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때를 놓친 상인은 아예 시장바닥에 작은 화로를 놓고 냄비를 얹어 라면을 끓이고 있다. 양은냄비에서는 하얀 김이 뭉글뭉글 피어올라 지나는 이의 코를 자극했다. 과자를 길게 펼쳐놓은 난전에도 할머니들이 기웃거린다. 설날 시골에서 손주들에게 딱히 줄 수 있는건 과자뿐, 그마저도 투박한 시골과자는 아이들에게 인기가 없다. 차가운 손주의 발을 덮혀 줄 알록달록한 양말을 고르는 할머니의 손은 고민이다.”(본문에서)
글이 참 곱다. 저자의 외모만큼이나 화사하고 멋스럽다. 필자가 저자 김종길씨를 처음 만난 건 몇 년 전, 경남도민일보가 주최한 팸투어 때인 것 같다. 첫인상이 호감이 가는 미남형에 대화를 하면 상대방의 얘기에 귀기우려 관심을 보이는 태도에 그와 얘길 잠시 나누면 누구든지 금방 친해지는 스타일이다.
처음 책을 선물 받았을 때 ‘이 책을 언제 다 읽어..’ 하고 한쪽 구석에 밀어 뒀던 책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400쪽에 가까운 두꺼운 책이다. 추석 명절 때 딱딱한 책이 싫어 펼치자 몇 장 읽지도 않았는데 재미에 솔솔 빠져들고 말았다. 거기다 필자가 30년 가까이 살았던 마산과 그 인근 지역 얘기다. ‘느림의 미학, 세상에서 가장 느린 기차 경전선’이라는 부재가 말해주듯 이 책은 마산선의 시간이 멈춰버린 마을에서 진주, 함안, 군북 진북, 반성, 진주...를 거쳐 순천 역까지 여행하는 과정의 맛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는 고마운 책이다.
첫 장에서 몇 페이지를 읽으면서 나는 뒷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마산에서 30년 가까이 살면서 지역사를 연구하는 모임인 솟대를 만들고 ‘마산 창원 역사읽기’라는 책까지 쓰면서 몰랐던 얘기들을 이 책이 술술 풀어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글이란 딱딱한 학술서적이 쉽게 피로해지고 읽기가 힘든 반면 여행기처럼 여행자와 함께 재미에 빠지는 매력이 있어 한번 잡으면 손을 놓지 못하는 특징이 있다. 그런데 이 책은 그런 재미 정도가 아니다. 그 지방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도 모르고 있던 지역사를 너무 쉽게 풀어써 지역사를 연구합네 하는 사람들도 부끄럽게 만드는 책이다.
사진찍기가 서투른 필자에게 가끔씩 사진 기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던 전문가답게 중간 중간에 넣은 사진은 보는 사람들에게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진주제일식당은 비빔밥뿐만 아니라 해장국도 유명하다. 영업방식도 특이한데, 새벽 4시부터 오전 11시~11시 30분까지는 해장국을 팔고, 11시~11시 30분 이후에는 비빔밥을 판다.” 이런 소개글을 읽으면 진주에 가면 진주제일식당에 찾아가 내가 좋아하는 국밥을 꼭 한 번 먹어봐야지 그런 생각이 든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사진을 보면 왜 아니 그런 생각이 나지 않을까?
이 책은 단순히 여행에서 보고 느낀 것 뿐만 아니다. 앞에서도 지적했듯이 귀한 지역사를... 또 유명 맛집을 소개해 주기도 한다. 서울의 역사만 배운 사람들에게 지역사를 가르쳐 주고 맛집 블로그나 공중파들이 소개하는 그런 인스턴트 양념투성이의 그런 맛집이 아닌 옛날 어머님 손맛이나 시골 장터에서나 맛볼 수 있는 그런 맛집들을 소개 해 준다. 역사조선의 2대 냉면인 진주냉면을 소개하는가 하면 젓가락을 주지 않는 기이한(?) 식당 얘기에는 웃음이 터진다.
‘비빔밥은 진주비빔밥이 유명하지만 그것은 최근의 일이고, 그 역사와 유래는 확실치 않다. 비빔밥이 문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800년대 말엽에 발간된 <시의 전서>인데 ’부븹밥‘으로 표기하고 있다. 다만 육당 최남선은 <조선 상식>에서 지방마다 유명한 음식으로 전주의 콩나물과 진주의 비빔밥을 들고 있어 이 때만해도 진주의 비밤밥이 훨씬 유명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정도면 단순한 여행서라기보다 음식의 역사까지 섭렵한 저자의 역사인식의 깊이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다솔사....“1930년대에 만해 한용운이 수도하면서 보수한 것으로 전해진다. 사실 다솔사를 거쳐간 인물들을 보면 예사롭지 않다. 한용운 은 일제 강점기 때 12년간 이곳을 왕래하면서 <독립선언서>초안을 작성하고 항일비밀결사 ‘만당’을 조직했다. 그가 머문 곳이 요사체 안심료다. 안심료는 또한 소설가 김동리가 1960~1961년에 머물면서 <등신불>을 집필한 곳이기도 하다.김동리는 효당스님이 ‘광명학원’이라는 야학을 세우자 야학교사로 부임하여 다솔사와 인연을 맺었다.”이 정도면 향토 사학자가 무색할 정도다.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나고 자라고 살고 잇는 곳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서울문화가 표준문화가 되고 서울의 역사, 왕의 일거수일투족이 역사가 되는 나라에서 향토사란 관심밖의 기록이다. 돈이 되지 않으니 그런 지역사에 누가 관심을 가질 것인가? 향토사가는 그래서 춥고 배고프다. 그런데 필자는 이런 연구를 언제부터 했을까? 내가 알고 잇는 김종길씨는 여행가인줄 알았는데 그의 매끄럽고 맛깔스러운 필체를 보면 수필가요 향토사가요, 사진작가다. 이 책은 그의 외모만큼이나 잘생기고 맛깔스럽다. 여행을 하면 견문이 넓힐 수 있다는 말은 ‘남도 여행법’을 읽으면 실감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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