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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소승과 대승 사이

by 참교육 2008.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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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종교는 권력과 쌍생관계가 아니다. 그런데 기독교와 불교는 어떻게 거대한 권력으로 자리잡고 있을까? 대부분의 종교는 ‘약자 배려’라는 가치와 ‘평등’이라는 가치를 우선으로 한다. 이러한 종교의 속성상 반권력적 친민중적인 성향일 수밖에 없다. 절대권력 앞에서 종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권력화(이데올로기)되거나 아니면 도태의 길을 밟는다. 역사적으로 제정일치 시대에서는 제사장이 정치적인 수장이었다. 그러나 제정분리시대를 거치면서 대부분의 종교는 권력화 되어 살아남거나 아니면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사진 : 속리산 법주사>
 기독교의 예수는 ‘약자와 강자가 없는 세상, 평등세상’을 만들자고 주장하다가 귀족들과 종교지도자들에게 미움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고 만다. 석가모니가 지향하는 세계도 계급세상을 타파하고 평등세상을 추구하기를 바란다. 초기 불교가 개인의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소승불교에서 출발했던 것은 권력의 박해를 벗어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리학이 국가지배이데올로기가 되지만 도교는 권력의 미움을 받아 크게 번창하지 못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다. 농민을 배반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독일의 영웅이요, 역사의 승리자가 되고 토마스 뮌처(Thomas M ntzer)는 악마의 화신이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권력 앞에서 특정 종교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종교가 지향하는 이상을 포기할 때 가능한 얘기다. 모든 종교가 그렇듯이 불교가 권력과 밀월관계가 유지된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다. 평등세상을 이상으로 하고 있는 종교가 권력 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가 되지 않고서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것은 현존하는 대부분의 종교가 약자의 억압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를 증명할 수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는 외세의 지배를 받아 온 동남아시아의 불교가 '중생의 구제하는 대승불교'가 아닌 '개인의 해탈을 중시하는 소승'이 득세했다는 데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부정과 비리를 저지를 수 없도록 ‘공익 이사제’나 ‘친인척비율 축소’와 같은 내용을 담은 사립학교법을 바꾸자며 삭발과 단식을 하는 성직자를 보면서 현세의 종교는 ‘처음 마음’을 버렸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처음의 마음을 지키려 했다면 존재자체를 보장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부정이나 다름없는 변절은 종교가 국가 이데올로기로 변하거나 구복신앙, 혹은 현세구복적인 퓨전종교가 되고 만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절대권력이나 식민지 지배 하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불교가 대승이 아닌 소승이 주류를 이루었던 것은 소승불교가 정치의식을 마비시킨 공로 때문은 아닐까?

 민중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는 대승불교는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 권력에 의한 착취라는 모순에 맞서야 하기 때문에 식민지 종주국이나 독재정권이 용납할 리 없다. 소수가 권력이나 부를 독점하는 사회에서는 자연스럽게 불교도 세상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해탈을 위한 소승의 시대를 구가할 수밖에 없었다. 서슬 퍼렇던 권력이나 식민지배 아래서는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上求菩提), 아래로는 대중을 교화한다는(下化衆生)' 대중구제에 중점을 둔 대승불교는 뿌리를 내릴 수 없었던 것이다. 비판이 허용되지 않는 사회에서 평등사상이나 약자를 배려하는 가치가 허용될 수 없듯이 말이다.

 불기 2551년을 맞아 사원마다 연등행사를 비롯한 화려한 축제가 준비 중이다. 각 사원마다 거행되는 성대한 부처님 오신 날 행사를 보면서 ‘부처님이 이 모습을 보신다면 과연 감격해 하실까?’ 부처님은 왜 저렇게 살이찌고 권위주의에 찬 얼굴을 하고 있을까? 초기불교 시절의 목불이나  철불이 왜 은불 동불 금불로 바뀌었을까 한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연등의 크기로 극락왕생을 배분하는 불교를 보면서 오늘날의 불교가 과거 기독교의 ‘면죄부’판매와 어지간히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설파한 철인(哲人)이 있다. 권력과 타협한 종교, 돈에 눈이 어두운 종교는 이미 종교가 아니다. 타락한 종교는 마약보다 더 무서운 효과(?)를 발휘한다. 자애로운 모습의 부처님 상이 위엄과 권위에 차고 철불이 금불로 바뀌는 과정에서 불교는 피억압자에서 억압자로 바뀌어 갔던 것이다. 종교라고 돈과 권력 앞에 초연할 수 있을까? 3법인, 사성제, 팔정도를 통해 구도의 길을 걸어야할 불도에게 승과를 두고 계급을 부여했던 일은 덮어두더라도 오늘날 돈과 권력 앞에 무너지는 종단을 보면 종교가 마약이라는 철인의 주장이 새삼스럽게 가슴에 와 닿는다.

 권력과 타협했을 때 종교는 곧 권력이 된다. 식민지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조차 없다. 군사독재정권에 기생해 그들의 무운장수(?)를 기원하던 불자들은 과연 해탈의 과정을 밟는 수도자였을까? 불의한 권력을 정당화시켜 준 대가로 종교는 안일과 치부의 길을 걸었다. 그들이 권력과 타협하고 불의에 침묵해 준 대가로 민주화를 갈망하던 수많은 인사들이 고문당하고 죽어갔다. 왜 종교재단이 면세 혜택을 누리며 치부를 할 수 있는지, 승려와 불자들은 정말 모르고 있을까? 부처는 신이 아니다. 부처는 ‘대도를 깨닫고 중생을 깨닫게 하는 성인’ 즉 해탈자다. 승려나 불자는 부처가 되기 위해 수도하거나 부처의 길을 따라가는 사람들이다. 부처님 오신 날 그 참뜻이 사바세계에서 피어나려면 특권을 포기하고 민중의 편에 서려는 진지한 고민부터 있어야 하지 않을까?

(2007년 5월 23일 썼던 칼럼입니다. 사립학교법을 개악해야 되다고 목소리를 높이던 종교재단을 보고서..... 이건 교리와 다가르침과는 다른 민중의 억압자라는 생각에서 썼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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