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지능지수가 낮기 때문에 노력해도 공부를 잘하는 친구를 따라 갈 수 없다"고 체념하거나 열등의식을 가진 사람이 있다.
"나는 지능지수가 100도 안돼"
"나는 지능지수가 120이야!"
학창시절 알게 된 지능지수, 자신의 지능지수가 노력과 상관없이 자신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생각해보자.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지능지수가 낮기 때문에 불행하거나 가난하게 살아도 당연하다고 체념하는 사람들이 있다. 도대체 지능지수가 무엇이기에 인간의 삶의 방향을 좌우하는 것일까? 실제로 지능지수가 그렇게 위력을 가진 절대진리일까?
지능지수가 교육용 참고자료가 아니라 서민들에게 운명론적 세계관을 심어주어 기재로서, 혹은 기득권의 체제유지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생각해 본 일은 없는가?
지능지수가 우열을 가리는 수치라는 걸 믿고 있는 학부모가 아이를 학교에 입학시킨 후 지능검사 결과가 나쁘다는 걸 알아 버린 어머니의 심정은 어떨까?
'지능이 낮은 아이는 창조적인 직업이나 지도자의 자질이 없다'고 알고 있다면 그날부터 그 어머니는 선입견으로 '우리아이는 머리가 나쁘니까 할 수 없다'는 식의 체념을 하게 될 지도 모른다.
과연 지능지수란 그 사람의 운명을 결정하는 절대지수인가?
<지능지수란 무엇인가?>
IQ라는 용어는 독일의 Intelligenz-Quotient에서 변화한 것으로 독일의 정신학자 윌리엄 스턴(William Stern)이 1912년에 현대의 어린이들의 인지 검사의 점수를 매기는 방식으로 제안한 것이며, 이 용어는 생활 속에서 일상적으로 쓰인다.(위키백과)
프랑스의 A. Benet와 T. Simon의 고안으로 만들어진 지능지수는 '환경에 적응하는 능력, 또한 학습능력'이라 정의하고 있다.
지능지수란 IQ(intelligence quotient)라고도 표현하는 이 개념은 ‘개인의 지능을 판단, 이해, 추리 등등과 같은 일반적인 정신능력에 의하여 판정하려고 나타낸 수치’다.
학습에 필요하다고 간주되는 언어능력, 수리력, 기억능력, 지각능력, 추리능력 등과 같은 능력을 수치로 나타낸다는 것은 처음부터 한계를 지닌 연구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학업성적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측정하는 언어능력이나 수리력..등은 연구자의 검사항목으로 개인의 모든 능력을 우열을 가린다거나 100% 신뢰한다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 예를 들어 엄마의 애정과 아동의 언어발달에 관한 상관관계를 연구한다고 할 때 엄마의 애정을 포옹한 횟수로 나타내는 수치가 애정을 100%표현한다고 믿어도 좋을까?
IQ가 110은 머리가 좋고 90은 저능아라든가 하는 식의 해석은 참으로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연구를 위해 추상적 개념을 측정한 값(개념의 조작적정의)을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수치로 해석한다는 것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말장난이다.
지능발달 이론에 따르면 일란성 쌍생아를 문화적 여건이 상반된 환경에서 양육할 경우 최고 지능지수의 차가 20까지 차이가 나타난다고 한다.
이것은 환경의 중요성을 나타내 주는 수치이기도 하지만 그 만큼 지능지수의 절대적인 신빙성에 대한 문제점을 지적하는 수치이기도 하다.
또 18-19세가 최고의 수치로 나타나며 50세의 경우는 15세와 비슷해진다고 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60-70세 이상의 장관과 대통령은 지능지수가 10여세가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는 어린아이에게 국가통치를 위임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 이론은 직업과 지능은 필연적인 상관관계에 있다고 보고 창조적 전문직의 자녀의 평균 지능지수는 116.2정도이고, 전문직 107.5, 단순노동자의 자녀는 97이라는 연구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이러한 연구결과를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앞에서 예를 든 지능지수가 낮은 학부모의 좌절이나 고민을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를 지적하고 넘어가자.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과 가능성과 희망을 갖고 노력하는 사람은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가?
<누가 왜 이런 지능지수표를 만들었을까?>
특히나 지능지수를 신봉하는 교사의 경우 지능지수가 낮은 아이들에게 '가능성을 포기'한다면 이는 교육자로서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이러한 위험한 발상에서 비롯된 논리를 '지배이데올로기'라고 하자. 그것은 소수의 몇사람의 출세나 기득권을 안정적으로 보장해주고 현실 유지의 논리로 다수에게 억압적인 운명론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능지수는 해석하기 따라 다르다. 지능지수란 '초등학교에서부터 경쟁교육으로 서열을 매기고 당근과 채찍으로(보상과 좌절) 운명에 순응하는 인생관을 갖도록 길들이고 있는 것' 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그런데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자.
성적이란 어차피 1등에서 꼴찌까지 나올 수 밖에 없다. 꼴찌가 없는 일등짜리가 있을 수 없다면 일등은 꼴찌를 업신여길 일이 아니다.
사람은 얼굴모양이나 성격이 열이면 열 모두가 다르듯, 개성이나 소질, 취미, 특기도 모두가 다르다.
지능지수에서 측정하려는 언어능력, 기억력, 수리력...... 그런 획일적인 틀에서 퍼센트를 나타낸 불완전한 수치가 소중한 사람의 인생을 좌우한다고 생각해보자. 특정 분야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지능지수가 특정인에게 유리하게 작용함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세상에 있는 색깔을 좋아하는 순서대로 매기는 일이 가능 할까?
빨간색 일등, 노랑색 이등, 파랑색 삼등......
좋아하는 사람도 순서대로 매기고 좋아하는 친구도 서열을 매길 수 있을까?
설사 그 서열이 옳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어떤 개인의 주관적인 판단이지 객관적인 진리는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어떠 학급에서 꼴찌를 하는 학생은 음식을 먹는 일에서 돈버는 일, 심부름하는 일...... 모두가 꼴찌인가?
일등짜리 학생보다 우수한 면이 많이 있을 수 있다. 노래를 잘 부르는 학생, 시를 잘 쓰는 학생, 달리기를 잘 하는 학생, 청소를 잘 하는 학생......
개성과 다양성을 무시한 사회는 사람들이 살 수 없다.
모두가 똑같은 가치관, 똑같은 것을 선호하는 가치관을 갖는다면 결혼 상대자도 등수를 매겨야 할것 같다.
어떤 여자나 어떤 남자가 최고의 신랑감, 신부감이라고 똑같이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의 눈에 못난 사람도, 또 어떤 사람에게는 예쁘게 보여 짝을 맞추어 행복을 누리며 살고 있다.
중요한 문제는 살아 가는데 열등의식을 갖는다든지 자포자기를 한다든지 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일류대학을 나오고, 일류직장에 다니는 사람이 최고 일등짜리 인간이고......
지능지수가 무용지물이라는 뜻은 아니다.
그것은 교육학자들에 의해 중요한 교육자료로 활용될 수 있지만 그것이 이데올로기로 악용되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아무리 인간이 만든 소중한 문명의 이기(利己)일지라도 사용자의 이용에 따라 흉기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어떤 문명의 이기도 좋은 제도로 인간의 삶에 굴레가 되거나 짐이 된다면 그것은 가짜요 폐기해야 될 대상이다.
인간을 편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참이요, 진리다. 그러나 소수의 이익을 위해 다수에게 고통을 주는 어떤 것도 그것은 악(惡)이다. 더구나 어떤 학자의 연구의 결과가 한 사람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불리하게 적용된다면 그런 논리는 폐기되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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