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민주주의 어디까지 왔나
4월 19일... 오늘은 4·19 혁명이 일어난지 65주년이 되는 날이다. 당시 고등학생이 지금은 80세의 노인이다. 오늘의 대한민국을 사는 국민들은 4·19혁명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우리는 학교에서 역사를 배우지만 교과서를 통해 배워 알고 있는 역사는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왜....’라는 사건 중심의 역사다. 사관(史觀)없이 암기한 지식은 ‘나’의 삶, ‘우리’의 삶과 무관한 관념으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 더구나 이승만과 박정희을 흠숭하는 정권이 만든 국정교과서를 배운 세대들이야 오죽하겠는가.
■ 4·19혁명의 전개 과정
우리가 알고 있는 4·19혁명이란 “1960년 3월 15일 자유당정권의 개표조작에 반발 ‘부정선거 부정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주장하는 학생들과 시민들이 참여한 ‘반독재투쟁’, ‘혁명’ 정도다.” 이승만 정부와 자유당은 이기붕을 당선시키기 위해 ‘4할 사전 투표’, ‘투표함 바꿔치기’ 등의 부정선거를 저지르자 ‘3·15 마산의거’에 참여했던 김주열학생이 4월 11일 아침에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왼쪽 눈에 경찰이 쏜 최루탄이 박힌 채 시신으로 떠오른 것이 부산일보를 통해 보도되면서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대된다.
4월 18일에는 고려대 학생들이 4월 19일 ‘3·15부정선거 다시 하라’, ‘1인독재 물러가라’, ‘이승만은 하야하라’... 등의 구호를 외치며 독재정권 퇴진과 민주주의 수호를 요구하였다. 서울시내가 완전히 무정부상태에 빠지자 당황한 정부는 오후 3시를 기해 서울 일원에 계엄령을 선포, 서울에서만 1백여 명, 부산에서 19명, 광주에서 8명 등 전국적으로 186명의 사망자와 6,026명의 부상당하는 희생자를 내자 ‘4·25 대학교수단 데모’로 확산되었다. 4월 26일 전국민적 저항과 군지휘부의 무력동원 거부에 봉착한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하와이로 아반 도주해 12년간 이승만의 집권시대는 막을 내린다.
■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기 위한 처절한 저항
1894년 동학농민혁명, 1919년 3·1혁명, 1948년 제주 4·3민중항쟁, 1960년 3·15의거, 1960년 4·19혁명, 1980년 5·18광주민중항쟁, 1987년 6월항쟁, 2016년 박근혜 퇴진을 위한 촛불혁명으로 이어졌다. 박근혜의 탄핵으로 끝난 줄 알았던 민주화 운동은 2024년 12월 3일 ~ 2025년 4월 4일 헌법재판소에서 전원일치 탄핵 선고 때까지 항쟁의 끈을 놓치지 않았다. 대한민국 주권자의 저력을 보여 준 주권자들의 저항은 밤새 쏟아지는 눈을 맞으며, 세계가 놀란 '키세스 시위대'라는 또 하나의 신조어를 만들어 내기도 했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주권자들의 뜨거운 나라 사랑은 오늘날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을 지키는 원동력이다. 일제식민지시대에서부터 우리 선열들은 폭력에 평화적인 방법으로 저항해 지켜냈다. 군주제 시대는 봉건적 지배계급의 맞서 싸우고 군사정권, 독재권력의 폭압에도 외세에 억압에도 물러서지 않고 나라를 지켜내 세계에서 모범사례로 만들어 놓았다.
■ 누가 민주주의를 파괴하는가
이승만은 누구인가? 1919년부터 1925년까지 상해 임시정부 대통령을 역임하다 탄핵당한다. 미군정기에 이승만의 행적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미군정기에 각지를 순회하는 도중 1946년 6월 3일에 전북 정읍에서 '남측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의 발언을 한다.
1945년 12월에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찬탁과 반탁을 놓고 좌·우세력의 대립, 이듬해에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개최되었으나, 소련측과 미국측의 입장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결렬된다. 무기한 휴회된 민감한 상황에서 1946년 6월 3일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라는 반공주의와 '단독정부수립 운동' 정치성향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도선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라며 반공주의와 '단독정부수립 운동' 정치 성향을 드러낸다.
■ 민주주의 수호는 안중에도 없는 수구세력들...
식민지시기 대부분을 임시정부의 대표 자격으로 미국에서 활동하던 이승만은 8·15직후 국내에서 활동하기 위해 조기 귀국한다, 귀국에 앞서 맥아더와 하지(John R. Hodge) 주한 미군정 사령관과 회합, 이 자리에서 38선 이남에서 약세를 보이고 있었던 우익세력들을 강화하는 방안을 논의한다. 이승만은 맥아더 사령부와 미군정의 지원을 받으면서 정치세력들을 자신을 중심으로 하여 재편하고자 하였다. 맥아더 사령부와 미군정은 한국 내에서의 이승만의 명망을 이용하여 좌익세력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약세에 있었던 우익세력들을 강화한다.
8·15 광복 이후 38선 이남에서 활동했던 유명한 정치지도자들 가운데 거의 유일하게 총선거에 참여한 이승만은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을 뿐만 아니라 국회에서의 간접선거를 통해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승만은 1945년의 ‘반공’ 담화, 1946년 6월의 ‘단정’ 발언, 1947년 3월의 ‘단독과도정부’ 발언 등을 통해 비난을 받았지만, 1947년 이래 조성된 세계적 상황 및 한반도 내에서의 냉전의 심화는 결국 38선 이남에서 이승만의 정치적 집권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 역사왜곡 어떻게 바로 잡을 것인가
‘독재자 반란자 변절자’를 존경하는 국민의힘과 수구세력, 수구언론은 1948년 8월 15을 ‘건국절’이라 하고 이승만을 ‘국부’라고 한다. 4·19혁명을 덮어두고 5·16군사정변을 혁명이라고 한다. 5·16이 혁명이면 4·19는 혁명이 아니라 쿠데타가 되어야 논리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도 6·3 대선에 출사표를 던진 홍준표 예비후보는 동대구역 광장을 박정희 전 대통령 업적을 기념하는 장소로 만들겠다며 “산업화의 영웅인 박 전 대통령의 동상을 대구에 건립하겠다고 한다.
홍준표뿐만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 기념관'을 찾아 손을 맞잡은 국민의힘 김문수·이철우 두 대선 후보는 "'박정희 정신'으로 대한민국을 다시 일으켜야 한다"며, 서울에 박 전 대통령 동상을 세우자고 입을 모았다. 내란 공범 국민의힘은 대선 승리를 통해 머저리 후보를 당선시켜 윤석열의 수렴청정, 막후정치를 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승만과 박정희 그리고 제 2의 윤석을 만들겠다는 탄핵공범 국민의힘은 오는 6월 3일 21대 대선에 출마할 자격이 없다. 국민의힘은 일말의 양심이라도 있다면 4·19혁명 영령들 앞에 엎드려 속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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