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업을 하러 교실에 들어가 보면 이 아이들이 학교에 왜 왔는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알고 싶은 욕심도 지적 호기심도 없이 끝도 없이 잠을 자거나 장난을 치고 시간을 때우는 아이들.... 공부가 하기 싫으면 학교에 오지 않아야할 텐데.... 그래도 꼬박꼬박 학교는 나온다. 공부를 하기 싫은 아이들이 학교에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학생들 중에서 자기 맘대로 학교에 가든지 말든지 결정하라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아마 과반수가 학교에 나오지 않을지 모른다. 학교는 그만큼 인기를 잃었고 부모의 강요나 졸업장이 필요해 어쩔 수없이 다니는 학생들이 많다. 보충수업시간에는 선생님의 허락 없이 무단 조퇴하는 학생들이 늘어 가고 있다.

 

가정에서 자녀들 어떻게 키울까?

 

요즈음 부모들 중에는 아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태교부터 남다르다. 자라면서 자녀의 기를 살린다는 이유로 아이가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며 키운다. 아니 자녀가 원하지 않아도 미리 알아서 다 해준다. 내 자식만큼은 내가 살아 온 시행착오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일념으로 장난감을 알아서 사 주고 컴퓨터며 게임기며 스마트폰이며 부족한 것 없이 다 해준다. 이렇게 자란 아이는 부모가 고맙다든지 만족한다든지, 감사하다는 정서를 느끼지 못한다.

 

당연히 부모는 그래야 하고 나는 왕자처럼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리 다 알아서 해 주지만 그래도 혹 필요한 것이 있으면 부모에게 말하면 모두 해결된다고 믿는다. 돈이 없으면 은행에 가서 찾으면 되는 줄 알고 어려운 문제도 부모가 해결해 줄 수 있다고 믿고 자란다.

 

초등학교도 입학하기도 전에 영어학원이며 미술학원이며 피아노 학원은 필수다. 그걸 왜 배워야하고 배워서 어디에 쓸 것인지 그런 목적의식 같은 건 알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부모가 가라고 하니 가야하는 줄 알고 부모는 그냥 이웃집 아이가 다니니까 ‘금쪽같은 내 새끼가 뒤지면 안 된다’는 경쟁의식이 학원 보내기를 따라하는 사람도 있다.

 

 

 

화분에서 키우는 화초도 물을 많이 주면 말라 죽는다. 자식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부모가 필요해서 보내는 학원, 부모의 체면이나 부모의 뜻에 따라 받는 교육은 아이들이 행복할까? 그런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은 먼 훗날 후회 없이 행복한 삶으로 연결될 수 있을까? 이렇게 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은 자식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으면 자녀에게 온갖 질책이 쏟아진다.

“넌 도대체 이렇게 해 가지고 어떻게 살아가려고 그러니? 그렇게 했다가는 대학은커녕 깡통차기 딱 알맞겠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과보호는 무력한 인간을 만든다 

 

자식은 화분에 심어놓고 키우는 화초가 아니다. 과보호로 키운 아이는 겉보기는 멀쩡하지만 창의력도 의욕도 없는 무기력한 존재로 자란다. 살다가 힘든 일을 만나면 쉬 좌절하고 사회성도 문제햐결능력도 없는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꼭두각시와 같은 존재로 자라기 쉽다. 세상에 내 자식이 무력한 인간으로 자라는 부모가 있을까?

 

자식은 부모의 분신이나 부모가 못다 이룬 꿈을 완성해 줄 존재가 아니다. 우리 가문을 일으켜 세워 줄 임무를 띠고 태어난 존재가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대하는 것이 올바른 자녀관이다. 나의 자식이기 때문에 내 뜻대로 내 맘대로 키워야한다는 생각은 사랑이 아니라 욕심이다. 내가 낳아서 키우는 자녀는 나의 자식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생명체로서 존엄성을 가진 하나의 인격체인 것이다.

 

자식이 훌륭하게 자라는 걸 싫어할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부모의 의지대로 자라주고 부모가 원하는 대로 좋은 대학, 좋은 직장, 원하는 배우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도록 바라는 것은 모든 부모가 바라는 마음이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의 역할을 대행하는 대역 배우가 아니다. 부모의 의욕과는 다르게 개성과 소질과 특기가 다른 가능성을 가진 존재다. 부모의 뜻대로 살아가야할 꼭두각시가 아니라 스스로 행복한 인생을 찾을 수 있도록 안내해 주는... ‘벼 포기를 뽑는 농부가 아니라 벼가 잘 자라도록 김을 매고 가꾸는 그런 부모’가 될 수는 없을까?

 

이미지 출처 : 다음 검색에서...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분류없음2011.08.11 05:00



사랑하는 아이에게 영양가 있는 음식을 골라 먹이고 학교와 학원을 빠지지 않고 열심히 보내기만 하면 훌륭한 인격체로 자랄 수 있을까요?

‘학원에 가지 않으면 놀 친구가 없다’

‘아이가 놀고 있으면 왠지 불안하다’
‘100점만 받아오면...’

이런 생각을 하고 학원으로 학원으로 내 모는 어머니... 좀 더 비싼 학원, 좀 더 고액과외를 시켜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고 파출부며 노래방 도우미도 불사하는 어머니는 가장 훌륭한 어머니일까요?


기저귀를 찬 아이에게 영어 과외를 시키고 영어 본토발음을 하기 위해 혓바닥 수술도 불사하는 극성 엄마가 유능한 어머니일까요?


놀 친구가 없어 학원에서 학원으로 개미 쳇바퀴 돌듯이 쫒기며 사는 아이들은 정말 몸도 마음도 건강한 어른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아이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더불어 사는 법을 가르쳐야합니다. 그러나 학교는 무엇을 가르칩니까? ‘이겨야 산다. 지면 죽는다. 학교는 ‘성적지상주의’, ‘승자 독식주의’가 진리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무엇인 소중한 것인지 무엇이 귀한 것인지... 행복이 어떤 것인지... 바르게 산다는 게 무엇인지... 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귀중한 존재라는 걸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어떤 것이 아름다운건지....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가르치기 보다는 100점만 받으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과정은 무시하고 결과만 좋은 그만이라며 정답만 가르쳐주는 교육은 착한 교육일까요?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청소년기를 저당 잡히고 군대보다 더 엄격한 교칙에 묶여 시험문제 풀이로 날밤을 세우는 아이들.... 학원과 학교를 개미 쳇바퀴 돌듯 오가며 친구가 뭔지 자연의 소중함이 뭔지 모르고 오직 이겨야 산다는 삭막한 경쟁의식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님들. 내 자식이 지금 이대로 교육받고 자라면 정말 건강한 몸과 마음을 가진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부모님들이 원하는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아이를 경쟁 때문에 정작 가장 중요한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오늘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상식적인 이야기, 사랑 때문에 보이지 않는 이야기를 한 번 짚어보기로 합시다.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키워야할까요?



첫째, 나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것부터 가르쳐야합니다.

성적이 나쁘다고 자살하는 아이들이 있습니다. 얼굴이 못생겼다거나 가난하다는 이유로 혹은 친구들에게 왕따를 당한다고 자살을 하는 청소년들이 있습니다. 청소년들의 자살률이 높아지자 뒤늦게 ‘자아 존중감을 길러야 한다고 시범학교니 연구학교를 만들어 쇼(?)를 하고 있습니다. 자아 존중감은 시범학교나 연구학교로 기르는 게 아니라 학교의 모든 교육과정이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교육과정 전체에 녹아 있도록 짜야합니다.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아이가 어떻게 내 부모나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소중하다는 것은 아는 사람만이 이웃을 사랑할 줄 알고 내 민족과 우리문화를 아끼고 사랑할 줄 아는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을 가르쳐야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라고 했습니다.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지요.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떤가요? 돈이 사람보다 자산이 사람보다 소중하다는 풍토가 만연해 있습니다. 학교를 비롯해 그 어디에서도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라는 걸 가르쳐 주지 않습니다. 학교에서는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선(善)이요, 승자가 (善)이 됩니다. 내가 승자가 되기 위해 소중한 친구에게 노트조차 빌려주지 않는 삭막한 마음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선의의 경쟁이 나쁘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내가 소중하다는 것을 알면 남도 소중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와 너, 우리가 소중한 존재라는 것. 인간존중의 가치관을 갖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뜻이지요. 교육은 근본은 인간에 대한 예의, 더불어 사는 지혜,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갖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것을 ‘인간의 존엄성’이라고 하지요. 말로는 ‘인간의 존엄성’을 말하면서 친구나 이웃을 사랑하고 배려하는 교육은 그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습니다.

셋째, 지식위주의 교육만이 교육이 아닙니다.

놀이를 빼앗긴 아이들. 머리는 있어 가슴이 없는 아이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놀이문화를 빼앗기고 학원에서 학원으로 전전하는 아이들은 자라서 어떤 인간이 될까요? 실천이 없이 말만 하는 사람을 ‘입만 살아있다’고 하지요. 유치원에서부터 초·중·고등학교시절. 아이들의 머리  속에는 실천과 연결되지 않는 관념적인 지식들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약속이란 무엇인가? ‘다른 사람과 앞으로의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미리 정하여 둠. 또는 그렇게 정한 내용’ 이렇게 사전에 나온 내용을 외워서 알긴느 하지만 약속을 어기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무엇일가요?

친구와 ‘오늘 오후 몇 시 어디에서 만나 기마전 놀이를 하자’는 약속을 하고 실제로 어기지 않도록 해보고 놀이를 하면서 규칙을 지키고 상대방에 대해 배려하고 질서를 지키고 인내하고 하는 과정에서 소중한 삶을 경험하게 됩니다. 놀이문화를 빼앗기고 학원에서 학교로 학교에서 학원으로 개미 쳇바퀴 돌듯이 살아가는 아이들은 그런 귀한 경험하지 못하고 자라고 있습니다. 아이가 놀면 불안 한 어머니... 놀이는 살아 있는 공부입니다. 모르는 것은 배우면 되지만 그만그만한 나이에 경험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체험은 나이가 들어 배우기는 어렵습니다.

네째,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는 이번 여름, 어마어마한 폭우와 태풍이 얼마나 무서운가를 너무나 아픈 경험을 통해 배웠습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문화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가, 또 자연의 위력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실감했습니다. 사람은 초자연적인 존재가 아닌 자연의 일원입니다. 자연에서 태어나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어릴 때부터 풀이 어떻게 자라고 꽃은 어떻게 피는지, 내가 먹는 음식이 어디서 온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자랍니다.

시멘트로 지은 집에다 시멘트 길을 밟으며 손에 흙을 묻히지 않고 자랍니다. 생명의 근원인 태양이 얼마나 소중한지, 농부나 어부들의 땅방울의 가치를 모르고 자라고 있습니다. 나의 생명의 근원이 돈이 아니라 수고한 이웃이 흘린 땀의 대가라는 것 모르고 자라고 있다는 말입니다. 수량화된 지식, 칼로리를 따지고 영양가를 따지고 그런 개량화된 지식으로 세상을 보고 그런 안목으로 살아가도록 강요받고 있는 것입니다.


자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닙니다. 더불어 살아야할 공존의 대상입니다. 자연을 훼손하면 보복을 당합니다. 극지방의 얼음이 녹고 바다의 온도가 높아지는 엘리뇨현상, 라니뇨현상이니 하는 기상이변으로 인류의 미래가 위기를 맞고 있습니다. 서양에서 들어온 지식, 서구의 자연관은 정복주의 세계관입니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 존재한다는 참으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오만한 사고방식이 지구를 위기로 몰아가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자연과 공존하는 세상의 살아왔습니다. 자연의 소중함을 가르치고 자연과 더불어 살아 갈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자식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부모라면 오늘날 학교교육이 병든 교육이라는 것을 하루빨리 깨달아야합니다. 학교교육을 거부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학교에서 어련히 알아서 해주겠지...!’ 하지 마십시오. 교육을 상품이라고 선언한지 오랩니다. 상품이란 수요자가 좋은 상품을 선택할 권리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이들이 받는 교육이 삶을 황폐화시키는 반교육이라면 부모들이 나서야합니다.


‘누군가가 해주겠지...!’ 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방심하고 있을 동안 사랑하는 아이는 너무 빨리 자라 좋은 교육 바른 교육을 받을 기회를 잃고 말 것입니다. 학교운영위원회든, 학부모단체든 나가서 적극적으로 바꾸려고 노력 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고쳐주지 않습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기회는 놓치면 다시 오지 않습니다. 어머니의 위대한 힘으로 병든 교육, 위기의 교육을 살려내야 합니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인성교육자료2011.08.09 05:00



기쁜 일을 만나면 기뻐해야 하고 슬픈 일을 만나면 슬퍼하는 게 정상이다. 성낼 일이 있으면 성내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예뻐하고, 귀한 것을 보면 귀하게 생각할 줄 알고.... 그래야 정상적인 사람이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재물욕, 색욕, 식욕, 명예욕, 수면욕 같은 다섯 가지 본능적인 욕구와 기쁨, 노여움, 슬픔, 즐거움, 사랑, 미움, 욕심 같은 사람의 일곱 가지 정을 가지는 것이 보통 사람들의 정서다.

화를 내거나 미워할 줄 알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사랑의 감정이 생기고 슬픈 일을 만나면 슬퍼할 줄 알고, 기쁜 일을 만나면 웃을 줄 알지 못한다면 정상인 아니다. 제대로 생각할 줄 알고 즐길 줄 모르는 사람은 바른 삶을 이어가기 어렵다. 어려운 일을 만나면 자기 스스로 제어하면서 그런 여유로움 속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 감정을 죽이거나 누르는 것이 아니라 감정을 일으키고 다스릴 줄 아는 것 그것이 가능할 때, 한 인격체는 비로소 정서적으로 안정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 다음 이미지 검색에서>

그런데 오늘날 청소년들의 모습을 보면 그게 아니다. 성낼 일도 아닌데 불같이 성내고 슬픈 일을 만나도 슬퍼할 줄 모르는 아이들도 많다. 잠을 자야 하는 시간에 자고 일어나야 하는 시간에 일어나야 하는데 잠을 자야 하는 시간인데 잠을 자지 않고 공부해야할 시간에 엎드려 자는 아이들이 있다. 끼니도 먹을 시간에 먹어야 하고 배설도 규칙적으로 하는 것이 건강을 지키는 길이다. 그런데 아침을 그르고 쉬는 시간에 컵라면으로 시장끼를 때우고 군것질을 입에 달아놓고 있다. 방부제가 들었는지 유해색소가 든 음식인지 그런 건 개의치 않는다. 

자기 물건도 챙기지 못하고 값진 물건을 잊어버려도 찾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뭘 먹고는 뒤처리를 할 생각도 않고 휴지나 껍질은 아무데나 예사로 버린다. 자신을 낮추고 겸손해 하기보다 ‘너보다 내가 더 잘났다. 나는 너보다 비싸고 고급물건을 가지고 있다...’며 자기 스스로 과시하기를 좋아한다. 가난한 아이들, 그걸 갖지 못하는 친구들의 아픔은 생각하지 않는다. IMF를 맞으면서 줄어들기는 했지만 메이커 신발이나 분에 넘치는 비싼 옷을 찾고 과시하던 분위기는 아직도 사라진 것이 아니다. 

아이들이 왜 이렇게 됐을까? 책임감이 없는 아이, 인내심도 창의력도 없고, 스스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구별하지 못하는 아이들...   소위 마마보이의 모습을 어디에서나 흔히 볼 수 있다. 도대체 이 아이들이 정상적이지 못한 유약한 아이로 자란 이유가 무엇일까? 다른 사람의 눈에는 그런 아이들의 병든 모습(?)이 금방 보이는데 부모님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사랑이라는 안경. 그 안경으로 자녀를 바라보고 양육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배고픔도 겪어보고 슬픈 일, 기쁜 일도 경험해 봐야 한다. 말로 해서 알아들을 일이 있고 경험을 통해 배우는 것이 따로 있다. 배가 고프면 스스로 찾아 먹도록 습관화되지 못한 아이는 스스로 배고픔을 해결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배가 고파보지 않은 아이가 남의 배고픔을 이해 하기 어렵다. 외로움을 겪어 보지 못한 아이, 슬픈 일을 경험해 보지 못한 아이가 어떻게 어떻게 정상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할 것인가? 

                                       <이미지 출처 : 교육희망>

그런데 오늘날 많은 부모들은 사랑이라는 안경으로 끼고 그들이 스스로 설 수 있는 길을 막고 있는 경우를 종종 본다. 부족한 것 없이, 배고프지 않게, 그리고 자식이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지 다 해 준다. ‘나는 배고프고 힘들게 자랐지만 너만은 그렇게 키울 수 없다’는 비뚤어진 사랑이 자녀를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실학자 이덕무는 자녀양육의 교훈으로 낙상매의 예를 이렇게 적고 있다. 매는 해안의 암벽에서 주로 번식하며, 알을 낳는 시기는 3월 하순에서 5월 무렵이고 한 배의 산란 수는 3, 4개이다. 새끼는 알을 품은 지 28, 29일 만에 깨고 깨자마자 수컷은 자신이 잡아 온 먹이를 직접 암컷과 새끼에게 나누어 준다. 그 뒤에 35~42일이 지나면 암수 함께 먹이를 찾아 나서고 잡아 온 먹이를 공중에서 둥지에 직접 떨어뜨려 새끼가 알아서 먹도록 한다.

어미 매는 새끼 매를 먹일 때 높은 하늘에 떠서 먹이를 떨어뜨린다. 그 먹이가 어미를 바라보고 있는 새끼들 바로 위로 떨어진다는 법은 없다. 따라서 새끼들은 모험을 해 가며 그 먹이를 차지하려고 위험을 무릅쓴다. 그러다가 절벽의 둥지에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놈도 생긴다. 어미 매가 노리는 것이 바로 이 먹이를 취하려다가 실패하여 다리를 다친 낙상매인 것이다. 

왜냐하면 새끼 때에 낙상을 한 매가 그 결함이나 열등 보상으로 별나게 사납고 억센 매가 된다는 것을 어미 매들은 알고 있기 때문에 자칫 죽을지도 모르는 낙상을 먹이로써 유도한다는 것이다. 임금님의 매 사냥을 위해 조정에서 응방을 두고 매를 길렀는데 낙상매는 진상품으로서 금테로 발찌를 하여 여느 매들과 구별했다고 한다.

호랑이도 새끼가 어느 정도 자라면 사냥감을 적당히 상처 입혀서 스스로 싸워보게 만들어 새끼가 스스로 먹이감을 찾을 수 있도록 훈련을 시킨다고 한다. 그런데 만물의 영장이라는 사람들은 사랑에 눈이 어두워 사랑하는 자녀가 건강하고 올곧게 자라지 못하게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아이들이 정서적으로 정상적으로 자라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 그 책임은 전적으로 부모에게 있다. 정서는 관념이 아닌 경험을 통해 습득된다. 이러한 정서를 사회화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놀이다. 동네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소꿉장난이나 게임을 하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게 아니다. 

                                           <이미지 출처 : 교육희망>

추운 겨울에 얼음을 지치다 물에 빠진 발이 시려도 그걸 참으면서 어려움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친구들과 어울려 우정을 배우고 양보하는 마음과 질서를 지켜야 하는 필요성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배도 고프고 발도 시리고 춥지만 어머니께 꾸중을 들을까봐 참으면서 인내심을 배우고 친구의 소중함을 배우는 것이다. 놀이나 게임은 이렇게 규칙을 지킬 줄 아는 준법정신이며 친구의 도움을 고마워하는 우정과 인내심과 질서의 필요성을 배우는 소중한  교육이다.

학원에서 영어단어 한두 개 익히는 것과 놀이를 통해 정서가 안정된 모습으로 자라는 것이 비교가 되지 않는다. 피아노 학원이며 태권도학원이며 웅변학원, 컴퓨터학원, 미술학원...이렇게 가르쳐 만능인간이라도 만들겠다는 것인가?

이웃집 아이는 무슨무슨 학원에 다니는데 우리집 아이는 혹시 경쟁에서 뒤지면 어쩌나 안달하고 불안해 방학도 없이 등 떠밀어 학원으로 보낸다고 부모의 역할을 잘하는 것이 아니다. 정서적으로 성숙할 수 있는 기회인 놀이를 빼앗아 무한 경쟁에 내모는 것이 좋은 부모가 아니다. 학교성적만 좋으면 모든 것이 용서 되는 그래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들어주는 것이 사랑일 수 없다. 오늘날 마마보이를 키우는 어머니들은 낙상매에게 자녀 양육법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인성교육자료2011.06.12 05:30



부모의 욕심이 아이들을 망친다

몇 년 전 일이다. 퇴근 시간에 창원에서 좌석버스를 타고 마산으로 오는 길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퇴근 버스에는 하루의 피로가 가득 담겨 있다. 버스에서 집까지 오는 동안 잠간의 휴식은 보약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시간이다.

그런데 이 귀한 시간을 빼앗은 작은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창원역 근처쯤 왔을까? 어느 정류소에서 젊은 아주머니가 초등학교 1학년에 입학했을까말까 한 형과 두서너살 아래로 보이는 동생을 데리고 함께 차에 올랐다.

                           <모든 이미지출처 : 다음 이미지 검색에서>

자리를 잡아 앉는 가 했더니 금방 아이들은 차 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총놀이를 시작했다. 당연히 어머니가 “차 안에서는 장난치면 위험해” 하고 꾸중을 할 줄 알았다. 아이들이 계속 차 안을 뛰어다니자 보다 못한 연세 지긋한 할아버지 한분이 “이 놈들, 차 안에서 장난하면 안돼!” 그랬고 그 한마디로 아이들은 주눅이 들었는지 금방 조용해졌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아이 엄마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못 볼 것을 본 것이 아닌가?’ 하고 내 눈을 의심했다. 아이들을 꾸중한 어른에게 감사하다는 말은 못할망정 노골적으로 인상을 쓰면서 못마땅해 하는 표정이 역력했기 때문이다. 아마 ‘당신이 뭔데 내 귀한 아들의 기를 죽이느냐?’는 항의 표현인 듯 했다. 주변 사람들의 눈이 없었다면 아마 그 말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을듯한 그런 얼굴이었다.


아이들이 조용해지자 차 안은 다시 잠시 전의 고요가 찾아왔고 언제 그런 일이 언제 있었느냐는 듯 다시 평화가 찾아왔다. 나의 행동이나 생각으로 다른 사람이 고통스러워하거나 피해를 보게 한다는 건 죄다.

그러나 산업사회 이후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되면서 서로가 서로에게 지켜야 할 도리나 예의쯤은 팽개쳐도 좋은 것쯤으로 되고 ‘나에게 이익이 되면 선’이라는 계산적인 이기심이 지배하는 사회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도덕군자 같은 소릴 한다고 힐난할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자녀를 양육하는 어머니들조차 그런 감각도 없이 아이들을 키우면 사랑하는 아이들은 어떤 모습으로 자랄까?


「아이가 갖고 싶어 하는 것을 무엇이든 사 주면 아이는 세상의 모든 것이 자기 것이 될 수 있다고 오해하면서 자랄 것입니다. 아이가 나쁜 말을 사용할 때, 그냥 웃어넘기면 재치를 키워 장차 더욱 나쁜 말로 이웃에게 상처 줄 것입니다.

잘못된 품행을 야단치지 않고 스스로 잘 할 것이라고 내버려 두고 훈계나 훈련이나 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무식해서 용감한 독불장군이 되어 사회로부터 격리 될 것입니다. 아이가 어질러 놓은 것을 모두 정돈해 주면, 쓰레기를 몰래 버리고 모든 잘못된 일은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는 무책임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스프라이즈에 ‘시골훈장’이라는 분이 쓴 ‘자녀를 망치는 열 가지 방법’이라는 글 중의 일부다. 젊은 분들이 들으면 ‘꼰대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요즈음 결혼할 젊은 부부들이 한번쯤 새겨 들어야할 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교육을 감당하는 교사에게 자격증을 주듯 ‘신랑 자격증’, ‘신부 자격증’, ‘어머니 자격증’ 이런 걸 주면 어떨까? 가끔 이런 생뚱맞은 생각을 하고 실소를 하기도 한다. ‘결혼 대비 이혼율이 47.4%가 넘었다’는 보도도 그렇지만 요즈음 부모들의 자녀양육모습을 보면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자식 교육을 위해서라면 기러기 아빠며 이민도 불사하는 모습을 보면서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그게 과연 진심으로 자식을 사랑하는 방법일까? 그렇게 양육하면 부모가 원하는 사람으로 자랄 수 있을까?


이혼율뿐만 아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또 아내가 남편에게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 자녀가 부모에게. 또한 이웃에게 서로가 서로를 배려하는 마음은 찾아보기 어렵다.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

오늘날 우리사회가 이 지경이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다. ‘사회적 존재’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 담겨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당연히 가정이나 학교는 내일의 주인공이 될 아이들에게 개인적인 존재가 아닌 사회적인 존재로 자라도록 양육해야 옳지 않을까?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살아남는 길이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선’이라는 가치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모든 이들이 함께 누릴 행복이란 존재할 수 없다. 다른 사람의 희생의 대가로 누리는 나의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다. 나의 이익을 위해 다른 사람은 어떻게 돼도 좋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우리사회는 모두가 만족하는 행복한 사회란 영원히 도래하지 않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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