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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기독교의 두 얼굴, 신학 없이 성서를 만나면..

by 참교육 2012. 6.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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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 어떤 책을 만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품이나 삶의 질까지도 달라진다. 그런 의미에서 해방둥이 우리또래 사람들은 참으로 열악한 환경에서 살아 온 불행한 사람들이다. TV는 물론 라디오도 제대로 듣기 어려운 시대... 시골 학교에는 도서관은 말할 것도 없고 신문조차 구해 보기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 왔다.

 

성경을 처음 만난 사람들이 다 그렇겠지만 진로에 대한 안내나 멘토도 없는 가난한 독학생이 만난 문고판 신약성경 한 권. 그것은 나에게 충격 그 이상이었다. 교양서적 몇 권도 제대로 읽지 못한 청소년이 읽은 신약성경은 종교서적이기 이전에 윤리서요, 교양서요, 철학서이기도 했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에는 순진한 청소년들에게 삶을 가르치기에는 너무나 빈약한 내용들로 채워져 있다. 정치며 경제며 사회를 보는 안목은 물론 시비를 가리며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판단력을 길러주기는 역부족이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기본적 가치도 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데 지녀야할 품성도야에는 아예 작은 도움조차 주지 못한다.

 

청소년이 만난 성서는 죽음을 넘어 내세를 준비하는 종교의 의미보다 예수라는 분의 삶을 통해 내가 가야할 길, 설 자리, 삶의 방향을 안내해 주는 인생의 안내자였다. 참과 거짓이 무엇이며 사랑과 인내, 관용과 소망을 가르쳐 준 내 삶의 안내자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학이 없는 성경, 그 성경 속에 숨겨 있는 이데올로기를 발견할 수 있는 안목은 어린 나에게는 생각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문제였다.

 

 

 

교과서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모르고 금과옥조로 배운 사람들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인간, 자본이 필요로 하는 인간 그 이상의 사람이 되기는 어렵다. 도구교과의 경우는 예외겠지만 윤리니 사회, 국사와 같은 교과서에는 그 내용 속에 체제 이데올로기며 자본이 필요로 하는 가치관을 가진 이데올로기가 담겨 있다.

 

성경도 예외는 아니다. 내가 성경을 신학 없이 순진한 눈으로 이해한 것이 성경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은 나이 40이 가까워서였다. 70년대 후반 감리교 속회모임에서 고만고만한 청년들이 성경을 공부하면서부터 전통신학 외에도 예수님을 보는 다른 시각도 있다는 걸 깨우치게 된 것이다. 이 모임에서 전통신학 이외에 민중신학이며 해방신학도 있다는 것 뒤늦게 알게 된 것이다.

 

성경을 처음 만나 받은 충격만큼이나 성경 속에 담긴 이데올로기가 얼마나 무섭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이다. 미친듯이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찾아 읽은 철학 서적이며 민중 신학과 해방 신학 서적속에 만난 예수님은 전통신학의 예수님의 모습과는 너무나 다른 모습으로 내게 다가 온 것이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나니..(누가복음 6장 17- 20)’라는 성구가 왜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태복음 5장 3~5절)’라는 기록으로 남게 됐는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처럼 하라’는 말씀의 ‘이웃’이 옆집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 ‘도움이 없으면 생명을 이어가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을 깨우치게 된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참 많은 사람들, 다양한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면서 살아간다. 특히 기독교인들... 교회 안에서 양처럼 순하고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사람들이 교회 밖에서 만나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다는 사실에 놀라움과 충격을 받게 된다.

 

죄를 아무리 많이 지어도 교회에 가서 용서를 받으면 씻김을 받을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일까? 직장에서 만나는 교인들이며 정치인들의 행태를 보면서 그들의 삶이 교회에서 만난 사람과는 너무나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물론 문익환 목사님이나 문규현, 문정현 신부님, 그리고 이태석신부님과 같은 분이 없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보고 교회에 다니면 안 된다’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신자 한 두 사람을 보고 특정 종교를 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종교가 체제 순응 이데올로기나 불의한 권력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되면 그 후유증은 예상 외로 심각하다. 수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주는 종교가 또 다른 수많은 사람들을 운명론적 세계관을 갖도록 만드는 독약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종교가 약자의 고통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한 기독교는 존재를 배반하는 의식을 만드는 마취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 않을까?

 

- 이미지 출처 : 다음 검색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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