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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교육자료

언론이 살아야...

by 참교육 2008. 9.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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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없고 역사만 공부한 역사학도는 어떤 학자가 될까? 그런 학자는 역사적 지식은 풍부하겠지만 오늘의 문제를 역사적 관점에서 해석할 수 없다.

지난 12월 5일부터 경남도민일보 강당에서 있었던 ‘시민을 위한 동학농민혁명 역사특강'에서 동학을 강의한 이모 교수는 강의가 끝난 후 정리를 하면서 ’한미 FTA 반대시위가 과격하다’는 발언을 듣고 아연해 했던 일이 있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그 후 뒤풀이 장소서 같은 얘기를 반복해 참으로 안따까운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동학농민혁명이 뭔가? 교과서에도 동학운동이란 ‘반봉건 반외세’ 아닌가? 그런데 그 분의 이름을 들으면 다들 알만한 학자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 있을까? 역사뿐만 아니다. 교사들은 어떤가? 학습지도능력만 뛰어난 교사! 철학은 없고 지식만 전달하는 기술자는 진정한 교육자가 아니다. 언론은 어떤가? 청년실업문제가 사회문제가 되면서 언론사에 취업을 하는 청년들은 엘리트 중의 엘리트다. 그런데 그 엘리트를 채용한 조․중․동이라는 신문은 왜 그 모양인가?


 언젠가 오마이뉴스 오연호대표가 한 말이 생각난다. ‘언론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 강연에서 ’오마이뉴스는 온 국민의 기자화가 목표‘라고 했다. 신문이 없었던 시대는 언론은 ’여인들의 빨래터였으며 초당방의 대화가 신문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전파나 종이로 전달되는 매체인 언론은 어떤가? 일제에 빌붙어 매국행위를 했던 자들이 해방 후 신문사를 만들었다면 그 신문의 어떤 소리를 할까? 재벌이 신문사를 만들면 어떨까” 철저하게 상업주의에 입각한 기사, 자본의 논리를 정당화하는 기사를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특정 종교집단이 만든 신문도 그렇고 종교재단이 만든 신문도 예외일 수 없다. 

 

방송사도 마찬가지만 언론이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한다면 그것은 사회공기로서의 언론의 기능을 하기 어렵다. 그런 언론은 특정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기관지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오늘날 조․중․동이 욕을 먹는 이유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면 언론이 지향하는 가치란 어떤 것인가? 훌륭한 언론이란 눈앞의 이익에 현혹돼 편협하게 독자를 현혹시키는 신문이 아니다.

식민지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식민지 종주국을 두둔하거난 비호한다면 그것은 언론일 수 없다. 마찬가지로 자본주의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본의 눈치를 보는 신문도 신문으로서 기능을 못하는 것이다. 독재정권이나 군사정권을 비호한 대가로 당근을 받아먹고 자란 언론이라면 객관적이고 공정한 보도를 할 수 없듯이 말이다.

 

훌륭한 기자란 어떤 기잔가? 특종 기사를 자주 써 상사로부터 능력을 인정받는 기자인가? 아니면 글 솜씨가 뛰어나 상사로부터 능력을 높이 평가받고 있는 기자인가? 물론 신속하고 객관적인 보도에 뛰어난 기자는 그렇지 못한 기자보다 상대적인 능력이 있는 기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철학이 없는 시인이 시를 쓰면 사랑타령의 범주를 넘지 못하듯 철학이 없는 기자도 그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다. 역사의식이 없는 기자, 민주의식과 시민의식이 없는 기자는 사건을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보도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언론인이 가져야할 철학이란 어떤 것인가? 언론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눈앞의 현상만 볼 것이 아니라 문제의 본질을 읽을 수 있어야 한다. 광주민중항쟁을 ‘폭도들의 난동‘으로 보느냐?, 아니면 혁명으로 보느냐? 하는 기자의 자유다. 광주민중항쟁을 폭도들의 난동으로 기록했던 신문이 있었고 그런 신문은 독자에게 사과 한 번 한 일이 없다.

한미FTA 반대시위를 놓고 농민이나 시민단체들의 행동을 과격시위, 불법시위로 기록하는 언론들이 있다. 아니 한 술 더 떠서 한미 FTA 체결만이 살길이라고 보도하는 언론도 있다. 교육개방이 살길이라 하고 수월성 교육이 경쟁력을 높이는 길이라고 한다. 교원평가를 받아야 교육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신문도 있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나 역사적 안목, 역사의식이 없는 기자는 좋은 기사를 쓰기 어렵다. 신문사를 경영해 부를 축적하겠다는 신문은 변절하기 쉽다. 사주의 눈치를 보고, 권력의 눈치를 보는 신문이 어떻게 사회정의를 실현하는 정론을 펼 수 있는가?

한겨레시문이 초심을 잃어버린 이유가 바로 그렇다. 약자의 목소리를 내 달라고 국민주주로 출발한 한겨레가 권력의 눈치를 보고 경영의 눈치를 보다 독자의 기대를 저버린 것이다. 자본주의에서 민중의 목소리를 내는 정론지를 바란다는 건 정녕 불가능한 일일까?
(2006.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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