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성당에 갔더니 주임신부의 강론 중 “KBS에서 방영하는 사극도 끝났고 MBC에서 방영 중인 선덕여왕도 끝나가는 데 사극이 끝나면 저녁시간이 심심해 뭘 하지?”라면서 다른 사람들도 ‘사극 보는 재미로 산다는 사람이 많더라’는 얘기를 소개했다. 신부님의 강론이 아니라도 연속극이나 사극 보는 재미로 산다는 얘기는 자주 듣는다. 서민들에게 ‘삶의 의미’를 주는(?) TV 드라마나 사극은 문학적인 가치나 역사적 교훈이 담긴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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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의 극중 인물과 실제 인물을 구별 못하는 시청자가 몇%나 될까? ‘스크린’이 독재자의 민중 마취제인 3S정책[스크린(screen:영화), 스포츠(sport), 섹스(sex) 또는 스피드(speed)에 의한 우민(愚民)정책]의 하나로 악용되어 왔음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을 외우던 역사교육, 암기한 지식의 양으로 서열을 매기는 학교교육, 사관도 가르치는 않는 역사교육으로 사극이 민중의 삶을 억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오죽하면 학생들에게 ‘사극은 절대로 보지 말라’는 역사선생님조차 있다.
역사를 가르치는 교사가 아니라도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 이름이나 업적 정도를 빼고 나면 ‘99퍼센트가 허구’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렇게 작가의 머리에서 가공된 내용이 작가의 의도와 다르게 이데올로기가 된다는 것 또한 심각한 문제 아닐 수 없다. 실제로 최근 석덕여왕의 ‘덕만’이 한나라당의 전대표인 박근혜와 닮았다는 주장이 논란이 됐던 일은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니다. 서민에게 삶의 재미를 주는 사극은 구체적으로 어떤 피해를 줄까?
첫째 시청자로 하여금 운명론자를 만든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학생들이 배우는 역사 교과서에는 ‘역사의 주인은 민중이 아니라 왕’이라는 식의 왕조사관이나 영웅사관으로 기술되어 있다. 역사의 주인은 민중이 아니라 왕이며 왕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역사관이다. 왕조사관으로 구성된 대부분의 사극에서는 왕은 최고의 인기배우가 등장해 어리석고 우둔한 백성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주인 노릇을 한다. 사극에서 왕조사관은 백성들에게 ‘가난은 나랏님도 구제 못한다’거나 ‘올라가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식의 운명론을 정당화시킨다.
둘째는 정치의 식을 마취시킨다. ‘희소가치를 배분’하는 정치야말로 시민들의 삶의 질을 좌우하는 기제다. 농민들은 농사나 짓고 학생들은 공부나 하고 ‘정치는 정치인들이나 하는 것’이라는 철학을 정당화 시키는 수법이다. 정치의식을 마비시키는 3S정책은 역대 독재자들이 써 먹던 수법이다. 선거 때가 되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인기 사극은 왕조사관의 운명론과 함께 민중들의 정치의식을 마비시켜 정당정치조차 뿌리 내리지 못하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해 왔다.
셋째 역사의식을 마비시켜 역사를 왜곡한다. 역사는 ‘사실(事實)의 기록’이다. 그러나 ‘사실(事實)’의 기록은 사실(史實)과 다르다.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따라 사실(事實)은 의미도 가치도 없는 허접 쓰레기가 될 수도 있다. 실제로 ‘어떤 왕의 아침 수라상의 반찬이 무엇이며, 하루에 화장실을 몇 번 다녀왔는지....’는 사실(事實)이기는 하지만 사실(史實)로서 가치가 없다. 역사적 사실(事實)이란 전문가의 시각(史觀)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떤가? 국정교과서인 국사교과서에서 보듯 우리 역사는 민중사관이 아닌 왕조사관이나 식민사관으로 오염되어 있어 그 피해가 심각하다.
자신의 삶이 좀 더 보람 있고 알찬 삶을 살기 위해서는 역사공부는 필수다. 자신은 민중이면서 머리 속에는 귀족이나 왕의 생각을 하고 있다면 이는 개인의 불행이요, 국가의 불행이다. ‘엽전은 어쩔 수 없다’는 식민사관이나 ‘유럽중심주의’와 같은 서구인들의 시각으로 본 역사는 주체적인 역사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왕조사관이나 상업주의로 오염된 사극이 픽션과 난픽션을 구별하지 못하는 시청자들에게는 독이다. ‘사극을 보지 말자’는 뜻이 아니다. 사는 재미는 문학이나 오락에서 찾을 수도 있지만 역사를 왜곡하거나 이데올로기가 담긴 사극으로 마취되는 시민의식을 저당 잡혀서는 안 된다. TV사극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 필요한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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