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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동양철학의 신비, 1000원의 행방은 이렇습니다

by 참교육 2011. 4.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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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포스팅한 ‘동양철학의 신비, 1000원의 행방을 찾습니다’는 수수께끼를 푸신 분이 있으면 댓글로 마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수수께끼의 답을 정확하게 맞히신 분이 없었습니다. 정답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동양철학에세이'라는 책을 좀 더 소개드려야 할 필요성을 느껴 다시 이 글을 쓰게 됐습니다.

수수께끼 문제는 이 책 ‘주역’ 편에 나오는 얘깁니다. 답을 하려면 길게 설명을 붙여야 할 수밖에 없어 이렇게 긴 설명을 하게 됐습니다.

어제 문제... 나그네들이 낸 돈을 모두 합하면 27.000원이고 그기에 중간에 심부름하는 아이가 슬쩍한 2000원을 합쳐도 29,000원 밖에 되지 않았지요? 그래서 처음의 30.000원에서 1000원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다시 잘 생각해 보면 나그네들이 모두 낸 돈은 27,000원이고 그 중에서 주인이 25,000원 가졌고, 심부름 하는 아이가 2000원 가졌으니 아무 착오도 없었던 것입니다. 1000원이 사라진 것처럼 보였을 뿐, 사실 이 퀴즈는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수수께끼의 핵심은 수(數)나 말(言語)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 그 자체는 아니라는 점이, 수리로 해석하는 경우에 흔히 무시됩니다.

예를들어 수가 참세계라고 주장한 서양 고대의 피타고라스학파는 수의 원리에 따라 태양계에는 10개의 행성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세계에서 이들이 말하는 10이라는 숫자는 무엇을 가리키는지 불확실합니다.

현대과학에서 분류하는 방식으로 하면 지구, 금성, 화성, 수성, 토성 등의 행성과 태양은 서로 다른 별입니다. 우선 스스로 빛을 내느냐 아니냐의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빛을 내는 행성을 항성이라 하여 행성과는 다른 종류로 분류합니다. 지구와 달도 종류가 다릅니다. 달은 지구의 위성입니다. 태양계 안에서 발견된 수천개 소행성들은 왜 그 10에 넣을 수 없는 것일까요?

이렇게 따지기 시작하면 피타고라스학파의 주장은 기초부터 합의해야 할 것이 너무 많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대상을 분류하는 방식에 따라 달리 나타납니다. 대상 세계와 우리의 분류방식을 무시하고 수를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수의 신비한 법칙으로 밝힌 주역의 운명론이라는 것은 자칫하면 아무관련이 없는 수를 서로 더하고 곱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그네들, 여인숙 주인, 심부름 하는 아이 중 누구도 가져가지 않은 100원을 찾아 헤멜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주역하면 무엇이 생각나십니까? 점(占)..?, 복술(卜術)...?, 관상(觀相)...?

어떻습니까? 어렵지요? 수수께끼 자체가 주역이니까 주역으로 해석해야 하는데 댓그을 달아 주신분들은 수학적으로 풀려고 하니까 답이 안 나온 거지요. 이야기가 나온 김에 주역에 대해 조금만 더 얘기하고 가야할 것 같습니다. 앞에서 잠시 언급했지만 주역하면 보통 역술이나 점, 복, 관상을 생각하기 쉽지만 주역이란 ‘주나라의 역(歷)’이라는 뜻입니다. 주나라는 기원 전 11세기에 나타난 나라입니다.

주역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경문’이고 다른 하나는 ‘역전’입니다. 내용에 따라 하나는 상징부호이고 다른 하나는 문자입니다. 주역은 64가지 상징부호가 나오는 데 우리는 그것을 64괘라고 합니다. 주역에 나오는 상징부호는 결국 양효와 음효 두가지로 이루어져 있는데 양효 6개(주역의 맨 처음에 나오는 건괘),이고 음효 6개(건괘 바로 다음에 나오는 곤괘)로 건괘와 곤계는 주역의 64괘를 모체 즉 아버지와 어머니에 해당됩니다.

음, 양 두가지 세 번 사용하여 만들 수 있는 서로 다른 괘의 숫자는 모두 8개입니다. 이렇게 만들어 진 건,곤,감,이가 태극기의 괘라는 건 다 아시죠?

주역의 64괘 384효는 우주만상의 변화원리를 알리는 부호이고 64괘는 기본 8괘에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복잡하지요? 주역에는 우주의 원리가 들어 있고 주역을 완전히 이해하면 우리의 미래와 사물의 변화를 에견할 수 있다는 것이 주역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주장입니다. 물론 점성술이나 관상학 같은 것이 주역의 전부가 아니라는 건 이 글을 끝까지 읽어 보신 분이라는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들, 딸이 일류대학에 합격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나 사업이 번창할 것인가 하는 마음, 결혼을 한 부부가 앞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인가의 여부, 국가와 세계의 미래 등 그런 모든 문제가 주역이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는 주역을 해석하는 사람들의 좁은 시각에서 비롯된 것임은 더 더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주역이 말하고자하는 진정한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하겠다고 생각한 분은 학문으로 접근해 무궁무진한 비밀을 밝혀내야 할 것입니다. 

삶은 미망(迷妄)일 수 없습
니다. 나의 운명을 어떤 보이지 않는 신의 뜻에 따라 움직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실한 삶을 살아가기 어렵습니다. 또한 운명론자가 아니라면 자신의 앞날을 얘견해 행운을 기대하는 것도 바람직한 일 만은 아닐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주역이 만병통치라고 호도하는 점복술(占卜術)은 주역이 아니라 사람들을 미혹하는 세계관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공자와 자로의 대담으로 글을 마치겠습니다
 
어느날 자로가 공자에게 물었다.

“죽음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삶도 아직 다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말하겠느냐?”
자로가 다시 물었다.

“귀신 섬기는 법을 말씀해 주십시오”

“사람도 다 못섬기는데 어찌 귀신을 말하겠느냐?”

(위의 글들은 동양철학 에세이를 참고로 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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