 이라크 국민을 살상한 것이 아메리칸 드림이라면 이는 건강한 국민의 자질이 아니라 비판자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이데올로기다. 청교도주의(puritanism)의 전통에 바탕을 둔 이들의 꿈이라는 게 ‘능력을 발휘해 돈과 명예를 얻는 것’이라는 것도 우습지만 전 세계를 상대로 한 미국의 패권정책이라는 게 지식인들을 침묵케 하는 바탕 위에나 가능하다는 논리로 이해가 안 된다.


군주는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이 필요로 했지만 자신에 대해 비판을 하는 사람은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독재자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이러한 독재자의 성향을 악용해 출세하고 인정받기 위한 경쟁은 치열했을 것이고 그 경쟁이 공정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을 것 같다.



군주를 위한 충성이 시나 음악이라는 예술의 형식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철학이나 종교의 외피를 쓰고 탄생하기도 했다. 중세 종교가 정치를 압도하던 시대에 찬란했던 예술은 권력의 크기에 비례해 꽃필 수 있었던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인들의 역할을 긍정적인 측면만 아닌 곡학아세의 도구로, 자신의 출세를 위해 진실을 호도해가면서 출세도 하고 인정받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불의한 권력이 지배하는 시대나 전제 군주가 지배하던 사회에서는 진실을 말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고 진리를 외치다 혹은 죽고 혹은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경우 침묵이 생존의 수단이 되기도 해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스스로 불이익을 당하기를 자처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오늘날이라고 달라질 리 없지만 지식인들의 침묵은 독재 권력에게는 정당성을 약자에게는 운명론을 정당화시키는 역할을 하게 마련이다. 몇 년 전 강정구교수 사건이 그 좋은 예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학자가 학문적인 양심에 따라 주장한 내용을 놓고 색깔을 뒤집어씌우고 그것도 모자라 실정법운운하며 진흙탕 쌈을 두고 진보와 보수라는 흑백논쟁으로 왜곡한 사건이 그렇다. 이렇게 온통 나라가 소용돌이치고 있을 때 그 잘난 역사를 했다는 수많은 학자님들. 누가 나서서 “그 사람 강정구 말이 맞소!” 한 사람 몇이나 있었나?


전문성 얘길 꺼내면 자존심 상해할 사람도 있겠지만 역사적으로 지식인들에게 후한 대접을 해 온 것은 진짜 전문성 때문만은 아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논리나 그 분야의 나름대로의 지식으로 다수를 설득시킬 수 있는 영향력(권력이라 해도 좋고...)을 잠재우기 위한 당근책이라는 걸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이들 중 정말 자신이 잘나고 똑똑해서 대접받는 것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는 사람들이라면 이 희소가치의 배분에 특혜를 받는 대가로 희생을 운명이라고 주장해 순진한 민초들을 마취시켜 온 것이 그들이다. 그러나 이들이 유명인사가 되고 오히려 피해자는 가해자면에서 그들의 존경까지 받고 살아 왔다.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역대 독재권력이 폭력을 행사할 때 언론과 지식인들의 침묵은 간접적인 공범이 아니리고 강변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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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교육자료2010.12.04 21:29


아래 글은 운영자가 학교에 재직하고 있을 때 학생들에게 틈틈히 들려줬던 이야기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학교는 어떤 인간을 양성하고 있을까? 우리나라 교육이 기대하는 인간상은  '홍익인간(홍익인간의 핵심은 '이타주의')의 이념' 아래 '지덕체를 겸비한 조화로은 인간의 양성'(교육법 제1조)이다. 그렇다면 학교가 길러내고자 하는 이상적인 인간상은 어떤 사람일까? 통계를 내보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학교의 교훈이나 급훈은 '근면한 사람' '정직한 사람' 또는 '성실한 사람'이다. 

정직, 근면, 성실한 인간이 학교가 길러낼 이상적 인간인가? 인간이 사회적 존재인데 개인만 도덕적이기를 바라거나 완벽하기를 바라는 교육은 옳은 교육이 아니다. 타락한 사회, 부도덕한 사회에서 '착하기만 하다거나 정직하기만 한 사람을 키우는 것은 민주적인 교육이 아니다. 불의한 사회에서 개인이 성실하기만 하거나 정직하기만 한 사람, 착하기만 한 사람은 필연적으로 희생자가 될 수밖에 없다.


일찍이 예수 당시의 사회는 오늘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순박한 사회였지만 예수님은 '비둘기처럼 유순하고 뱀처럼 지혜로워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오늘날같이 눈뜨고 코 베어 가는 세상에 학교가 길러내는 착하고 정직한 사람, 성실하기만 한 사람을 길러내도 좋을 까? 

예수님은 2000년 전에 '비둘기 같은 사람, 뱀같이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고 가르쳤다. 왜 그렇게 가르쳤을까? '이웃(자기 집 근처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사랑하기를 네 몸처럼하라'고 가르친 예수다.

죄인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목숨까지 내놓은 예수님이 뱀같은(뱀은 마귀를 상징한다) 사람이 되라고 했을까? 아마 예수님은 사람이란 인간다운 인간, 정정당당한 인간으로 살기를 원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현실을 보자. 학교에서 착하기만 한 학생이 어떤 대접을 받는가? 가정에서 끝없이 희생만 하던 아내는 인간으로서 정당한 권리를 인정 받았는가? '개도 무는 개를 돌아 본다'든지 '우는 아이 젖 준다'느니 하는 말이 왜 생겼을까? '오른 뺨을 치거든 왼 뺨을 내놓아라'는것은 상황 논리지 오른 뺨을 치고 손이 근질근질한 사람에게 다른 뺨을 대주라는 말이 아니다.  

지금까지 학교에서 학생은 '품행이 방정하고 온순한' 학생이 모범생으로 포상을 받았다. 그 '품행이 방정하고...' '정식하고 성실한....' 인간은 혹시 자본이 요구하는 인간상이 아닐까? '오리를 같이 가자는 사람에게 십리를 함께 가 주고 겉옷을 달라는 사람에게 속옷까지 내 주어라. 구하는 사람에게 거절하지 말라'던 예수다. 그런 성현이 착하기만 하고 성실하기만 한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가르친 이유는 무엇일까? 



허세를 떨거나 과장하는 사람은 수치를 당한다. 그러나 일한 대가를 받지 못해도 운명으로 아는 착하기만 한 사람은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 자신이 노력한 만큼 정당하게 대접받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권리를 침해당하고도 침묵하는 것은 건강한 시민이라고 할 수 없다. 학교는 무조건 성실하고 정직하고 의무에만 충실해 자신의 권리를 찾지 못해서는 안 된다. 민주시민은 자신의 권리를 정당하게 행사하고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정당하게 대가를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을 사는 사람은 비둘기처럼 유순해야겠지만 자신의 소유나 권리를 지킬 줄 아는 뱀같은 사람이기도 해야 한다. 노동자의식이 없는 노동자는 노동자가 아니라 일하는 기계다. 의무는 있고 권리는 없는 사람은 노예일 뿐이다. 여성이기 때문에 다소곳하고 순종적이고 소극적이어야 한다는 논리는 시대에 뒤떨어진 논리다. 자신은 없고 평생 남편의 시중을 드는 그래서 남편의 자식을 낳아주는 그리고 자식을 위해 끝없이 희생하는 것을 위대한 어머니라 해서는 안 된다. 일방의 희생으로 상대방이 누리는 행복은 진정한 행복일 수 없다. 의무는 없고 권리만 있는 사람을 노예라고 하듯이 권리를 두고도 행사할 줄 모르는 사람 또한 바보다. 학교는 언제까지 착하고 정직하기만 한 사람, 성실하기만 한 인간을 길러낼 것인가?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인성교육자료2010.11.28 07:51



이 기사는 필자가 학교에 재직시절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들려줬던 얘기를 재구성한 것입니다 
 
수업시간에 “자기가 가장 갖고 싶은 게 무엇인가? “라고 학생들에게 불으면 ‘돈, 여자 권력, 명예…….’ 이렇게들 대답한다. 맞는 말이다. 그건 누구나 갖고 싶은 거지. 그걸 일컬어 희소가치라고 하는 거야. 희소가치[稀少價値]라는 것은 드물고 적기 때문에 인정되는 가치란다. 다이아몬드와 물을 보면 알지. 물은 하루만 없어도 큰일 나는 소중한 물건인데 다이아몬드는 없어도 살지 않니? 그 다이아몬드 값이 비싼 이유가 희소가치 때문이라는 거야.

 그런데 희소가치라고 하는 그 돈과 여자와 권력…….그런 걸 어떻게 자기가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문제란다. 지금부터 그 얘길 해보자.(이런 얘길 하면 아이들이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낚시꾼이 고기를 많이 잡으려면 낚시도구만 가지고 아무렇게나 낚시를 던져놓고 기다린다고 되는 게 아니란다. 어떤 바다에는 어떤 물고기가 많고 어떤 물고기는 무슨 먹이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야 원하는 물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는 거지.

그런데 사람들은 어리석은 낚시꾼처럼 물고기만 잡겠다고 덤비니 시행착오를 거듭할 수밖에 없지 않겠니?(그렇게 기를 쓰고 잠을 자던 아이들이 이번 시간에는 잠을 자겠다는 눈치가 보이지 않는다. 내친 김에 ‘한 시간 특강을 하자’ 마음먹고 시작해 본다)

                                                         <사진자료 : 네이버 이미지에서>

-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

길을 가다가 첫눈에 참 맘에 드는 여자를 만났다고 하자. 그렇다고 “야! 너 나하고 결혼하자!”하고 덤비면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순서를 밟아야 할까? 희소가치도 마찬가지다. 사람이 감각적으로 인지하는 현상에는 겉과 속이 다르다. 사과 껍질이 빨갛다고 속까지 빨간 건 아니다. 본질을 모르고 현상이 본질이라고 착각한다면 그 희소가치를 내 것으로 만들기는 영 불가능하지. 그렇다면 그 본질을 찾는 여행을 해보자.

- 겉과 속은 다르다 -

우선 ‘어떤 바다에는 어떤 물고기가 많이 사는가?’를 안다는 것. 그게 중요한거야. 그렇다면 그 바다와 낚시, 미끼 그리고 낚시장비는 어떤 것인가 살펴보자.
가장 중요한 것은 희소가치를 가지고 행복하게 사는 게 중요하지 않니? 그런데 그 희소가치라는 게 무엇인지부터 알아보자.

살아가면서 자주 듣는 말 중에 ‘아는 것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지 않니? 아무리 위대한 시인이 쓴 시라도 그 시를 해득할만한 안목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시의 진가를 모를 수밖에 없단다. 어디 시만 그렇겠니? 정치자금을 준 대가로 특혜를 받고 탈세를 하고 내수가격을 올려 치부하는 재벌의 정경유착을 나와 무관하다고 생각하는 순진한 사람들만 사는 세상이라면 어떻게 세상이 바뀌겠니? 그러니까 사람들은 자기 수준만큼 보이기 마련이라고 하지 않니? 이런 사람들일수록 아무리 부지런히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자신의 무능이나 운명 탓으로 돌리기 마련이거든…….  

                                                        <사진 : 네이버 이미지에서>

희소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먼저 옛날사람들은 어떻게 살았는지 그걸 먼저 알아야 한단다. 옛날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왜 농민들은 죽을 지경으로 심한 노동에 시달리면서 일했는데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했는가……. 이런 역사를 배워야 하고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어떤 것이 옳은 것이고 어떤 것이 그런 것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철학을 배워야 한단다.

뿐만 아니라 돈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돈을 벌겠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란다. 그 돈의 흐름이나 가치를 알기 위해서는 경제나 경제사를 배워야 한단다. 우리가 학교에서 영어나 수학을 잘하면 출세도 하고 훌륭한 사람대접 받는 건 생각해 보면 웃기는 얘기란다. 영어나 수학이 살아가는데 필요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영어나 수학은 살아가는데 필요하기는 하지만 모두가 영어와 수학을 그렇게 깊이 배울 필요가 있겠느냐는거지.

그러나 이게 옳은지 저게 옳은지 판단하지 못한다면 인생을 실패할 수도 있고 방황할 수도 있지 않겠니? 그 판단의 기준이 되는 세계관이나 철학을 학교가 가르쳐 주지도 않고 그런 건 중요하다고 취급도 하지 않는 학교가 우습지 않니?(이 문제도 후에 자본주의의 본질을 배우면 이해할 수 있단다)  

먼저 원하는 물고기를 낚기 위해 우선 역사부터 알아보자.  

 학교에서 가르쳐주는 역사란 어떤 것일까? 지금은 바뀌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가가 ‘이건 필요한 역사적 지식이다‘라고 선별해 골라 묶은 ’국정교과서‘라는 걸 배우게 했지. 요즈음 그 속셈이 드러나고 말았지만 그 국정교과서를 만들던 국정교과서 편수관들이 일제시대 민족을 배신한 대가로 일본의 은혜를 입었던 사람들이거나 그 후손이었다는 걸 알게 되면서 교과서를 그렇게 만든 이유를 알 수 있지 않겠니? 

특히 고대사를 많이 배우게 하고 현대사는 거의 배우지 못하게 한 이유도 말이다. 하여간 국정교과서라는 걸 배우면 암기한 지식의 량으로 사람의 가치를 서열매기게 된 이유를 알 수 있단다. 이제부터 그 역사를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 알아보자.

학교에서 가르쳐 주는 교과서에는 옛날사람들이 살아 온 내력이라는 게 무조건 ‘아무게네 집에 벼를 몇 섬하고 노비는 몇이나 있었고…….’ 이런 지식을 많이 암기하도록 잡다한 지식을 나열해 놓은 식이었단다. '광개토대왕이 장수왕이 몇 년에 태어나 몇 년에 죽었다든지 하는 지식보다는 농부들이 열심히 일했는데 왜 일하지 않은 양반들이 호의호식하며 살았는가?' 그게 더 중요한 게 아닐까?

텔레비전에 나오는 사극을 보면 왕이나 양반은 인기도 있고 잘생긴 사람이,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뭐가 모자라도 한 참 모자라는 사팔뜨기, 팔푼이가 등장해 양반의 고귀한 삶의 조역이 되는 모습을 보면서 ‘상놈들은 저렇게 무지막지하게 생겼고 못났으니까 저런 대접을 받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거란다. 그런 걸 자꾸 보다보면 차차 나도 못 배우고 못났으니까 가난하게 사는 게 당연하다‘는 운명론자가 되고 마는 거란다.

이렇게 나와 무관하게 보이도록 쓴 역사를 영웅사관, 또는 왕조사관이라 고 하는 거야. ‘어떤 색깔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느냐’ 그것도 없이 역사적 지식을 많이 안다고 훌륭한 사람 취급받는다는 건 웃기는 얘기 아니니?(텔레비전에서 돈을 걸어놓고 이렇게 단편적 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가의 여부로 보상을 해주는 것도 일종의 이데올로기가 될 수 있는 거지. 그런데 일반인도 아닌 학생의 상대로 암기한 지식의 양으로 영웅을 만드는 ‘골든 벨을 울려라’와 같은 프로그램도 그런 아류라고 볼 수 있단다.)

나와 무관한 역사적 지식이라는 걸 배우는데 내 소중한 인생을 허비해야 한다는 건 좀 생각해 볼 일이 아니겠니? 그래서 내가 민중이면 민중사관에 의한 역사를, 내가 지배계급에 속한다면 영웅사관이나 왕조사관에 의해 씌어진 역사를 배우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드는 구나.

분명한 사실은 역사를 배우면서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걸, 내 민족이 우리 문화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는 걸, 우리 선조들이 피땀흘린 대가로 내가 이정도 자유를 누리고 산다는 역사의식을 깨닫지 못한다면 그런 역사는 가짜라는 거지. 그런 역사는 배울 가치가 없는 게 아닐까? 민족을 배신한 대가로 개인의 부귀영화를 누렸다면 그 배신으로 다수의 동족이 당한 고통을 덮어둔다면 누가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일할 것인가?

역사는 안다는 것은 나를 아는 것이요, 나의 정체성을 깨닫는 일이다. 민족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를 깨닫지 못하는 역사는 가짜다. (계속)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사진설명 : 어느 고등학교 교실 벽에 붙어 있는 사진이다. 이소룡의 주먹이 뜻하는 건 '센팅'인데 센팅이란 '주먹으로 해결하자 못할 일이 없다'는 뜻이란다. 이 선생님 운영하는 학급의 급훈은 '대학가서 미팅할래 공장가서 미싱할래'였다>

상대방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융통성이 없어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을 고지식한 사람이라 한다. 변칙을 허용하지 않고 타협을 거부하는 고지식한 사람. 우리 주변에는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남에게 손해를 주거나 피해를 끼치는 일없이 살아가는 그런 사람을 사람들은 고지식하다고 한다. 이런 사람을 순진한 사람라고 표현해도 틀린 말은 아닐듯하다. 순진한 사람은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그래서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사악한 세상에서는 어떤 대접을 받을까?

‘사악한 세상에서 순진하거나 정직하기만 한 사람은 바보다’

선생님들 모임에서 학교마다 교육목표가 유별나게 ‘정직’이니 ‘근면’이니 하는 표현이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얘기 끝에 나온 결론이 그랬다. 왜 ‘정직’이니 ‘근면’과 같은 그런 학교교육목표가 많을까? 식민지시대 조선학생들의 머릿속에 ‘황국신민화’라는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일제가 꺼내 든 카드가 바로 ‘근면, 정직’과 같은 교육정책이다. 천황의 백성이 된 게 감사해 목숨이라도 내놓고 싶은 생각을 갖게 하도록 만드는 식민지 교육. 조센징 학생들에게는 당연히 ‘지순, 근로, 경애, 양순, 신애... ’와 같은 체제순응적인 인간을 양성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해방 후에는 왜 정직하거나 순진한 체제순응적인 인간을 육성하기보다 정의감이 강하고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을 길러내기를 꺼려했을까?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보면 결론은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다. 식민지 시대 일제가 허용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사람은 누굴까? 민족해방을 위해 간도니 만주를 쫓겨 다니며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의 아들딸일까? 최소한 현대교육이나 경성제국대학, 동경제국대학과 같은 대학에 다닐 수 있었던 학생들은 최소한 경제력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그런 시혜를 받고 사회 각 영역에서 요직을 차지할 수 있었던 사람은 당연히 애국지사의 자녀가 아님이 분명하다.

나라를 위해 지하에서 혹은 이국땅으로 쫒기며 살아온 사람들의 자녀들이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해방정국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영역에서 주도권을 잡던 사람들의 자녀가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런 교육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들은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협조한 친미주의자들과 손잡고 재빨리 기득권층으로 재편되면서 정의감이나 민족에 대한 애착심보다 순진한 인간, 착하기만 한 인간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을 것이다. 이들은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정의감이나 민족에 대한 뜨거운 애국심을 길러주는 교육을 할 리 없었던 것이다.

말이란 의사전달 수단뿐만이 아니다. 순진한 사람들은 목적을 가지고 시도하는 악의적인 말이라도 의심 없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런 사람일수록 ‘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이 옳고 부엌에 가면 며느리 말이 옳다’는 속담처럼 상황논리에 매몰되는 경양이 강하다. 말의 성찬시대를 살면서 사람들은 말 속에 담긴 의미에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상대방의 언술에 마취되기 십상이다. 판단의 기준이 없는 사람. 순진하기만 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의 성찬에 곧잘 방향감각을 잃고 마는 것이다.

말은 이데올로기다. 상대방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말은 언어로서 구실이 아닌 상대방에게 자신의 논리를 전달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말의 상대성을 무시하고 단순히 의사 전달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순진한(?) 사람이다. 상대방이 전하는 의도를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순진한 사람은 개인적으로는 손해를, 사회적으로는 진보에 발목이 잡히고 말뿐이다, ‘크다’는 것은 ‘작은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개념이다.

‘부지런 하다’는 말도 ‘게으르다’는 말이 있으니까 존재하는 개념이다. 착한사람과 악한사람, 성실한 사람과 불성실한 사람.. 등 말에는 상대적인 개념이 있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사악한데 특정한 사람만 정직하게만 살라는 것은 바른 교육일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늘 속히고 이용당하고 손해만 보고 살아야 한다. 이제 학교도 순진하기만한 사람 근면한 사람(일밖에 모르는 사람)을 길러낼 것이 아니라 시비를 가릴 줄 알고 사리가 분명한 정의감이 강한 국민을 길러내야 할 때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상대방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고 융통성이 없어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을 고지식한 사람이라 한다. 변칙을 허용하지 않고 타협을 거부하는 고지식한 사람. 우리 주변에는 주관적이고 자기중심적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남에게 손해를 주거나 피해를 끼치는 일없이 살아가는 그런 사람을 사람들은 고지식하다고 한다. 이런 사람을 순진한 사람라고 표현해도 틀린 말은 아닐듯하다. 순진한 사람은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그래서 권모술수가 난무하는 사악한 세상에서는 어떤 대접을 받을까?

‘사악한 세상에서 순진하거나 정직하기만 한 사람은 바보다’


선생님들 모임에서 학교마다 교육목표가 유별나게 ‘정직’이니 ‘근면’이니 하는 표현이 많은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얘기 끝에 나온 결론이 그랬다. 왜 ‘정직’이니 ‘근면’과 같은 그런 학교교육목표가 많을까? 식민지시대 조선학생들의 머릿속에 ‘황국신민화’라는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 일제가 꺼내 든 카드가 바로 ‘근면, 정직’과 같은 교육정책이다. 천황의 백성이 된 게 감사해 목숨이라도 내놓고 싶은 생각을 갖게 하도록 만드는 식민지 교육. 조센징 학생들에게는 당연히 ‘지순, 근로, 경애, 양순, 신애... ’와 같은 체제순응적인 인간을 양성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해방 후에는 왜 정직하거나 순진한 체제순응적인 인간을 육성하기보다 정의감이 강하고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사람을 길러내기를 꺼려했을까?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보면 결론은 어렵지 않게 얻을 수 있다. 식민지 시대 일제가 허용한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사람은 누굴까? 민족해방을 위해 간도니 만주를 쫓겨 다니며 독립운동을 하던 애국지사들의 아들딸일까? 최소한 현대교육이나 경성제국대학, 동경제국대학과 같은 대학에 다닐 수 있었던 학생들은 최소한 경제력이 없이는 불가능했다. 그렇다면 그런 시혜를 받고 사회 각 영역에서 요직을 차지할 수 있었던 사람은 당연히 애국지사의 자녀가 아님이 분명하다.

나라를 위해 지하에서 혹은 이국땅으로 쫒기며 살아온 사람들의 자녀들이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해방정국에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각 영역에서 주도권을 잡던 사람들의 자녀가 그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런 교육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들은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에 협조한 친미주의자들과 손잡고 재빨리 기득권층으로 재편되면서 정의감이나 민족에 대한 애착심보다 순진한 인간, 착하기만 한 인간을 양성하는 데 힘을 쏟았을 것이다. 이들은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는 정의감이나 민족에 대한 뜨거운 애국심을 길러주는 교육을 할 리 없었던 것이다.

말이란 의사전달 수단뿐만이 아니다. 순진한 사람들은 목적을 가지고 시도하는 악의적인 말이라도 의심 없이 마음을 열고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그런 사람일수록 ‘방에 가면 시어머니 말이 옳고 부엌에 가면 며느리 말이 옳다’는 속담처럼 상황논리에 매몰되는 경양이 강하다. 말의 성찬시대를 살면서 사람들은 말 속에 담긴 의미에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상대방의 언술에 마취되기 십상이다. 판단의 기준이 없는 사람. 순진하기만 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의 성찬에 곧잘 방향감각을 잃고 마는 것이다.

말은 이데올로기다. 상대방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말은 언어로서 구실이 아닌 상대방에게 자신의 논리를 전달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말의 상대성을 무시하고 단순히 의사 전달 수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순진한(?) 사람이다. 상대방이 전하는 의도를 감지하지 못할 정도로 순진한 사람은 개인적으로는 손해를, 사회적으로는 진보에 발목이 잡히고 말뿐이다, ‘크다’는 것은 ‘작은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개념이다.

‘부지런 하다’는 말도 ‘게으르다’는 말이 있으니까 존재하는 개념이다. 착한사람과 악한사람, 성실한 사람과 불성실한 사람.. 등 말에는 상대적인 개념이 있다. 마찬가지로 세상이 사악한데 특정한 사람만 정직하게만 살라는 것은 바른 교육일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늘 속히고 이용당하고 손해만 보고 살아야 한다. 이제 학교도 순진하기만한 사람 근면한 사람(일밖에 모르는 사람)을 길러낼 것이 아니라 시비를 가릴 줄 알고 사리가 분명한 정의감이 강한 국민을 길러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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