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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역사

유신정권을 무너뜨린 ‘부마항쟁’ 기억하세요?

by 참교육 2022. 10.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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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항쟁기억하세요? 10월 16일은 부마항쟁 혹은 부마민주화운동 43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우리 역사에 민주화 운동은 많고 많지만 19791016일부터 1020일까지 부산직할시와 경남 마산시 지역에서 일어난 유신정권을 무너뜨리고 부마항쟁이야말이 잊어서는 안된 중요한 날이기도 합니다. 민주공화국을 되찾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준 날. 윤석열대통령은 박정희를 따라 배우겠다고 했지만, 박정희야말로 민주공화국의 군주(?) 노릇을 한 독재자입니다. ‘하늘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긴급조치로 국민의 눈과 입과 귀를 막고 무한권력을 행사하던 유신정권은 부마항쟁으로 무너지게 되는 것입니다.

<만약 10·26 사태가 없어었다면...>

만약 10·26 사태가 없어었다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19791018일 박정희는 경찰의 방어막이 뚫리자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군인들을 투입합니다. 장갑차와 탱크가 거리에 나타나고 인근 창원과 마산에서에서도 시위가 번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들은 공화당사를 습격해 집기를 파괴하고 벽에 걸린 박정희 사진을 떼어내 내동댕이쳤습니다. 물론 파출소와 동사무소 방송국 신문사는 분노한 민중의 타깃이 되었습니다.

계엄사령부는 야간 통행금지를 2시간 연장하고 시위에 참여한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하여 좁은 유치장에 가두고 불순분자의 책동이나 북한의 자주를 받았다는 허위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 이런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가운데 하늘의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박정희가 김재규의 손에 죽은 것입니다. 1026... ‘십이륙 사태!’ 언론은 박정희 대통령각하 서거!”라는 방송과 신문 호외가 길거리에 뿌려지고 있었었습니다. 만약 박정희가 김재규의 손에 죽지 않았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한 피의 대학살이 벌어지지 않았을까요?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헌법의 상위법 긴급조치>

박정희는 5·16군사반란을 일으킨 후 아홉 차례에 걸친 긴급초치를 발동합니다. 긴급조치 제 1호에서 십이륙 사태로 끝이 난 제 9호까지... 물론 이런 사태가 발생할 것이라는 것을 예언(?)했던 박정희는 유신헌법 제 53조에에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어 신속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할 때는 내정ㆍ외교ㆍ국방ㆍ경제ㆍ재정ㆍ사법 등 국정 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는 근거를 만들어 두었던 것입니다.

박정희는 군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할 때마다 긴급조치를 발령합니다.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로 시작한 긴급조치 1호에서 제 2긴급조치를 위반한 자를 처벌하는 비상군법회의를 설치하고 9호에 이르러서는 집회·시위 또는 신문, 방송, 통신 등 공중전파 수단이나 문서, 도화, 음반 등 표현물에 의하여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반대·왜곡 또는 비방하거나 그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청원·선동 또는 선전하는 행위...” 주권자인 국민의 입과 눈과 귀를 막고 박정희의 뜻이 곧 법이며 진리가 되는 암흑세상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긴급조치를 알면 박정희가 보입니다>

민주공화국의 군주 박정희는 뻔뻔스럽게도 7차개헌 유신헌법 제 1조에서 대한민국의 주인이요 주인을 위해 정치를 한다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고 개정합니다. 박정희를 위한 법 유신헌법을 만들어 놓고 헌법상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는 권한, 긴급조치 제1호를 시작으로 총 9차례 발령합니다. “대한민국 헌법을 부정, 반대, 왜곡 또는 비방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대한민국 헌법의 개정 또는 폐지를 주장, 발의, 제안, 또는 청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이 조치에 위반한 자와 이 조치를 비방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 처단한다....” 긴급조치야말로 헌법의 상위법, 법 위의 법으로 박정희가 공화국의 군주로 군림할 수 있도록 만든 법입니다.

<부마민주항쟁의 배경>

유신 철폐!” “독재타도!” “우리의 소원은 자유”... 박정희야 말로 날벼락 중의 날벼락이 아닐 수 없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성을 잃은 박정희는 반정부 인사들에 대한 연행·체포·고문·연금 등의 탄압 속에서 야당과 재야세력의 저항이 고조되기 시작합니다. 19798, YH무역 여성 노동자들이 신민당사에 들어가 부당폐업을 반대하며 농성을 벌이다가 경찰의 폭력적인 진압으로 22세 여성 노동자가 사망하고 수많은 부상자가 발생하는 사태가 일어납니다.

197910월 초 김영삼 신민당 총재는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박정희의 유신독재를 강력히 비판하였고, 이를 빌미로 박 정권은 김영삼을 의원직에서 제명당하게 됩니다. 설상가상으로 1970년대 말 수출 중심의 한국 경제는 제2차 오일쇼크로 심각한 위기에 빠져듭니다. 물가는 상승하고 경기가 침체되었으며, 불황으로 서민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지게 됩니다. 수출지향적 경공업 도시였던 부산과 마산에서는 정부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부가가치세를 도입합니다. 부가 가치세 도입은 가뜩이나 어려운 중소자본가, 봉급생활자, 도시 노동자와 농민들의 불만을 증폭시키는 기폭제 역할을 한 것입니다.

<부마항쟁의 전개과정과 평가>

청년학도여. 지금 너희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우리의 조국은 심술궂은 독재자에 의해 고문받고 있는데도 과연 좌시할 수 있겠는가. 이 땅의 위정자들은 흔히 민족을 외치고 한국의 장래를 운운하지만 진실로 이 나라 이 민족의 영원한 미래를 위하여 신명을 바칠 이 누구란 말인가? 소위 유신헌법을 보라! 그것은 법이 아니다. 그것은 국민을 위한 법이라기보다는 한 개인의 무모한 정치 욕을 충족시키는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부산대학교 교정에 뿌려진 선언문)

19791016일 아침 10시경, 부산대학교 구내 도서관 앞에서 약 500명의 학생들이 모여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학생들은애국가·선구자·통일의 노래등을 부르는 한편,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는 등의 구호를 외치며 교문을 나가 가두시위에 돌입하게 됩니다. 한편, 비슷한 시간에 부산 동아대학교에서도 1,000여 명의 학생이 시내에 진출, 부산대학교 학생과 합류하여 가두시위에 합세 야간까지 계속 이어집니다. 18일에는 1,000여 명의 경남대학 학생들이 마산시내 번화가에 산발적으로 집결, 일부 시민들이 가담한 가운데 동사무소와 파출소에 불을 지르고 경찰차량에 불을 지르는 격렬한 시위로 이어집니다.

부마민주항쟁은 10·26사태로 유신정권의 종말을 불러 온 결정적 계기로 4·19 혁명, 5·18 민주화운동, 6월 항쟁과 함께 한국 현대사에서 큰 영향을 미친 민주화 운동의 하나로서 평가받고 있습니다. 2013년에는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이 제정되어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가 구성되고 2019917일 항쟁 시작일인 1016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습니다.

“헌법은 나라의 진정한 주인인 평범한 시민이 알아야 하며, 헌법의 주인은 평범한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시민들이라는 마음으로 쓴 책... 임병택 시흥시장이 쓴 책입니다. 청소년과 어린이들에게 추천하고 싶은 책... 딱딱한 헌법책을 읽으며 가슴이 뜨거워 짐을 느끼는 책.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임병택 시장의 '시처럼 노래처럼 함께 읽는 어린이 헌법' 을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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