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잘나가던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이 있었다. ‘신분사회, 가부장 중심의 문화군자의 논리, 혈연적 폐쇄성, 남존여비, 가족중심주의, 스승의 권위를 강조...’하는 공자시대 유습극복을 강조한 책이다. 이러한 전근대적인 유습은 우리사회 구석구석에 깊숙히 잔존하고 있다. 명절문화가 그렇고 제사를 비롯한 관혼장제문화가 그렇다. 이러한 전근대적인 유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필요한 상업주의와 무관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지 출처 : 모과>

대학진학율이 90%라고 한다. 대학은 나와야 사람 대접받을 수 있다는 가치관 때문이다. 살아가는데 대학 졸업은 필수적인 요건인가? 대학을 나와야 우대받는 사회. 사람의 됨됨이나 능력이 아니라 대학을 나와야 취업도 결혼도 가능한 사회는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공자의 유습처럼 우리사회에는 연고주의가 판을 치고 있기 때문에 학벌이 피부색깔처럼 평생을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요건이 되고 있다. 학연은 직장생활에서 능력을 인정받기 위한 필수요건이다. 우리사회 깊숙이 잔존하고 있는 학연과 혈연지연과 같은 전근대적인 유습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다.

 

아이 한명이 대학까지 졸업하는데 드는 비용이 3억이라고 한다. 이렇게 투자(?)해 졸업하면 원하는 세상이 열리는가? 교육부와 한국교육개발원은 지난해 8월과 올해 2월 졸업한 전국 552개 고등교육기관 졸업자 555142명의 취업률을 조사한 결과 59.3% 정도가 취업한 것으로 집계됐다. 고려대(69.1%), 연세대(64.2%), 서울대 졸업자의 취업율은 59.8%. 대졸자가 반드시 고졸자보다 근무능력이 뛰어날까?

 

전국 323개대학(전문대학졸업자 포함)에서 매년 46만명씩 쏟아지는 대학졸업자... 대학졸업생의 평균 취업률은 50% 남짓하다. SKY 입학이 내 인생의 목포처럼 된 사회... 대학을 졸업만 하면 금방 세상이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에 사로잡히지만 현실은 개인이 원하는 만큼 신기루가 아니다. SKY를 졸업했지만 취업하지 못한 3~40% 그리고 대학졸업장을 들고 취업도 되지 않는 현실 앞에 부딪히면 무슨 생각을 할까?

 

연고주의 사회에서는 능력이 아니다. 대학졸업장은 결혼을 하기 위한 조건 중의 하나요, 취업이나 승진 그리고 임금산정기준부터가 차별화된다. 성이 상품화된 사회에서 여성의 외모가 그 사람의 가치를 달리하듯 연고주의 사회에서는 대학졸업장은 살아가는데 필수조건이다. 연고주의 사회는 열심히 일하면 일한만큼의 대가가 돌아오고 능력에 따라 대접받는 그런 사회가 아니다.

 

<이미지 출처 :고발뉴스>

 

우리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 잘나가는 SKY 대학중의 하나, 고려대 재학생이었던 김예슬씨가 사회에 던진 충격을....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 그 한 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믿음으로...’ 김예슬씨의 대학자퇴선언문 중 일부다.

 

지금쯕 김예슬씨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리하여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더 많이 쌓기만 하다가 내 삶이 한번 다 꽃피지도 못하고 시들어 버리기 전에. 쓸모 있는 상품으로 '간택'되지 않고 쓸모없는 인간의 길을 '선택'하기 위해. 이제 나에게는 이것들을 가질 자유보다는 이것들로부터의 자유가 더 필요하다. 자유의 대가로 나는 길을 잃을 것이고 도전에 부딪힐 것이고 상처 받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삶이기에, 삶의 목적인 삶 그 자체를 지금 바로 살기 위해 나는 탈주하고 저항하련다.’고 항변하던 그가 부럽다.

 

모든 대학생이 이런 용기만 있다면.... 학벌사회도 우리사회 깊숙이 잔존하는 유교문화의 유습도 연고주의도 뿌리 뽑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렇게 하기에는 그들이 만나는 현실이 너무나 각박하다. 사람됨됨이가 아니라 대학 졸업장이나 스팩으로 사람의 가치를 평가하는 사회. 전근대적인 유습은 언제 척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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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정치2012.01.06 06:30


                              <이미지 출처 : 다음 이미지 검색에서>

 

A 학생의 점심 메뉴 :「빵 1개, 단무지 2점, 게맛살 4조각, 메추리알 5개. 튀김 2개...」

 

B 학생의 점심 메뉴 : 「캐비어, 게살 스프, 연어 구이, 등심 스테이크, 시저 샐러드, 생과일 주스, 케이크...」

 
'방학 중 사교육비가 채 5만원이 안 되는 아이와 1000만원을 호가하는 '풀 코스 교육'을 받는 아이의 교육 양과 질의 차이는, 두 아이가 먹는 이 한 끼 점심 메뉴가 그대로 말해 준다. 사교육비 비율 '1000 : 5', 때로는 '1000 : 0' 인 대한민국의 방학'

오죽하면 서울대 김대일교수는 ‘대한민국에서 빈곤한 이들이 끔찍한 가난의 늪에서 벗어날 확률이 고작 6% 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했을까? 

지난 2002년 토리노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경기에서 국민들이 안톤 오노의 손을 들어준 심판에게 분노 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규칙이 무너진 경기였기 때문이다. 규칙이 무너진 경기. 그건 경기로서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쇼트트랙경기뿐만 아니라 사회도 마찬가지다. 규칙(법과 도덕...)이 무너진 사회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계층상승의 통로가 되는 교육이 '1000 : 5', 또는 '1000 : 0'으로 불공평하게 기회가 주어졌다면 이는 사회가 지켜야할 최소한의 기준(규칙)이 실종됐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실이 무너졌다’느니 ‘학교는 죽었다‘는 얘길 자주 듣는다. 교실에서 수업을 하기 어렵다는 게 교사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학교가 왜 무너지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학교가해야 할 일을 못하기 때문이다. 학교가 존재해야할 이유가 무엇일까? 학교가 해야 할 본질적 기능은 교육이 ’계층상승의 수단‘이 아니라 ’삶의 지혜를 전수‘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학교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 ’삶의 지혜를 전승하는 곳‘이 아니라 부모의 경제력으로 자녀의 사회적 신분을 대물림하는 절차나 과정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를 학벌사회라고들 한다. 학벌사회란 학업경쟁력이 아닌 학벌(간판,브랜드밸류)에 의한 신분이 세습되는 사회를 말한다. 서열을 본질로 하는 우리사회의 신분이란 수학능력점수에 따라 매겨진다. 이 서열 매김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은 규칙이 무너진 게임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시합 전 승패가 결정 난 이러한 신분사회, 학벌사회를 가능케 한 이유는 무엇일까?

학벌구조가 유지되는 이유


 한국사회가 학벌사회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이 파행적으로 치닫고 있는 이유도 학벌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교육위기의 근본원인도 학벌에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의 패거리 문화가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 각 영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부정과 부패를 가능케 한 사회구조도 학벌에 있고 이를 재생산하는 대학서열화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실붕괴 뿐만 아니다. 기러기 아빠며 천문학적인 사교육시장이며 교육 붕괴 등 오늘날 우리교육이 당면한 모순의 원인이 학벌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정과 부패구조의 원인 제공자요, 사회진보와 교육위기의 주범인 학벌이 유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학벌은 식민지시대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할 것 같다. 민족을 배신한 대가로 얻은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이 해방과 함께 위기를 맞자 이들의 힘이 필요한 불의한 정치권력이 야합하고 여기서 이루어진 세력이 학벌을 통하여 뿌리는 내릴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 그 후 독재 권력이나 군사정권이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고 정당성이 없는 권력의 지지 세력으로 기생하면서 공생관계로 살아남게 된다.

이들의 생존 방식도 재벌로 또는 사학으로 언론권력으로 연결되면서 거대한 세력으로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사회정의가 무너지고 정경유착이니 권언유착이 가능한 사회구조는 이러한 학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법으로 흔히 3S 정책이 동원되기도 한다. 교육이 실종된 사회는 자본에 종속되기도 하지만 독재 권력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했을 때 그로부터 도래할 수 수 있는 피해란 상상을 초월한다. 독재 권력이 존속되기 위해서는 침묵하는 국민이 필요하다. 국민의 비판을 거세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 국정교과서제다.

권력이 특히 정당하지 못한 권력이 국정교과서의 편성권을 장악한다면 그 교과서는 그들의 기준에 의해 선정된 지식이 고급지식이 된다. 특히 입시위주의 사회에서 그들이 선정한 지식만이 가치를 인정받게 되고 이러한 교육의 결과는 그들이 원하는 인간 양성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교육개혁, 안 하나 못하나?


 해방 후 ‘대학별 단독시험’으로 시작한 대학입시제도는 현행 입시제도까지 무려 11차례나 바뀌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연례행사로 치러진 입시제도 바꾸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대부분의 정권들은 명운을 걸고 이뤄내고야 말겠다는 교육개혁을 약속했지만 그 어떤 정권도 그 일을 해 내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교육개혁은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 같다. 참여정부가 교육개혁위원회를 만들고 국민적 기대를 모았지만 정권중반에 접어든 현재까지 교육개혁은 가능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교육개혁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회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우리사회는 진보와 보수가 아니라 ‘개혁과 반개혁’, ‘민중대 반민중’의 대립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정의나 불의가 아니라 기득권세력과 개혁을 추진하는 세력간의 힘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반세기가 넘게 기득권 수호세력들은 정치, 경제, 사회문화 종교 등 각 영역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러한 개혁저항세력들은 이번 사립학교법 반대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부정과 부패비호세력이라는 오명도 불사하면서 이들의 기득권 지키기는 파렴치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상위 2%가 부와 권력을 독점해 98%를 지배하고 세습하는 구조는 입시라는 과정을 거쳐 정당화되기도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방학 중 사교육비가 채 5만원이 안 되는 아이와 1000만원을 호가하는 '풀코스 교육'을 받는 아이가 일류대학을 입학할 가능성을 비교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얘기다.

교육을 살리는 길


학교가 시험 준비기관이 되고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질이 다른 사교육을 받아 기득권을 계승하는 구조는 이렇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세계 10-20위 수준의 학생들을 싹쓸이 해 뽑아놓고 4 년 후에 세계 150위 수준의 학생으로 만들어 배출하는 서울대‘가 있고 승패가 결정 난 경기를 정당시키는 사회제도가 유지되는 한 교육의 기회균등이란 헌법의 명문규정에나 남아 있을 뿐이다.

20대 80이라는 사회양극화현상은 개인의 능력 차라기보다 근대화과정에서 우리사회가 만든 구조적인 모순의 결과다. 사화양극화를 정당화하고 가난이 개인의 책임으로 또는 운명론으로 인식하게 된 풍토 또한 왜곡된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를 보는 시각이나 판단능력이 중시되지 않고 암기한 지식의 양으로 사람의 가치와 서열을 매기는 학교교육이 바뀌지 않는 한 사회양극화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해야할 입장에 있는 정부조차 힘의 논리에 바탕을 둔 신자유주의 경쟁이데올로기를 고수하고 있다.

 사회양극화나 신분의 세습을 혁파하기 위해서는 실종된 교육을 살려야 한다. 학교가 더불어 사는 지혜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출세를 위한 경쟁장이 되는 한 진정한 교육, 인간 교육은 불가능 하다. 겉으로는 사회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또 평준화의 틀을 유지하겠다면서 수월성을 말하고 특목고나 자사고를 확대하고 시장개방과 영어몰입교육까지 불사한다면 교육의 공공성회복은 불가능하다. 철학이 없는 사회는 부패하기 마련이다. 진정한 교육의 기회균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학벌문제와 입시구조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정치2011.02.28 19:58


<삼국시대의 골품제>

고구려의 고추가, 백제의 8대성족, 신라의 골품제도는 지배계급이 신분세습을 위하여 만든 제도적인 장치였었다. 지배자는 하늘의 뜻을 따라 통치한다는 지배논리가 성립되는 사회에서는 지배자의 의도에 따라 제도나 종교가 만들어지고 운영되었다.


특히 신라의 골품제도는 두품과 계급을 연결시켜 철저한 폐쇄적인 사회 구조를 유지하였다. 제 1두품은 이벌찬을, 제 6두품은 아찬의 관직을 맡을 수 있게 한 것이 그 예이다.

골품제는 가옥, 수레, 의복 일상생활의 용기까지 제한하고 규제하였다. 방의 크기는 진골이 가로 세로 24척을 넘지 못하게 하고 4두품과 평민의 방이 15척을 넘지 못하게 하였다.


복식에 있어서도 평민 남녀는 가죽신을 신지 못하게 하였고 4두품 이하의 여자는 속치마를 입지 못하게 하였다. 금그릇, 은그릇이나 금을 도금한 그릇은 진골 조차도 사용할 수 없었다.

섬돌로는 산의 돌을 쓰지 못하고 담장은 6척을 넘지 못한다. 또 들보는 걸지 못하며 석회를 칠하지 못한다.

고대 부여 사회에서는 주인이 죽을 경우 100여명이 죽은 주인과 함께 땅에 묻혀야 하는 순장의 희생을 당해야 했다.

이러한 악습은 서기 502년 지증왕 3년에 가서야 법으로 금지하기에 이르런다.

골품제도나 순장풍습과 같은 악습은 현대인으로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겠지만 엄연한 역사적 사실인 것이다. 성취지위(成就地位) 보다도 귀속지위(歸屬地位)가 인정되는 사회에서는 봉건 잔재를 역사가 청산 해 주는 것이 아니다.

< 사진자료 : blog.daum.net/psrpsl 에서>
 
<지배를 정당화화 하기 위한 이데올로기>


제정일치 시대의 난생설화나 건국신화에서 볼 수 있듯이 지배계급의 정당성을 위해 어떻게 역사가 왜곡됐는지 살펴보자.

민족의 시조신(始祖神)인 단군 할아버지는 평범한 어머님의 몸을 빌어 탄생한 사람이 아니다. 하느님의 아들인 환웅과 곰 사이에서 민족의 시조이신 단군왕검이 태어난다. (물론 자구적인 해석이 아닌 곰 부족과 호랑이 부족간의 힘의 관계에 의한 선택으로 해석하는 사관이 유력하지만...)

삼국의 시조신(始祖神)도 유사한 탄생의 신화에서 비롯된다. 흔히 토테미즘이라고 설명되고 있는 부족의 신화는 거북이나 닭, 말, 개구리등이 부족의 수호신으로 신비화되면서 정상적인 인간의 자녀가 아닌 알이나 비정상적인 탄생으로 신비화 되고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작용하여 왔던 것이다.

이 시대의 피지배자들은 자기네들을 지배하는 강자가 곧 신이었거나 신격화시켜 그들에게 복종함으로서 사회질서를 유지시켜 왔다. 제사장이 통치자가 되는 제정일치(祭政一致)시대의 정치는 '지배자는 신의 뜻을 펴는 것'이었고 피지배자는 복종만이 선이요, 도덕이요, 진리였다.

당시의 민중들은 신의 뜻에 따르는 것이 운명이요, 신의 섭리(攝理)라고 이해하고 있었다. 고로 민중은 복종만이 허용되었고 통치자는 곧 신의 대리 통치자였던 것이다.
인간의 정치의식이 조금씩 높아 진 삼국시대도 지배계급은 그들의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종교가 곧잘 이용되었다.

<운명론적인 세계관의 탄생>

인간에 대한 애정에서 출발한 불교는 수용 과정에서부터 권력과의 타협으로 시작된다. 해탈을 목적으로 수도하는 과정에서 3법인, 4성제, 8정도를 원론적인 차원에서 수용하지 못하고 샤머니즘적인 구복적인 신앙과 결탁함으로써 업(業)에 의한 운명론적인 세계관을 성립시키는 왕즉불의 귀족 불교로서의 자리 잡게 된다.

이러한 귀족 불교의 논리는 불상의 크기나 탑의 양식이 웅장하고 다양화로 나타나기도 하고 현실 부처인 왕의 절대권력 앞에 순종하는 미덕이 현세구복적인 신앙으로 미회 되기도 한다. 당시의 지배계급은 부처나 보살이 되어 현생에서도 내세에서도 기득권을 유지하고 지배질서를 정당화하는 업(業)의 논리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원은 또 하나의 수탈자로서 군림하면서 웅장한 절의 건립, 많은 시주가 축복으로 인식되면서 귀족 불교의 기능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즉 불교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함으로서 민중은 자신의 삶이 운명으로 체념하는 삶을 살게 되고 내세를 위해 끝없는 내핍과 절제 그리고 인내를 미덕으로 합리화  되는 논리가 성립된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현실의 고난이 전생의 업인(業因)으로 합리화되고 불만이나 비판은 계율을 어기는 범죄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다.

지배계급의 수탈이 정당화되고 그들의 논리가 법이 되기 위해서는 종교의 이데올로기가 필연이었고 진실은 왜곡되어 현실 구복적인 샤머니즘적인 종교가 지배 이데올로기로 기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계급 재생산을 위해 이용된 종교>
 
신라 말의 불교는 순수한 종교적인 기능을 넘어 지배 이데올로기로써 권력의 충실한 시녀 역할을 다하였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종교의 역할은 권력의 필요에 의하여 유교, 기독교가 권력의 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해 왔던 것이다. 오늘날의 종교 또한 권력과 타협한 이데올로기 역할을 함으로써 수탈자가 아닌지 진지한 검토가 있어야 할 것이다.

종교는 과학의 이름으로 추방되었는가?
재벌의 2세가 부모의 재산뿐만 아니라 사회적 지위까지도 상속받고 있고 연예계의 2세들도 예외가 아니다.

물론 부모의 재능이 유전적인 능력으로 나타나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만 유명 정치인의 2세가 그 부모의 후광을 이어 받는 현실은 고려 시대나 조선 시대의 음서제도나 문음제도와 어떻게 달라졌다고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아들이 지구당 위원장을 비롯한 정치 지망생으로 아버지의 후광을 엎고 정계에 진출하고 있는 경우가 그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정권을 비롯한 기득권을 소유한 사람은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기득권을 유지 존속하기 위하여 계획적이고 의도적인 노력이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으로 또는 법률이나 제도적인 장치를 통하여 유리하게 작용하여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골품제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서울대 ; 성골
연세대, 고려대 : 진골
서울소재 상위권 대학, 지방국립대 인기학과 : 6두품
서울소재 중하위권 대학 : 5두품
수도권 대학 ; 4두품
지방대 : 1, 2, 3두품 평민
대학을 진학하지 못함 : 사회적 천민,

인터넷에 떠도는 현대판 카스트 제도다. 

의사의 아들은 의사가 되고 판검사의 아들은 판겸사가 되는 세상. 

'우리가 남이가?'라며 지연, 학연, 혈연과 같은 연고주의가 판을 치고 SKY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전 영역에서 기득권을 독식하는 사회.   
 
재벌은 재벌끼리 사돈을 맺고 정치인은 정치인끼리, 부자는 부자끼리 사돈을 맺어 대대로 신분이 대물림되는 사회는 현대판 골품제 사회다. 

인도의 카스트,
신라의 골품제와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대물림되는 사회는 무엇이 다른가?  

성이 상품화되고 신부, 신랑에게 등급이 매겨지는 사회에서 평등사회란 영원한 꿈이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정치2010.12.19 18:43



어린이가 234억이나 되는 주식을 소유하고 있다면 믿을 사람이 있을까?
어린이 중에는 1억 원이 넘는 주식을 소유한 어린이가 75명, 10억 원이 넘는 어린이는 모두 8명이나 된다("우리나라 어린이 주식 부자 1위는 234억 보유" sbs 2009. 5.4.) 어린이가 무슨 장사를 해서 어떻게 그 많은 재산을 모았을까? 

신기한 일은 어린이 부자뿐만 아니다. 삼성과 현대차 그룹 등 우리나라 100대 부자들의 재산평가액이 78조 2천억으로 2009년 우리나라 국민들이 벌어들인 국민총소득(GNI)의 8.2%를 차지하고 있다. 이건희 삼성회장 일가족은 부인과 1남 2녀의 직계가족 재산총액이 12조 1752억이나 된다. 또 개인재산이 465억 이상이 400명으로 집계됐으며 개인재산이 1천억이 넘는 재산가는 216명이다.(비즈니스 경제)

무슨 재주가 있어 그런 천문학적인 돈을 벌 수가 있었을까? 윈도우운영체계를 개발한 빌 게이츠도 아니고 허리우드 스타 엠마 왓슨이나 배용준처럼 인기스타로서 돈을 모은 사람도 아니면서 어떻게 그런 천문학적인 돈을 벌수 있었을까?  


                                           < 사진 ; 네이버 검색 창에서 >

우리나라 10대 재벌그룹 임원들의 평균 연봉이 9억원을 웃돌아 1년 새 30.32%나 급증했다고 한다. 통계청이 발표한 ‘2010년 8월 근로형태별 및 비임금근로 부가조사 결과’를 보면, 비정규직 근로자는 568만5000명이나 된다. 이들의 평균 임금은 125만원이다. 매달 125만원을 받는 근로자가 평생 먹지도 입지도 않고 모아도 10억의 재산을 가진 어린이를 따라 갈 수 있겠는가.


최저임금위원회는 2010년 1월 1일부터 2010년 12월 31일까지 적용되는 최저임금액을 시간급 4,110원으로 모든 산업에 동일하게 적용, 일급(8시간) 32,880원, 월급(주40시간) 858,990원, 월급(주44시간) 928,860원으로 고시했다.

올해 3월 기준 전체노동자의 12.8%에 달하는 210만명이 법정최저임금(4110만원)보다 적은 임금을 받고 있다. 2000년까지만 해도 최저임금을 받는 노동자수가 전체임금노동자의 4.2%인 53만명에 불과했다.


'고소득층과 저소득층' 소득의 격차가 이렇게 벌어진 사회는 건강한 사회일까? 정치란 더불어 살아가는 삶들에게 골고루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조정해 모든 구성원이 행복하게 살도록 조정하는 역할을 하는 일이다. 

인간이란 어차피 능력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재산의 차가 나는 게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빈부격차는 정상적인 과정을 통해 이러한 빈부격차가 났다고 믿을 수는 없다.  

재산이 9조에 가까운 사람과 86만원도 안 되는 월급을 받는 사람이 똑같이 세금(간접세)을 낸다면 빈부격차는 천문학적으로 계속 더 벌어진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안다. 간접세만 그런가. 이명박정부가 출범한 후 비즈니스 프랜들리 정책은 가난한 사람들이 설곳조차 없는 나락으로 내몰고 있다.  

한 달에 21억1000만원(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 2006년 2006년 6월 말 기준, 연봉 250억원)의 월급을 받는 사람과 86만원도 안 되는 월급을 받는 사람이 함께 사는 세상을 두고 이명박정부는 정의사회니 복지국가 실현을 외치고 있다.

경제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라면 당연히 부자가 존경받아야 옳다. 그러나 차떼기 정치자금사건에서 보듯 대부분의 재벌들은 정경유착이나 탈세, 부동산 투기, 심지어는 밀수까지 마다않고 부를 축적해 왔다. 반대로 가난한 민초들은 탈세는커녕 재벌의 가격담합이나 인플레이션 등 온갖 착취로 수탈을 당해 왔다. 공정한 경쟁만 보장된다면 정당한 노력의 대가로 누리는 부귀영화를 탓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의 역사를 뒤돌아보면 권언유착이나 정경유착뿐 아니라 탈세, 사채놀이, 불법투기, 불법상속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를 축적해 이런 부자들이 존경받는 사회까지 만들어 놓았다.


1801년. 노비가 해방되기 전에는 양반과 서민이라는 신분의 차가 존재하는 계급사회였다. 그 후 1945년 해방과 미군정시대를 거쳐 신분에 따른 차별이 철폐되면서 민주주의 사회가 열린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평등을 이념으로 하는 자유민주주의가 시작된 것이다. 자유민주주의가 시작된 지 반세기, 오늘날 우리사회가 지향하는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사회로 바뀌고 있는가?

한마디로 '그렇다'고 대답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 우리사회가 합리적인 사회 건강한 진보를 가로 막고 있는 것일까? 

 평등의 발목을 잡고 있는 원인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사회적 가치'를 '배분하는 기준의 차를 잘못 설정했기 때문이다. 과거 신분사회에서 신분이라는 차별이 공정한 게임을 가로막는 원인이었다면 오늘날의 사회는 기득권 세력이 사회적 가치를 편향적으로 가로 챌 수 있도록 배분방식을 정해 놓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잘못된 기준의 설정으로 정직하고 열심히 일한 사람이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계급이 없어졌기 때문에 평등한 사회가 됐다고 할 수 있을까? 사전적 의미로 계급(階級, class)이란 '①지위나 관직 등의 등급, ②세습적인 신분, ③직업에 의한 사회적 위치, ④경제체제에서의 생산수단 소유와 비소유의 차이, ⑤수량의 분류와 정리에 따른 구분' 등을 의미한다.

또한 세계사 사전에는 '계급이란 생산관계에서 자기가 처해 있는 위치에 따라 정해지는 신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즉 생산수단의 소유여부에 따라 신분이 결정되며, 그것이 곧 계급을 의미한다고 정의하고 있다. 계급이란 구성원들의 '사회적인 위치'를 의미한다면 오늘날은 과거의 양반과 노예라는 신분사회가 '상류층, 중류층, 하류층'이라는 새로운 신분사회로 바뀌었을 뿐이다.


계급에 대한 보다 구체척인 이해를 한다면 우리사회의 모순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신분의 차를 일컫는 계급이란 ①고대사회의 경우 자유민과 노예의 차이, ②봉건사회에서의 영주와 농노(지주와 머슴-職人)의 차이, ③자본주의 사회의 경우 자본가와 노동자의 차이다. 구성원들을 상위등급과 하위등급으로 구분해 놓은 것이 곧 계급이라는 마술이다.



현대사회에서는 계급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더욱 세분화되고 복잡해졌다고 표현해야 옳다. 직장에서 사장은 회사 밖에 나가서도 사장이다. 다시 말하면 사회적 지위가 곧 그 사람의 인품이 되는 사회를 두고 '평등사회'가 실현되었다거나 계급사회가 없어졌다고 말하는 것은 언술적인 기만에 불과하다.

'공직사회는 물론 일반기업체에서까지 상하가 있고, 그 사람의 가치를 가늠하는 급수가 있다. 이것이 전형적인 계급에 속한다. 박사나 대학교수와 평교사는 강사료는 물론 출장비나 숙박비까지 차등화해 놓고 있다. 강사료를 책정할 때는 전문지식과 능력, 경험 등을 감안해 우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에 따라 차등화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학에서 공정한 가격이란 완전시장에서나 가능하다고 한다. 완전경쟁시장이란 '모든 공급자가 동질의 상품을 공급하고, 모든 정보가 공유된 경우에(수요자에게든 공급자에게든 또 정보비용이 없다고 가정) 일물일가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공정한 가격이란 시장가격에 따라 공급과 수요가 정해지는 것이며 완전경쟁시장일 때 이러한 가격이 가능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민주주의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와 평등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경제에서 완전경쟁시장의 원칙과 같은 공정한 전제가 보장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정경유착과 탈세가 공공연하게 묵인되는 사회. 그래서 그러한 부정과 부패가 능력으로 인정받는 사회에서는 정의사회니 평등사회니 하는 말은 민중을 속이는 새까만 거짓말이다.
                                                                                                  
교육이라는 이데올로기와 언론의 왜곡보도가 이데올로기가 된 사회에서는 이데올로기와 상업주의에 마취된 민초들만이 피해자가 된다. 기득권자가 이데올로기로 조정하는 사회에서 계급사회란 기득권자들을  위한 사회다.  노예가 노예주(奴隸主)인 양반의 편이었듯이 피해자가 가해자의 편을 드는 현실에서는 진정한 자유도 평등도 기대하기 어렵다.

계급적인 관점에서 사회를 이해하지 못하면 사회의 모순이란 보이지 않는다. 불의한 사회에서 순진한 사람은 강자의 하수인이 되거나 비굴한 아첨꾼으로 살 수밖에 없다. 피를 흘리지 않고 쟁취한 자유가 없었듯이 계급이 엄존하는 사회에서 평등사회의 실현은 허구요 기만이다. 양심적인 지식인이 당근을 거부하고 민중을 각성하는 일에 앞장서지 않는 한 86만원과 21억1000의 차이를 극복할 수도 없고 계급사회도 무너질리 없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