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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역사

이승만의 악행은 양민 학살 정도가 아니다

by 참교육 2026. 4. 20.

위임통치 청원, 단독정부 수립, 간첩조작...

윌슨 미 대통령에게 위임통치 청원하다

우리는 자유를 사랑하는 2천만의 일흠(이름)으로 각하께 청원하노니 각하도 평화회에서 우리의 자유를 주창하야 평화회에 모인 열강으로 하여곰(하여금) 먼저 한국을 일본의 학정 하에서 장래 완전 독립을 보증하시면 아직은 한국을 국제연맹 통치하에 두게 하시옵소서... 각하께서 잘 주선하야 한국 인민으로 하여곰 천부의 자유를 찻게(찾게) 하시며 한국 인민으로 하여곰 자기가 원하는 정부(독립정부)를 자기들이 건설하고 그 정부하에서 살게 하시기를 바라나이다.”

191933일 이승만-정한경이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제출한 청원서이다. 신채호 선생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은 "없는 나라를 팔아먹으려는 것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은 이완용보다 더한 역적"이라고 했다.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수립하자

이제 우리는 무기 휴회 된 공위(共委)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 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남방만이라도 임시 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니 여러분도 결심하여야 될 것이다. 그리고 민족 통일 기관 설치에 대하여 지금까지 노력하여 왔으나 이번에는 우리 민족의 대표적 통일 기관을 귀경한 후 즉시 설치하게 되었으니 각 지방에 있어서도 중앙의 지시에 순응하여 조직적으로 활동하여 주기 바란다

미군정기인 194663일 이승만이 삼남 지방을 순회하던 도중에 전라북도 정읍군(현 정읍시)에서 한 발언이다. 이승만은 나라가 두 동강이 나더라도 대통령이 될 수만 있다면 나라가 분단되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분단 체제의 희생자... 조작된 간첩들

19481019일에 발생한 여순사건을 계기로 나타난 괴물이 국가보안법이다. 조작 간첩 사건의 최초 피해자들은 이승만 정권의 정적들이었다. 국회 프락치 사건(1949)과 성시백 사건(1950), 그리고 국제공산당 사건(1952)을 통해 이승만은 자유 민주주의를 수호해야 한다는 논리로 정적을 제거한다.

이승만의 만행은 4·3 제주항쟁(1947~ 1954), 여순 사건(1948), 국회 프락치 사건(1949), 문경 양민 학살 사건(1949), 보도연맹 학살 사건(1950), 거창 양민 학살 사건(1951), 산청·함양 양민 학살 사건(1951), 부산정치파동(1952)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제주 4·3항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20031015일 대한민국 정부가 확정 발표한 제주4·3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제주 인구의 9분의 1에 달하는 3만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이승만 정부가 주도한 강경 진압 작전으로 제주도 중산간 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다.

미국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는 이승만 정권은 미군정의 작전명 빨갱이 사냥(Red Hunt’)을 그대로 계승하여 19481117일 제주도에 한하여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규모 군사력과 우익단체 회원들을 파견하여 초토화 작전, 제노사이드의 군사작전을 전개한다. 194731일에서 1954921일에 이르기까지 공식 사망자만 14,032, 시민사회의 조사로는 적게는 3만에서 많게는 8만으로 추정되는 제주도민이 희생되었다. 제주 4·3항쟁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이승만 독재정권에 의해 자행된 3·15 부정선거와 이로 인한 4·19 혁명의 유혈진압(186명 희생), 보도연맹 학살(희생자 4934) 등 각종 민간인 학살 등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고 있다. 이런 이승만을 박민식 국가 보훈부 장관은 이승만 대통령의 한평생은 누구도 쉽게 걸을 수 없고 아무도 감히 폄훼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 그리고 참된 지도자의 시간.”이라고 추앙했다.

이승만의 양민 학살의 전모

살인마라고 하면 사람들은 유태인 수백만 명을 학살한 독일의 아돌프 아이히만을 생각하겠지만 이승만의 양민학살은 아이히만에 버금가는 이승만을 연상한다. 동국대 강정구 교수는 한국전쟁의 첫 단계인 작은 전쟁시기인 19482.7 구국 투쟁에서 6·25전쟁까지의 양민 학살이 있었다. 이 전쟁 기간은 주로 제주 4·3항쟁이나 여순 항쟁과 같은 인민 항쟁, 유격대 투쟁, 38선상의 남북 충돌로 특징화할 수 있는데 이 기간에 10만 명에 가까운 인명피해가 발생하였다. 이 기간의 양민 학살은 주로 인민 항쟁에서 발생하였고 또 유격대 소탕전의 과정에서 청천벽력 작전을 구사하였으므로 주로 산간 지역에 사는 주민들이 학살을 당하였다.”고 했다.

이승만이 건국 대통령이 될 수 없는 이유

한국전쟁 전후 이승만 정권에 의해 자행된 민간인 학살은 1백만 명 수준에 이른다. 전라남북도 지역의 약 20만 명, 보도연맹 학살의 30만 명 등을 포함하여 함평, 문경, 대구, 부산, 함양, 산청, 거창, 충무, 거제 등 민간인 학살은 전국적, 조직적, 체계적인 현상이었다. 4·19 이후 남한 전역에 걸쳐 구성된 유족회, 국회진상조사단의 조사 등으로 이들 민간인 학살·만행에 대한 역사적 진실이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했으나 5·16쿠데타 이후 이들 유족회는 대부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어 침묵을 강요당해왔고 역사적 진실 또한 은폐되어왔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 민주 이념을 계승하고.” 대한민국 헌법 전문(前文)은 이렇게 시작한다.

4·19혁명이 왜 일어났는가? 이승만은 4·19혁명으로 1965719일 하와이에서 90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했지만 죽어 국립묘지에 안장된다. 이승만은 19603·15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대를 향해 발포 명령을 내려 186명 사망자와 6026명의 부상자를 내고 하와이로 망명해 죽은 후 대한민국 국립묘지에 안장, 연간 100만의 정도의 관리비를 국가가 부담해 죽어서도 호사를 누리고 있다. 이승만은 왜 반공이 필요했는지는 그의 행적을 보면 안다. 이승만의 민간인 학살 중심에는 희대의 악법 국가보안법이 있다,

이승만은 1948815일 단독정부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해 121일 헌법 위에 군림하는 무소불위의 국가보안법을 제정한다. 조봉암 김구, 신익희 송진우, 박헌영, 여운형 장준하는 왜 의문의 죽음을 당해야 했을까? ‘정의법치를 강조하는 윤석열 정부는 이제 터놓고 독재정권, 학살자 미화에 팔을 걷고 나섰다. 대통령 윤석열, 법무 한동훈, 보훈 박민식. 이들은 백선엽이 친일하지 않았다고 하고 홍 장군 흉상 철거, 백 장군 친일 행적 삭제, 이승만 기념관 건립과 국립대전현충원 홈페이지에서 백선엽 장군에 대해 친일반민족행위자라고 명시한 문구를 삭제했다. 이런 이승만이 국부요 건국 대통령이면 4·19혁명은 민란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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