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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9.05.12 오늘은 이 땅에 부처님이 오신 날입니다 (1)
  2. 2008.11.03 예수는 신인가, 인간인가? (2)
종교/불교2019.05.12 07:29


오늘은 2563년 전 부처님이 오신 날입니다. ‘성불하세요...^^’ 부처님이 오신 날, 오늘은 전국 사찰에서는 일제히 봉축법요식을 열고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고 각자의 자리에서 주인공으로 살아갈 것을 서원’한다. 우리나라 불교는 삼국시대부터 한국에 상륙하여 포교가 시작되었고, 남북국시대를 거쳐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약 1천년간 국가 단위에서 밀어주던 종교였다. 왕실과 불교는 깊이 유착되어 있었고 불교는 국교와 같았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표본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5년 11월 1일 기준 종교인구수는 전체인구수 4905만 명의 43.9%인 2155만 명이다. 이 중 불교 인구는 전체인구의 35%인 8,059,624명이다. 부처님이 오신 날, 석가모니불의 생애와 부처님이 바라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알아보자.



<석가모니의 생애>

석가모니의 본래 이름은 싯다르타(達多 Siddhrtha)로서 고타마는 그의 성씨였다. 석가(釋迦 kya)족 출신의 성자라 하여 석가모니(釋迦牟尼 kyamuni) 혹은 간단히 석존(釋尊)이라 부르기도 한다. 석가족은 지금의 네팔과 인도 국경 부근에 있었던 하나의 조그마한 왕국이었으며 수도는 카필라바스투였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BC 560년경(460년경으로 보는 설도 있음)에 이 왕국의 정반왕(淨飯王 uddhodana)과 마야 부인(摩耶夫人 Mahmy)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왕궁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며,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까지 두었으나 인생고의 문제를 깊이 자각한 후 29세의 나이에 왕궁을 떠나 출가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유행사문(遊行沙門)으로서 마가다 국에 가서 여러 출가 사문들을 만나 각종 명상법을 배우고 깊은 선정(禪定 dhyna)에 드는 체험을 했으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독자적인 수행의 길을 걸으면서 극심한 고행을 통해 해탈을 얻으려는 노력도 해보았지만 몸만 극도로 쇠약해지고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는 고행을 포기했다. 수자타라는 처녀가 공양하는 우유죽을 먹고 몸을 회복한 후 나이란자나 강에서 목욕을 하고 그 물을 마셨다고 한다. 그와 함께 고행을 하던 수행자들은 그가 고행을 포기했다고 비난하면서 그에게서 떠났고, 그는 홀로 숲으로 가서 이른바 보리수(菩提樹:나중에 붙인 이름으로 avattha라는 무화과 나무의 일종) 밑에서 깊은 선정에 드는 체험을 하는 중에 깨달음(菩提 bodhi)을 얻어 부처, 즉 각자(覺者)가 되었다. 진리의 깨달음으로 인해 그의 마음은 모든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탈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석존의 성불체험이었고 불교가 시작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석존은 오랫동안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맛보면서 지냈으며 자신이 깨달은 진리(法 dharma)가 너무나 심오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설법을 주저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마음을 돌이켜 교화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석존은 제일 먼저 바라나시의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자기와 함께 고행을 하던 걸식승 다섯 비구를 찾아 그들에게 고행이나 쾌락주의의 양 극단을 피해 중도를 따라 수행할 것을 말하고 '4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와 '8가지 바른 길'(八正道)에 대한 설법을 하여 그들을 제자로 얻었다고 한다. 이것이 불교의 수도 공동체인 승가(僧伽)의 시작이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

석존의 가르침을 모아놓은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에 여러 가지로 전해지고 있으나 무엇보다도 그가 성도 후 다섯 비구들을 찾아가서 행했다고 전해지는 그의 첫 설법 내용인 사성제팔정도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을 기본으로 하여 석존의 교설과 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석존은 첫번째 거룩한 진리로서 인생의 고에 관한 고성제(苦聖諦)를 설했다고 한다. 사랑하는 자와 이별하는 괴로움, 미워하는 자와 만나는 괴로움,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괴로움, 그리고 색(色 rpa)·수(受 vedan)·상(想 sajñ)·행(行 saskra)·식(識 vijñna)의 5가지 요소들의 복합체인 인간존재 그 자체가 괴로움임을 설했다. 여기서 인간존재 그 자체가 괴로움이라 함은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신체적 요소(色),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인식(識) 등의 물질적·정신적 요소들이 모두 항시 변하는 무상(無常 anitya)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것도 항구적인 만족을 줄 수 없는 괴로운 것들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고 석존은 말한다. 뿐만 아니라 위에 언급한 5가지 묶음(五蘊)들 가운데 어느 것도 나의 불변하는 자아로 취할 것이 못 된다고 한다. 석존에 의하면 인간이란 다만 수시로 변하는 요소들이 화합하여 하나의 임시적인 존재를 산출하고 있을 뿐 인간에게는 항구불변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無我 antman)고 한다. 고·무상·무아는 그가 본 인간존재의 참된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으로, 무상한 것을 항구적인 것으로, 영원불변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데도 존재하는 것으로 전도된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2번째 진리는 고집성제(苦集聖諦)로서 고가 발생하는 원인을 밝히는 진리이다. 인간 존재와 그 삶이 고인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욕구하는 갈애(渴愛)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갈애가 계속되는 한 인간은 집착(取)을 일으켜 행위(業)를 하여 그 결과(業報)로써 사후에 또다른 고통의 존재로 태어나 같은 과정을 또다시 반복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갈애 또한 원인을 갖고 있다. 갈애는 인간의 실상을 모르는 무지(無明)와 이 무지를 조건으로 하여 생긴 전생에 있어서 누적된 업력(行)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석존은 이와 같이 고를 일으키는 '복합적 조건'(集起)들을 분석적으로 설했으며 이같은 고의 조건적 발생을 연기(緣起)라 불렀다. 무지와 갈애로 인해 인간은 과거·현재·미래 세를 통해 끊임없는 생사(生死)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3번째 진리로서 석존은 이러한 고가 멸한 상태, 즉 무지와 갈애가 멸한 상태에 관한 진리인 고멸성제(苦滅聖諦)를 설했다. 이는 고가 멸한 상태(nirodha)가 있다는 진리이며 이러한 상태를 열반(涅槃)이라 부른다. 열반은 탐욕(貪)·성냄(瞋)·무지(痴 moha)의 3독(三毒)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로서 생사의 세계를 초월한 경지를 뜻한다. 열반은 과거세에 지은 업의 소산인 현재의 몸을 지닌 채로도 실현 가능하고(석존이 성도했을 때처럼) 사후에 신체를 떠나 실현되기도 한다. 후자를 반열반(般涅槃 parinirva)이라고 부른다. 석존의 입적시에 실현된 경지이다. 이런 사후의 열반에 대하여 석존 당시부터 제기되었던 문제는 인간에게는 영원불멸의 자아가 없는데 누가 열반을 체험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석존은 열반이라는 초월적 실재의 신비를 그대로 남겨두었으며 우리의 일상적 개념으로 규정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4번째 진리로서 석존은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 또는 줄여서 도제(道諦)를 설했다. 즉 고의 종식인 열반으로 가는 길, 팔정도에 관한 설법이다. 팔정도는 정견(正見)·정사(正思)·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이 8가지 수행을 셋으로 크게 묶으면 계(戒)·정(定)·혜(慧)의 삼학(三學)이 된다. 도덕적 행위와 삶(戒), 흩어진 마음의 통일과 정화(定), 사물에 대한 올바른 통찰(慧)을 닦음으로써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석존은 팔정도를 설함과 아울러 쾌락을 탐하는 삶과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주의의 양극을 피해 중도의 길을 따를 것을 가르쳤다. 중도는 8가지 수행을 올바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태도인 것이다. 석존은 이같은 고락의 중도 외에 단상(斷常)의 중도, 혹은 유무(有無)의 중도도 가르쳤다. 즉 영원한 자아가 존재한다는 상주론(常住論)도 석존은 거부했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죽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으며 업보도 내세도 없다는 단멸론(斷滅論)도 거부했다. 그러나 존재의 조건이 계속되는 한 인간은 조건적 존재로서 존속한다. 열반이란 이렇게 조건적으로 존재하는 무상하고 괴로운 인간존재 자체가 완전히 극복된 무조건적인 세계이며, 팔정도는 무지와 탐욕 같은 인생의 조건들을 극복하여 열반을 실현하는 길인 것이다.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갈망... 그것이 오늘날의 종교가 출현하게 배경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라 무엇인가? 사후의 세계란 실재하는 것인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절대자인 신은 실존하는 것인가?... 이 모든 물음에 대해 종교는 과학적인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지만 종교를 통해 평등세상을 이루고자하는 인간의 보편적 진리는 모든 인류의 염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종교는 종교가 지향하는 가치와는 다른 자본에 예속된 물질과 타협한 세속의 길을 선택해 타락의 길을 걷고 있다. 무신론이 불교가 구복신앙 혹인 기복신앙으로 변질된 것은 이를 반증하고 있다. 다시 부처님 오신 날을 맞으며 부처님이 바라던 세상 모든 불자가 성불의 길로 가는 꿈이 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 이 글은 jesusi 홈의 글을 편집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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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종교2008.11.03 20:00


“교회를 다닌다고 다 기독교인인가. 아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기독교인이다.” 요한복음 강해를 앞두고 1월 31일 기자들과 만난 김용옥 교수(세명대 석좌)가 당신은 “기독교인이 아니지 않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지식인은 참 편리해서 좋겠다. 입장이 곤란하면 어려운 말로 적당히 지나가면 된다. 김용옥교수의 대답도 그렇다. 이번 회견에서 김교수는 당신은 ‘예수를 믿는가?’라는 질문에는 “나는 예수를 믿는다. 내 안에 예수에 대한 심상이 있다." 이렇게 알듯 모를 듯한 말로 적당히 지나갔다.



만약 김교수에게 내가 질문을 할 기회가 있었다면 “예수님은 사람인가 신인가?”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 민감한 문제, 논란이 될 문제는 대중언어가 아니라 언술적인 유희로 통과하는 게 지식인의 장기일까? 사실 예수가 ‘신인가? 아니면 사람인가?’는 해묵은 그러나 끝나지 않은 논쟁이다.

크리스트(구세주) 탄생을 학수고대하던 유대인들도 ‘나는 하느님의 아들’라는 예수의 말에 신성을 모독했다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기독교인들조차 “예수는 신이다”와 “예수는 신성이 있다”는 말은 전혀 성격이 다르지만 이것을 거의 구별하지 않는다. ‘신이다‘라고 간주하는 것과 ’신성이 있다‘는 표현은 결론이 같을 수 없다.


예수를 신이라고 보는 측에서도 예수님께서 "나는 신이다"라고 직접 말씀하셨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요 1:)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는 구절을 인용해 삼위일체, 혹은 ‘예수=신‘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 밖에 마태복음은 왕이신 예수, 마가복음은 노예이신 예수, 누가복음은 사람이신 예수, 요한복음은 신성 방면에서의 ’하나님과 하나‘라는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측에서는 성서만으로는 예수가 신이라는 증거도 없고, 신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믿음’으로써 예수의 신성을 인정할 뿐이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크리스천이자 수도사였던 윌리엄 오브 오캄은 ‘예수는 신이 아니라는 것이 해답’이 된다고 말하고 ‘그래야만 수수께끼 같은 삼위일체, 복음서의 억지스런 구약인용, 압제 세력인 로마의 미화, 예수의 수많은 이적을 목도하고 들었음에도 예수의 메시아임을 부인하고 십자가에 매달아버린 유대인의 안타까운 선택이 설명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밖에도 ‘비록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 아닐지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이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유리병과 꿀이 따로 있었는데 어느 날 유리병 속에 꿀을 담아 놓았다. 이를 무엇으로 불러야 하는가? 이를 두고 ‘예수님 속에 임한 하나님’이며 ‘그 분을 하나님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느냐?’는 ‘신인합일(神人合一) 사상’이다.

신인이 합일되어 있다면 그 사람을 보고 신이라고 불러도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은 ‘예수님을 하느님과 완전 동일하게 보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꿀과 유리병이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가 신이 되는 과정은 니케아 종교회의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마르키아누스황제가 소집한 제4차 종교회의에서는

「1.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도 완전, 인성에도 완전하다.

2.그리스도는 참 신이며 참 인간으로 이성 있는 영혼과 육체를 소유하였다
3.신성은 성부와 같고 인성은 우리와 같으나 죄가 없다.
4.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성으로 동정녀에게 출생하심」을 결의하게 된다.
예수가 신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즉 삼위일체논쟁은 기독교가 존재하는 한 끝나지 않을 논쟁으로 보인다.

예수님이 신이기 때문에 두려워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신앙에 진정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신성을 강요하면 하느님은 두려움의 대상, 공포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 신이기 때문에 두려워서 섬기도록 하는 신앙은 구복신앙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

물론 신앙이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생겨났지만 신의 두려움이 아니라 이성을 통해 자신을 절제하는 성숙한 신앙을 갖도록 가르치는 것이 목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예수님은 인간이라는 측면을 강요하면 더더욱 존경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권력 앞에 고개를 숙이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데 그분만이 유일하게 권력과 맞섰지 않은가?


과거에 잘잘못이 있어도 현재 제대로 옳은 길을 가고 있다면 덮어두고 싶은 게 나의 개인 적인 심정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국교회는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이성을 잃고 막가파식으로 가고 있다는 감을 지울 수 없다. ‘천국과 지옥을 강요해 착한 사람을 겁주고 제정일치시대가 아님에도 십일조를 강조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 있다고 십일조를 강요하고 있다.

김용옥교수가 말한 것처럼 ‘예수가 ’신인가 인간인가‘ 하는 것과 예수처럼 사는 것’ 중에 어떤 것이 중요할까? 주객이 전도됐다고 해야 하나? 예수 없는 교회, 예수 없는 신앙... 그게 오늘날 한국교회 모습이다. 천국과 지옥을 강요하고 헌금의 액수나 신자의 수로 교세를 과시하는 그래서 '이 땅이 하늘나라가 되기를 바라면서' 오염된 세상에는 침묵하고 개인 구원만 강요하는 교회가 한국교회다.


한국교회가 타락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신부나 목사들이 져야 한다.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의 목자들은 성서를 바로 가르치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 중에는 하느님을 믿는지 샤머니즘을 신봉하는지 구별이 안 된다. 교회나 성당에 나와 복이나 빌고 죄의식에 사로잡혀 반 주체적인 운명론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솔직히 같은 성당이나 교회에 나오는 사람치고 같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이러한 혼란은 모두 목회자가 책임져야할 문제다. 죽어서 천국에 가기 위해 준비나 하는 교인은 예수가 바라는 인간상이 아니다. 교인들을 예수처럼 살도록 가르치지 않고 내세구복사상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떻게 살았는가? 예수님은 불의를 보고 무섭게 화를 내신 분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온유하기만 하신 분인 줄 알지만 교회당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었다, 내쫓으셨다, 쏟으셨다, 또 엎으셨다’ 라는 표현에서 그는 불의를 보고 불같이 화를 내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의 불의를 못본 채 하고 내세만 준비하라고 가르치는 목자는 참 목자가 아니다. 식민지시대를 거쳐 독재정권과 군사정권 아래서 ‘권력은 위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다’며 그들을 위해 조찬기도나 하고 사회의 부정과 비리에 침묵하게 만드는 목자는 목자가 아닌 적그리스도다.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권력을 도둑질한 전두환을 위한 조찬기도회는 하는 목사님들>

이러한 왜곡된 신앙은 결국 신에게 돌아 가야할 찬미를 목회자인 신부나 목사가 가로채 자신이 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독재자는 민중이 비판의식을 가지거나 합리적인 사고를 하기를 원치 않는다.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기 때문이다. 기독교도 그렇다. 근시안적인 안목에서 보면 신지들이 내세나 준비하고 복이나 비는 그런 신앙이 편하고 좋을지 모르지만 역사는 변하고 민중은 깨어난다.

그럴 경우 기독교는 한꺼번에 무너지고 말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른 건 모두 덮어두더라도 이 한 가지. 예수를 신으로 가르치더라도 그 신은 ‘전지전능의 공포의 신이 아닌 사랑의 신’이라는 사실. 그리고 예수가 신인가 아닌가? 그게 아니라 나는 과연 예수처럼 살고 있는가? 그게 문제다. 분명한 사실은 지옥을 강조해 순진한 신자들을 겁주는 종교지도자는 양을 인도하는 목자가 아니다.... (계속)


- 2007년 2월 8일 썼던 기사입니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TAG , 예수,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