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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예수는 신인가, 인간인가?

by 참교육 2008. 1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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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다닌다고 다 기독교인인가. 아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기독교인이다.” 요한복음 강해를 앞두고 1월 31일 기자들과 만난 김용옥 교수(세명대 석좌)가 당신은 “기독교인이 아니지 않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지식인은 참 편리해서 좋겠다. 입장이 곤란하면 어려운 말로 적당히 지나가면 된다. 김용옥교수의 대답도 그렇다. 이번 회견에서 김교수는 당신은 ‘예수를 믿는가?’라는 질문에는 “나는 예수를 믿는다. 내 안에 예수에 대한 심상이 있다." 이렇게 알듯 모를 듯한 말로 적당히 지나갔다.



만약 김교수에게 내가 질문을 할 기회가 있었다면 “예수님은 사람인가 신인가?”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 민감한 문제, 논란이 될 문제는 대중언어가 아니라 언술적인 유희로 통과하는 게 지식인의 장기일까? 사실 예수가 ‘신인가? 아니면 사람인가?’는 해묵은 그러나 끝나지 않은 논쟁이다.

크리스트(구세주) 탄생을 학수고대하던 유대인들도 ‘나는 하느님의 아들’라는 예수의 말에 신성을 모독했다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기독교인들조차 “예수는 신이다”와 “예수는 신성이 있다”는 말은 전혀 성격이 다르지만 이것을 거의 구별하지 않는다. ‘신이다‘라고 간주하는 것과 ’신성이 있다‘는 표현은 결론이 같을 수 없다.


예수를 신이라고 보는 측에서도 예수님께서 "나는 신이다"라고 직접 말씀하셨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요 1:)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는 구절을 인용해 삼위일체, 혹은 ‘예수=신‘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 밖에 마태복음은 왕이신 예수, 마가복음은 노예이신 예수, 누가복음은 사람이신 예수, 요한복음은 신성 방면에서의 ’하나님과 하나‘라는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측에서는 성서만으로는 예수가 신이라는 증거도 없고, 신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믿음’으로써 예수의 신성을 인정할 뿐이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크리스천이자 수도사였던 윌리엄 오브 오캄은 ‘예수는 신이 아니라는 것이 해답’이 된다고 말하고 ‘그래야만 수수께끼 같은 삼위일체, 복음서의 억지스런 구약인용, 압제 세력인 로마의 미화, 예수의 수많은 이적을 목도하고 들었음에도 예수의 메시아임을 부인하고 십자가에 매달아버린 유대인의 안타까운 선택이 설명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밖에도 ‘비록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 아닐지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이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유리병과 꿀이 따로 있었는데 어느 날 유리병 속에 꿀을 담아 놓았다. 이를 무엇으로 불러야 하는가? 이를 두고 ‘예수님 속에 임한 하나님’이며 ‘그 분을 하나님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느냐?’는 ‘신인합일(神人合一) 사상’이다.

신인이 합일되어 있다면 그 사람을 보고 신이라고 불러도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은 ‘예수님을 하느님과 완전 동일하게 보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꿀과 유리병이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가 신이 되는 과정은 니케아 종교회의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마르키아누스황제가 소집한 제4차 종교회의에서는

「1.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도 완전, 인성에도 완전하다.

2.그리스도는 참 신이며 참 인간으로 이성 있는 영혼과 육체를 소유하였다
3.신성은 성부와 같고 인성은 우리와 같으나 죄가 없다.
4.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성으로 동정녀에게 출생하심」을 결의하게 된다.
예수가 신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즉 삼위일체논쟁은 기독교가 존재하는 한 끝나지 않을 논쟁으로 보인다.

예수님이 신이기 때문에 두려워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신앙에 진정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신성을 강요하면 하느님은 두려움의 대상, 공포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 신이기 때문에 두려워서 섬기도록 하는 신앙은 구복신앙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

물론 신앙이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생겨났지만 신의 두려움이 아니라 이성을 통해 자신을 절제하는 성숙한 신앙을 갖도록 가르치는 것이 목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예수님은 인간이라는 측면을 강요하면 더더욱 존경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권력 앞에 고개를 숙이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데 그분만이 유일하게 권력과 맞섰지 않은가?


과거에 잘잘못이 있어도 현재 제대로 옳은 길을 가고 있다면 덮어두고 싶은 게 나의 개인 적인 심정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국교회는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이성을 잃고 막가파식으로 가고 있다는 감을 지울 수 없다. ‘천국과 지옥을 강요해 착한 사람을 겁주고 제정일치시대가 아님에도 십일조를 강조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 있다고 십일조를 강요하고 있다.

김용옥교수가 말한 것처럼 ‘예수가 ’신인가 인간인가‘ 하는 것과 예수처럼 사는 것’ 중에 어떤 것이 중요할까? 주객이 전도됐다고 해야 하나? 예수 없는 교회, 예수 없는 신앙... 그게 오늘날 한국교회 모습이다. 천국과 지옥을 강요하고 헌금의 액수나 신자의 수로 교세를 과시하는 그래서 '이 땅이 하늘나라가 되기를 바라면서' 오염된 세상에는 침묵하고 개인 구원만 강요하는 교회가 한국교회다.


한국교회가 타락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신부나 목사들이 져야 한다.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의 목자들은 성서를 바로 가르치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 중에는 하느님을 믿는지 샤머니즘을 신봉하는지 구별이 안 된다. 교회나 성당에 나와 복이나 빌고 죄의식에 사로잡혀 반 주체적인 운명론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솔직히 같은 성당이나 교회에 나오는 사람치고 같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이러한 혼란은 모두 목회자가 책임져야할 문제다. 죽어서 천국에 가기 위해 준비나 하는 교인은 예수가 바라는 인간상이 아니다. 교인들을 예수처럼 살도록 가르치지 않고 내세구복사상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떻게 살았는가? 예수님은 불의를 보고 무섭게 화를 내신 분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온유하기만 하신 분인 줄 알지만 교회당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었다, 내쫓으셨다, 쏟으셨다, 또 엎으셨다’ 라는 표현에서 그는 불의를 보고 불같이 화를 내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의 불의를 못본 채 하고 내세만 준비하라고 가르치는 목자는 참 목자가 아니다. 식민지시대를 거쳐 독재정권과 군사정권 아래서 ‘권력은 위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다’며 그들을 위해 조찬기도나 하고 사회의 부정과 비리에 침묵하게 만드는 목자는 목자가 아닌 적그리스도다.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권력을 도둑질한 전두환을 위한 조찬기도회는 하는 목사님들>

이러한 왜곡된 신앙은 결국 신에게 돌아 가야할 찬미를 목회자인 신부나 목사가 가로채 자신이 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독재자는 민중이 비판의식을 가지거나 합리적인 사고를 하기를 원치 않는다.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기 때문이다. 기독교도 그렇다. 근시안적인 안목에서 보면 신지들이 내세나 준비하고 복이나 비는 그런 신앙이 편하고 좋을지 모르지만 역사는 변하고 민중은 깨어난다.

그럴 경우 기독교는 한꺼번에 무너지고 말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른 건 모두 덮어두더라도 이 한 가지. 예수를 신으로 가르치더라도 그 신은 ‘전지전능의 공포의 신이 아닌 사랑의 신’이라는 사실. 그리고 예수가 신인가 아닌가? 그게 아니라 나는 과연 예수처럼 살고 있는가? 그게 문제다. 분명한 사실은 지옥을 강조해 순진한 신자들을 겁주는 종교지도자는 양을 인도하는 목자가 아니다.... (계속)


- 2007년 2월 8일 썼던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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