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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사회 양극화와 계급 재생산

by 참교육 2011. 7.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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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을 보지 마라!‘ 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선생님 한 분의 지론이다. 사극이 역사적인 사실(史實)만이 아니라는 것은 상식이다. 작가의 머릿속에서 나온 픽션을 사실(事實)로 보는 시청자의 수준 때문이 아니다. 사극이라면 하나같이 사랑타령이나 왕이나 귀족의 업적중심으로 채워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긴 사극이라는 것 자체가 민중사는 없고 왕의 이야기나 귀족, 양반 중심의 이야기만 전개되기 때문에 서민대중인 민초들이 사극을 보면서 역사의식은커녕 영웅사관에 의한 역사관만 길러주고 있다는 것을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이미지 출처 : 다음 이미지 검색에서>

사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주로 잘생기고 인기가 있는 멋진 인기 탤런트이고, 노비나 서민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하나같이 못생기고 추하고 굽실거리는 비굴한 모습으로 그려지기 마련이다. 이런 사극을 보면 자신도 모르게 역사의 주인이 민중이 아니라 왕이나 잘난 귀족이라는 가치관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역사를 이런 관점에서 보면 자신의 가난과 어려움이 못배우고 못난 자신의 탓 때문이라는 운명론적 가치관을 학습하게 된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착시현상이 진리일 수는 없다. 그러나 외모가 준수하고 걸친 의복이 고급스러우면 일단은 한 수 위로 보이게 마련이다.(자본주의가 만든 착시현상이기는 하지만...) 속으로야 아무리 육도삼략이 들어 있다하더라도 겉보기가 꾀죄죄하고 추하게 보이면 한 점수 깎인다. 나중에야 실력이 드러나고 본질이 보이겠지만 선입견이란 이렇게 사람들로 하여금 착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첫 인상이란 그래서 중요하다는 것일까? 그렇잖아도 상업주의문화가 만들어 놓은 착시현상은 텔레비전 드라마에서도 여지없이 본색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사회양극화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다. 경쟁이나 효율이 살길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분배나 기회균등 같은 공공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빨갱이로 매도당하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막가파식 상업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결혼상대자를 선택하는 기준은 사람에 따라 약간씩 차이가 있겠지만 ‘잘 생긴 사람’ ‘돈 많은 사람’ ‘일류대학을 나온 사람’...을 선호한다. 잘 생긴 사람과 잘 생긴 사람이 결혼하면 더 잘생긴 2세가 태어난다. 머리가 좋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람들이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 제대로 된 태교에서 친환경적인 음식을 먹이고 좋은 환경에서 양육하면 어떤 모습으로 성장할까?

잘 생기지도 못한 사람, 배운 것도 없고 돈도 없어 그만그만한 사람이 결혼해  2세가 태어나고 어려운 여건에서 제대로 먹을 것도 못 먹고 자라면 어떤 사람으로 자랄까? 생김새는 제쳐 두고서라도 건강문제 하나만 보자. 산모가 출산에 관련된 지식이 있고 정기적인 검진을 받고 태어나 오염되지 않은 친환경농산물을 먹으면서 주치의의 진단을 받으면서 자라는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는 누가 건강하게 자랄까? 과거에는 ‘개천에서 용 난다’느니 ‘가난한 집 아이가 공부를 더 잘 한다’느니 하는 얘기들이 신문을 장식하곤 했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어쩌다 구두닦이를 해 가며 주경야독한 학생이 고시에 합격했다는 입지전적 얘기조차 들리지 않는다. 오히려 ‘개천에서는 절대 용이 나지 않는다’는 류(類)의 기사가 종종 보인다.
 


공정하지 못한 경기는 게임이 아니다. 부모의 재산을 물려받았건, 머리가 좋건, 아니면 운(?)이 좋아 돈을 많이 번다는 얘기를 문제 삼자는 게 아니다. 어차피 자본주의 체제니까 자본의 논리를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교육과 의료와 같은 부분은 다르다. ‘사회 계약설’과 이념에 따라 성립된 자본주의라고 하더라도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기본적 가치를 전제로 성립한 것이 사회다. 모든 경쟁이 선이라는 막가파식 힘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사회란 존재해서도 안 되지만 존재할 수도 없다. 그래서 자본주의 국가에서도 기회균등이나 공공성이니 하는 가치를 근본이념으로 하는 ‘공화국’에서 출발하고 있다. 

승패가 결정된 게임은 게임으로서 가치도 없거니와 그런 게임을 한다는 것 자체가 코미디나 다름없다. 교육 분야를 보자. 우리나라와 같은 사회양극화가 한계상황에 도달한 나라에서 교육이 수월성을 바탕으로 한 경쟁논리로 가면 어떻게 되는가? 여기다 모든 경쟁구조가 돈 있고 힘 있는 사람들이 유리한 구조를 만들어 놓았다면 결과는 뻔하다. 국영수중심의 교육과정 편성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힘 있는 사람들에게 유리하다.


어릴 때부터 해외에서 영어공부를 하거나 방학이 되면 해외로 나가 언어연수를 하면서 자란 아이와 학원에도 다녀보지 못하는 가난한 아이들과 경쟁이 되겠는가? 의대에 다닐 정도의 머리가 있어도 가정에서 뒷바라지를 해 주지 못한다면 의사가 되기는 쉽지 않다. 고시도 마찬가지다. 대학에 다니면서 고시에 합격할 정도가 안 된다면 일년에 수천만원 이상 들어가야 가능한 고시공준비를 수년 혹은 10여년간 할 수 있을까? 

교육뿐만 아니다. 의료분야도 예외가 아니다. 의료보험이 비교적 잘 되어 있다고는 하지만 가난한 사람에게 유능한 의사를 만나기는 쉽지 않다. ‘인간의 존엄성’을 기본가치로 설정한 체제에서 돈이 없이 치료를 못 받거나 살릴 수 있는데도 돈이 없어 죽어간다면 이는 개인의 책임이 아니라 사회적 살인이다. 능력이 있어도 공부를 못하는 학생이나 돈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방치한다는 것은 ‘좋은 사회’라 할 수 없다.

더불어 사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기본적인 가치가 ‘공공성’이다. 이러한 공공성을 포기하고 ‘경쟁만이 살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공성을 말하면 '빨갱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최소한 국민의 기본권인 교육과 의료를 시장에 맡겨서는 안 된다. 과정은 무시하고 결과로 승자를 결정하는 사회는 공정한 사회가 아니다. 소득 재분배나 공공성의 실현은 방법을 몰라서가 아니다. 사회적 가치를 배분할 힘을 기득권자가 장악하고 있는 한 공정한 사회도 더불어 사는사회도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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