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마르크스... 하면 무슨 생각이 드세요? 참 어울리지 않은 이름. 사람들은 마르크스는 종교의 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그럴 것이 마르크스는 종교는 사회에 해악을 전염시킨다고고 생각하고 헤겔 철학비판이라는 책에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며 부정적인 평가를 하기도 했다. 그런데 알고보면 마르크스와 종교 특히 마르크스와 불교는 공통점이 참 많다.

<붓다와 마르크스>

공산주의란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악마로 알고 있는 체재 순응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사람들에게야 말할 가치도 없겠지만 사실은 마르크스가 추구한 이상이나 부처님이 추구한 이상은 같은 점이 많다. 불교는 엄밀히 말해 기독교처럼 전지전능한 조물주를 신앙하는 종교가 아니다. 중생들이 어떤 괴로움도 없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극락세계와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이상향은 다른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는 둘 다 생산 수단 공공화 및 중앙 집중적 계획체제에 바탕을 두고 사용을 위해 물건을 생산하는 체제이다. 능력에 따라 일하고 실적(행위)에 따라 분배를 받는 사회주의나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공산주의는 불교의 극락과 이상향은 다르지 않다는 얘기다. 그런 점에서 마르크스와 부처님은 다같이 인간의 평등, 계급 없는 세상...’ 꿈꾸던 사상이다.

<불교과 공산주의의 같은 점과 다른 점>

마르크스와 붓다는 다같이 인간의 평등, 계급 없는 세상...’ 꿈꾸던 분들이다. 그러나 불평등을 만든 원인에 대해서는 두 분의 생각은 많이 다르다. 붓다는 불평등의 원인을 인간의 욕망이, 마르크스는 계급사회가 만든 결과로 본다. 당연힌 해법도 같을 수가 없다. 부처님은 삼법인, 사성제, 팔정도를 통해,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을 통해 이상향을 실현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런데 불교를 비롯한 종교는 마르크스를 적대시하고 마르크스는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을까?

<불교와 마르크시즘이 만나지 못하는 이유>

마르크스는 인간의 평등을 믿은 사상가요, 붓다는 인간의 평등이라는 교의(敎義: doctrine)를 가르친 인류 역사 최초의 사상가였다. 마르크스는 역사발전의 단계설에서 불교는 민주주의가 보편화된 평등 사회를 옹호한다. 마르크스나 붓다는 다같은 계급 없는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목표가 같은데 왜 서로 적대시하고 대립과 반목으로 평행선을 달리고 있을까? 붓다와 마르크스가 다같이 계급 차별이 없는 사회를 이상사회라고 간주하면서도 약육강식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해결방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수행을 통해 해탈을 꿈꾸는 불교와 계급투쟁을 통해 평등사회를 건설하려는 마르크스는 어쩌면 영원히 만나지 못하고 달리는 철도처럼 영원히 평행선을 달리지 모른다. 인간의 욕망이 역사발전을 가로막고 있는 계급투쟁이나 고()에서 깨어나지 못하게 하는 탐, , 치라는 삼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불교는 어쩌면 인간 그 자체가 안고 있는 태생적인 한계가 아닐까?

<불교는 종교인가?>

불교는 중생들이 알고 있는 것 같은 인간 외부에 별도의 신을 인정하지 않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불교는 절대자를 숭배하거나 도움으로 고통 없는 이상향을 찾는 종교와는 다르다. 그러나 비유신론적 종교로서 불교와 과학적인 사상으로서 마르크시즘은 신 중심의 세계관을 부정하고 물신화를 비판하는 사상이란 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다. 아널드 토인비는 불교와 서양의 만남은 20세기의 가장 의미심장한 사건이다.”라고 했다. 그러나 극락과 공산주의라는 동상이몽을 꿈꾸는 이 두 사상은 현대과학인 유전자 변형기술로 이종교배를 할 때만 만남이 가능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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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정치2012.02.04 07:00


 


‘도둑놈’을 ‘도둑님’이라고 이름을 바꾸면 도둑이 존경의 대상이 되는가? 한나라당이 당명을 새누리당이라고 바꾼다고 한다. 한나라당은 ‘쇄신과 개혁의지를 국민과 공감할 새로운 당명을 찾기 위해 지난 1월 27일부터 국민대상 당명공모를 시작’ 비상대책위원회에서 ‘새누리당’으로 당명을 개정하기로 의결했다.

한나라당은 ‘대한민국, 갈등을 넘어 국민이 화합되고 하나되는 새로운 세상, 국민의 염원을 대신하겠다’는 뜻으로 이 당명을 확정, 13일 전국위원회에 상정하기로 했다.  당명에 담긴 뜻은 새로움의 ‘새’와 나라의 또 다른 순우리말, 나라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진 ‘누리’가 합쳐진 새로운 나라, 새로운 세상을 뜻하는 ‘새누리당’이라고 한다.

누굴 위해 당명을 바꾸나? 유권자? 자신들이 한 일이 부끄러워...?


얼굴을 성형한다고 사람이 다른 사람이 되는 게 아니다. 한나라당의 비대위가 재창당 의지로 전문과 10대 과제, 24개 정책으로 이뤄진 정강·정책 개정안을 보면 ‘큰 시장, 작은 정부’가 아니라 ‘작지만 강한 정부’다. 이런 정강을 두고 '공정경쟁' 내지 '경제정의' 어쩌고 하면 지나가던 소가 들어도 웃을 일이다.


중생이라는 말이 있다. 기독교에서는 ‘원죄 때문에 죽었던 영이 예수를 믿음으로 해서 영적으로 다시 새사람’이 된다는 뜻으로 삶의 방향을 360도 회전하는 것을 뜻한다. 한나라당이 중생이 가능할까? 솔직히 말해 한나라당이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린 이유는 경제가 어려운 서민들을 위해 꾸린 게 아니다. 집권당으로서 정치를 잘못해 오는 총선에서 실권을 할 위기에 대비해 만든 게 비상대책위원회다.

옛말에 ‘성을 간다’는 말이 있다. 조상을 부정하겠다는 것은 가문의 수치다. 당명을 바꾼다는 게 그렇다. 얼마나 한나라당이 서민들로부터 지탄이 대상이 되어 왔으면 이름까지 바꾸려고 할까? 네티즌들이 만든 한나라당의 별명을 보면 100가지도 넘는다. 딴나라당, 쑈당, 성희롱당, 차떼기당, 대리투표당, 골프당, 성추행당, 군미필당, 매국노당, 탈세당, 부동산투기당, 강부자당... 등 끝이 없다.

사람의 됨됨이는 그 사람이 살아 온 이력을 보면 안다. 당도 마찬가지다. 한나라당은 어느날 갑자기 땅에서 떨어진 게 아니다. 3·15에 의해 부정당한 이승만의 자유당에서부터 시작돼 권력을 도둑질한 쿠데타와 유신후예들의 공화당, 그리고 광주시민을 학살한 후안무치한 민주정의당, 이들당과 야합해 만든 민자당, 신한국당이 오늘날 한나라당의 전신 아닌가? 한나라당 이 국민들 편에 서겠다고 발버둥을 치지만 그들의 발버둥은 그들이 살아남기 위한 집권 야망극에 다름 아니다.


한나라당이 정말 거듭나고 싶다면 민주주의를 자유민주주의로 바꾸는 꼼수부터 버려야 한다. 시혜복지가 아니라 보편적인 복지사회를 건설하기 위한 정당이라고 정강에 삽입해야 한다. 한미 FTA 전면폐지, 남북관계 개선, 친일종미에서 벗어나 독립국가로서 의연한 다자외교를 선언해야 한다. 학벌폐지, 재벌개혁, 부자증세를 공약하지 못한다면 선거에서 살아남기 위한 꼼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솔직히 한나라당의 개혁이란 죽었다 깨나도 불가능한 일이다. 말로는 친서민이니 개혁이니 하지만 그것은 어떻게 서민들을 속일까 어떻게 하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게 관건이다. 그들이 서민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은 그들이 살아 온 길. 그들의 채택하고 집행해 온 정책이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역사적으로 친일에서 유신이며, 친독재, 친재벌의 기둥으로 세운 집을 어떻게 바꿀 수 있다는 말인가?

한나라당은 서민을 기만하는 꼼수는 이제 그쳐야 한다. 군사정권, 유신정권, 학살정권이 저지른 죄만해도 당한 서민들의 고통을 필설로 다할 수 없는데 또 다시 ‘작지만 강한 정부’니 하며 정책이며 당면 바꾸고 있다. 한나라당은 죽었다 깨어나도 서민을 위한 정당이 될 수없다. 차라리 속죄하는 마음에서 유권자들 앞에 석고대죄(石膏待罪)하는 길을 찾는 게 동정이라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인성교육자료2010.11.23 21:49


지난 2006년 8일 일이다. 전남 순천의 선암사 경내에서 태고종 총무원 쪽 승려와 선암사 쪽 승려들의 모습을 보는 국민들은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부처가 되겠다고 수도하는 분들이 죽봉으로 치도 때리고 막가파들이나 할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폭행을 하게 했을까? 이날 몸싸움 과정에서 5명의 승려가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직원과 26명의 승려가 경찰에 연행되는 추태를 보였다.


자비를 실천해야할 수행자가 이해관계 때문에 상대방에게 폭행을 가하는 저들이 ‘수도를 하는 사람들이 할 일인가?’ 의심이 간다. 싸움의 발단이란 게 총무원장이 누가 되느냐 주도권 다툼인데 막강한 재산이 걸려 있는 문제 때문이다.  

불교의 추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고려시대 불교의 번성과 타락상, 일제시대 친일불교,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의 ‘정화운동’과 비구 대처의 폭력적 종권다툼, 1980년 신군부에 의한 ‘10·27법란’과 군사정권에 순응했던 승려들….

        <선암사 승려들으 몸싸움-사진 SBS에서>

기독교는 어떤가? 기독교는 ‘사랑’과 용서’을 부르짖으면서도, 근대 세계사의 절반을 피로 물들이고 지금도 그 행위는 계속되고 있다. 서기 1096년부터 시작, 무려 200년동안 계속된 십자군 전쟁이 그렇고 이스람권 문화와 기독교 문화 간의 충돌은 지금도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보복이라는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

도대체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문제를 말하려면 ‘신(神)이란 실제로 존재하느냐?’는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 BC. 6c 이후 그리이스의 자연철학 이래로 모든 철학의 가장 첫 물음은 ‘세상(만물)의 근원은 무엇인가?’였다. ‘물질과 정신 중 무엇이 근원적인가?’ 이것이 신학을 비롯한 철학의 근본문제요 사물을 보는 관점의 차이다. 이 질문에 대해 ‘물질은 정신과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존재 한다‘고 보는 유물론과 ’물질은 정신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념론으로 나뉘어 진다. 유물론에서 보면 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관념론에서는 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유물철학에서는 신이란 ‘인간이 만들어 낸 존재‘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관념철학에서는 신이나 영혼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유물론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스탈린은 ‘물질, 자연, 존재는 의식 외부에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이고, 물질은 감각, 표상, 의식의 원천이므로, 물질이야말로 제 1차적인 것이다. 의식은 물질의 반영이고 존재의 반영이므로 2차적인 것이고 파생적인 것이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정신이나 영혼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관념론이 아니면 종교란 존재할 수가 없다. 기독교가 공산주의와 공존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종교는 신과 인간이 공존하는 현세구복적인 종교였다면, 서양의 기독교는 내세 지향적이다. 불교가 ‘스스로 부처가 되기 위한 고행의 과정’이라면 기독교는 우주의 창조주요, 전지전능의 신을 믿고 따르는 유신론의 입장에 선다. 공통점이 있다면 불교에서는 제화갈라보살(과거불), 석가모니불(현세불), 미륵불(미래불)이 존재하는데 반해 기독교는 성부인 야훼와 성자인 예수와 성신인 성령이라는 절대적인 신이 있다는 정도의 차이일까? 아니 불교가 무소유의 사상이라면 기독교는 공유사상의 차이정도가 아닐까?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부처님이나 예수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른다는 이들이 부처님과 예수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대승불교의 경전인 <반야바라밀다심경>에는 ‘색즉시공.공즉시색,일체유심조‘라고 말이 있다. ’색(空)과 공(空)이 다르지 않고 공과 색이 다르지 않아,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공(空)인데 소유를 버리면 부처가 될 수 있는데 서로 많이 가지려는 불자는 부처의 제자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지향하는 세계 천국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공산주의의 이상과 닮았는데 공산주의는 기독교를 부인하고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자본주의 세계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외피는 불교니 기독교니 하는 다른 형식으로 남아 있지만 교의는 실종되고 없다. 무소유를 지향하고 보시를 통해 중생을 구제한다는 불교가 그 많은 재산을 두고 다툼을 벌이는 것은 불교사상과는 거리가 멀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또한 ‘이 땅에 천국을 건설하라’는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자본의 논리를 정당화하고 있으니 ‘교회 안에만 예수가 없다’는 주장이 나올 법도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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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종교2008.12.08 22:19


딸아이가 사는 청주에 들렸다가 예까지 온 김에 속리산에나 갔다 오기로 했다. 속리산에 가면 법주사 입구에서 거부감을 느낀다. 국립공원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는 정부 방침에 공원 입구를 막고 입장료를 내야한다며 지키고 있는 사원의 태도부터가 그렇다. 신라 신흥왕 때 의신이 서역으로부터 돌아올 때 나귀에 불경을 싣고 와서 이곳에 머물렀다는 고색창연한 내력보다 경내를 들어서면 거대한 금불상(법주사 미륵대불)에 대한 위압감에 주눅들게 한다.

<사진 : 속리산 법주사 부상의 크기가 또 금으로 칠하면 더 영험으라도 있다는 듯 사원마다 경쟁적으로 크고 화려한 부처님 만들기에 여념이 없다> 

국보 제5호인 법주사쌍사자석등(法住寺雙獅子石燈)을 비롯하여 국보 제64호인 법주사석연지(法住寺石蓮池), 보물 제15호인 법주사사천왕석등(法住寺四天王石燈), 보물 제216호인 법주사마애여래의상(法住寺磨崖如來倚像), 보물 제848호인 신법천문도병풍(新法天文圖屛風), 보물 제1259호인 법주사괘불탱 등은 높이가 33m나 되는 금동미륵대불의 위압감에 질린다. 100여Kg(불상의 무게 160여톤)이나 되는 금으로 도금을 했다는 불상 앞에 중생은 계급적 이질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부자 부처님에 대한 거부감은 그것 말고도 부처님 앞으로 가고 싶은 중생들을 가로막고 무엇에 필요한 지 좀 더 많은 모금을 위한 모금요원이 버티고 앉아 있었다.

부처님은 왜 이 세상에 오셨을까? 수행본기경(修行本起經)〉(大正藏, 3, 463, 下)과 〈태자서응본기경(太子瑞應本起經)〉(大正藏, 3, 473, 下) 두 경을 내용을 합해보면 부처님께서 이 사바세계에 오신 뜻은 바로 ‘괴로움을 해결하여 안락(安樂)의 세계로 인도하기 위함’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부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이 고통을 벗어나 안락의 세계에 들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오신 것이다. 이를 불교에서는 ‘중생구제’라고 한다. 바로 부처님은 사바세계의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하기 위해 오신 분이다. 이를 제도(濟度)라고도 표현한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신 뜻을 한마디로 말하면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중생은 왜 법주사 경내를 들어서면 위화감이나 위압감부터 느기니 웬 일일까?

부처님이 중생구제를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이 ‘중생’은 누굴까? 사전은 중생을 ‘감각이 있는 모든 생명. 지·수·화·풍 네 가지로 합성된 몸을 가진 모든 물건’이라 정의하고 있다. 쉽게 말하면 평범한 삶을 사는 ‘민초’들이요, ‘민중’이다. 이들이 애환을 해결해 주기 위해 내놓은 화두가 ‘생노병사’ 문제일 것이다. 종교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등장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말이란 ‘아’ 다르고 ‘어’ 다른 법. ‘생’을 강조하느냐 아니면 ‘사’를 강조하느냐에 따라 존재의 이유가 달라진다. 불교에서는 ‘생(生)노(老)병(病’)보다 ‘사(死)’를 강조한다.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부처님이 사를 강조하라는 가르침은 그 어디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대부분의 종교가 그렇듯이 ‘산다는 것’을 ‘허무’나 ‘무상’으로 본다. 부처님이 살아계셔서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본다면 분명히 ‘사는 것이 곧 죽는 것이요, 죽는 것이 곧 사는 것’이라고 대답하셨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잘 살지 못하면 잘 죽지 못한다’는 연기법이 이와 같은 뜻을 담고 있는 게 아닐까? ‘가난이 죄’라고 했다. 여유 있는 집에서 제대로 사랑과 교육을 받고 자란다면 평범한 길을 걸을 수 있는 사람도 친구나 이웃을 잘못만나 잘못된 길을 걷는 사람들이 수 없이 많다. 이런 뜻에서 보면 ‘생에 대한 애착’으로 고(苦)를 만든다는 ‘고집멸도(苦集滅道)’도 해석하기 따라 다른 뜻으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생’를 강조하느냐? 아니면 ‘사’를 강조하느냐에 따라 불교의 정체성을 달라질 수 있다. 물론 불교가 중생의 삶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노력했더라면 지금과 같은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중생의 ’생‘의 질을 높이기보다 사원의 축적을 위해 정교유착해 온 것이다. 문제는 ’권력의 맛‘, ’돈의 맛‘을 보면 교조의 진의를 살리기 어렵다. 거대한 부처님! 황금 옷을 입고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개미만한 속물(?), 인간이 굼틀거리고 지나다니는 모습을 보면 가소롭게 보시지는 않을까? 배가 고파 보지 않은 사람은 배고픔의 고통을 모른다고 했다. 가난의 애환을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가난의 설움을 알 리 없다. 물론 부처님은 그런 분이 아니지만 종교지도자는 자꾸만 부처님을 속물로 끌어내리지 못해 안달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 세상이 극락보다 좋고서야 해탈이 어떻게 가능할까? 불교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부처님의 뜻을 쫒으려면 거대한 불사를 위해 서민들의 주머니를 축내는 일부터 중단해야 한다. 이와 함께 부처님이 입고 계시는 그 도금한 옷과 부처님의 얼굴에 붙은 권위를 털어내야 한다. 세계에서 유일하게 세금을 내지 않고 치부하고 있는 사원, 그 사원이 입고 있는 ‘부자'라는 옷부터 벗어야 중생이 보인다. 그런 다음, 사원이 잘 사는 길이 아니라 중생이 잘 사는 길을 제시하고 안내해야 한다. 가난할수록 중생들은 ‘이 세상은 헛되고 헛되도다’라는 허무주의로, ‘운명론자’로 만든다. 부처님의 팔아 부귀영화를 누리면서 이세상에서도 극락을 누리고 다음 세상도 극락왕생하겠다는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사원이 있는 한 거대한 불상에는 부처님도 영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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