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는 그는 누구인가?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을 졸업하여 임용고사에 합격해 발령을 받은 사람을 교사라고 하는가? 교과서나 참고서에 있는 지식을 제자들에게 암기시켜주는 지식전달자인가? 자기가 맡은 제자들을 일류대학에 많이 보내는 능력이 있는 사람을 교사라고 하는가?

 

국민 전체의 평균학력은 높아지는데 교육의 위기는 왜 오는가? '교사는 있어도 스승은 없다'는 언론의 질책을 들으면서 이 시대 교사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할 필요를 절감한다. 가치혼란의 시대, 교사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하는 일은 교원들이 풀어야 할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학교가 교육의 기능을 감당하기 전, 전통사회에서의 교육은 가정의 몫이었다. 농업사회에서 교육은 삶을 이어가는 능력을 터득케 하는 일이었다. 농사를 짓는 기술을 배우고 조상과 가문에 대한 예의와 제사법을 익히는 것이 교육이었다. 남자는 남자로서 여자는 여자로서 역할을 분담하고 그 역할에 충실하는 것, 사회를 계승하도록 유지시켜주는 기능을 가정교육이 담당해 왔다.

 

모든 사회가 그렇듯이 교육을 비롯한 각 영역별 기능이란 그 사회의 성격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사회가 농업사회냐, 산업사회냐, 봉건사회냐, 자본주의 사회냐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산업사회가 시작되면서 전통사회가 담당하던 교육의 기능은 전문기구가 분담하게 된다. 유치원과 학원, 학교 등이 교육을 감당하는 전문기구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산업사회로의 이행이 급속히 진전되면서 가정이 감당해야 하는 기본적인 교육을 가정이 수행하지 못함으로서 여러 가지 사회적인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맞벌이 부부의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가문중심의 유교문화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교육은 계층상승의 수단이요, 부모가 못다 이룬 꿈을 성취시켜주는 한풀이 수단이 되기도 한다. 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도 교육은 계층상승의 기능으로서의 역할이 달라지지 않는다.

 

산업사회에서 음악학원, 미술학원, 피아노 학원 등은 기능을 습득하는 전문 교육을 담당하는 기구다. 기본적인 인간교육은 가정이나 학교가 감당해야 하지만 우리 사회의 특수성에 비추어 학교가 인간교육을 수행하지 못한다. 대신 학교는 개인의 계층상승을 위한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부담까지 떠맡게 된다. 교육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교사자격증이라는 조건을 갖춰야 한다.

 

물론 교사는 피교육자에게 전문적인 지식도 전수해야지 만 삶을 가르쳐야 한다. 기계적인 기능인을 키우는 것만 아니라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안내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더불어 사는 관계와 사랑과 예의를 가르쳐야 한다. 그러나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은 인성보다 기능이 더욱 높이 평가됨으로서 학교교육은 산업사회의 요구를 반영할 수밖에 없다.

 

인성교육이 교육의 본질적인 임무다. 그러나 산업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을 양성하기 위해 '경쟁을 통한 서열 매김' 때문에 그 임무를 이행하기 어렵다. 교육은 지시와 복종이 아닌 사랑과 대화로 이끌어야 한다.

 

사랑과 존경이 없는 지시와 복종, 통제와 단속이라는 수단이 동원되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라 순치다. 교사의 권리만 인정하고 학생의 인권이 무시되는 분위기에서는 진정한 교육이란 불가능하다. 서커스단에서 동물을 순치(馴致)시키는 것과 인간교육이 같을 수 없다.

 

교육의 본질적인 기능을 말하면 '현실론'을 들고 나오는 사람이 있다. 경쟁사회에서 인성보다 경쟁에서 이기는 것, 살아 남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이다. '유능'이 자신의 개인적인 출세나 소득의 차이로 해석한다면 학교에서의 본질적인 교육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경쟁사회에서의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개인의 소질이나 특기을 무시하고 획일적인 지식을 주입하고 특정 가치에 의해 줄 세우기를 하는 무모함에 있다.

 

산업사회의 교육은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건,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건,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건,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국어, 영어, 수학의 점수가 사람의 가치까지를 서열 매기는 무모함을 고집해 왔다. 1등이라는 가치가 정직이라는 가치보다도 순수라는 가치보다도 인격이라는 가치보다도 더 상위의 가치로 평가돼 왔다.

 

 

자본주의에서는 서열매김이라는 가치를 거의 광적인 원칙으로 고수하고 있다. 제도교육의 틀 안에서 학생이 그렇고 여자나 남자, 교사나 일반 직장인이나 가릴 것 없이 그렇게 서열화에 익숙해 졌다.

 

성적이라는 서열, 일류와 이류라는 학교서열, 연봉이 얼마냐에 따른 소득에 의한 서열, 인물이 얼마나 잘생겼는가에 따른 생김새에 따른 서열, 심지어는 가슴둘레와 허리 사이즈로 사람을 표준화 시켜 서열이나 가치를 매기는 미스 코리아, 미스 월드와 같은 행사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렇게 사회가 만든 원칙도 기준도 없는 서열매김에 학교도 예외가 아니었다. 돈이 사람의 가치를 차별화하는 사회에서는 보통사람들이 건강한 이성이나 비판력정신은 오히려 걸거침이 될 뿐이다. 법(실증법)이라는 것, 도덕이라는 것, 교칙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가치가 아니다.

 

교사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표준품'이라는 전형을 만들어 놓고 그런 사람에 가깝도록 만드는 도공(陶工)인가? 머리 모양이나 옷의 모양이 사람의 가치보다 소중할 리 없다. 옛날에는 남자들도 치마를 입었다(두루막, 도포..) 머리모양도 조선시대 500년 동안 남자들이 처녀처럼 길렀다.

 

교문에서 소신을 가지고 가위로 머리를 자르는 사람은 과연 교육자인가? 물론 법이나 교칙을 무시할 수 없다. 이러한 규범은 구성원들이 지켜야 할 의무다. 그러나 구성원들의 합의 없는 법이나 규칙은 원인 무효다. 법도 마찬가지다. 소수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만든 법을 악법이라고 한다. 국가 보안법이 그렇다.

 

교사는 공식을 암기시키는 사람이 아니라 원칙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옳고 그름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깨닫게 하는 사람이다. 스스로의 모범을 보이는 사람이다. 교육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다. 입으로는 도덕을 말하면서 부도덕한 일을 하는 교사는 교사가 아니라 지식 전달자이다.

 

오늘날 학교 현장에 교육을 하는 사람보다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 교사나 성인이 이중성을 가지고 청소년 앞에 섰을 때 그들은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교사는 몸으로 가르쳐야 한다. 마음으로 가르쳐야 한다. 입으로 가르치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 이미지 출처 : 다음 검색에서...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점수에만 열을 올리는 애들을 가르치느라 '진정한 교육'이라는 것은 할 수 없는 '무너진 교실'이라 교사는 허탈하다 하십니까?

 

그렇다면 그 점수조차 아무런 관심이 없는 아이들이 그득한 교실은 어찌해야 할까요?

 

지식이든 삶의 지혜이든 배울 생각은 전혀 없고, 오로지 놀 생각만 있는 아이들. 삶의 지혜나 도리 같은 것을 이야기하면 비웃기 바쁘고, 하다못해 교과지식 하나라도 가르치려 하면 이런 거 왜 배우냐며 빈정거리는 애들을 앞에 놓고 있노라면 '진정한 교육'을 운운하는 것 자체가 사치입니다.

 

점수에 목숨 걸고 점수 때문에라도 하나라도 더 들으려 집중하는 애들을 가르쳐봤으면 좋겠습니다.

 

며칠 전 제 블로그에 12년 전에 오마이뉴스에 썼던 ‘무너지는 교실, 교사는 허탈하다’는 글을 오려 오늘날 교육과 무엇이 달라졌느냐고 했더니 ‘어느 교사’라는 네티즌의 쓴 댓글이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점수 때문이라도 좋으니 공부하고 싶은 아이 한 번 가르치는 게 소원이라 했을까? 학교가 이 지경이 된 게 누구의 죄일까? 교사, 학생, 학부모, 교장을 비롯한 교육관료 정치인... 들 중 무너진 교육의 책임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누굴까?

 

교육을 살린다고 난리다. 너도 나도 ‘내가 적임자’라며... 내가 대통령이 되면 교육을 살릴 수 있다고 화려한 공약을 내놓고 있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무너진 교육도 학교폭력문제도 공교육정상화도 문제없다며 교육으로 가난의 대물림을 끊고 학부모들의 사교육비 부담을 없애겠다고 기염(氣焰)을 토하고 있다. 그런데 뭐가 좀 이상하다. 이런 얘기는 선거철만 되면 자주 듣던 얘기가 아닌가?

 

 

선거철만 되면 화려하게 등장했다가 선거가 끝나면 내가 언제 그런 말 했느냐는 듯 시치미를 떼고 모르쇠다. 그런데 정말 이해 못할 일은 그런 약속을 했던 사람이 소속된 정당 사람이 5년 전에 했던 말을 똑 같이 되풀이 하고 있다. 할 수 있었으면 임기 안에 하지 못하고 이제 와서 또 할 수 있다고 기고만장일까? 정치인의 거짓말, 양치기 소년 말에 속지 말아야 할 텐데 순진한 유권자들은 그런 말에 또 귀가 솔깃해진다.

 

입으로 못하는 게 없는 사람들! 교실에 가서 수업을 하는 모습을 한번이라도 본 일이 있을까? 유명인사가 출두(?)한다고 예고하지도 말고 방송국 카메라 대동해 준비된 쇼(?)를 보러 가지 말고, 소문 없이 찾아가서 한 시간만 이 허탈한 교실을 보고 난 후에도 그런 소리를 할 수 있을까?

 

상황 1. 씨×! 학교 안 다니면 그만 아닙니까?

 

책가방도 버려 둔 채 달아나는 학생을 따라 가 보지만 붙잡아 교실에 앉혀놔도 마음이 떠난 아이를 잡아 둘 재간이 없다. 20평도 안 되는 교실에 앉아 있는 학생과 교사와의 거리는 끝간데 없이 멀어만 진다.

 

하루가 다르게 달라지는 학생들의 수업태도를 보면서 "힘들어서 못해 먹겠다"는 푸념을 하는 교사들이 늘어간다.... 최근 서울의 ㅁ중 김모교사(31·여)는 지난달 말 5교시 수업시간에 잠자는 학생을 깨웠다가 봉변을 당했다.

 

여러 번 채근한 뒤에야 고개를 겨우 든 남학생은 한동안 대꾸도 하지 않다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씨…』하고 내뱉더니 책상을 차고 일어났다. 한참 꾸지람을 들은 학생은 『교실 뒤쪽에 서 있으라』는 말에 벽과 문을 잇달아 발로 차면서 수업을 방해했다.

 

김교사는 『체벌을 하려 해도 중학생이면 덩치가 클 대로 큰데다 「왜 그래요」라며 달려들 것만 같아 그만두었다』고 털어놨다.(2000년 6월 경남도민일보에 필자가 썼던 "무너지는 교실, 좌절하는 교사!" 중 일부)

 

상황 2. 수업 시작 벨이 울리면 교사는 교과서와 수업 재료를 챙겨들고 교실로 향한다.

 

하지만 골마루엔 아직도 장난치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이 넘친다. 벨이 울렸는데도 교실에 들어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장난 삼매경'에 빠지면 그럴 수도 있겠지 하며 교실 문을 연다.

 

책상 위를 뛰어 다니는 아이, 사물함 위에 드러누워 자는 아이, 교탁 주변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숨바꼭질 하는 아이. 참으로 다양한 아이들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창문이 꽁꽁 닫혀 먼지가 자욱한 가운데 선풍기와 에어컨으로 교실 열기를 식혀낸다.(2012년 7월 12일 경남도민일보 '사천 중학교 '멘붕 스쿨' 어떡하지...?'에서)

 

위의 사례를 보면 12년 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그 때는 실업계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일어나던 일이 지금은 중학교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게 다르다면 다를까? 학교는 멘붕상태다. 아니 멘붕학교다. 2009년 2963명이던 명예퇴직교사가 2010년에는 3660명, 2011년 4217명으로 계속 늘어 올해에는 지난 2월 신청자만 3517명에 이른다.

 

교사가 아이들을 감당 못해 떠나는 학교. 어쩌다 학교가 이 지경이 됐을까? 학교를 살리겠다던 정치인들은 그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으며 교육을 살리겠다고 기고만장하던 대통령, 교육감들은 다 어디 갔을까? 이 땅의 정치인들, 교육학자들, 교사, 학부모 교육관료들...

 

교육을 살리겠다는 사람들, ‘시험점수 때문이라도 좋으니 공부하고 싶어 하는 학생들을 한 번 가르쳐 볼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는 이 현장 교사의 처절한 목소리는 왜 들리지 않을까?

 

- 이미지 출처 : 다음 검색에서....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분류없음2011.04.07 00:15


'학교의 우등생이 사회의 열등생이다!'

많이 듣던 얘기지요? 왜 그럴까요?
저는 그 이유가 학교에서는 원칙만 가리치고 현실을 가르쳐 주지 않는... 그래서 그 원칙을 쓸 수 있는 능력(철학)이 없는 사람을 만들어 놓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말이 안통하는 노인을 꼰대라고 하지요?
학교에서 원칙만 배운 범생이(?)는 사회에서 늘푼수가 없는 꼰대가 되거든요. 
제가 이글을 통해 전하고 싶은 메세지는 '어떻게 학생들에게 현실을 볼 수 있는 안목을 갖도록 하는냐?'
하는 의미를 전하고 싶었습니다만 역부족으로 몇가지 예만 들겠습니다.
이런사례를 가정이나 친구들과 얘기를 나누어 가면 자기의 세계관을 만들어 나갈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기대를 해봅니다.

-사람과 자연-

 TV를 보다 보면 맛있는 음식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매기를 잡아 요리하는 장면도 나온다. 펄쩍펄쩍 뛰는 매기를 뜨거운 물에 집어넣는 장면과 뜨거운 물에 익어 허물어진 멋어진 매기의 모양을 그대로 찍어 방영하면서 설명하기도 한다.

TV를 보면 가끔 담배가 인체에 해롭다는 증명을 하기 위해 쥐에게 주사는 주어 죽어 가는 실험을 하는 장면이 그대로 방영되기도 한다. 사람 중심의 문화가 힘없는 생명체는 잔인하게 죽어도 좋은 존재로 비춰주고 있는 것이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하찮은 미물도 자연에서 더불어 살아갈 권리가 있는 것이다. 자연에는 사람만 살아 갈 수 없다. 자연이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곳이다. 힘이 있다고 마구잡이로 자연을 훼손하거나 힘없는 미물을 잔인하게 죽일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는 것이다. 실험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아이들이 그런 잔인한 모습을 그대로 볼 수 있도록 하는 상업주의가 밉다는 뜻이다. 

 눈을 크게 뜨고 하늘을 보자, 저것은 산이고 이것은 구름이다. 이것은 나무고 저건 집이다. 눈이라는 감각기관으로  인지되는 것은 가시적인 자연이다. 가시적인 것은 정상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인식할 수 있다. 사람이 인식할 수 있는 자연은 고정된 것이 아니고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서로 연관성과 법칙성을 가지고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인간중심의 문화 속에 살다보니 자연의 법칙이나 섭리에 대해서는 무심할 때가 많다, 생태계의 원리는 사람 중심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더불어 공존하도록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자연 속에 존재하는 어떤 개체도 인간의 허욕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없다. 다만 자연의 섭리에 따라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다. 혼자서는 살아 갈 수 없는 존재라는 뜻이다. 나에게 이익 되는 것, 좋은 것만 골라서 하면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나의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기 위해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불이익을 줘서는 안 된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다. 자연 속의 존재해 있는 각 개체도 존재의 의미와 가치가 각각 다르듯 사람도 개인의 능력이나 역할이란 같을 수 없다.

사람이 사는 공동체에서는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구성원의 합의를 전제로 한다. 특정한 기준에 의해 높은 가치를 매기는... 서열화 한다는 것은  일방의 이익을 위해 타방이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을 잘 생긴 순, 키가 큰 순으로 한 줄로 세우고, 노래를 잘하는 사람, 영어를 잘하는 사람 순으로 한 줄로 세운다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사회에는 정치를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교육을 하는 사람 생산을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건축을 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쓰레기를 치우는 사람도 있어야 한다. 어떤 일이 더 '훌륭하다'든지 '가치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판단의 기준-

 자신을 위해 열심히 사는 사람을 일컬어 훌륭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웃이나 민족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한 사람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공동체 사회 속에서는 각 개인이 역할을 분담하면서 살아간다. 물론 어떤 일이 더 소중하고 덜 소중한 것이 있을 수 있지만 소중하지 못한 일이라고 해서 없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성이란 사용가치로 따져 효용성의 유무에 따라 가치가 매겨진다. 효용성이란 희소성과 무관하지 않다. 자연은 유한한데 인간의 욕망이 무한하기 때문에 희소성문제가 대두하게 된다. 모든 사람들이 서로 갖고 싶어하는 것 즉 희소성으로 인해 가치가 매겨지는 것은 공평하다. 예를 들면 금이나 석유는 돌이나 물보다 희소성으로 가치 차이가 난다. 그러나 이렇게 자연의 희소성이 아니라 인간의 욕망의 기준에 의한 희소성으로 사람들이 가치를 매긴다.

-서열을 매긴다는 것-

 매화가 세상에서 가장 예쁜 꽃, 다음이 장미, 그 다음이 백합... 이런 식으로 서열을 매긴다는 것은 주관적인 판단이다. 판검사는 가장 좋은 직업, 그 다음은 의사, 약사... 이런 식으로 서열을 매긴다는 것도 어떤 기준에 의해 가치 지워진 것이다. 농사를 짓는 일이 장사를 하는 일보다 덜 중요하다는 것은 기준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오늘날 한국의 농민들은 열심히 일해도 가구당 평균부채가 수천만원에 이르고 있다. 의사들 중에는 연봉이 몇억원 이상이 되는 사람도 있다. 농민들은 일할수록 가난해 지는 이유는 농민이 하는 일이 가치 없는 일이기 때문일까? 모든 사람이 의사나 판검사가 되기 위해 몸부림이다. 이런 사회에서는 의사나 판검사가 못된 사람은 주눅들고 열등의식에 젖어 살수밖에 없다.

-좋은 옷 입은 사람이 훌륭한 사람?-

몇년 참 이상한 모습이 TV를 통해 보도됐던 일이 있다. TV화면에 비친 국회의원들이 이성을 잃고 명패를 던지고 고함을 지르는 장면이 그대로 보도 됐다. 이유인 즉 유시민이라는 사람이 보선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됐는데 넥타이를 매지 않고 등원해 국회의원의 품위를 떨어뜨렸기 때문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물론 국민의 대표로 일하는 분이 품위 있는 행동거지란 지켜져야 한다.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고 예의바른 행동을 해야하고...

그런데 정장(?)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당선된 의원들이 '국회를 모독했다'는 것이다. "야 이 ××야! 국회를 뭘로 알아!" 명패가 날아가고 퇴장하는 소동이 벌어진 것이다. 그런 모습을 TV로 지켜보면서 '저런 국회의원들의 눈에는 농사를 짓기 위해 흙투성이 작업복을 입은 사람이나 잠바차림의 장사꾼은 뭘로 보일까?' 씁쓰레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외모로 사람의 가치는 매기는 것은 잘한 일일까?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