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없음2016.07.31 06:42


“돈만 밝히는 기복신앙, 한국불교와 인연 끊겠다”

하버드대 출신 미국인 현각 스님이 실망한 한국불교와 인연을 끊겠다”고 선언해 파문이 일고 있다. 문화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현각스님이 한국불교에 살망한 이유는 '상명하복식 유교적 관습, 국적·남녀차별, 신도 무시, 기복신앙을 비롯한 돈만 밝히는 한국 불교가 싫다는 것이다.

살다보면 이해 못할 일도 만나고 오해를 살 일도 있지만 돈을 밝히는 종교의 타락은 어제 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거대한 교회 그리고 가람마다 거대한 불사를 일으키기 위해 모금을 하는 모습을 보면 비위가 상하도 못해 역겹다. 얼마나 돈이 필요했으면 스님과 수녀가 한 웨딩 업체 광고에 손을 잡고 등장해 두 성직자가 결혼을 하는 것 같은 인상을 주는가 광고를 나돌기도 할까? 

실제로 교회나 성당에 가 보면 종교단체가 참 돈을 밝히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빈손으로 교회나 절에 가기 어렵다. 가난하고 소외받은 이들의 안칙처가 되어야 할 종교가 가난하고 소외받는 이들의 심터가 되지 못하고 부자들의 안식처기 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생각이 들 정도다.

교회나 성당, 절이 운영을 위해서는 돈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데 목회자에게 더 많은 월급을 주기 위해 또는 더 큰 교회 더 큰 성당, 더 큰 절을 짓고 헌금을 강요하다시피하는 교화나 가람은 가난한 이들이 맨손으로 가기 부끄럽게 만든다. 헌금시간이 끝나면 목사님들이 헌금한 손에 축복을 하고... 빈손으로 간 사람이 얼마나 위축되고 미안하고 부끄러울까? 

헌금을 낸 사람을 주보에 게시하고 가람에는 기왓장에 명단을 적고 석탄일이 되면 헌금한 사람의 이름을 등에 새기고... 더 많은 돈을 낸사람이 주지나 목사님으로부터 대접받고.... 남루한 옷을 입고 세상 근심 한기득 짊어진 초라한 모습의 신자를 함께 아파하고 상처를 어루만져 주지 않는가? 돈을 밝히는 종교...얼마나 꼴볼견이었으면 연각스님이 '한국불교와 인연을 끊겠다'고까지 했을까?

 2000여년 전에 예수는 천국에 가고 싶어 잿밥에만 맘에 있는 청년에게 말한다. “만일 네가 완전하게 되려거든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목회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믿는 예수님이 그렇게 호화롭고 거대한 성당을 지어라고 가르친 일이 있는가? 스님에게 묻고 싶다. 부처님이 그렇게 화려한 불사를 일으키고 격식 차린 예불로 부처님를 경배하라고 가르친 일이 있는가?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아닌 사람의 눈, 권력의 눈치나 보는 세상 지향적인 종교는 종교가 아니다. 그런 교회는 예수님이 미워하신다. 그런 가람은 부처님이 싫어 하신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싫어하는 교회는 종교가 아니다. 타락한 종교가 어떻게 내세를 말하고 어떻게 소외받고 가난한 사람들의 안식처가 되겠는가? 예수님은 말씀하셨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라고... 당신네들의 귀에는 예수님의 목소리거 들리지 않는가? 부처님의 가르침에 왜 귀를 막는가? 권력에 기생하고 자본에 기생해 가난한 이들의 가슴에 상처를 주는 교회여, 가람이여....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에는 오래 전에 썼던 글을 여기 올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2007년 09월 23일 (바로가기▶) '기독교와  자본주의는  공존할 수  없다'라는 주제로 오마이뉴스에 썼던 글입니다.


기독교와 자본주의는 공존할 수 없다


기독교가 타락했을까, 자본주의가 변절했을까?

2007.09.23 14:02

 기독교와 자본주의는 공존할 수 없다. 공유사상의 기독교와 사유사상의 자본주의는 물과 기름처럼 공존할 수 없는 태생적인 한계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런데 어떻게 기독교는 자본주의와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는가? 모순된 이념이나 체제가 상호 공존할 수 있다는 것은 어느 한 쪽이 변절했거나 아니면 타협했다는 증거다. 자본주의가 변질됐거나 아니면 기독교가 타락하지 않았다면 결코 공존할 수 없는 게 기독교와 자본주의 관계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두 가족은 한 지붕 두 가족처럼 수백년동안 사이좋게 공존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세상바라보기>

기독교와 자본주의는 이론상 공존할 수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기독교는 재산의 공유를 통한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하는 반면 자본주의는 철저하게 개인주의에 바탕을 두고 이기주의를 실현하고 있다. 기독교의 사상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평등한 사회를 이상적인 국가로 규정하는 반면 자본주의는 자유라는 가치를 금과옥조로 생각하고 이기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혹자가 평등이나 기회균등을 말하면 서슴없이 빨강 색칠을 당해야 한다. 또한 기독교의 선(善)은 아카페 사랑이지만 자본주의는 ‘이익이 선’이라는 자본의 논리, 상업주의에 근거하고 있다. 

기독교의 이상은 천국이다. 천국이란 무한경쟁으로 경쟁대상자를 밟고 이기지 않으면 살아남는 자본의 생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감각적이고 이기적인 사람, ‘이익이 선’이라는 자본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은 갈 수 없는 곳이 천국이다. 예수를 보라! 기독교인들의 이상적인 인간상은 예수다. 원수를 위해 하나뿐인 목숨까지 내놓을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을 닮지 않고서는 결단코 천국에 갈 수 없다고 성서는 가르치고 있다.

자본주의는 어떤가? 지본주의란 생산수단을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도록 허용된 사회, 이름 그대로 사람이 아니라 자본이 주인인 사회다. 좀 더 노골적으로 표현한다면 돈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의 여부에 따라 사람의 가치가 매겨지는 사회가 자본주의다. 돈이 되는 것이라면 사람을 죽이는 무기를 만들어도 죄가 되지 않는다. 한화 김승연 회장의 집행유예 판결과 배임ㆍ횡령혐의로 1심에서 실형이 선고된 정몽구 현대기아차 그룹 회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한 법원의 판결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형식적으로 인간의 존엄성, 자유, 평등을 이념으로 한다지만 이러한 이념이 완벽하게 실현되고 있는 나라를 찾아보기 어렵다.

공존할 수 없는 기독교와 자본주의가 공생할 수 있게 된 것은 자본주의가 아니라 기독교의 변질이다. 오늘날 교회는 공유사상이 아니라 철저하게 천민자본주의를 빼 닮았다. 

‘왼뺨을 때리면 오른뺨을 내어주며,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옷까지 벗어주며, 오리를 가자는 자에게 십리를 가주고, 구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며,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이 예수의 사상이다. 

한 청년이 예수께 찾아와 물었다.

“선생님, 제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겠습니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다.

“생명으로 들어가려거든 계명을 지켜라”

청년이 대답했다. 

“저는 언제나 그 계명들을 다 지키고 있습니다. 아직도 무엇을 더 해야 합니까?” 

예수께서는 다시 청년에게 이르셨다. 

“만일 네가 완전하게 되려거든 가서 네가 가진 것을 다 팔아 그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하늘에서 보화를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말씀을 들은 젊은이는 큰 부자였으므로 침울한 표정으로 돌아갔다. 

예수님은 떠나는 부자청년을 보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 다시 말하지만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

예수님이 살아계신다면 오늘날의 교회를 보고 뭐라고 하실까? 교회는 이미 예수의 가르침과는 정 반대의 길을 부자청년처럼 떠난 지 오래다.

이제 남은 답은 분명하다. 교회가 변절했다면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정체성을 찾던지 아니면 기독교라는 이름을 ‘자본주의교’라고 바꾸든지 해야 한다. 신의 뜻을 저버리고 어떻게 ‘이 땅에 천국을 건설하겠다’는 것인가? 자본주의와 어정쩡하게 한 지붕 두 가족처럼 공생하는 것은 하나님만 속이는 것이 아니라 사람까지 속이는 이중 죄를 짓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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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분류없음2012.12.07 07:00


 

"하늘에 계신" 하지 마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마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라고 하지 마라.
아들딸로 살지 않으면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 하지 마라.
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라고 하지 마라.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지 마라.
내 뜻대로 되기를 기도하면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라고 하지 마라.
죽을 때까지 먹을 양식을 쌓아두려 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라 하지 마라.

누구에겐가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라 하지 마라.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악에서 구하소서"라 하지 마라.

악을 보고도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않으면서.

 

"아멘"이라고 하지 마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우루과이 한 작은 성당벽에 적혀 있는 글이다>

 

기도(祈禱)란 ' 신 또는 신격화된 대상과 의사소통을 시도하려는 행위'다. 또는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어떠한 절대적 존재에게 빎. 또는 그런 의식을 말한다. 예수님은 왜 제자들에게 기도하라고 했을까? 기도하고자 하는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 지 몰라 부지런히 '쉬지말고 무엇이든지 기도만 하면 다 들어주기 위해서..' 일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상대방에게 해가 되는 일이나 부자가 되게 해달라, 꼼짝도 하지 않고 건강을 바라는 그런 기도도 들어 주기 위해서일까? 


샤머니즘시대는 주술적인 것, 구복적인것을 기도로 알았다. 그러나 기독교나 불교처런 오랜 역사를 거쳐 서민들의 종교로 자리 매긴 종교는 구복의 의미보다 '내가 이렇게 살겠습니다'라는 결심을 신에게 알리는 행위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예수님이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뜻은 '이 땅에 하늘나라를 세우기 위해서'다. 그런데 오늘날은 어떤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실천에 옮기도록 직접 가르쳐 줬다는 기도문은 이렇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일을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버지의 뜻'이 '이땅의 천국'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이땅이 천국이 되록 실천하게 살기 위한 기도를 하라고 가르치신 것이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우루과이 성당 벽에 걸린 글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역행하고 있어 그렇게 살면 안 된다는 경고의 뜻이다. 우루과이만 그럴까? 예수님의 가르침을 믿고 따르는 많은 나라 특히 영국이나 미국은 과연 이땅이 천국으로 바뀌고 있는가? 예수님이 지금 이땅에 재림하신다면 기독교인, 성직자들에게 천국문을 열고 그들을 자녀로 받아들일까?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2천년이 지난 오늘날 예수님의 하느님으로 믿는 신자 수는 세계 전체 인구의 약 3분의 1이나 된다. 뉴스위크 일본판은 최신호에서는 세계 인구 64억5300만명 중 예수를 구세주로 믿는 그리스도교인은 21억3300만명이나 된다고 한다. 모든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친 주기도문대로만 산다면 우리나라는 아니 세계는 이모양 이꼴이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까? 교회는 어떤 모습인가?

 

 

예수님이 탄생하신 이스라엘은 영토 욕심 때문에 중동지역이 지옥을 방불케 하고 있다. 이기주의와 상업주의가 만들어 놓은 지본주의는 날이갈수록 예수님의 가르침과는 반대의 세상을 만들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과는 반대로 사는 교인들... 아니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라고 가르치기보다 교회 안에서만 예수의 모습이 됐다가 교회를 나오는 순간 딴 사람이 되기를 가르치는 성직자들....

 

서울시를 하나님께 봉헌하는 것도 모자라 대한민국을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이명박 대통령! 그가 만들고 있는 한국은 과연 '이땅이 천국'으로 변하고 있다고 기대해도 좋을까?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우루과이 성당벽에 붙여 놓은 이 글을 읽으면 무슨 생각이 들까? 가난하다는 이유로 사람대접도 받지 못하게 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그런 구도를 고착화시켜 대물림하도록 법을 만들고 제도화하는 기독교 신자인 정치인들.....

 

불의에 항거하는 소금은 되지 못할망정 건물의 크기로 혹은 교인의 숫자로 일류교회를 만들겠다는 성직자들은 우루과이 한 작은 성당벽에 적혀 있는 글과는 반대의 길을 걷고 있다. 인간이 완전무결한 존재가 아닌 이상 그런 노력을 하면서 자신의 한일을 반성하고 개선해 간다면 나무랄 수는 없다. 그러나 교회안에서 그것도 입으로만 하는 그런 기독, 교회를 죄를 씻어주는 세탁소쯤으로 아는 신자가 있는 한 예수님이 바라는 천국은 기대할 수 없다. 

 

이제 우리도 교인들이 앞장서서 무한경쟁, 그래서 부자들만 살기 좋은 세상이 아니라 약자들도 더불어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 세상을 만드는 길은 오늘날 교회가 '교회에만 예수님이 없다'는 비판의 소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여 이땅에 천국을 건설하려는 예수님의 가르침(주기도문)을 실천할 때 가능한 얘기가 아닐까? 

 

- 이미지 출처 : 다음 검색에서....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종교2012.09.24 07:00


 

 

인도 건국의 아버지 마하트마 간디는 ‘원칙 없는 정치, 노동 없는 부, 양심 없는 쾌락, 인격 없는 교육, 도덕 없는 상인, 인간성 없는 과학, 헌신 없는 종교’를 ‘일곱 가지 사회악’이라고 했지만 철학이 없는 삶은 방황의 연속이다.

 

나이가 든 사람들은 할 얘기가 많다. 그래서 나이든 사람은 꼰대 소리를 듣는가 보다. 오늘은 종교에 대한 얘기를 해 볼까 한다. 오늘 전개하는 얘기는 나의 개인적인 종교관일 뿐 신실한 종교인들을 비하하거나 남의 종교를 비난할 목적이 아니라는 걸 먼저 밝혀둔다.

 

요즈음은 많이 달라졌지만 나이가 지긋한 사람들은 어린 시절 어머니 손을 잡고 한두 번 절에 가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절에 가면 시주를 하고 부처님께 절을 하고 돌아오는 것.... 부처님께는 살다가 어려운 일을 만나면 정성을 다해 빌면 비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는 그런 불교신자들이 많다. ‘절에 다닌다’고 하는 사람들은 삼신도 모시고 조상신도 모시고 한울님...도 모시면서 산다.

 

 

 

교회에 다닌다는 사람도 그렇다. 초등학교 때 친구를 따라 다녀 본 성경학교나 커서 이성에 호기심을 느낄 나이가 되면 교회나 성당의 따라가다 기독교 신자가 되거나 아니면 부모가 신실한 기독교인이어서 배속에서부터 종교인(?)이었던 사람도 있다. 그런데 불교신자건, 기독교 신자건 종교인들에게 ‘종교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속 시원하게 ‘종교는 이런 것이다’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종교란 ‘죽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겨 난 것이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어떤 힘’에 자신이 풀지 못한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심리가 신이라는 이름으로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 싱안의 대상이야 시대나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인간의 능력으로 해결하지 못한 초월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가 있다는 것일 믿고 의지하고 숭배하는 것.... 그런게 종교가 아니까?

 

신관(神觀)이 없는 종교란 위헌 천만이다. 기독교의 경우를 보자. 고등학생들에게 ‘기독교가 뭔가?’라고 물으면 정확하게 대답하는 학생들이 없다. 국어사전을 보면 ‘基督’이란 머리에 성유 부음을 받은 자, 곧 왕 또는 구세주라는 뜻으로, ‘예수’를 이르는 말, ‘그리스도’의 음역어‘이라고 풀이한다. 크리스트라는 말의 한자 방음이란 뜻이다. ‘기독=천주=크리스트=구세주=예수’라는 의미다.

 

기독교인이라는 학생 들 중에는 구교와 신교, 천주교, 개신교, 여호와의 증인, 안식교... 에 대한 정확한 개념도 없다. 종파 얘기를 하자는 말이 아니다. 기독교인이라면 천주교신자든, 개신교 신자든, 여호와 증인신자든 자신이 믿는 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명확한 인식(觀)이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라는 분이 사랑의 신인지 권위의 신인지 구별조차 못한다면 옳은 신앙인 아니다.

 

같은 뿌리에서 나온 종교가 철천지원수가 되어 수천년간 앙숙의 관계로 이어지는 종교란 그 역사만큼이나 복잡하고 어렵다. 그 복잡한 뿌리는 어쩌면 간단하게 정리할 수도 있다.

 

 

개신교를 포함한 기독교는 '성부-성자-성령'의 '삼위일체'를 유일신으로 숭배하는 종교요. 이슬람교는 만인의 신인 알라(야훼, 여호와)를 유일신으로 숭배하는 종교다. 유대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야훼, 여호와)을 유일신으로 숭배하는 민족종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름만 다른 ‘알라’와 ‘야훼’(신은 같은 여호와)라는 차이인 이슬람교와 유대교는 앞으로도 타협이란 기대할 수 없을 정도로 원한이 깊고도 복잡하다.

 

‘신이란 어떤 존재인가?’라는 답은 신앙인의 신관(神觀)이다. 신관에 따라 천주교와 개신교, 이슬람교..로 나눠진다. 개신교 만해도 장로교, 침례고, 감리교, 퀘이커교, 기독교 한국루터회, 기독교 대한 성결교회, 제 7일 안식재림교회...등 그 수를 헤아리기조차 어렵다. 장로교는 다시 고려파 장로회, 기독교 장로회, 통합파와 합동파....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의 기독교는 신관에 따라 분열되었다기 보다 이해관계로 얽혀 분열된 경우가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평범한 신자가 ‘어떤 종파가 진짠가’의 여부로 따진다면 신앙도 갖기 전에 실망감으로 신을 믿을 정나미가 떨어지고 말 것이다. 종교의 핵심은 자신이 신앙하는 ‘신이 누군가?’라는 문제다. 기독교의 경우 ‘예수가 누구인가?’라는 문제가 신앙의 핵심이다. 똑 같은 신을 믿으면서도 이명박장로, 뉴라이트의 김진홍목사, 서경석목사...같은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문익환목사, 문규헌, 문정현신부, 이태석신부.... 같은 분도 있다. 누가 믿는 예수가 진짜일까?

 

이미지 출처 : 구글 검색에서....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종교2012.06.12 06:30


 

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 어떤 책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품이나 삶의 질까지도 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해방둥이 우리또래 사람들은 참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 온 불행한 사람들이다. TV는 물론 라디오도 제대로 듣기 어려운 시대... 시골 학교에는 도서관은 말할 것도 없고 신문조차 구해 보기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 왔다.

 

성경을 처음 만난 사람들이 다 그렇겠지만 진로에 대한 안내나 멘토도 없는 가난한 독학생이 만난 문고판 신약성경 한 권. 그것은 나에게 충격 그 이상이었다. 교양서적 몇 권도 제대로 읽지 못한 청소년이 읽은 신약성경은 종교서적이기 이전에 윤리서요, 교양서요, 철학서이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에는 순진한 청소년들에게 삶을 가르치기에는 너무나 빈약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정치며 경제며 사회를 보는 안목은 물론 시비를 가리며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판단력을 길러주기는 역부족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 가치도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데 지녀야할 품성도야에는 아예 작은 도움조차 주지 못한다.

 

청소년이 만난 성서는 죽음을 넘어 내세를 준비하는 종교의 의미보다 예수라는 분의 삶을 통해 내가 가야할 길, 설 자리, 삶의 방향을 안내해 주는 인생의 안내자였다. 참과 거짓이 무엇이며 사랑과 인내, 관용과 소망을 가르쳐 준 내 삶의 안내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학이 없는 성경, 그 성경 속에 숨겨 있는 이데올로기를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은 어린 나에게는 생각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문제였다.

 

 

 

교과서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모르고 금과옥조로 배운 사람들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간, 자본이 필요로 하는 인간 그 이상의 사람이 되기는 어렵다. 도구교과의 경우는 예외겠지만 윤리니 사회, 국사와 같은 교과서에는 그 내용 속에 체제 이데올로기며 자본이 필요로 하는 가치관을 가진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다.

 

성경도 예외는 아니다. 내가 성경을 신학 없이 순진한 눈으로 이해한 것이 성경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나이 40이 가까워서였다. 70년대 후반 감리교 속회모임에서 고만고만한 청년들이 성경을 공부하면서부터 전통신학 외에도 예수님을 보는 다른 시각도 있다는 걸 깨우치게 된 것이다. 이 모임에서 전통신학 이외에 민중신학이며 해방신학도 있다는 것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성경을 처음 만나 받은 충격만큼이나 성경 속에 담긴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다. 미친듯이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찾아 읽은 철학 서적이며 민중 신학과 해방 신학 서적속에 만난 예수님은 전통신학의 예수님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내게 다가 온 것이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누가복음 6장 17- 20)’라는 성구가 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태복음 5장 3~5절)’라는 기록으로 남게 됐는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처럼 하라’는 말씀의 ‘이웃’이 옆집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도움이 없으면 생명을 이어가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된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참 많은 사람들,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면서 살아간다. 특히 기독교인들... 교회 안에서 양처럼 순하고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사람들이 교회 밖에서 만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충격을 받게 된다.

 

죄를 아무리 많이 지어도 교회에 가서 용서를 받으면 씻김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일까? 직장에서 만나는 교인들이며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서 그들의 삶이 교회에서 만난 사람과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물론 문익환 목사님이나 문규현, 문정현 신부님, 그리고 이태석신부님과 같은 분이 없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보고 교회에 다니면 안 된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신자 한 두 사람을 보고 특정 종교를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종교가 체제 순응 이데올로기나 불의한 권력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면 그 후유증은 예상 외로 심각하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는 종교가 또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운명론적 세계관을 갖도록 만드는 독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종교가 약자의 고통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한 기독교는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만드는 마취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 이미지 출처 : 다음 검색에서...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종교2011.05.21 05:00



예수님의 동생이자 초대 교회의 유력한 지도자였던 야고보는 교인들에게,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라고 경고했습니다. 지도자가 되지 말라고 한 뜻은 지도자가 받을 더 큰 심판보다 지도자 때문에 발생할지도 모를 교회 공동체의 엄청난 피해를 더 염려했던 것 같습니다.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보면, 지도자를 잘못 만났거나 잘못 선택한 바람에 불안과 공포에 떨고, 끔찍한 비극을 겪어야 했던 기억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오늘날 세계 곳곳에는 물욕과 권력욕과 명예욕에 취한 교회 지도자들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소금이어야 할 교회가 병들어 가는 이유가 무엇일가요? 교회는 늘어나는데 기독교에 대한 거부감은 왜 날이 갈수록 심해질까요?

                       <이미지 출처 - 다음 이미지 검색에서>

성서에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마태복음 5:3)’고 했습니다. 그런데 왜 목회자들은 왜 가난한 사람들에게 헌금을 강요하세요? 제정일치(祭政一致)시대 십일조관행을 제정(祭政)이 분리된 지가 언젠데 아직도 바꾸지 않고 있습니까? 세금은 세무서에서 따로 내는데 소득의 십분의 일을 내는 게 맞나요? 그리고 시민들이나 기업들은 세금을 다 내는데 왜 교회는 세금을 내지 않는지요? 교회가 세금을 내지 않는 대신 가난한 사람들이 조세부담이 늘어나는 것은 양심적이지 못한 일이 아닌가요? 십일조 안내면 왜 하나님 재물을 훔치는 도둑이라고 강조하시나요?

성서는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든 기도는 하느님이 다 들어주신다고 했는데 기도(祈禱)를 잘못 가르치고 있는 것 아닌가요? 야고보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왜 예배는 강조하고 실천을 강조하지 않는지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태복음 7:21절) 하지 않았나요?

교회는 권력의 시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일제시대는 황국신민화에 앞장서고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거치면서 왜 ‘권력은 위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다’며 불의한 권력을 두둔하던 아픔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왜 독재자를 두둔하고 살인자를 비호해야 할까요? 하느님은 가난한 자, 소외된 자, 병들고 고통 받는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과 아픔을 함께 하셨던 분이 아닌가요?


정의보다 순종을 강요하는 게 하느님의 뜻인가요? 야훼를 강조하는가, 아니면 예수님을 강조하는가 아니면 성령을 강조하는가에 따라 하느님은 다른 모습으로 보인다는 건 상식입니다. 신학을 공부하지 않은 사람들도 아는 상식을 목회자는 왜 역사의 고비마다 신자들에게 정의보다 순종을 강요해 불의에 침묵하도록 가르쳐 왔습니까?

교회가 하느님보다 소중한가요?
교회란 무엇입니까? 초대교회를 생각해보세요. 초대교회 예수님의 제자들은 선교를 하다 잡히면 십자가에 달리는 희생을 당해야 하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그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순교를 각오하는 모임이 교회의 시작이 아니었던가요? 죽음의 결의를 다지는 장소, 실천의 각오를 다지는 장소가 교회 아니었나요? 그런데 그런 교회가 하느님이 바라는 모습으로 운영되고 있나요?


유다인들의 과월절이 가까워지자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인자하시고 순한 양 같으신 예수님이 '성전 뜰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과 환금상 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밧줄로 채찍을 만들어 양과 소를 모두 쫓아내시고 환금상들의 돈을 쏟아 버리며 그 상을 둘러엎으셨습니다. 그리고 비둘기 장수들에게 "이것들을 거두어 가라. 다시는 내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마라." 하고 꾸짖으셨습니다. 오늘날 교회는 장하는 사람들의 집으로 예수님의 꾸중을 듣지는 않을 런지요?

교회는 죄를 씻어주는 세탁소가 아닙니다.
누구나 회개만 하면 다 용서해 주신다고요? 전두환처럼 수많은 광주시민을 죽여 놓고 ‘하나님을 믿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하면 속죄가 되는 걸까요? 진정한 회개란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나는 것’(요나서 3장 8절)이라고 했습니다. ‘강포’란 히브리어로 ‘하마스’ 즉 ‘모든 형태의 사회적 불의를 뜻하는 말로 ‘억압과 착취와 박해 등 인간에게 저질러지는 사회적 폭력’을 의미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사회에서 행하던 일상적 폭력에서 떠나 정의와 공평의 삶을 살 때 하느님의 용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교황이 허락한 성직자들 외에는 성경을 읽을 수 없었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성경은 라틴어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백성들은 성경을 읽을 수도 없었습니다. 오직 신부들이 전하는 것만 신자들은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은 교황의 생각이 그들의 신앙과 행위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오늘날은 어떨까요? 성서를 가르치는 신부님. 목사님. 그분들의 시각에 따라 강론이 달라지고 신자들의 신앙관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오늘날 교회를 향한 ‘교회에만 하느님이 없다’는 비판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요? 그 것은 교인들과 교회지도자가 만든 자업자득이라는 사실을 겸허하지 받아들일 때 교회는 소금의 역할을 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종교2010.12.28 08:56


<삶이 종교에 종속된 사람들>

기독교 신문에 따르면 현재 한국 교회의 71%이상이 10%도 안되는 봉사활동 지출을 하고 있다. 20% 이상 사회봉사 비용을 지출하는 교회는 8.9%에 불과하다. "일부 목사들의 월수입이 수천만원으로 전체 예산의 3.8%가 교역자들의 생활비로 쓰여 왔고, 일부 대 사찰의 승려들이 외제 고급승용차를 타고 일년내내 특급호텔에서 지낸다"는 보도는 일반 상식으로서는 이해하지 못할 일이다.

1993.10.28. 24:00에 예수가 이 땅에 재림할 것이라고 예언한 종교는 신도들이 집을 팔고 학업을 포기하고 예수의 재림을 준비하고 있다가 예언이 빗나가자 가정파탄으로 자살까지 한 사람도 있었다. 몇년전 미국에서는 수백명의 사이비 종교인들이 집단자살한 일도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도 가끔 예수의 재림을 예언했다가 빗나간 사건이 있었다.


도대체 종교가 무엇이기에 하나 뿐인 생명이나 전 재산 까지 바쳐 가면서 빠져 들 수 밖에 없을까?

종교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하여 좀더 상세히 알아보자.

어떤 철학자는 종교를 "무지와 공포의 소산"이라 표현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종교를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통치 수단으로 기능하며 피지배자의 억압 수단이 된다고 비난하고 있다.

<원시종교>

단군(제사장) 왕검(지배자)의 명칭에서도 볼 수 있드시 원시시대는 종교의 수장인 무당이 정치의 우두머리로 군림하던 때를 제정일치시대라고 했다.

이 시대는 특정 동식물이 특정 부족의 수호신으로 신앙하던 토테미즘이 발달하기도 하였고, 지배자의 야망이 인민의 지배수단으로서 종교를 권장하기도 하고 국교로 인정하여 현실의 고통은 내세의 영생복락을 위해 현실을 희생하라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민중의 정치의식이 낮은 시대는 원시종교나 샤머니즘이 지배수단으로서 이데올로기 역할을 했으나 점차 민중의 정치의식 수준이 높아지고 비판의식의 향상 되면서 체계적인 신앙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삼국시대 불교는 민중의 정치의식을 마비시키고 현실세계에 대한 혐오감을 갖게 하여 내세의 준비를 위해 끝없는 희생과 인내를 강요하게 했다.

<불교는 어떤 종교인가>

불교의 교의를 한번 살펴 보자. 불교에서 붓다(Buddha)는 한자어로서 진리를 깨달는 자를 가리키는데,불교에서는 불타,즉 카필라국 정반왕과 마야부인의 사이에서 태어난 고다마 싯달타의 도움을 받아 깨닫는자(부처)가 되는 것이 신앙의 목표이다. 신앙의 대상은 국보(불,법,승)인데, 부처가 되기 위한 과정인 3법인(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숙정)과 사성제(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와 8정도(정어, 정사유, 정정, 정명, 정정진, 정염, 정견 정업)가 있다.

사람들은 누구든지 불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노력여하에 따라 부처가 될 수 있다고 한다.

불교가 사회와 문화 전체에 미친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지만 고난에 찬 삶을 살면서 창조적인 세계관을 갖지 못하고 운명론적인 세계관을 갖도록 하는 것은 현실의 질서를 유지 존족하기를 바라는 지배 논리에 기여했던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부인할 수 없다.

인간의 의식수준과 민중의 각성은 불교가 지배이데올로기의 한계를 노정(露呈)하자 시, 서, 악, 역, 예, 춘추 등 6가지 경전사상을 기초로 한 인(仁)의 도를 가르치는 유교가 등장하게 된다.

<유교는 종교인가?>

유교에서 논어는 공자의 교훈과 행동을 기록한 책으로 모든 경전의 근본사상인 인(仁)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인(仁)이란 극기복례(克己復禮)로 극기는 이기심을 이기는 것이요, 복례는 예법을 존중하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인의 실천강령을 삼강오륜(三綱 - 군의신강, 부의자강, 부의부강. 五倫 - 군신유의(임금과 신하간), 부부유별(부부간), 부자유친(부자간), 붕우유신(친구간), 장유유서(노소간)이라고 하는데, 상호간의 예의를 기본으로 한다. 특히, 임금과 부모를 동일시하여(군사부일체) 봉건지배 질서를 정당화하고 충효사상(忠孝思想)을 고취하였다.
 

이성적이고 전통적인 공자사상에 대립하여 나타난 삶의 현실을 의미한 도(道)의 실천을 주장한 도교는 노자와 장자가 대성시킨 종교이다. 우주의 본체가 도요, 상대 세계를 초월한 절대 평등과 무차별의 본체를 인정하는 것을 기본원리로 하고 가르치고 있다. 도교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가르침으로 하는 노장철학을 받아들이고 음양오행설과 신선사상을 가미하면서 불로장생의 술(術)을 구하고 주술기도 등을 행하는 종교이다.

<도교와 샤머니즘>

민중의 입장을 강조하는 도교는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이 유교에 비할 수 없다는 약점때문에 크게 번성하지 못하고 소수의 양심적인 지식인이나 민중에서 받아들인 종교이다.

그 후 서구의 민주주의가 유입되면서 봉건적인 지배질서가 붕괴되고 그 공백을 채워주는 또하나의 지배이데올로기로서 기독교가 들어 온다.

<기독교의 본질>

유태민족의 민족종교인 유대교에 뿌리를 둔 기독교는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 들이는 개신교와 천주교로 분리되어 수많은 종파가 들어 온다.

기독교의 교의는 전통윤리가 미개문화로 매도되면서 문화라는 가면을 쓰고 침투한다.

전지전능하고 무소부재한 절대자인 여호와 하나님과 구세주로 세상에 왔다가 인간에 배척당하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예수와 성령의 3위 일체신을 믿는 종교가 기기독교다. 

기독교는 예수를 구세주로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아들로 천국을 보장받고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교리를 전한다.


                   <사진 : 원불교>

세상의 끝날 예수가 재림할 때 알곡과 죽정이를 구분하듯 죄인과 의인을 분류하고 죄인은 지옥불에 영원한 고통을, 의인은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면서 살 수 있는데, 그날(재림)은 하나님 외에 아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항상 준비하고 살라고 가르친다. '권세는 위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느니라'와 같은 성구에서 보듯, 지배자에게 순종하는 운명론적인 삶이 곧 하나님의 뜻이요, 현실은 내세의 준비과정으로 보고 현실 긍정적인 순응적 삶을 강요한다.

<힌두교와 조르아스트교 그리고...>

그 외의 힌두교는 인도의 굽타왕조때 범서, 비서 등을 기초로 한 바라문교의 사상을 고치고 변경하여 고유한 인도 민족신앙과 결부시켜 발전한 종교로서 범신론, 다신론, 유신론, 무신론을 수용하면서 원시적인 경배와 요가를 통해 인간의 참된 자아를 추구하는 종교이다.

조르아스트교는 기원전 60년경 조르아스트가 창시한 종교로서 젠드 아베스트란 경전을 갖고 있다. 조르아스트교의 교의는 이 세상은 선(善)과 악(惡)이 싸우는 전쟁 마당이며, 아후라 마즈다라는 선신(善神)과 앙화 마이뉴라는 악신(惡神)이 대립하고 있는데, 근검 역행의 노력으로 악신을 이기고 선신이 승리한다는 내용을 가르치고 있다.

<이슬람교>

이슬람교는 회교라고도 하며, 마호메트에 의해 창시된 종교이다.

이슬람은 복종이란 뜻이며, 인간은 신에게 절대 복종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슬람교라 명명했다. 이슬람교는 아라비아 고유의 민족신앙, 그리스트교, 유대교의 교의를 흡수하여 알라를 믿는 신앙을 말한다.                                                                                     <사진 : 힌두교 신 '새미골 (toogoo12)'에서>
 
그들의 경전인 코란에 의하면 알라, 천사, 예언자, 경전, 내세 심판, 예정에 대한 신앙 등 6신과 5행(다섯가지 의무, 즉 알라예배, 모하멧트 믿음, 1일 5회 기도, 자선, 9월 단식, 메카순례)을 요구하는 종로서 4억 5천의 신도가 있다.

<유대교는 기독교의 모태>

유대교는 기원전 15세기경 모세가 애굽을 탈출하여 40년간 광야에서 생활하면서 종교적 체험에서 비롯된 종교로 모세 율법을 기초로 하여 유대인은 하나님의 선민이며, 천국이 지상에 이루어진다고 믿고 있는 종교이다.

유대교가 모태이면서 예수를 크리스도(구세주)로 믿는 개신교와 이땅에 다른 크리스도가 나타날 것이라고 믿는 유대교는 구약 성서만을 믿는다.

이제 개략적으로 살펴본 종교의 공통점은 개인의 영생과 축복에 초점을 두고 개인의 수련과 반성, 도덕적 인격의 완성 등에 관심을 둔다. 특히, 대부분의 종교는 운명론적인 세계관을 갖는 것이 특색이다. 절대자에게 복종하고 순응하며 현실 질서에 복종하는 세게관은 강자의 논리로서 창조적이고 개척의욕을 마비시키고 신의 의도를 추종하는 삶을 강제받는다.

<종교는 약인가 독인가>

종교의 현실 감각의 마비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여 진취적이고 주체적인 삶의 저해 요소가 된다는 점에서 민중중심의 종교가 양심적인 신앙인에 의해 제기되고 있다.

해방신학이나 민중교회나 민중불교 등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는데, 이들은 지배권력에 의해 반체제 세력 또는 전통에 대한 도전세력이라는 이단(異端)으로 분류되어 탄압을 받는다.

기독교 발생 당시의 이스라엘 상황을 신학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관점에서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해석하려는 시도 없이 전통신학이란 이름으로 다른 해석을 거부하는것은 종교의 경직성을 보여 주는 또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사진:힌두교 신 '소망노트' 블로그에서>

전통신학에 대한 도전은 식민지적인 상황에서 예수의 정신을 오늘날 다시 살려 내야 한다는 시도로 상당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는데 해방신학이나 민중불교와 같이 신의 본성을 현실에 맞게 재해석하여 지배논리가 아닌 민중시각에서 신앙화하려는 시도가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민중종교의 공통점은 내세를 위한 준비단계로서의 현실이 아닌 이 땅이 하나님의 나라요, 극락으로서 구현시키려는 노력이 종교의 당면한 과제로 받아 들이고 있다.

이제 신의 노예로서 현실 감각의 마비나 지배이데올로기로서의 종교의 역할은 당연히 거부되어야 하고,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인간의 해방과 인간의 주체적인 삶을 위한 인격 수양의 과정으로서 재정립할 단계에 있다.

목사나 승려의 교세확장이나 독선적이고 배타적인 자기논리는 상대종교를 적대시 함으로서 또 하나의 38선을 긋는 민족의 비극을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종교2009.05.09 21:39



개신교에서는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성도(聖徒)라고 한다. 성도란 자구대로 해석하면 ‘거룩한 무리’란 뜻이다. 개신교 신자인 성도들은 그 이름에 걸맞게 거룩한 삶을 살고 있을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그들의 삶이 ‘보통 사람’이거나 오히려 평범한 삶을 사는 사람보다 더 영악스럽고 가증스런 짓(?)을 하는 이도 없지 않다. 그러면서도 교회 안에서는 가장 예수님을 닮은 것처럼 행동한다. 이명박장로를 비롯한 부자교회 목사들의 삶과 행동이 그렇다. 이들이야말로 성서가 지적한 ‘주여, 주여!’하는 이들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들의 행동을 보면 저희들은 진정으로 ‘전지전능한 하느님이 있고 내세가 있다’고 믿고 있을까?


한신대 신학연구소(소장 김경재)가 지난 1~2월 18살 이상 120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사후세계는 있을까?’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53.3%가 ‘모르거나 없다고 믿는다.’고 답했다는 설문조사결과가 나와 눈길을 끈다. 이 설문조사에서는 "종교생활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가 뭔가?'라는 질문에 대해 천주교 신자들은 기독교 신자(54.0%)들과 달리 53.9%가 ‘구원과 영생’을 위해서가 아니라 ‘마음의 평안을 위해’라고 답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전체 1천명의 조사 대상자 중 “개신교의 경전인 성서가 문자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느냐고 질문에 대한 응답이 ‘그렇다’가 38.5%, ‘보통’ 26.7%, ‘그렇지 않다’ 34.8%로, 긍정적 응답과 부정적 응답이 비슷한 분포를 보이고 있다.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가? 스스로 깨달은 자가 되어 ‘이 땅을 부처님의 나라’로 만들겠다는 불교와는 달리 전지전능(全知全能)한 신(3위일체)을 믿고 신의 뜻을 따라 살면 죽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종교다. 그런데 개신교는 신자의 54.0%가 구원과 영생을 위해’ 종교생활을 한다고 믿고 있지만 ‘가톨릭’ 교인 중에서는 53.9%가 영생이 아니라 ‘마음의 평안을 위해’ 종교생활을 한다고 믿고 있다는 재미있는 응답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개신교의 목사나 천주교의 신부들은 ‘신의 전지전능'이나 '내세'를 과연 믿고 있을까?

필자가 경험한 바로는 극소수의 성직자를 제외하고는 ‘신의 전지전능이나 내세가 있다’고 믿는 사람이 없다고 단언하고 싶다. 왜냐하면 부자교회 목자(牧者)들의 삶을 보면 ‘양 떼를 인도'하는 ’착한 목자 노릇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민족이 위기에 처했을 때 민초들을 배신한 과거가 그렇고 불의한 권력을 행사하는 정치지도자와 손잡고 공존해 온 이력이 그렇다. 착한 양들(?)에게 사회의 모순을 '내탓'으로 책임을 전가시키고 운명론자를 만드는 반성서적인 가르침이 그렇다. 이들이 진정으로 ‘신이 전지전능(全知全能)하다’고 믿는다면 천국을 만들어야할 이 땅이 쓰레기장으로 변해가는 현실을 방관할 리는 없다.

‘성도(聖徒)들’의 삶은 어떨까? 한신대 신학연구소에서 밝힌 설문조사가 말해주듯 기독교 신자들은 영생을 위해서...라고 믿고 성서대로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교인들의 성향을 내 나름대로 분석해 보면 첫째 전체 교인들 중에 성서의 가르침대로 믿고 실천하는 신자들보다 맹신적이고 샤머니즘적인 신앙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자들이 대부분이다. 이들은 성서를 자구대로 믿는 전형적인 운명론자요, 순종적이고 착한 양들이다. 둘째, 소수의 대학교수나 의사 혹은 기업가, 교사와 같은 사회 지도층이나 엘리트들이 교회를 운영하는 실세들로 교회운영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목회자들과 함께 교회의 경영에 동참하는 교회의 주인(?)들이다. 이들의 삶은 운명론자의 모습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교회에서 궂은 일이나 험한 일을 가리지 않고 헌신적으로 참여하는 청장년들로 심성이 착하고 성실한 일꾼들이다.

또 한가지 특색은 예나 지금이나 교회는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다. 종교개혁 당시의 성직자들의 절대권이 지식기반사회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교회를 지켜보면 현실이 그렇다. 성서에 대한 비판은 말할 것도 없이 교회의 구성이나 운영에 비판을 금기시 하고 있다. '성도들끼리 믿지 않고 누굴 믿느냐?"며 운영에 전권을 위탁하는 정서도 있겠지만 설사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어도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되고 만다. 또 한가지 교회는 특히 천주교에서 남녀 차별이 초기 교회와 달라진 게 없다. 남자는 신부가 될 수 있지만 여자들을 신부는커녕 ‘교회에서 잠잠해야...’ 하는 것이 불문율이다. 신부와 수녀의 차별대우 또한 ㅅ아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문익환 목사님이나 문정현신부와 같이 작은 예수와 살아가는 성직자가 없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뒷동산에 십자가의 길’을 만들어 걷는 게 예수의 삶을 따르는 길'이라는 코미디를 하는 일반 성직자와는 달리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살아 왔고 또 그렇게 살고 있다. 십자가의 길은 무엇일까? 기독교인들이나 성직자가 가야 할 길은 교회에서 헌금 몇푼을 하고 죄를 깨끗이 씼었다고 믿는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달아 놓고 팔아 먹는 가룟유다의 2세들이 아니라 '이 땅에 천국을 건설하는...' 일을 위해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게 기독교인이 가야할 길이 아닐까?

기독교인들이 정말 천국이 있다면 믿는 다면... 정말 내세가 있고 예수의 재림을 믿는다면... 악인은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지옥불에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믿는 다면... 이 세상에서 누릴 걸 다 누리고 할 짓(?) 다 하고 저 세상에서도 부귀영화(?)를 누리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사이비 성직자나 교인들에게 그들의 야망을 채워 줄 신이 있다면 그런 신은 가짜다. 잔인한 로마의 전지전능(?)한 권력에 맞서 약자의 권리를 지키겠다던 예수의 길을 따라가지 않는 성도(聖徒)는 가짜가 아니면 이 또한 적그리스도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종교2009.03.16 07:41



 "선생님! 연세가 쉰이 넘은 선생님께서 교회에 나가신다고요?"
 법(신) 없이도 사실 분이 '왜 갑자기 하나님이 필요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 언젠가 저와 함께 교회 다니시던 분이 제게 하던 말이 생각났습니다. 대통령탄핵반대 집회에 참석했다가 돌아오던 길이었습니다. 15년도 훨씬 지난 옛날, 교회에 함께 다니던 H권사님이 길에서 어깨띠를 하고 "예수 믿읍시다" "예수 믿고 구원받읍시다"하며 홍보물을 나눠주고 있었습니다. 신호를 기다리고 있는 저를 보고 깜짝 놀라면서 "선생님은 노인이 다되셨네요. 이제 연세도 있고 한데 준비 하셔야지요. 교회에 다시 나오십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에서 본지 10년 정도 세월이 더 지났으니 머리카락이 하얗게 된 걸보고 '노인이 다됐다'는 말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이제 죽을 때가 다 됐으니 회개하고 죽을 준비를 하라'는 말은 기분 좋게 들리지 않았답니다. 


 교회 얘기가 나왔으니 필자의 지난 얘기를 좀 해야겠습니다. 1989년 전교조결성으로 나라 안이 온통 시끌벅적했을 때입니다. 필자가 재직하고 있던 학교(사립)의 교장이 필자가 다니는 교회에 장로이기도 했습니다. (필자의 당시 교회직분은 초등부부장을 맡은 권사였다) 대부분의 학교가 그랬지만 전교조 출범 당시 사립학교의 경우 학교비리와 관련해 문제를 제기했고 필자의 경우도 그랬습니다. 전교조도 미운데 자기 학교 비리까지 문제제기를 했으니 교회에서인들 예쁘게 보일 리 있었겠습니까. 필자도 교장의 뜻은 아니지만 전교조 교사 5명이나 해직시킨 교장이 고울 리 없어 한달 정도 교회에 나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뒤에 들리는 말에 의하면 총회를 열어 저를 제명처분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30년이 넘게 교회에 다닌 중진(?) 권사(감리교회의 권사는 장로교회의 장립집사 정도 될까?)를 본인의 소명기회도 주지 않고 징계처분을 했다는 것이 못내 서운하고 못마땅했습니다. '죽을 준비나 하라'던 그 권사는 당시 필자와 같은 권사였는데 예의 그 교장과 같은 입장에 서서 우리를 참 괴롭게 했던 장본인이었습니다. 특히 전교조에 대해 악의적인 선전을 한 장본인이었고, 징계(?)과정에서 '전교조는 빨갱이다'라는 주장을 하고 다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하는 일,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가 동료교인을 징계하면서 본인도 출석하지 않은 상황에서 징계한 것도 그렇습니다. 개인적인 차원을 떠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대통령시절 군사정권을 축복하는 조찬기도를 자청하고 최근에는 국가보안법철폐반대를 하는 모습이 예수님의 정신을 실천하는 길인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문익환목사님이나 문규현신부님과 같은 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는 에수님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저만의 생각이겠습니까?

 서론이 너무 길었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편지를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군에 갔다 오면 사람된다'는 속설에 대한 오해와 같은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선생님처럼 착하신 분이 오히려 멀쩡한 아이를 군대 보내 '권력에 복종하는 순종적인 인간'을 만들듯이 법 없이 살 수 있는 선생님 같으신 분이 '하나님이 두려워 눈치를 보면서 살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돼서 말입니다.

 종교란 무엇인가? 까마득한 옛날, 자연에 대한 신비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인간의 눈으로 보이지 않는 어떤 존재(신)가 있을 것이라고 믿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무서운 병으로 고통을 받거나 죽음의 공포는 신의 존재를 확신하게 되고 그 보이지 않는 절대자가 죽음의 문제까지 해결해 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인간의 능력 밖의 일은 신의 영역이고, 죽음의 문제는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종교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생겨난 거라고 봐야겠지요. 다시 말하면 종교란 인간의 유한성에 대한 신의 도움이 필요해 생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고 절대자를 믿고 따라야 하는 데 그 '절대자의 실체가 도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 그게 종교가 존재하는 이유가 아니겠습니까? 인간의 생사길흉화복을 좌우하는 '신(神)이란 어떤 존재일까? 아니 그러한 신이란 과연 있기나 한 것일가? 하는 문제를 놓고 '유신론이니 무신론이니 또는 삼위일체 신이 진짜 신이니 예수는 신이다. 아니다 선지자일뿐이다... 신이 아니라 자연의 법칙인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은 부처가 되는 길밖에 없다..... 내가 믿는 종교만이 인간의 고통과 죽음을 해결해 줄 수 있다'느니... 하는 논쟁이 지금도 그치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쟁은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식의 끝없는 논쟁으로 결론이 쉽게 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나 마호메트나 부처나 공자나...어떤 신앙의 대상도 마찬가지지만 그걸 본 사람, 그러니까 전한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에 따라 신의 모습은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비춰질 수 있다는 거지요. 공자의 가르침을 놓고 주자만이 해석할 능력이 있다고 금과옥조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주자학이니 성리학이라 하고 왕양명이 해석한 걸 양명학이라 하지 않습니까? 불교도 참선을 중시하는 선종과 경전을 중시하는 교종, 그리고 선교종(선종+교종)도 있고 조계종, 천태종, 일붕선교종, 진각종, 여래종, 일승종, 미타종, 미륵종, 원효종, 태고종, 정토종 등...이 있지 않습니까?

 폐일언하고 선생님이 믿기로 했다('교회에 나간다'와 '예수가 하나님이다'하고 믿는 것은 다른 뜻이지요)는 그 신. 그 기독교에 대해 얘기해 봅시다. 우선 기독교를 말하기 전 제 얘기를 잠간 해야할 것 같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지요. 성경을 처음 읽어 본 사람들이 공통으로 느끼는 일이지만 그 감동을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답니다. 중학교 1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는 모습을 목격한 저로서는 인간의 허무함을 뼈 속 깊이 느끼고 있었던 터였습니다. 목사가 되는 길을 몰랐기 때문에 그 길을 가지 못했지만 성직자가 돼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던 일이 있었답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다른 종교도 그렇지만 기독교는 종교자체가 곧 권력이었던 과거가 말해주듯 상당부분 이데올로기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이 어때서요?'할지 모르지만 그건 순진한 사람들이 하는 말이고 돈이나 권력은 인간의 신념까지 바꿔놓을 수 있는 마력을 가지고 있더군요. 옛날 저와 함께 시민운동을 함께 했던 사람들. 그 사람들 중에는 지금 청와대에도 있고 정부쪽 고위직에도 있는 걸 봤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옛날 하던 말과 지금 하는 소리는 같은 사람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변절을 했더군요. 그거지요. 권력의 맛. 돈의 맛을 알면 그럴 수 있다는 겁니다.

 기독교도 초기에는 처절한 탄압을 받았지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제정일치시대를 거치면서 초기의 정신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예수의 수제자인 베드로는 예수의 뒤를 따라 십자가에 그것도 거꾸로 매달려 죽지만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 교황(베드로의 후계자=교황)은 곧 왕 중의 왕이 되지 않았습니까? 유럽 제국의 왕을 임면할 수 있는... 권력이 장기간 집권을 하면 부패하기 마련인 것 같습니다. 중세의 기독교가 얼마나 타락했으면(면죄부를 팔아먹는...) 루터나 쯔빙글리 같은 이들, 토마스 뮌쯔 같은 이들이 목숨을 건 저항을 시작했겠습니까?

 종교개혁을 성공한 마르틴 루터는 민중을 배신한 대가(?)로 오늘날 개신교의 종주가 되지만 예수의 뜻을 따르겠다고 권력과 타협을 거부한 토마스 뮌쯔는 처형을 당하지 않습니까? 천주교에서 아니 유대교에 뿌리를 둔 기독교는 천주교에서 그리스 정교회, 국공회,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여호와의 증인 등 엄청난 파벌이 만들어지고 각 종파들은 전쟁을 치르듯이 숫자를 늘려 세력 확장해 나갔습니다. 공유사상인 기독교가 자본주의와 타협을 신의 뜻이라고 호도하면서 권력의 맛. 세상의 맛을 알고 스스로 권력이 되기를 거부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교회를 나가면 됐지. 뭘 그리 복잡하게 따지고 드느냐 하면 할 말이 없습니다만 나의 삶을 맡긴다(신앙)는 것은 그렇게 함부로 그리고 단순하게 결정할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이 살아 온 삶을 부인하고 신이 가르쳐 준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말씀처럼 '자신을 부인하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나의 제자가 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생활을 한다' 또는 '신자'란 어떤 의미를 다고 있는가? 진정한 신앙인은 중생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은 '중생(거듭난다)하지 않고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했습니다. 건방지게 앞으로 목사님을 통해 하나님을 쉽게 자세히 배우실 기회가 있는데 왜 제가 이런 얘길 하는가 하면 목사님이 가르쳐 주실 한느님과 제가 말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다르게 느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40년이 넘게 기독교에 몸담고 있는(?) 저가 알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지금부터 그 얘길 하려고 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지금 대부분의 '신부님들이나 목사님들이 가르쳐 주는 그런 하나님은 처음의 예수님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에 따라 기독교의 성격이 달라질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안경(신관)으로 예수를 보느냐에 따라 전통신학과 민중신학 또는 해방신학으로 나누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처음 현재의 성서가 전부이고 그런 시각에서 예수를 해석하는 것 외에는 다른 것이 없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외경이라는 것도 있고 예수님이 절대권력을 가진 무시무시한 분이 아니라 나의 육신의 아버지 보다 더 사랑이 많으시고 인자하신 분이라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모습의 예수를 가르쳐 주느냐에 따라 신자들의 신앙을 전혀 다른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목사님이나 신부님은 현실보다 내세를 더욱 강조하고 인자하신 하나님보다 권위의 하나님, 절대자 하나님을 더욱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의 모습을 보는 사람에 따라 예수님의 모습이 다르게 보이듯이 성경도 해석하는 사람에 따라 그 뜻이 달라집니다. 물론 기록된 사실도요. 예를 들면 신약의 5복음서 중에서 가장 먼저 기록된 성서는 마가 복음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베드로의 수행원이 그것도 예수님이 죽은 후 60년이 지나 기록한 것이 최초의 신약성서인 마가복음입니다. 마가복음의 산상보훈에는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고 기록돼 있지만 다른 복음서 그러니까 마태나 누가, 요한복음에는 '그 산상보훈 앞에 '마음이'라는 말이 더 추가되어 있습니다. 왜 그럴까? 성경은 성령의 인도에 따라 일점 일획도 보태거나 빼서도 안 된다는 사람들(無誤說)이 그걸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겁니다. 이것만 보아도 기독교는 가난한 사람들의 종교에서 부와 권력과 손잡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지요.

 이제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좀 더 깊이 살펴봅시다. 예수는 과연 누구인가? 예수를 바르게 알지 못하면 신앙생활은 헛수고일 뿐입니다. 예수를 그리스도(구세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천주교, 개신교...) 선지자일 뿐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보는 사람(유대교, 이슬람교)도 있습니다.  선생님이 다니시기로 한 교회(개신교)는 예수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다'라고 믿음으로서 성립한 종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삼위일체'(성부인 야훼와 성자인 예수 그리고 성신인 성령)이신 하나님이시라는 겁니다. 성부는 무엇이고 성자는 뭔가 그리고 성령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건 절대자 야훼=예수=성령이라는 다른 이름 같은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신. 삼위일체의 신을 어떤 모습을 믿어야 하는가?'
 자비의 신인 예수를 믿을 것인가? 아니면 복수의 신인 구약의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구약성서에 나타난 신은 복수의 신, 위엄의 신으로 나타나고,. 신약성서의 신은 죄를 지은 인간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주시는 자비스런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공포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엄부(嚴父) 아래서 자란 자녀처럼 권위에 복종하는 순종적인 신앙인이 되거나 이중인격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비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믿는다면 사랑을 실천하는 신앙인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발 하니님이 무서워 마음에도 없는 자선을 베푸는 그런 신앙인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쓴 두서 없는 글을 마치겠습니다. 제발 제 좁은 신관(神觀)이 선생님의 신앙생활에 작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하는 마음 간절합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종교2008.10.21 17:04



개신교에는 ‘부흥회’나 ‘신앙 간증‘이라는 걸 가끔 한다. 여기에는 단골손님으로 지옥이나 천국에 갔다 온 사람이 등장해 신자들에게 자기가 지은 죄를 회개하게 하거나 공포심을 갖게 한다. 그런데 조금만 주의해서 들어보면 그 사람들이 갔다 왔다는 지옥이 한결같이 똑같은 곳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진짜 이분들이 갔다 온 지옥이 실체적인 사실이라면 목격한 곳이 같아야 할 텐데 모두가 다 다르다. 그렇다면 이들이 보고 왔다는 지옥이나 천국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인가?

교인들에게 ‘왜 교회를 다니느냐?’고 물어보면 하나같이 ‘천당 가기 위해서..’란다. 그렇다. 일반적으로 교인은 ‘예수를 믿으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믿음을 기정사실로 한다. 물론 종교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인간이 만든 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기독교와 같은 종교 이전에도 종교는 있었다. 미개한 사람들은 자연의 신비나 공포, 인간의 능력을 벗어난 힘은 신의 영역으로 알고 신과 통하는 사람(巫)이 우두머리가 되어 다중을 지배하던 제정일치시대도 있었다. 이러한 사회 즉 제정일치(祭政一致)시대를 거치면서 범신론을 비롯한 온갖 신을 섬기는 ‘신인공존’의 시대를 구가하게 된다. 이 중에서 특이한 유대인의 종교가 등장한다. 유일신 사상은 유대인의 민족신앙으로 아직도 예수가 크리스도인가 아닌가를 좋고 유대교와 기독교를 분리되지만 예수가 하나님이라고 보는 기독교와 유대교는 각각 제갈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자연발생적인 원시종요인 샤머니즘을 빼고는 종교가 정치에 이용되는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지 않은 때가 없다. 불교가 삼국시대를 지배한 이데올로기였음은 그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다. 유교는 엄밀하게 따져 종교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중국사회의 정신적인 지주요, 조선시대 지배이데올로기가 된다. 인도의 힌두교가 그렇고 동남아시아 대부분의 약소국들은 불교라는 종교가 체제를 유지하는 이데올로기 역할을 감당해 왔다. 어떤 종교치고 정치와 무관할 수 없지만 지구상의 종교 중 인류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종교가 기독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대인의 민족 종교가 서구의 사상사를 지배한 연유는 메시아사상과 무관하지 않다.

유대인의 민족종교인 기독교가 서양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지배하게 된 연유에는 여러 가지 사연이 있겠지만 메시아사상과 천국, 지옥이라는 교의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유대 땅 이스라엘에 탄생한 예수. 그를 두고 구세주인 크리스트냐 아니냐는 논쟁은 지난 시간 정리한 바 있다. 예수가 구세주로 믿는 천주교와 개신교에서는 영생과 천국을 믿는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이 믿는 천국이란 객관적으로 실존하는가?

 성경에 보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태 3:2),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 중에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임하는 것을 볼 자들도 있느니라(마가복음 9:1)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21)와 같은 표현으로 천국이 진술되어 있다. 그렇다면 지옥은 어떤가? 성서에 보면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막9:48) "영혼과 육신을 아울러 지옥에 던져 멸망시킬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라"(마10:28),  "천사들을 보내서 악을 행하는 자들을 불구덩이에 처넣는다."(마13:41-42)와 같은 구절이 있다.

  이 세상에 살다보면 함께 하늘을 이고 같이 함께 산다는 게 부끄러울 만큼 철면피한 사람도 없지 않다. 어린 아이를 유괴해 죽이고 부녀자를 납치해 어떻게 하고 무고한 사람을 수백 명이나 죽이고 뻔뻔하게 귀족행세를 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죽어서 가는 지옥이 정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끔 해 본다. 짐작컨데 요한게시록과 같은 경은 로마의 종살이하던 이스라엘의 고통을 신에게 하소연한 게 아닐까? 그런데 그들. 하나같이 똑똑하고 잘난 그들은 그런 지옥에 겁을 먹지 않는다는데 문제가 있다. 아마 예수의 시대 로마의 식민지에서 세리들이 이들과 같은 무리가 아니었을까?

 신앙은 ‘사탕을 주기 때문에 시키는 일을 잘하는 어린이' 수준이어서는 안 된다. 나의 선행이 천국을 가기 위한 아니면 지옥이 두려워 어쩔 수 없이 믿는 행위라면 그건 엄밀한 의미의 종교가 아니다. 영악스럽게도 범법자는 그런 수준의 종교에 겁을 먹을 만큼 순진하지 않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인간이기를 포기한 사람들에게 필요한(?) 지옥이 그 구실을 못하고 오히려 착한 사람의 공포감을 불러오게 한다는 것은 목적전치가 나닐 수 없다. 이는 종교지도자의 직무유기가 한 몫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땅을 천국으로 만들라‘는 신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자본과 손잡고 회칠한 무덤이나 돌보는 목회자는 성경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천국에 대한 강조도 예외가 아니다. ‘죽었다 살아난 사람이 하늘나라에 갔더니....’ 어쩌고 그래서 ‘지옥 있습니다. 천당 있습니다’나 강조하면 없는 지옥이나 천국이 존재하게 되는가? 천당을 강조하면 인간으로서 해야 할 당연한 선행조차도 신에게 보이기 위한 위선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객관적 실체로서 지옥과 천국이 존재하느냐의 유무는 그것이 있기 때문에 유인요소는 될망정 그것 때문에 겁이 나서 신의 눈치를 보는 신앙은 건강한 신앙이라고 보기 어렵다. '어릴 때는 단단한 것을 먹지 못하지만 장성한 후에는 그친 음식도 소화시킬 수 있듯이...' 건강한 신앙은 신의 눈치를 보는 차원을 초월해야 한다. 지옥과 천당이 없어도 예수님을 존경할 수 있는 그런 신자일 때 건강한 신앙이 가능한 게 아닐까?....(계속)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