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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역사 속에 숨은 진실 찾기

by 참교육 2011. 3.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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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시 마산 합포구 3.15탑 옆을 지나다 보면 '몽고정'이란 사적(史蹟)이 남아 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단정하게 치장을 하고 있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몽고정을 안내 하려면 "몇년에 만들었는지...?" 보다, 몽고정을 "왜 만들었는지" 그것을 만들어 "우리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 필요하다. 모든 역사가 그렇듯이 사적으로서의 가치는 오늘을 사는 우리가 그 사적을 통하여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안목을 길러 주는가의 여부에 달려있다.

완성된 연도보다도 그것을 만들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인 배경과 사건을 오늘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중요하다. "어제가 없는 오늘이 없듯이 오늘은 지난 역사의 산물"이다.흔히들 역사를 배운다는 것은 "사실(事實)을 안다"는 의미보다는 "사실(史實)을 안다" 역사를 바로 아는 것은 역사를 지킨 사람들에 대한 부채의식 즉 역사의식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옳다.

                                     <사진 출처 : 민족문제 연구소에서>

단순한 역사적 지식을 암기하는 것이 역사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우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역사가 객관적인 실체로서 살아 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역사를 바로 이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역사가 가치 없다고 생각한다든지, 역사적인 안목이 부족하여 나와 역사는 독립적으로 생각하여 역사를 두려워 할 줄 모르는 것도 문제이다.

오늘날 지식인들, 특히 제도 교육을 통하여 역사공부를 한 사람들은 '역사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백주에 양민을 학살하고 대통령이 되어 주인 행세를 하고, 퇴직 후에도 특권 귀족으로 보호받고 사는 사람이 그렇고, "성공한 쿠데타는 사법 심사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결정을 내린 검찰이 그렇다.

역사란 특정인이 개인의 이익을 위해 지우기도 하고 고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그때 죽고 다친 사람이나 그 증인이 아직도 살아 있는데 가해자가 권력의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은 정의나 법의 형평성이 무시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역사적으로 최영장군은 역적이 되고 이성계를 비롯한 권력을 장악한 세력들은  공신이 되어 부귀영화를 자자손손 누리는 문제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지조를 생명같이 여기고 양심을 지켰다는 이유만으로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 후손들은 혹은 죽임을, 혹은 노예가 되어 대대로 죽음보다 비참한 삶을 살아온 사실은 그 사건 속에 살아 있는 '정신'을 무시하고서 역사를 말할 수 없다.

몽고족의 침략이 있었을 때 재빨리 원의 앞잡이가 되어 몽고의 약탈을 도와주며 한 발 앞서 동족 살상과 수탈의 첨병 역할을 하던 무리들은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지만 지조를 지킨 사람들은 비참하게 죽어야했다.


역사란 배신자와 지조를 지키면 산 사람을 통하여 배신과 반역에 대한 교훈을 배운다. 역사는 죽은 것은 아니다.
일제 식민지 시대에도, 미군정 시대에도, 이승만독재,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군사독재정권 하에서도 권력의 양지로 찾아다니며 혹은 권력으로, 혹은 재산으로, 지도자로, 유명인사로, 명예와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살아오던 사람든은 역사가 죽었다고 믿고 싶겠지만 역사는 죽은 것이 아니라 다만 침묵하고 있을 뿐이다.

불의를 행하는 자는 권력의 비호를 받으면서 능력 있는 사람이 되고, 양심 때문에 하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무시당하고 무능한 사람으로 취급당하면서 살아 온 것이다.

 <사진 출처 :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결과에서>

"총구 앞에서 죽음과 삶의 선택을 강요받았을 선택할 수 있는 길을 두고 누가 침을 뱉을 수 있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살아남기 위하여..."라며 합리화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사는 게 옳은가? 무릎 꿇지 못하고 온갖 고초를 당하다 이름 모르는 산천에서 감옥에서 죽어 간 사람은 역사(歷史)가 보상해 주었는가?신약 성경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역사(役事) 하신다."라고 했다. 이 말은 "하나님 혼자서는 스스로 역사(役事)하지 않는다"라는 의미로 해석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사람이란 곧 "나" 자신이다.내가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되지 못하면 역사는 없다. 이때 내가 하나님이 되지 못하면 하나님도 없다. 반만년 역사의 종착역, 귀결점은 바로"나"자신이다. 내가 역사 속의 총화로써 내가 아닐 때, 역사는 없는 것이다. 이 "나"와 "나"의 총화가 역사를 만들 때 비로소 역사는 살아나는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역사를 두려워 할 줄 모르는 오만(傲慢)과 역사를 모르는 무지(無知)를 다함께 경계해야 한다. 역사는 살아 있고 또 역사는 정의의 편이라는 사실도 함께 말이다.이완용과 그 무리들, 전두환과 그 무리들, 노태우와 그 무리들, 배신자! 살인자! 그리고 역사의 파괴자! 그들과 그 후손, 불의에 동참했던 무리들은 역사가 살아 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고 있다. 부끄러운 과거를! 역사의 고비마다 "과거를 잊고, 용서하고, 역사의 심판에 맡기자"고 역사 죽이기에 앞장서고 있다.

2차대전 후 프랑스는 나치 점령하의 대독 협력자에 대해 사형 2,071건, 징역 3만 9천 2건을 선고했고 벨기에는 5만 5천건, 네델란드는 5만건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패전국인 일본의 경우에는 1946년 1월 과거의 군국주의자들에 대한 공직 추방령을 공포함으로써 민주 발전에 장애가 될 21만 287명이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36년간 민족을 배신하고 적의 편에서 동족을 배신한 대가로 귀족대접을 받던 이들은 해방과 함께 혹은 정치가로 혹은 법관으로 혹은 경찰로 애국자가 되고 재수 없어(?) 단 7명만 감옥에 갔다가 6.25사변으로 모두 석방되는 행운을 얻었다.

"성공한 도둑은 사법 심사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말과 검찰의 "성공한 쿠데타는 사법심사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 공소권 없음의 결정'과 무엇이 다른가? 사회 속에서 한 개인이 저지른 고의 또는 과실은 법의 엄정한 심판을 받는다. 역사 앞에서 큰 잘못을 저지르고 세월만 지나면 기득권으로 불가침의 영역이 되고 합리화된다면 법의 논리는 정당성을 상실하게 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전쟁을 일으키고 폭행을 저지르고 살인과 도둑질도 불사하는 무리들이 애국자가 되고 주인이 되는 사회는 희망이 없는 사회가 될 수밖에 없다. "정의는 승리한다"는 역사의 진리가 진실임을 확인하는 것, 그런 소박한 꿈이 있을 때 역사는 살아 있는 것이다. 역사를 감추고 왜곡하려는 무리에게 역사를 맡겨 두고서 역사를 살려 낼 수는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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