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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중학생 방화사건에 대한 중3의 생각‘을 읽고

by 참교육 2010. 10.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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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태윤군의 글을 읽고 훈수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태윤군보다 세상을 많이 살았다는 이유도 있겠지만 교직에 몸담았던 한 사람으로서 훈수를 하지 않고 견디지 못한 직업의식이 발동한 때문이 아닐까? 나는 평소 태윤군의 글을 볼 때마다 어쩌면 ‘중학교 3학년 학생이 이렇게 글을 잘 쓸 수 있을까’하고 글을 읽을 때마다 대견스럽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래서 나는 블로그에 태윤군의 글이 올라오면 빠지지 않고 읽고 있다. 중학생이 이정도의 논리와 자신의 생각을 갖는다는 것은 이 지역사회뿐만 아니라 아마 전국에서도 그 사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중학생 김태윤군의 블로그>

태윤군이 블로그를 시작하고 올린 글만 해도 무려 255편이 넘는다. 책 한 권의 분량이다. 마마보이가 기성을 부리는 세태에 중학생이 자기 생각을 이렇게 조리 있게 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처음에는 글을 쓰는 일이 직업인 아버지의 지도와 영향을 받았겠지만 최근의 글들을 보면 훈수한 흔적이 있는 글이 아니라 순수한 자신의 작품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다. 성적만능주의 학교에서, 더구나 바쁜 중3시절에 세상일에 자신의 생각을 편다는 것은 칭찬을 들어 마땅할 것 같다.

태윤군의 이번 글을 보고서 훈수할 마음이 생긴 이유 중의 하나는 ‘이런 점만 조금 더 신경을 쓸 수 있다면...’ 하는 아쉬움과 욕심 때문이다. 태윤군은 어려서 잘 이해가 안 되겠지만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현상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사건은 현상으로 나타나지만 원인이라는 본질은 따로 있기 때문이다. 본질을 외면한 채 현상만 보고 본질로 착각한다는 것은 중대한 오류가 아닐 수 없다. 부분을 보고 전체라고 판단하는 오류를 범한다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에게 치명적일 수 있다. 태윤군의 글뿐만 아니라 가끔 신문기사를 보고도 그런 아쉬움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문제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현상을 본질이라고 호도해 독자들로 하여금 헷갈리게 하는 우를 범하는 경우가 그렇다.

생각하기도 싫은 얘기지만 이미 세상에 알려 진 사건. 중학생이 자기 집에 불을 질러 일가족 4명을 죽게 한 사건. 이 사건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태윤군의 표현을 빌리자면 ‘일부러 미리 휘발유를 준비해서 치밀하게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은 정말 충격적이고 무서운 사건’으로 보고 자기가 그런 일을 당했다면 차라리 가출을 해버릴 것‘이라고 적고 ‘자식이 사랑하는 부모를 사전에 준비까지 해 살해한 계획적인 범죄’라고 개탄하고 있다.

보통 이런 사건을 보면 피의자인 학생에게 몰매를 가한다. 그러나 한 개인이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골라 건강하게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가 아니라 판검사나 의사가 돼야만 사람대접 받는 구조가 아니었다면 어땠을까? 그런 사회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아들의 개성과 소질에 맞는 일을 하겠다는 데 반대할 리가 없다. 집에 불을 질러 일가족 4명이 불에 타죽게 한 아들을 두둔하자는 말이 아니다. 아들이 그런 일을 저지르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덮어두고 가해 학생에게만 몰매를 가하는 게 옳은 일인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하는 말이다.

모든 국민이 다 공무원일 수는 없다. 모든 사람이 다 의사나 판검사일 수도 없다. 이 세상에는 환경미화원도 있어야 하고 농부나 어부도 있어야 한다. 택시기사도 필요하고 상인도, 교사도 있어야 한다. 물론 직업에 따라 사회적인 기여도나 차이가 있을 수는 있지만 어떤 직업이라야 사람대접 받고 어떤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은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잘못된 제도를 덮어두고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만 나무란다면 그것은 형평성에 맞지 않다.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구조적인 모순, 즉 외모나 경제력, 혹은 사회적 지위로 인간을 평가하고 서열화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하다. 어려운 시대를 살아 온 아버지 세대들은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자녀가 대신 풀어주기를 바라는... 그래서 자식을 인격적인 존재가 아닌 나의 분신으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

언론에 비친 아버지의 체벌 또한 중학생 아들에게 가할 수 있는 방법인지도 생각해 봐야 한다. 폭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경향... 그런 경향은 아버지 세대에서 경험으로 체득한 방법이다. 가정에서 ‘귀한 자식은 매로 다스려야 한다’든지 군대에서 ‘폭력 앞에 복종하는 해결책’을 배워 온 결과다. 물론 그런 방법이 최선일 수는 없다. 우리는 가정이나 사회에서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대화로 풀지 못하고 완력으로 혹은 자력구제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여기서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가 가치관의 문제다. 관료주의 사회에서 혹은 자본주의가 만들어 놓은 사회적 보상이 일부 직업에 치중해 놓다보니 경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다 이러한 비극을 불러오게 한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말한다. ‘세상 아이들이 모두 그런 것이 아닌데... 저를 키워 준 부모를 불태워 죽인 놈이 죽일 놈이지...’한다. 세상이 바뀌는데 아버지는 바뀌지 않고 아들은 변화하지 않은 아버지를 향해 아니 세상을 향해 자력구제를 택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보면 아버지도 아들도 사회가 만든 잘못된 제도의 희생자다. 판검사가 되는 것이 출세하는 길이며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만이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그릇된 사회풍조와 제도가 어린 중학생으로 하여금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게 한 것이다. 물론 2차적인 원인 제공자는 ‘내 아들만은 누구에게도 뒤떨어진 삶을 살게 할 수 없다’는 왜곡된 아버지의 사랑이다. 자식을 완전한 인격자로 보지 않는... 그래서 자신이 못다 이룬 꿈을 이루어줄 대리자로서의 아들에게 거는 기대가 아들의 요구와 일치하지 못해 일어난 불행한 일. 이러한 일이 있을 때마다 ‘개인의 도덕성이나 책임’으로 돌리는 우를 더 이상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태윤군의 글이 앞으로 더욱 일취월장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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