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서 시험이란 최고의 선이요, 정의. 시험성적이 그 사람의 인품은 물론 사회적 지위나 삶의 질까지 좌우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에서 시험성적이 좋다는 것은 공부를 잘한다는 말로 표현한다. ‘공부만 잘 하면....’ 모든 것이 용서되고 공부를 잘하면 도덕성이나 성품까지도 좋은 사람으로 인식하는 게 우리나라 사람들의 정서다.





시험에 대한 재미있는 연구결과를 EBS가 기획시리즈로 방영해 눈길을 끌고 있다. 그 중에서 특히 눈길이 가는 방송이 서울대 학생의 ‘A+을 받는 비법시험 성적이 곧 실력인가? 라는 방송편이다. 그 중에서 서울대 학생의 ‘A+을 받는 비법을 보면 충격과 함께 분노가 치민다. 서울대학이 어떤 곳인가? 우리나라 학생이라면 누군가 가고 싶어 하는 선망의 대상이요, 로망이다. 심지어 서울대학만 나오면 굶어죽을 일이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연고주의의 뿌리가 아닌가?


“A+을 받는 비법은 어느 정도까지가 아니라 들리는 것은 모두 적는 수준으로 녹음기를 켜두고 녹음을 해둬요. 그래서 나중 수업이 끝났을 때나 시험 기간에 다시 녹음을 들으면서 필기를 정리하는 방식으로... 앵무새처럼... 의문을 가지면 안 돼요.”


그냥 알려주신 거 받아 적고 농담을 어떤 맥락에서 던지셨고 까지 적고 그 다음에 PPT를 외우고 속기했던 것을 다시 요약해서 다시 외우고 교과서를 보고 기출문제를 구해서 풀고... 이게 고등학교 때 하던 건데, 고등학교 때 쪽지 시험 볼 때나 하던 짓인데 대학에 와서도 크게 다른 게 없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더 듣고 앉아 있으려니 짜증이 나고 분노가 치밀어 올라 욕이 다 나왔다. ‘인터뷰를 하던 학생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자 남들이 하는대로 따라하니 최고의 성적을 받게 됐다는 대목에 가서는 그만 실소를 하고 말았다. 최고의 두뇌를 가진 우수한 학생을 뽑아 어떻게 이런 교육을 하고 있다니... 수능준비를 하는 고등학생들이나 하는 문제풀이 학습이나 다를 게 뭔가? 이런 짓(?)을 하고 있는 대학 교수를 보면 저 사람들이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인들을 길러내는 학자가 맞는지 의심이 간다.


또 하나... ‘시험 성적이 곧 실력인가를 놓고 인도, 중국, 프랑스, 독일의 시험 모습을 현장을 취재한 PD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웃음과 함께 허탈감을 느끼게 한다.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와 수능과 비슷한 중국의 가오카오는 학부모들이 학생들의 시험을 돕기 위해 학교 주변에 이사를 하는 극성을 연출하기도 한다. EBS교육기획 시험을 제작한 이미솔 PD는 중국과 유럽의 시험을 촬영하며 처음에는 시험이 단순한 인재를 뽑아내는 도구라고 생각했는데,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 보니까 시험은 사회제도, 사회 분위기와 완전히 맞물려있는 하나의 문화였다고 진술했다.





시험이라는 문화는 독일이나 프랑스의 경우 달라도 너무 다르다. 대한민국이나 인도, 중국과 같은 나라는 시험이 곧 한 개인의 사회적 계층이동의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프랑스의 바칼로레아새로이 권력을 주거나 무언가를 결정짓지 않는다는데 놀란다. 프랑스의 학생들은 시험이라고 해서 특별히 일상이 바뀌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시험을 통해 한 번 더 생각을 정리할 기회를 얻는 정도로 여긴다고 한다.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2015년 철학 시험 문제를 보여주면서 출제 문제가 우리나라처럼 5지선다형이라는 객관식이 아니라 "살아있는 모든 존재를 존중하는 것이 도덕적 의무인가?", "나는 내 과거로부터 만들어지는가?"와 같은 출제문제에 충격을 받는다.


시험이란 무엇인가? 시험 성적이 곧 수험생의 실력이요, 인품의 척도일까? 아니면 없어지면 안 되는 필요악일까? 평가의 결과가 측정한 가치를 나타내지 못한다면 그런 시험이란 존재해야할 이유가 없다. 그런 평가로 사람의 인품은 물론 사회경제적인 지위까지를 결정하고 계층이동의 수단이 된다면 이는 인간이 저지르고 있는 잔인한 폭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평가란 수험생을 포함한 학부모 그리고 사회지성이 정의를 깨뜨리는 비겁한 묵인에 동참하는 폭거다.


모든 합의는 정의로운가? 우리는 역사에서 강자의 논리가 정당성을 얻고 약자들을 통제하고 지배하는 수단으로 이용됐던 모습을 종종 본다. 그런 비합리적인 모순이 정보화사회, 민주주의 사회에서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는 현실에 우리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의 가치를 서열화하는 평가, 그런 평가가 우리나라 최고의 지성인을 양성하는 대학에서 받아쓰기 수준으로 전락한 현실을 당연시해야 하는가? 학생들을 서열화시키는 수준 이하의 평가를 언제까지 강건너 불구경하듯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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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오늘도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학생들을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가족들의 아픔에 함께 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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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정치2012.01.06 06:30


                              <이미지 출처 : 다음 이미지 검색에서>

 

A 학생의 점심 메뉴 :「빵 1개, 단무지 2점, 게맛살 4조각, 메추리알 5개. 튀김 2개...」

 

B 학생의 점심 메뉴 : 「캐비어, 게살 스프, 연어 구이, 등심 스테이크, 시저 샐러드, 생과일 주스, 케이크...」

 
'방학 중 사교육비가 채 5만원이 안 되는 아이와 1000만원을 호가하는 '풀 코스 교육'을 받는 아이의 교육 양과 질의 차이는, 두 아이가 먹는 이 한 끼 점심 메뉴가 그대로 말해 준다. 사교육비 비율 '1000 : 5', 때로는 '1000 : 0' 인 대한민국의 방학'

오죽하면 서울대 김대일교수는 ‘대한민국에서 빈곤한 이들이 끔찍한 가난의 늪에서 벗어날 확률이 고작 6% 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했을까? 

지난 2002년 토리노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경기에서 국민들이 안톤 오노의 손을 들어준 심판에게 분노 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규칙이 무너진 경기였기 때문이다. 규칙이 무너진 경기. 그건 경기로서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쇼트트랙경기뿐만 아니라 사회도 마찬가지다. 규칙(법과 도덕...)이 무너진 사회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계층상승의 통로가 되는 교육이 '1000 : 5', 또는 '1000 : 0'으로 불공평하게 기회가 주어졌다면 이는 사회가 지켜야할 최소한의 기준(규칙)이 실종됐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실이 무너졌다’느니 ‘학교는 죽었다‘는 얘길 자주 듣는다. 교실에서 수업을 하기 어렵다는 게 교사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학교가 왜 무너지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학교가해야 할 일을 못하기 때문이다. 학교가 존재해야할 이유가 무엇일까? 학교가 해야 할 본질적 기능은 교육이 ’계층상승의 수단‘이 아니라 ’삶의 지혜를 전수‘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학교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 ’삶의 지혜를 전승하는 곳‘이 아니라 부모의 경제력으로 자녀의 사회적 신분을 대물림하는 절차나 과정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를 학벌사회라고들 한다. 학벌사회란 학업경쟁력이 아닌 학벌(간판,브랜드밸류)에 의한 신분이 세습되는 사회를 말한다. 서열을 본질로 하는 우리사회의 신분이란 수학능력점수에 따라 매겨진다. 이 서열 매김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은 규칙이 무너진 게임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시합 전 승패가 결정 난 이러한 신분사회, 학벌사회를 가능케 한 이유는 무엇일까?

학벌구조가 유지되는 이유


 한국사회가 학벌사회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이 파행적으로 치닫고 있는 이유도 학벌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교육위기의 근본원인도 학벌에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의 패거리 문화가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 각 영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부정과 부패를 가능케 한 사회구조도 학벌에 있고 이를 재생산하는 대학서열화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실붕괴 뿐만 아니다. 기러기 아빠며 천문학적인 사교육시장이며 교육 붕괴 등 오늘날 우리교육이 당면한 모순의 원인이 학벌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정과 부패구조의 원인 제공자요, 사회진보와 교육위기의 주범인 학벌이 유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학벌은 식민지시대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할 것 같다. 민족을 배신한 대가로 얻은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이 해방과 함께 위기를 맞자 이들의 힘이 필요한 불의한 정치권력이 야합하고 여기서 이루어진 세력이 학벌을 통하여 뿌리는 내릴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 그 후 독재 권력이나 군사정권이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고 정당성이 없는 권력의 지지 세력으로 기생하면서 공생관계로 살아남게 된다.

이들의 생존 방식도 재벌로 또는 사학으로 언론권력으로 연결되면서 거대한 세력으로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사회정의가 무너지고 정경유착이니 권언유착이 가능한 사회구조는 이러한 학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법으로 흔히 3S 정책이 동원되기도 한다. 교육이 실종된 사회는 자본에 종속되기도 하지만 독재 권력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했을 때 그로부터 도래할 수 수 있는 피해란 상상을 초월한다. 독재 권력이 존속되기 위해서는 침묵하는 국민이 필요하다. 국민의 비판을 거세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 국정교과서제다.

권력이 특히 정당하지 못한 권력이 국정교과서의 편성권을 장악한다면 그 교과서는 그들의 기준에 의해 선정된 지식이 고급지식이 된다. 특히 입시위주의 사회에서 그들이 선정한 지식만이 가치를 인정받게 되고 이러한 교육의 결과는 그들이 원하는 인간 양성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교육개혁, 안 하나 못하나?


 해방 후 ‘대학별 단독시험’으로 시작한 대학입시제도는 현행 입시제도까지 무려 11차례나 바뀌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연례행사로 치러진 입시제도 바꾸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대부분의 정권들은 명운을 걸고 이뤄내고야 말겠다는 교육개혁을 약속했지만 그 어떤 정권도 그 일을 해 내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교육개혁은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 같다. 참여정부가 교육개혁위원회를 만들고 국민적 기대를 모았지만 정권중반에 접어든 현재까지 교육개혁은 가능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교육개혁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회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우리사회는 진보와 보수가 아니라 ‘개혁과 반개혁’, ‘민중대 반민중’의 대립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정의나 불의가 아니라 기득권세력과 개혁을 추진하는 세력간의 힘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반세기가 넘게 기득권 수호세력들은 정치, 경제, 사회문화 종교 등 각 영역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러한 개혁저항세력들은 이번 사립학교법 반대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부정과 부패비호세력이라는 오명도 불사하면서 이들의 기득권 지키기는 파렴치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상위 2%가 부와 권력을 독점해 98%를 지배하고 세습하는 구조는 입시라는 과정을 거쳐 정당화되기도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방학 중 사교육비가 채 5만원이 안 되는 아이와 1000만원을 호가하는 '풀코스 교육'을 받는 아이가 일류대학을 입학할 가능성을 비교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얘기다.

교육을 살리는 길


학교가 시험 준비기관이 되고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질이 다른 사교육을 받아 기득권을 계승하는 구조는 이렇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세계 10-20위 수준의 학생들을 싹쓸이 해 뽑아놓고 4 년 후에 세계 150위 수준의 학생으로 만들어 배출하는 서울대‘가 있고 승패가 결정 난 경기를 정당시키는 사회제도가 유지되는 한 교육의 기회균등이란 헌법의 명문규정에나 남아 있을 뿐이다.

20대 80이라는 사회양극화현상은 개인의 능력 차라기보다 근대화과정에서 우리사회가 만든 구조적인 모순의 결과다. 사화양극화를 정당화하고 가난이 개인의 책임으로 또는 운명론으로 인식하게 된 풍토 또한 왜곡된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를 보는 시각이나 판단능력이 중시되지 않고 암기한 지식의 양으로 사람의 가치와 서열을 매기는 학교교육이 바뀌지 않는 한 사회양극화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해야할 입장에 있는 정부조차 힘의 논리에 바탕을 둔 신자유주의 경쟁이데올로기를 고수하고 있다.

 사회양극화나 신분의 세습을 혁파하기 위해서는 실종된 교육을 살려야 한다. 학교가 더불어 사는 지혜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출세를 위한 경쟁장이 되는 한 진정한 교육, 인간 교육은 불가능 하다. 겉으로는 사회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또 평준화의 틀을 유지하겠다면서 수월성을 말하고 특목고나 자사고를 확대하고 시장개방과 영어몰입교육까지 불사한다면 교육의 공공성회복은 불가능하다. 철학이 없는 사회는 부패하기 마련이다. 진정한 교육의 기회균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학벌문제와 입시구조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대전시교육청이 9일 초등학교 6학년을 대상으로 교과학습진단평가(일제고사)를 치르려다 문제를 베낀 것이 들통 나자 취소하는 소동을 빚었다. 교과부가 이날 초등학교 3∼5학년 및 중학교 1∼2학년을 대상으로 치르는 일제고사를 6학년까지 치르려다 벌어진 소동이다. 10년 만에 부활된 전국단위 일제고사는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일제고사를 거부한 교사가 해임되고 학부모들은 체험학습을 떠나는 등 반발이 거치지 않고 있다.

 

일제고사를 실시하는 이유는 ‘기초학력 미달학생과 학습부진아를 구제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전교조와 학부모 단체 등 일각에서는 일제고사는 교육 평준화를 해체하고 또 다시 학교·학생들을 ‘무한경쟁 전쟁터’로 몰아가고 있다고 반발하고 있다.


 

<사진자료: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필자가 초등학교시절이었으니까 1950년대쯤 됐을까? 사회시간에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은?, 세계에서 제일 긴 강은...? 이런 걸 지식이라고 달달 외우게 했다. 또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 어쩌고 하면서 외우기 숙제를 내기도 했다. 놀이 문화가 부족한 시대였으니까 재미삼아 했다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지만 암기한 지식의 양으로 개인과 학교, 지역까지 서열화하겠다니 어이가 없다.

 

줄 세우기는 학교뿐만 아니다. 텔레비전을 보면 무엇이든지 서열을 매기지 못해 안달이다. 게임이나 놀이는 대부분이 서열매기기다. 전자사전 하나면 다 해결될 지식을 전교생을 모아놓고 서열을 가리는 ‘골든 벨을 울려라’는 차라리 공동체 의식이라도 심어준다고 치자. 그러나 초등학생들까지 방학까지 반납하고 일요일도 등교시켜 준비하는 문제풀이를 교육이라 할 수 있는가?

 

‘교육으로 가난의 대물림을 끊겠더니... 학교 교육만으로 원하는 대학에 갈 수 있도록 하겠다’더니... 강남의 학생들과 제대로 된 학원 하나 없는 시골 학생을 한 줄로 세울 수 있을까? 기준이나 원칙이 없는 경기는 공정한 게임이 아니다. 능력의 차를 부정하자는 말이 아니다. 효율을 위해 경쟁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해 못할 바 아니다. 지식으로, 돈으로, 권력으로, 미모로, 끝없는 한 줄로 세우겠다는 것은 공정한 경쟁이 아니다. 과정은 생략되고 결과가 선(善)이 되는 풍토에서는 승자만 정당화되는 진흙탕 싸움판이 계속될 뿐이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정치2009.03.18 10:06



「2000년대에 등단한 시인 56명 가운데 1등은 누구일까?」

평론가 34명에게 다섯 명씩 '인기투표'를 시켜 52표를 얻은 김경주라는 분을 1등, 차순위 득표자 000씨는 2등... 000씨는 3등.... 이런 식으로 시인 등기를 매겼다는 기사 내용이다. 경남도민일보 김훤주기자가 쓴 ‘시인 등수 매기는 황당한 문학잡지(2009.3.13)’라는 기사를 보면 어이가 없다. 1등 시인, 2등 시인이라니... 김훤주기자의 주장처럼 합리적 기준도 없이 등수를 매긴 것도 그렇지만 성적을 매길 권리는 도대체 누가 줬다는 말인가?


 

                              <사진 : 2009 교육선언 - 전교조 홈에서>

필자가 초등학교시절이었으니까 1950년대쯤 됐을까? 사회시간에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산은?, 세계에서 제일 긴 강은...? 이런 걸 지식이라고 학교에서 달달 외웠던 기억이 남아 있다. 또 태정태세문단세예성연중인명선.....’ 어쩌고 하면서 조선시대 임금님 이름 외우기 숙제를 내기도 하고 그걸 잘 외우는 학생이 스타가 되기도 했다. 놀이 문화가 부족한 시대였으니까 재미삼아 암기놀이를 했다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지만 요즈음 같은 디지털시대에 수학문제와 답까지 달달 외워 일류대학에 입학한다면 이해가 될까? 일류대학 입학 순서가 ‘암기한 지식의 량’이라니...?

 

암기한 지식의 량으로 서열을 매기는 게 어디 <시인세계>뿐이겠는가? 텔레비전을 보면 무엇이든지 서열을 매기지 못해 안달이다. 게임이라는 게임, 놀이라는 놀이는 대부분이 등수매기기다. 여성의 가슴이나 키 엉덩이 크기로 미인을 가리는 미스 코리아 선발대회며 요즈음 인기 있는 꽃미남 기준은 또 뭔가? 전자사전 하나면 다 해결될 지식을 전교생을 모아놓고 서열을 가리는 ‘골든 벨을 울려라’는 차라리 공동체 의식이라도 심어준다고 치자. 그러나 노래자랑을 비롯해 스타 킹이며 하나같이 서열을 매겨 줄세우기다.

 

1등만이 살아남는 엽기적인 서열매기는 풍토는 텔레비전 문화뿐만 아니다. 가장 교육적이어야 할 학교에서조차 원칙도 기준도 없이 서열매기기가 등장하곤 한다. 민주화의 바람이 한창 불던 지난 1980년대 후반, 학교에서는 두발자유화니 교복자율화 바람이 불어 닥쳤다. 전교조교사와 학생들의 요구가 워낙 드세니까, 이를 못 봐 주던 교장선생님이 내놓은 안이 ‘투표로 결정하자’는 카드였다. ‘다수결’이 민주주의 원칙이라는 걸 배우긴 배웠던 모양이다. 양보와 타협이 불가능할 경우 마지막으로 사용할 수 있는 비장의 무기인 ‘다수결의 원칙’이 이해관계가 아닌 ‘가치관’의 문제의 해결사로 등장했으니...!

 

평짜리 아파트에 사는가? 무슨 차를 타고 다니는가? 어떤 메이커의 옷을 입고 어떤 메이커의 장신구를 차고 다니는가에 따라 사람의 가치를 서열매기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인간의 됨됨이나 인품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 학벌이 사람의 가치를 서열매기는 사회는 사회적 지위는 곧 그 사람의 인격이요, 가치로 둔갑한다. 돈이 얼마나 많은가? 얼마나 고급 아파트에 살고 얼마나 고급 차를 타고 다니는가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요, 인품으로 자리 매겨지는 것이다.

 

이러한 풍토는 학교에도 예외가 아니다. 전국의 초·중등학교와 개인, 지역을 줄세우겠다는 전국단위 일제고사는 또 어떤가? 기저귀를 찬 아이들에게 영어 회화를 가르치는 열성 엄마들이 판치는 강남의 학생들과 경제력도 유명학원도 하나 없는 시골 학생과 점수비교로 한 줄로 서열 매길 수 있을까? 소득격차는 물론 결손가정, 다문화가정이 날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는 농어촌 학생에게 일제고사를 치러 도시학생과 비교시켜 한 줄로 세우는 시험은 공정한 경쟁일까? 프라이급과 미들급을 같은 링 위에 세워 경기를 시킬 수는 없다. 기준이나 원칙이 없는 경기를 어떻게 공정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능력의 차를 부정하자는 말이 아니다. 효율을 위해 경쟁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해 못할 바 아니다. 그러나 오프라인에서 서열을 매기지 못해 안달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성을 잃은 것 같다. 지식으로, 돈으로, 권력으로, 미모로, 끝없는 한 줄 세우기로 무엇을 얻겠다는 것인가? 과정은 생략되고 결과가 선(善)이 되는 풍토에서는 승자만 정당화되는 진흙탕 싸움판이 그치지 않을 뿐이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