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철학2016.06.14 07:00


전시학습 확인 : '종교란 무엇인가?' 예수님, 부처님, 마호메트 공자, 맹자님 만나보기...


사람이란 무엇일까?

이런 질문을 하면 무슨 낮도깨비 같은 소릴 하느냐고 웃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사람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모른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이란 이성을 가진 동물이니 정신과 물질의 중간존재니 혹은 생각하는 갈대’, ‘사유하는 존재’, ‘언어를 가진 존재’, ‘노동하는 존재’...등 수많은 정의를 내린 바 있지만 속시원하게 '이것이 인간'이라고 속시원하게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이미지 출처 : 손오공 봇>


옛날에 그리스 철학자에게 어떤이가 찾아와 인간이 무엇인지 물어보자 첫날은 "두발로 걷는 동물이다"라고 하자 다음날 닭을 가져오고, 그래서 '두발로 걷고 두 팔이 있는 동물이다' 라고 하니 원숭이를 데려오고, '두발로 걷고 두 팔이 있고 몸에 털이 없는 동물이다'라고 하니 다음날 원숭이 털을 밀어서 가져오고, 그 다음에 한 말이 저것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라고....했다는 얘기가 있다.


그렇다면 사람과 동물의 차이는 무엇일까? 한 때 인간은 학습을 하고 동물은 본능에 따라서 산다고 알았다. 그런데 과학이 발달하면서 사람과 동물은 종류의 차이가 아닌 정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달팽이도 학습을 하고, 피리새는 도구를 사용하며, 까마귀는 도구를 직접 제작한다. 또 돌고래는 언어를 사용고 개들도 의식이 있으며, 오랑우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을 알아보고 침팬지는 전쟁을 하며 고도의 정치를 한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일본원숭이는 자신들의 문화를 후대에 저해주기도 하고 코끼리는 다른 코끼리의 죽음을 애도한다는 것이 밝혀지고 있다.


서양철학에서 인간이 동물과 구분되는 가장 큰 차이는 '이성' 이며, 공자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지은 차이의 첫 시작은 '' 에 있으며, 맹자는 인간과 동물을 구분 짓는 차이점을 다음과 같은 4가지 즉 4단을 들었다.

 

측은지심 - 불쌍히 여기는 마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측은히 여기는 마음.

수오지심 - 부끄러워하는 마음, 의롭지 못한 일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

사양지심 - 남을 공경하고 사양하는 마음.

시비지심 -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아는 마음.

주장하는 사람들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간이 다른 동물과의 차이는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요?


개인적 존재로서의 인간


나는 누구인가? 외모야 거울에 바춰보면 보이지만 나라는 사람은 어떤 것을 좋아하고 어떤 성격의 소유자인가? 이 세상 사람들 중에는 성미기 급한 사람과 느긋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지런한 사람도 있고 게으른 사람도 있다. 상냥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뚝뚝한 사람도 있다.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예사로 약속을 어기는 사람도 있다. 일이 있으면 잠을 못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발등에 불이 떨어져야 미루던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성실한 사람도 있고, 불성실한 사람도 있다. 착한사람, 악한사람, 정의로운 사람, 비겁한 사람, 사교성이 좋은 사람이 있고 무뚝뚝한 사람도 있다. 밝고 명랑한 성격의 소유자도 있고 어둡고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도 있다. 적극적인 사람, 소극적인 사람, 원칙주의자가 있는가하면 좋은 게 좋다는 두리뭉술형도 있다. 내게 이익이 되는 일만 하는 사람이 있고, 내가 손해 보더라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함께 하는 사람도 있다. 불의를 보면 뜨겁게 분노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내 일이 아니면 관심도 없는 사람도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사회적 존재로서의 인간


사람을 일컬어 사회적인 존재라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얘기다. (: 180019일 프랑스의 생세랭이라는 마을에서 발견한 11~12세 소년이야기) 그래서 사회화의 과정을 밟는다. 사회화의 과정은 가정과 학교 그리고 지자체가 함께 해야 하지만 의도적인 학교교육조차 교육다운 교육을 못하고 있다. 사회화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한 사람이 사회적인 존재로서 권리와 의무를 다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선현들이 말하기를 인간은 5식욕(食慾), 물욕(物慾), 수면욕(腄眠慾), 명예욕(名譽慾), 색욕 (色慾)7(), (), (), (), (), (), ()을 가진 존재라고 한다. 개개인을 보면 참 좋은 사람이 많다. 그런데 사회적인 존재로서 개인은 그렇지 못한 사람이 많다. 한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의 살아가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욕구를 어떻게 조절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달라진다. 내가 욕구를 어떻게 절재하는가의 여부에 따라 좋은 사람, 혹은 나쁜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그저 열심히 살아왔다. 죽지 않기 위해, 배부르고 따뜻하게 살기 위해....“ 이런 사람도 어떤 사람은 개인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많은 사람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불우한 이웃과 사회의 모순을 바꾸기 위해 사회변혁운동에 일생을 바친 사람도 있다. 또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나라를 찾기 위해 자신의 한 몸을 던진 사람도 있다. 어떻게 사는게 보람 있는 삶일까? 어떻게 사는게 사람답게 사는 삶일까? 훌륭한 삶, 존경받는 삶이란 어떻게 사는 것일까?


차시 예고 : 나는 누구인가?(자아관)



함께 합시다.


우리헌법읽기국민운동 추진위원이 되어 주십시오. 

https://docs.google.com/forms/d/1EKGFAtCr6Z5z92VrDJHAQlJrUGNSxWuVvnTb4kkEP48/viewform?c=0&w=1 

[손바닥헌법책 선물하기 운동!!!]

"한 권에 500원 후원으로 최고의 선물을 할 수 있어요!!"

==>>동참하러가기

https://docs.google.com/forms/d/1gPNGF5nC9hFzYQvdY8pNqlTirsr6HVteiOoiIsWEx3Y/viewform?c=0&w=1


 ..................................................................


오늘도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학생들을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가족들의 아픔에 함께 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 김용택의 참교육이야기 - 두 번 째 책 '교육의 정상화를 꿈꾸다'를 구매할 수 있는 사이트입니다.


 

'김용택의 참교육이야기-공교육의 정상화를 꿈꾸다'를 구매하실 수 있는 사이트입니다.

 


교보문고 바로가기  , yes24 바로가기  알라딘 바로가기  인터파크 바로가기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13명의 진보교육감당선....!

오늘부터 진보교육감 시대가 열립니다. 박근혜대통령은 전교조가 이념 교육으로 학교 현장을 혼란에 빠트린다고 미워하지만 학부모들은 전교조출신을 비롯한 진보교육감을 선택했습니다. '모든 학생이 행복한 학교'를 만들겠다는 진보교육감 시대. 이제 교육현장이 얼마나 달라질지 설렘과 기대로 벅차있습니다. 무엇이 바뀌고 얼마나 달라질까요? 서울시교육감은 취임식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아직 바다 속에 있는데 화려한 축제로 시작하기에는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이유라고 합니다. 세종시교육감 당선자는 일과가 끝난 오후 5시부터 취임식을 하기로 했다는 소식도 들립니다.


취임식정도로 보수와 진보의 차이를 구별하고 싶지 않습니다. 시장판이 된 학교. 아이들은 문제풀이로 지칠대로 지치고 학부모들은 사교육비 마련을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는 현실이 어떻게 바뀌어 질 수 있을지 교육주체들은 기대의 시선을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등 진보 교육감 당선자 13명은 지난 12일, 서울 광화문 한국언론회관에 모여 “공교육 혁신의 새 시대를 열겠습니다”라는 공동 기자회견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진보교육감당선자들은 ‘모든 아이들을 위한 학교’를 만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들이 한 약속은 △학교폭력, 급식 사고, 학교 내 안전사고 등을 없애 ‘안전한 학교’ △교육복지를 확대한 ‘따뜻한 학교’ △혁신학교의 성과를 확대한 ‘행복한 학교’ △비리를 척결한 ‘깨끗한 학교’ △민주 시민교육을 강화한 ‘민주적인 학교’를 만들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학교 안을 들여다보면 기가 막힙니다. 사회시간에 수능과목 문제풀이를 하는 학생, 수업은 뒷전이고 잠을 자거나 짝꿍과 끊임없이 잡답을 주고받아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 책상 속에 거울을 넣고 얼굴을 다듬고 있는 학생.... 수업을 진행할 수 없어 복도에 세워 놓으면 복도에 나가서도 장난질입니다. 2011년 한국리서치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학생들의 53%가 ‘수업시간에 불행하다고 느낀다.’고 답했으며 ‘수업시간에 한 번도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학생이 무려 42%나 됐습니다.

교사들은 어떨까요? 오늘날 한국의 교사들은 스스로 3D업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쏟아지는 공문폭탄에 수업에 들어가기 겁나는 교실.... 교권이 무너진 교실에 보람이니 긍지란 아예 생각조차 못합니다. 사교육비폭탄에 지칠대로 지치고 학교폭력의 불안에 떨어야 하는 학부모... 교문에는 지킴이까지 세워놓고도 안절부절인 학교에서 수업하는 학생들은 행복할까요?

학교가 가장 먼저 회복해야할 문제는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교장, 교감, 수석교사, 부장교사. 평고사, 기간제교사...로 서열회된 학교. 학생은 선생이 되지 못한 미완성의 존재로 계급화된 현실에서 과연 민주주의 교육이 가능하겠습니까? 교사들의 회의체계는 있지만 교사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못하고 법제화되지 못한 구성원들은 지시와 복종이라는 전근대적인 모습이 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학부모들은 있어도 법적인 기구가 아닌 임의기구로 학교장의 들러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학생을 하나의 인격체로 보지 못하는 인권의 실종 또한 하루 빨리 바꿔야할 학교가 당면한 과제입니다. 정부가 전쟁을 선포한 학교폭력도 따지고 보면 개인의 폭력성이라기보다 '남을 배려하는 마음, 공감 능력, 인권감수성, 공동체 의식.... 가정교육의 부재, 미디어의 폭력성, 지식중심의 입시체제, 인성교육의 상실....' 등이 만들어 놓은 결과가 아닐까요?

산적한 과제가 어디 한 둘이겠습니까 만은 무엇보다도 시급한 문제는 공공성의 회복입니다. 학생들은 순치의 대상, 통제의 대상이 아닙니다. 민주시민으로서 행복을 누리고 살아가야할 당당한 권리의 주체입니다. 외모나 성, 경제력 성적 혹은 장애를 가졌다는 이유로 차별받아서는 안 되는 존재입니다. 교육이 상품이 되고 승부가 결정난 게임을 공정하다는 억지논리로 차별하는 교육은 이제 그쳐야 합니다.

상품이 된 교육, 이기적인 인간을 길러내는 교육을 사회적인 존재로 키우는 공공성 회복으로 바꿔내야 합니다. 그것이 학교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한 과제요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기회균등을 실현하는 길입니다. 산적한 과제들을 성급하게 바꾸려다보면 시행착오도 만나고 보수세력들의 반발 또한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난관이 닥치더라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교육자의 길, 그것이 진보교육감에게 안겨 진 과제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정치2012.01.06 06:30


                              <이미지 출처 : 다음 이미지 검색에서>

 

A 학생의 점심 메뉴 :「빵 1개, 단무지 2점, 게맛살 4조각, 메추리알 5개. 튀김 2개...」

 

B 학생의 점심 메뉴 : 「캐비어, 게살 스프, 연어 구이, 등심 스테이크, 시저 샐러드, 생과일 주스, 케이크...」

 
'방학 중 사교육비가 채 5만원이 안 되는 아이와 1000만원을 호가하는 '풀 코스 교육'을 받는 아이의 교육 양과 질의 차이는, 두 아이가 먹는 이 한 끼 점심 메뉴가 그대로 말해 준다. 사교육비 비율 '1000 : 5', 때로는 '1000 : 0' 인 대한민국의 방학'

오죽하면 서울대 김대일교수는 ‘대한민국에서 빈곤한 이들이 끔찍한 가난의 늪에서 벗어날 확률이 고작 6% 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했을까? 

지난 2002년 토리노동계올림픽 쇼트트랙 경기에서 국민들이 안톤 오노의 손을 들어준 심판에게 분노 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마디로 말하면 규칙이 무너진 경기였기 때문이다. 규칙이 무너진 경기. 그건 경기로서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쇼트트랙경기뿐만 아니라 사회도 마찬가지다. 규칙(법과 도덕...)이 무너진 사회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계층상승의 통로가 되는 교육이 '1000 : 5', 또는 '1000 : 0'으로 불공평하게 기회가 주어졌다면 이는 사회가 지켜야할 최소한의 기준(규칙)이 실종됐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실이 무너졌다’느니 ‘학교는 죽었다‘는 얘길 자주 듣는다. 교실에서 수업을 하기 어렵다는 게 교사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학교가 왜 무너지는가? 그것은 한마디로 학교가해야 할 일을 못하기 때문이다. 학교가 존재해야할 이유가 무엇일까? 학교가 해야 할 본질적 기능은 교육이 ’계층상승의 수단‘이 아니라 ’삶의 지혜를 전수‘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학교는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서 ’삶의 지혜를 전승하는 곳‘이 아니라 부모의 경제력으로 자녀의 사회적 신분을 대물림하는 절차나 과정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사회를 학벌사회라고들 한다. 학벌사회란 학업경쟁력이 아닌 학벌(간판,브랜드밸류)에 의한 신분이 세습되는 사회를 말한다. 서열을 본질로 하는 우리사회의 신분이란 수학능력점수에 따라 매겨진다. 이 서열 매김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은 규칙이 무너진 게임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시합 전 승패가 결정 난 이러한 신분사회, 학벌사회를 가능케 한 이유는 무엇일까?

학벌구조가 유지되는 이유


 한국사회가 학벌사회라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이 파행적으로 치닫고 있는 이유도 학벌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오늘날 교육위기의 근본원인도 학벌에 있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의 패거리 문화가 정치, 경제, 사회문화 등 각 영역에서 뿌리를 내리고 부정과 부패를 가능케 한 사회구조도 학벌에 있고 이를 재생산하는 대학서열화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실붕괴 뿐만 아니다. 기러기 아빠며 천문학적인 사교육시장이며 교육 붕괴 등 오늘날 우리교육이 당면한 모순의 원인이 학벌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정과 부패구조의 원인 제공자요, 사회진보와 교육위기의 주범인 학벌이 유지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학벌은 식민지시대에서 그 뿌리를 찾아야 할 것 같다. 민족을 배신한 대가로 얻은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이 해방과 함께 위기를 맞자 이들의 힘이 필요한 불의한 정치권력이 야합하고 여기서 이루어진 세력이 학벌을 통하여 뿌리는 내릴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다. 그 후 독재 권력이나 군사정권이 이들의 도움이 필요했고 정당성이 없는 권력의 지지 세력으로 기생하면서 공생관계로 살아남게 된다.

이들의 생존 방식도 재벌로 또는 사학으로 언론권력으로 연결되면서 거대한 세력으로 뿌리내리게 된 것이다. 사회정의가 무너지고 정경유착이니 권언유착이 가능한 사회구조는 이러한 학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독재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법으로 흔히 3S 정책이 동원되기도 한다. 교육이 실종된 사회는 자본에 종속되기도 하지만 독재 권력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했을 때 그로부터 도래할 수 수 있는 피해란 상상을 초월한다. 독재 권력이 존속되기 위해서는 침묵하는 국민이 필요하다. 국민의 비판을 거세하기 위해 필요했던 것이 국정교과서제다.

권력이 특히 정당하지 못한 권력이 국정교과서의 편성권을 장악한다면 그 교과서는 그들의 기준에 의해 선정된 지식이 고급지식이 된다. 특히 입시위주의 사회에서 그들이 선정한 지식만이 가치를 인정받게 되고 이러한 교육의 결과는 그들이 원하는 인간 양성을 가능케 했던 것이다.

 

교육개혁, 안 하나 못하나?


 해방 후 ‘대학별 단독시험’으로 시작한 대학입시제도는 현행 입시제도까지 무려 11차례나 바뀌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연례행사로 치러진 입시제도 바꾸기는 무엇을 말하는가? 대부분의 정권들은 명운을 걸고 이뤄내고야 말겠다는 교육개혁을 약속했지만 그 어떤 정권도 그 일을 해 내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교육개혁은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라고 말해야 옳을 것 같다. 참여정부가 교육개혁위원회를 만들고 국민적 기대를 모았지만 정권중반에 접어든 현재까지 교육개혁은 가능성의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교육개혁이 성공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회구조와 무관하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우리사회는 진보와 보수가 아니라 ‘개혁과 반개혁’, ‘민중대 반민중’의 대립구조를 유지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정의나 불의가 아니라 기득권세력과 개혁을 추진하는 세력간의 힘의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반세기가 넘게 기득권 수호세력들은 정치, 경제, 사회문화 종교 등 각 영역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러한 개혁저항세력들은 이번 사립학교법 반대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부정과 부패비호세력이라는 오명도 불사하면서 이들의 기득권 지키기는 파렴치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상위 2%가 부와 권력을 독점해 98%를 지배하고 세습하는 구조는 입시라는 과정을 거쳐 정당화되기도 한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방학 중 사교육비가 채 5만원이 안 되는 아이와 1000만원을 호가하는 '풀코스 교육'을 받는 아이가 일류대학을 입학할 가능성을 비교한다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되는 얘기다.

교육을 살리는 길


학교가 시험 준비기관이 되고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질이 다른 사교육을 받아 기득권을 계승하는 구조는 이렇게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것이다. ’세계 10-20위 수준의 학생들을 싹쓸이 해 뽑아놓고 4 년 후에 세계 150위 수준의 학생으로 만들어 배출하는 서울대‘가 있고 승패가 결정 난 경기를 정당시키는 사회제도가 유지되는 한 교육의 기회균등이란 헌법의 명문규정에나 남아 있을 뿐이다.

20대 80이라는 사회양극화현상은 개인의 능력 차라기보다 근대화과정에서 우리사회가 만든 구조적인 모순의 결과다. 사화양극화를 정당화하고 가난이 개인의 책임으로 또는 운명론으로 인식하게 된 풍토 또한 왜곡된 교육과 무관하지 않다.

사회를 보는 시각이나 판단능력이 중시되지 않고 암기한 지식의 양으로 사람의 가치와 서열을 매기는 학교교육이 바뀌지 않는 한 사회양극화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해야할 입장에 있는 정부조차 힘의 논리에 바탕을 둔 신자유주의 경쟁이데올로기를 고수하고 있다.

 사회양극화나 신분의 세습을 혁파하기 위해서는 실종된 교육을 살려야 한다. 학교가 더불어 사는 지혜를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출세를 위한 경쟁장이 되는 한 진정한 교육, 인간 교육은 불가능 하다. 겉으로는 사회양극화 문제를 해결하겠다면서 또 평준화의 틀을 유지하겠다면서 수월성을 말하고 특목고나 자사고를 확대하고 시장개방과 영어몰입교육까지 불사한다면 교육의 공공성회복은 불가능하다. 철학이 없는 사회는 부패하기 마련이다. 진정한 교육의 기회균등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학벌문제와 입시구조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정치2011.07.15 19:53



 ‘교육이란 무엇인가?’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쯤 이런 고민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보면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일수록 교육이 지향하는 목표치에 도달한 사람인가에 대한 의문을 떨쳐 버리기 어렵다.

생뚱맞게 왜 이런 생각을 하는 이유는 교육을 많이 받은 지식인, 정치인들의 도덕적 해이가 한계를 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정치인들뿐만 아니다,. 언론인이며 학자며 심지어 종교인들의 모습에서 과연 그들이 교육이 지향하는 ‘전인교육’을 받은 양식 있는 사람들인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잘못된 교육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는 우선 이 원론적인 질문에 대해 정직한 답변이 필요하다. 교육의 목적에 대해 수많은 교육전문가들이 교육의 목적을 말하고 방법을 말했다. 그러나 가정교육을 당당하고 있는 부모에서부터 학교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들에 이르기까지 이 원론적인 질문에 맞게 교육을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진지하게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교육이란 무엇인가?' 거창하게 유명한 교육학자의 이론을 빌릴 필요도 없이 한마디로 교육이란 ’사람을 사람답게 키우는 일‘이다.

사람다운 사람이란 동물처럼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 존재가 아니라 ‘이성에 따라 사고하고 행동하는 존재’를 말한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부모나 이웃을 생각하지 않고 감정대로 행동하는 존재를 키우는 것은 교육이 아니다. 해야 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분별할 줄 아는 사람으로 키우는 일, 그것이 교육이 지향하는 목표다. 다시 말하면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게 하는 일과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분별할 줄 아는 존재’로 키우는 것이 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교육이 감당할 일 즉 교육의 본질적 기능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지식과 기술의 습득’보다 ‘사람으로서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분별’하는 데 더 중점을 둬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육 즉 가정에서나 교육전문기관은 후자에 무게 중심을 두고 있다.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을 아무리 많이 터득한 사람이라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것을 분별할 줄 아는 능력 곧 지혜가 없다면 이는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동물과 다를 게 없다. 아니 오히려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존재보다 더 사악하고 이기적인 존재로 행동할 수도 있는 것이다.

교육은 지혜를 가꾸는 일이다. 지혜란 ‘지식을 활용하는 능력이고 사물의 이치와 가치, 옳고 그름과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말한다. 일찍이 유대인들은 '한 마리의 생선을 잡아주기 보다는 생선을 잡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지혜로운 사람으로 키우는 데 애썼다. 석가모니는 사람이 지혜를 얻기 위한 조건으로 ‘풍부한 정서와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모습, 감정과 욕망을 조절할 수 있도록 하는 능력, 그리고 목표를 갖고 꾸준히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파했다.

교육이란 지식과 기술의 습득보다 지혜 즉 ‘지식을 활용하는 능력과 사물의 이치와 가치, 옳고 그름과 선악을 분별하는 능력’을 기르는 지혜(철학)을 가르치는 일이다. 지식은 많아도 그 지식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를 알지 못하는 사람을 길러 놓는다는 것은 어린아이에게 칼이나 총을 맡겨 놓는 것과 진배 없다. 결국 그런 지식은 이기적인 무기로 씌어질 뿐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존재로서 키우는 교육의 목적을 달성할 수는 없는 것이다.  사회적인 존재로 인간을 키워야 하는 학교가 개인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경쟁이 되어 목적 전치의 이전투구장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교육의 위기는 학교가 해야할 기능을 제대로 못함으로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무너진 교육을 살리기 위해서는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육자들이 교육에 대한 근본적 회의와 반성이 필요하다. 진정한 교육자라면 ‘내가 현재 가르치고 있는 제자가 개인적으로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자아존중감과 사회 구성원으로서 건강하게 살아 갈 수 있는 공동체의식을 가진 구성원으로서 부족함이 없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많은 지식을 주입시켜 ‘승자가 선’이 되는 경쟁에서 살아나는 게 교육이라고 착각하는 교육자가 있는 한 무너진 교육을 살리기 어려울 것이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산업화가 되기 전, 농춘 초가집 담벼락아래서는 또래집단들이 모여 ‘살림살이’(모방놀이)를 하는 정겨운 모습들을 흔히 보곤 했다. “너는 엄마해라! 나는 아빠 할께! 자기 어머니에게 들은 잔소리를 아빠역할을 맡은 또래에게 훌륭하게 수행하는 아이, 아빠가 하던 반응이나 행동을 그대로 엄마역할을 하는 아이에게 하면서 훌륭한 아빠가 될 예비아빠로서 부족함이 없음을 과시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이들은 이렇게 사회적 지위가 주어지면 그 지위에 걸맞는 ‘역할’을 수행하면서 사회화 과정을 밟는다. 또래집단은 이러한 놀이를 통해 인간으로서 예기사회화 과정을 밟아 자아개념이 형성되고 사회적 존재로 성숙해 가는 것이다.


이 또래집단에서의 사회화과정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산아조절이 안 되던 과거에는 가족이 훌륭한 교육의 장이요 부모형제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교사였다. 형은 동생을 돌보면서 당당하게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고 동생에게 해야 할 일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기도 했다.

이러한 과정이 지나 또래집단에서 놀이를 통해 부모나 형제들에게서  배우지 못한 사회적 지위와 역할을 배운다. 요즈음 부모들에게 이런 얘길 하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릴 하느냐고 핀잔 받을지 몰라도 인간의 성장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교육이 이 또래집단에서의 상호작용이다.

스위스의 심리학자 피아제(J. Piaget)의 이론을 빌리면 또래집단은 ‘구성원 상호간의 관계는 아이들과 그 부모 사이의 관계보다 민주적’이며 ‘상호 합의의 기반 위에서 성립’하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서는 서로 주고받는 것이 많다’고 말한다. 뿐만 아니라 ‘또래집단에서는 어린이들이 서로 다른 상호 작용의 맥락 위에 놓이게 되며, 거기에서는 행위 규칙에 대하여 검토를 하고 그 수용 여부를 결정’하는 인간으로서 기초질서를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또래집단에서의 관계는 ‘한 개인의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관계로 영향을 미친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또래 관계야말로 ‘어린 시절과 사춘기를 지나서도 그 사람의 생활태도와 행동양식 등에 평생 동안 영향을 끼친다.’고 강조하고 있다.

사람들에게 사회화란 유년기에 필요한 교육이 있고 소년기나 청년기에 필요한 교육이 따로 있다. 가끔은 공백 기간을 주어 스스로 생각하고 깨우치도록 두는 것도 교육의 한 방편일 수도 있다. 유년기의 교육이 그 좋은 예다. 부부가 다 직장에 나가면서 아이를 어린이 집 등에 맡기면서 검증도 안 된 교육을 시켜, 아이들을 질리게 하는 경우가 있다. 어쭙잖은 교육이론가들이 조기교육의 필요성을 말하지만 유년기와 소년기의 아이들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놀이’다.

경쟁교육에 익숙한 부모들은 ‘골든 벨을 울려라‘에서처럼 최종적으로 살아남는 스타가 되게 하는 것을 교육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져보면 교육이란 개인적으로는 ’생존 방식을 습득하는 과정‘이요, 사회적인 존재로서 ’더불어 살아가는 지혜를 체득하는 과정‘이다. 물론 지식기반 사회에서 많은 지식은 때로는 필요할 때가 많다. 그러나 ’너보다 많이 아는 것‘, 혹은 너가 모르는 것을 내가 아는 것’을 위해 교육이 필요한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요즈음 부모세대들은 초등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의 숙제를 도와주기 힘든다고 한다. 그것도 그럴 것이 과거에는 ‘과정을 생략하고 답만 중시’했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육은 답보다 과정을 중시한다. 원의 넓이를 구하는 경우 과거에는 ‘원넓이=π ×반지름×반지름으로 통했다. 그러나 오늘날 초등학생의 수학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원의 반지름 길이로 잘게 쪼개어 붙이면 직사각형’이 되는데 이 직사각형의 넓이는 가로x세로이기 때문에 원을 잘게 쪼게는 과정을 학습해 원의 넓이를 구하는 과정을 이해하게 하는 것이다.

‘과정이 생략되고 답만 아는 교육’ 오늘날 성급한 학부모들은 자기 자녀가 이런 지식인이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렇게 답만 아는 교육으로 아이들은 변화에 적은하지 못하는 마마보이가 되는 것이다. 놀이문화를 빼앗고 등떠밀어 학원으로 또 학원으로 보내 답만 외워서 남보다 앞서게 만드는 부모들은 진정으로 자기 자녀가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인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일까?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정치2011.02.27 20:00



남존여비를 주장하던 사람이 다른 장소에서는 여존남비를 말한다면 정상적인 사람으로 취급받지 못할 것이다. ‘생각(가치관)이 같은 사람들이 모인집단을 '정당'이라고 하는데 생각이 가지각색인 사람들이 모여서 만든 정당이 있다면 이를 정당이라고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몇몇 정당을 보면 그렇다. 

부자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던 정치인이 어느날 갑자기 소속 정당에서 탈당해 중산층을 위한 정당에 가입하겠다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약자를 배려하겠다던 정치인이 하루 아침에 부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정당에 가입하는 경우도 종종 본다. 

정치,경제, 사회, 문화의 전 영역에서  원칙도 기준도 없이 이해관계에 따라 이합집산하는 모습을 보면 어처구니가 없다. 영어교육이 경쟁사회 사회에서 살아남는 길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던 신문이 하루 아침에 '한글날이 부끄러운 우리의 언어문화'라는 사설을 보면 저질 코미디를 연상케 한다. 

                                                          <사진출처 ; 오마이뉴스에서>

정치가 실종된 정치판, 교육이 없는 학교, 사랑과 자비가 실종된 종교, 바른말 하지 않는 언론, 침묵하는 지성인, 돈이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장사꾼이 판치는 시장,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망각한 사회 지도층... 억지로 웃기는 코미디 프로가 아니어도 언제부턴가 우리사회가 웃지 않을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 그런데 왜 웃음이 나오지 않을까?

 희소가치를 분배하는 기준을 만드는 곳이 입법기관이다. 그런데 그 입법기관인 국회가 기득권의 편에 서서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에 혈안이 되어 있다면 다수의 피해자인 민중이 할 수 있는 일은 저항뿐이다. 정당하게 행사해야할 권력은 차등분배를 만드는 강자의 편에 선다면 이는 권력의 행사가 아니라 폭력이다. 오늘날 정부불신은 이렇게 만들어지고 또 쌓여가고 있는 것이다. 권력이란 정당성이 있어야 하는데 억지 논리로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사회로 바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사진출처 : 전교조와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홈페이지에서>

 이러한 현실을 비판하고 시정해야할 언론은 또 어떤가? 언론이 객관적인 사실보도를 못한다면 이는 언론이 아니다. 연산군 시절에도 간쟁기구들은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러나 민주사회에서 비판의 기능보다 자사의 이익 앞에 침묵하거나 왜곡과 편파보도를 일삼고 있는 게 얼론이다. 언론뿐만 아니다. 대부분의 지식인들은 기득권의 당근정책에 침묵하고 있다.
 

교육은 어떤가? 교육이 ‘사회화‘의 기능과 ’문화의 전승‘이라는 기능을 감당하지 못할 때 그 사회는 병들게 된다. 산업사회로 이행하면서 가정이 감당하던 교육 기능을 전문기구인 학교나 학원이 맡게 됐지만 사회적인 존재로 키워야 할 사회화기관이 개인주의 교육. 개인을 출세시켜 주는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키워놓은 사람들을 상대로 돈벌이를 하는 상업주의가 판치고 이를 구경하고 침묵하는 지식인. 종교의 교의와는 무관하게 권력에 기생해 순진한 민중을 수탈하는 사이비 종교 지도자….

근대적 사법제도로 일컬어지는 ‘공판주의’로 가자는 것도 안 되고 엄연히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대통령의 국군통수권도 미국이 가지고 있어야 된다고 핏대를 세우는 사람들. 학자가 연구한 논문조차 이데올로기로 뒤집어씌우고 한쪽에는 없는 외국군대를 주둔해야 하고 우리 영토에 미군의 전투기 폭격 장을 제공해야 주권국민으로서 자존심이 지켜지는지……. 색깔만 뒤집어씌우면 이기는 선거판이 그렇고 집행기관과 의결기구를 같은 정당 사람을 당선시켜주는 주권행사가 그렇다. 
 

무지가 무서운 것이 아니다. 자신이 무지하다는 것조차 모르는 것이 더 무섭다. 희망이 있는 사회는 역경이 두렵지 않다. 그러나 조폭수준의 정치문화며 소득 재분배의 희망이 없는 사회는 살맛이 나지 않는 사회다. 학문의 전당인 대학이 취업준비기관이 되고 친일한 부모가 부끄럽기는커녕 민족을 배신한 대가로 취득한 재산을 찾으려고 소송까지 불사하는 막가는 사회는 부끄러운 사회다. 권리는 없고 의무만 강조하는 사회, 정의가 실종되고 방종이 판치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이제 죽은 민주주의를 살리기 위해서 민족의 대 회개운동이라도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정치2011.02.14 07:51



사람을 일컬어 ‘그 사람 참 사람 됨됨이가 됐다, 혹은 ‘사람답다’고 할 때 ‘사람답다’는 것은 ‘사회적 존재로서 바르게 행동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에 대한 눈 뜸’이라고 하는 의식이 형성됨으로써 개인적인 존재로서의 행동이 아니라 사회적 존재로서의 행동을 하고 있다는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자의식’을 ‘외계의 의식과 대립하여, 자아가 자기를 느끼고, 생각하고, 의지(意志)하고, 행위하는 다양한 작용을 통일하는 자기동일적(自己同一的)인 주체로서 의식하는 것을 말한다.’고 정의 하고 있다. 사회적인 존재로서 인간이 개인적인 존재로서의 본능적인 행동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오늘날 학교폭력을 비롯한 왕따가 그렇고 블루칼라 범죄에서 그런 모습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R.데카르트는 ‘자신을 가치 있는 것으로서 의식하는 자의식은 자각(自覺)이다.’라고 명쾌하게 정의 내리고 있다. 자각 없이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 이들이 주체적인 자의식을 가지고 살 수 있게 하는 것. 그것이 곧 교육이요, 공교육이 담당해야할 몫이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선하게 태어났느냐? 아니면 악하게 태어났느냐를 놓고 성선설과 성악설의 논란이 그치지 않고 있다. 선하게 태어났든, 아니면 악하게 태어났든, 사람으로 태어난 한 개체를 개인적 존재가 아닌 사회적 존재로 키우는 것. 그것이 곧 교육이 할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공교육의 위기‘니 ’교육이 무너졌다’는 말은 교육이 감당할 기능 즉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키우는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자의식은 ‘나는 누구인가? 행복이란 무엇인가? 살아 있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 바르게 산다는 것, 정직하고 진실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죽음이란 무엇이며 종교란 무엇인가? 신이란, 저 세상이란 과연 존재하는가? 등에 대한 자각이다.자의식 즉 자각이란 자신이 누구며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기준을 알고 그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만 좋으면... 내게 이익만 된다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본능적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수준이다. 감각적이고 주관적이고 본능적인 존재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인간적인 존재로서 질 낮은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자의식’에 눈뜬 사람들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자각한 사람, 자의식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란 자신과 상대방에 대해 정직한 사람이다. 성실한 생활인이요 겸손한 사람을 말한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남에게 고통을 주거나 피해를 주지 않는 사람이다. 해서 될 말 과 하면 안 되는 말을 구별할 수 있는 사람, 나설 때와 물러 설 때를 아는 사람, 자신의 말과 행동과 생각을 뒤돌아보는 것. 그래서 나의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곧 자각이다.

잘잘못을 반성하고 뉘우치지 못하는 사람은 사회적인 존재로서 온전한 자각을 못한 사람이다. 무엇보다 불의를 미워하고 정의를 위해 자신을 내던질 수 있는 사람. 그란 사람이 사회적 존재로서 자각한 사람, 자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숙한 사회란 이런 사람들로 구성된 사회다.

주관적인 사람보다 객관적인 사람, 폐쇄인 사람보다 합리적인 사람, 이기적인 사람보다 이타적인 사람, 타인의 인격을 존중하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들이 사는 사회는 얼마나 살맛나는 사회일까?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 어린 학생들까지 돈벌이의 대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우글거리는 사회는 살맛 없는 세상이다. 자각하지 못한 사람, 그런 사람들이 자의식을 찾아 나갈 때 우리사회는 훨씬 더 성숙한 사회로 탈바꿈 할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학교폭력 이야기로 세상이 떠들썩할 때 있었던 이야기다. 첫 번째 이야기는 필자가 울산에 근무할 때의 일이다. 이성에 눈뜨기 시작하는 남녀공학의 중학교 2학년 반에서 있었던 얘기다. 중학생들은 장난이 심하다, 특히 남녀 공학 반에서는 이성에 대한 호기심을 장난으로 애정표현을 하기도 한다.

                                                               <사진출처 : 뉴시스>

<첫번째 이야기>

악의 없는 개구쟁이들은 쉬는 시간만 되면 교실이 난장판이 되기 일쑤다. 어느날, 연필깎이 칼을 들고 장난을 하던 한 남자학생이 여학생이 예쁘다는 표현을 칼로 얼굴을 긋는 흉내를 내다가 얼굴에 3cm 정도나 찢어지는 사고를 냈고, 교실은 순간 수라장이 되고 말았다.

담임교사는 사고를 당한 학생의 부모와 가해 학생의 부모에게 연락을 했고, 피투성이가 된 여학생을 담임선생님이 부랴부랴 병원으로 옮겨 응급 수술을 받았다. 그런데 가해 학생은 편모 가정에다 형이 중학교를 졸업하고 난 후 직장에서 일하는 돈으로 동생의 학비를 대는 소년 가장의 집안 아이였다. 

반면에 피해 학생의 가정은 부모 모두 대학을 나오고 경제적으로도 여유 있는 집안이었다. 당시의 분위기로 피해학생의 말 한마디로 가해 학생은 병원 치료비는 물론 폭력학생으로 형사 책임까지 져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연락을 받은 가해자의 형은 사색이 되어 부랴부랴 병원으로 뛰어왔다.

곁에서 담임은 어쩔줄 몰라하며 상황를 지켜보고 있었다. 얼굴에 칼로 상처를 냈으니, 그것도 여학생의 얼굴을.... , 이런 경우 가해자의 가족은 사색이 되어 처분만을 기다리는 것이 통례다. 피해 학생의 부모의 경우, 가해자의 멱살을 잡거나 욕설이 나오는 것이 통례다. 성인(聖人)이 아닌 이상, 딸의 얼굴에 3cm정도의 상처를 냈으니 어느 부몬들 곱게 넘어갈 리가 없다.

가해자의 형이 사색이 되어 병원 문을 들어서는 순간 옆에서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있던 담임도 자기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피해학생의 아버지는 표정도 변하지 않고 피해학생의 형을 맞았다. 딸이 저지경이 되어 누워 있는데 어떻게 저렇게 침착할 수  있을까 의아심마져 들었다. 가정형편 이야기를 듣고 난 피해학생의 아버지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아이얼굴은 잘 치료하면 나을 것이니 치료비는 10만원만 마련하여 내시오"

물론 치료비는 100만원도 넘었다. 뒤에 들은 이야기지만 가해자의 가정 형편을 듣고 난 피해학생의 아버지는 가해학생의 심리적인 죄의식을 들어주기 위한 배려까지 했던 것이다. 담임뿐만 아니라 이 소문을 들은 선생님들은 한결같이 '어떻게 그럴 수가...,  내가 그 입장이 됐더라면 피해학생의 아버지처럼 할 수 있을까?' 라며 피해학생의 아버지의 인간적인 배려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필자는 그 후 인사이동으로 그 학교를 떠나, 피해학생이 그 후 어떻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 사건을 아는 사람들은 당시의 피해학생의 보모에 대한 인간적인 모습을 잊지 않고 있다. 

                                                <사진 출처 : 울시시교육청 블로그에서>

<두번째 이야기>

두 번째 이야기는 그로부터 3, 4년 후의 일이다. 필자가 고등학교 1학년 담을을 맡고 얼마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실업계 고등학교 입학식이 있고 난 후 한 달도 채 안 된 어느날. 새로 편성된 학급의 '주먹 서열 정하기'를 하다가 물걸레 채로 경쟁자의 머리를 때려 피투성이가 된 것이다.

순간 교실은 수라장이 됐고, 피해학생을 병원으로 옮겨 머리를 15바늘을 꿰매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가해자와 피해자 학생의 학부모가 달려와 서로 마주 앉았다. 피해자 부모는 가해자 학부모에게 백배 사죄하고 치료비를 내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저희들끼리 놀다가 다친 것을 가지고 문제삼을 것이 뭐 있느냐"는 투로 쉽게 넘어갔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튿날 다시 벌어졌다. 다친 학생의 학부모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다. "아이가 열도 나고 해서 병원에 있기 때문에 학교에 보낼 수 없다"며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웬걸, 일이 어떻게 그렇게 쉽게 풀리는가 싶었는데, 역시... 뒤에 안 일이지만 피해학생의 어머니는 그냥 넘어가려고 했지만 친척 중에서 '요즈음이 어떤 세상인데 폭력학생을 그냥 두느냐, 고발하면 구속까지 되는데 치료비라도 충분히 받아야 하지 않느냐'라는 얘기를 듣고 담임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이번 사건의 가해학생의 부모는 경제적으로 너무 어려운 형편에 있었다.

가해학생은 자기 토지도 없이 소작으로 겨우겨우 생계를 유지하는 어려운 형편의 학생이었다. 피해학생의 어머니는 가해학생의 부모에게 300만원을 요구하였고, 가해 학생의 부모는 그 돈을 마련하느라고 동분서주 하다가 결국은 빚을 내어 주고 합의를 했다는 뒷 얘기를 들었다. 그런데 피해 학생은 몇 달 후 친구를 폭행해 가해학생으로 둔갑, 학부모가 학교에 몇 번씩이나 불려와 곤욕을 치르더니 결국은 가정불화로 가출을 하고 말았다. 가해학생은 학교 생활을 견디지 못해 중간에 학교를 자퇴하고 말았다. 

<학교폭력이란 무엇인가?>

위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학교폭력은 학교 안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폭력없는 학교 어쩌고 하면서 문제학교라는 오명을 받기 싫어 쉬쉬하거나 학교차원에서 학부모끼리 해결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학생득간의 언어폭력과 왕따와 같은 문제도 학교 안에서는 빈번히 발생한다.

학교폭력은 왜 일어나는가? 학교폭력하면 학생 개인의 이기적이고 도덕적인 인성의 부재... 등,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기 일쑤다. 정말 그럴까? 학교폭력은 현상만 힉교에서 일어났을 뿐 그 원인은 제도적인 한계와 문화적 요인, 환경적 요인이 결합한 폭합적인 원인에서 찾아야한다. 개인의 도덕성의 결여가 원인제공자가 아니라는 얘기다. 그러나 학교폭력문제만 발생하면 개인에게 책임을 묻고 다른 아이들은 그렇지 않은데 폭력학생 개인이 문제라고 책임을 씌운다.

<학교폭력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학교폭력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꼭 한번 들려 볼 곳이 있다. PC방이다. 아이들이 자주가는PC방의 게임 내용이 어떤 것인가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게임만 문제가 아니다. 아이들이 즐겨보는 영화나 만화는 어떤가? 여기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에서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정서적으로 힘든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이 폭력에 대한 문제의식, 판단능력이 있기나 할 것일까?

인간을 사회적인 존재라 하면서 문제만 생기면 개인에게 책임을 지우는 풍토는 문제해결을 위한 바람직한 태도일까? 학교지킴이가 어떻고 하지만 그런건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없다. 학교폭력을 그본적으로 해결할 길은 없을까? 해결책이 없는 게 아니다. 학교가 교육다운 교육을 하면 된다.

그 교육다운 교육이란 일류대학 입학을 위해 문제풀이에 날밤을 세는 학교가 아니라 사회적인 존재로서 인간이 인간으로서 해야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철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만들면 된다. '아랫돌 빼 윗돌 괘는 식'의 폭력대책으로는 학교폭력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인성교육자료2010.11.26 06:44


-선생님 역할 포기하는 어머니들-

‘1800년 1월 9일 남부 프랑스의 생 세랑이라는 마을 근처의 숲 속에서 야생아가 발견되었다. 이 야생아는 11~12세 정도의 소년임이 판명되었으나, 인간이라기보다는 동물에 더 가까워 보였다.

후에 사람들은 그 소년을 파리로 옮겨 야수에서 인간으로 변화시키고자 체계적인 시도를 하였다. 교육을 받은 후 그는 화장실 사용에 익숙해졌고, 옷 입는 방법을 습득하여 스스로 옷을 입을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 이상의 발전을 보이지 않다가 40세 정도 되는 1828년에 세상을 떠났다.

'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늑대소년 이야기다. 부모가 키우지 않고 늑대가 키운 아이는 늑대로 자란다는 사회학 입문서에 나오는 예화다. 요즈음 아이들을 보면 늑대소년 이야기를 가끔 떠올리곤 한다.

더불어 사는 태도란 눈꼽만큼도 없고 '내게 좋으면 그만...'인 행동을 하는 것을 보면서 부모가 해야 할 기초적인 교육을 포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2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또 학교생활을 10년을 넘게 하는 고등학생들이 자신이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가정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한다.



<'우리교육 들여다보기' 연수에 참가한 어머니들. 자료 : 참교육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홈페이지에서>

누가 보지 않으면 교실에서 신발을 신고 다니기도 하고 교실에서 침을 뱉거나 책상 안이나 밑에 씹던 껌을 붙이기도 한다. 과자나 우유를 시먹고 예사로 교실이나 복도, 길거리에 버리기도 한다. 버스 안에서 큰 소리로 떠들거나 휴대폰을 받기도 하고 노약자에게 자리를 양보해 주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아이들이 왜 이렇게 됐을까? 기초질서나 예의를 배우고 익히는 건 전적으로 부모 책임이다. 그러나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할 어머니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한 인격체의 사회화 과정을 가르치는 일을 포기하고 있다는 감을 지울 수 없다.

늑대소년 이야기에서 보듯이 인간은 사회화과정을 거쳐 비로소 인간으로서 역할을 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배가 고프면 먹고 고통을 피하고 좋은 것을 반기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사람이 본능에 따라 움직인다면 동물과 다를 리 없다. 그러나 사람이 사회적인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알아야할 것과 해야 할 것, 또 해서는 안 되는 것을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 옳은 것과 그른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릴 줄 아는 가치판단과 분별력을 가르쳐야 한다. 슬픈일을 보면 슬퍼하고 기쁜 일을 만나면 기뻐할 수 있는 정서를 배워야 한다. 배우지 않고 아는 것은 본능뿐이다. 어머니는 자기 자녀가 인간으로 성숙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하는 막강한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모든 어머니가 다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 어머니들은 어떤가? 한 인간이 인격체로서 성숙하도록 돕기보다는 본능적인 것에 더 많은 관심과 배려를 하고 있다. 잘 먹이고 잘 입히고 남과 경쟁에서 지지 말아야 하는 것에는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개인이 사회 속에 적응하는 사회화에는 관심이 없다. 음식이라고 아무 것이나 먹어서 좋은 게 아니다. 유전자 변형식품도 있고 농약이나 방부제, 성장 촉진제가 들어 있는 음식도 있다. 아이가 건강하게 자라려면 먹어서 좋은 것도 있지만 먹으면 오히려 해가 되는 음식도 있다. 마찬가지로 아무 책이라도 읽어서 다 좋은 것이 아니다. 책 속에는 독이 든 책도 있고 덕(德)이 담긴 책도 있다.

상품의 가격은 그 상품 속에 담긴 내용물에 따라 가격이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사람도 개인의 머리 속에 얼마나 귀한 정보와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 가슴에 얼마나 따뜻한 사랑과 고결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개인의 인격이 달라진다. 덩치는 멀쩡하게 컸어도 어린아이 행동을 하고 있다면 철부지다. 어머니가 경쟁에 눈이 어두워 자녀에게 정말 소중한 것을 가르치지 못함으로서 귀한 자녀가 정상인 인간으로 자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 인간이 건강한 인격체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어머니의 사랑만으로는 부족하다. 사회적인 존재로서 한 인간이 성숙하기 위해서는 오욕 칠정과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의 정서를 느낄 줄 알도록 키워야 한다. 진정한 사랑은 온실 속의 화초가 아닌 비바람을 견디고 이겨낼 강건한 사람이다. 버릇없이 제멋대로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서 어머니 자격증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뚱맞은 생각을 다해 본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무릎 꿇지 마라 교사여!

 

 

무릎 꿇지 마라,교사여.

-도종환-

 

밥을 먹다가 목이 메어 숟갈을 내려놓는다.

생각을 지우고 지우려 애쓰다 다시 그대가 무릎을 꿇었다는 생각에 이르자

가슴이 미어져 밥을 떠 넣을 수가 없다.

손이 떨려 밥상 위에 흘리고 만 밥알과 국물자국을 행주로 훔치려는데

얼룩져 잘 보이지 않는다.

터져 나오려는 그 어떤 것을 참느라 수돗물을 틀어놓고 오래 눈을 감고 그대로 서 있었다.

참혹함을 대신하는 눈물일 수도 있고 견딜 수 없는 분노일수도 있는 그것이

혹시 감정의 덩어리일까 봐 마음을 다독인다.

 

무릎 꿇지 마라,교사여.

 

깊게 사유하고 당당하게 행동하고 책임져라.

가르치고 꾸짖고 꾸짖은 그 말과 함께 물러서지 말고 서 있어라.

그대는 아이의 일생에 대해 책임을 지는 사람이다.

자기 생을 던져,온몸으로 아이의 일생을 책임지는 사람이 교사다.

일생의 아주 중요한 시기를 함께 하며 아이의 생을 한 단계씩 위로 밀어 올리는 사람이다.

그대 자신이 교육과정이다.

그대의 언어,그대의 행동,그대의 가르침이 움직이는 교육과정인 것이다.

그대가 온 국민이 보는 앞에서 무릎을 꿇으면

이 나라의 교육과정과 교육의 근본이 무릎을 꿇는 것이다.

 

무릎 꿇지 마라,교사여.

 

우리 주위엔 우리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진 학부모가 있고,

우리보다 더 훌륭한 지식인들이 있으며,

우리보다 더 큰 힘을 가진 권력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이가 밥알을 흘리는 어지러운 식탁 옆에 있지 않고,

오줌 싼 바지를 갈아입히는 지린내 옆에 있지 않으며,

힘겨워하는 산수공식과 딱딱한 책상 옆에 있지 않다.

아이의 구체적인 고민과 어려움 곁에 있지 않고,

아이의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기 위해 아이 옆에서 고뇌하며 있지 않다.

교사는 아이의 현재와 미래를 책임지는 사람이다.

아이의 인격,아이의 고민,아이의 성장,아이의 성공과 실패를 책임지는 사람이다.

그러니 무릎 꿇지 마라,교사여.

 

무릎 꿇지 마라,교사여.

 

언제나 청정하고 떳떳하라.

아이들 앞에서고 학부모 앞에서고 진실하고 용감하라.

권력 앞에서고 역사 앞에서고 부끄럽지 마라.

진정으로 아이들을 먼저 생각하고 아이들을 위해 행동하라.

내일도 식사습관을 바르게 갖게 하기 위해 반성문을 쓰게 하고

공동체와 공공선을 생각하는 아이로 자라게 하기 위해 회초리를 들어라.

아이들을 힘들게 하는 잘못된 교육구조를 보면

눈 감지 말고 그들에게도 용기 있게 요구하라.

아이들이 편하게 밥을 먹고 즐겁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교장에게도 요구하고 교육청에도 요구하라.

두려우면 힘을 합쳐 요구하라.

이이들을 먼저 생각하면 한 시대도 하느님도 당신 편이 되어 줄 것이다.

 

무릎 꿇지 마라,교사여.

 

그대가 무릎을 꿇고 있는 동안 이 땅의 모든 교사가 무너진다.

그대 뒤에서 모든 교사가 용기를 잃고 넘어지며 자괴감으로 가슴을 친다.

무릎을 꿇어야한다면 차라리 교단을 내려와야 한다.

무릎을 꿇지 말고 교단과 교권을 지켜야 할 사람이다, 당신은.

책임져야 할 사람이고,지금도 아이들과 교실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다.

힘이 없고 가난해도 당신만이 아이들을 책임질 수 있다.

그래서 교사이고 그래서 당당해야 하는 것이다.

무릎 꿇지 마라,교사여.

 

무릎 꿇지 마라,교사여.

 

Ⅰ. 시작하면서

 

유모차에 타고 있는 아이의 손에 휴대폰이 쥐어져 있고 어머니는 태연하게 유모차를 끌고 가는 모습을 가끔 본다. 이 어머니는 휴대폰의 전자파가 아이에게 얼마나 치명적인가를 안다면 아이 손에 휴대폰을 쥐어 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휴대폰뿐만 아니다. 검증되지 않는 유전자변형식품(GMO)이며 식품첨가물이 성장기 아이들의 인체에 어마나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는지 안다면 그런 음식을 먹이려 하지 않을 것이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내가 가르치는 교과목, 그 지식이 아이들에게 오히려 독이 된다는 것을 안다면 교과서를 암기시키는 교사로서 참을 수 없는 분노와 반기를 들고 나설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제자를 운명론자가 되도록 만들거나, 힘 앞에 복종하도록 순치시키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방관자가 될 교사는 많지 않을 것이다. 모든 책이 유익하지 않듯이 ‘교육이 독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심각하게 고민해 본 교사는 얼마나 될까? 교문 입구에 적힌 정식, 근면, 성실은 이데올로기가 포함되어 있는지의 여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 일이 있는 교사는 얼마나 될까?

‘나는 아이들의 삶을 책임지고 있는 교사’이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줘 ‘약이 되는지, 독이 되는지...’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Ⅱ. 이 땅의 교사는 교육을 할 수 있는가?

 

1. 착각은 자유라지만....

 

사람은 자기 수준만큼 누리고 산다. 단체도 예외가 아니다. 학교 사회의 구성원인 교사가 교과서를 가르치는 게 교육이라고 생각하고 지식을 암기시키는 일에 만족한다면 학교는 교육의 장이 될 수 없다. 교육부가 시키는대로 교장이 시키는대로 운명적으로 사는 교사가 있는 학교에는 창의적인 교육도 민주적인 교육도 불가능하다.

개인의 삶의 질이 개인의 수준이듯 단체나 국가의 삶의 질은 그 구성원이다. 철학이 없는 교사들로 구성된 사회는 교사 자신도 불행하지만 나라의 장래를 이끌고 갈 2세 국민들의 미래도 암울하다. 착각은 개인의 불행으로 그치지만 교사는 제자를 그리고 민족의 장래를 불행하게 만든다.

 

1) 부끄러웠던 교사생활

1969년 첫 발령지 초등학교 동창회에 초대 받았던 일이 있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같이 동화를 들려 준 좋은 선생님’ 40년이 지난 제자들의 ‘나에 대한 기억’이었다. 그 동화가 어떤 동화였는지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옳고 그른 것, 좋고 나쁜 것’에 대한 분별력이 없었던 내가 아이들에게 들려준 얘기란 ‘미국의 시각에서 아니면 자본의 시각에서, 혹은 종교적인 이데올로기가 포함된 내용’이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다행히 제자들은 야생초처럼 건강하게 아버지 어머니로 혹은 할아버지, 할머니로 살아가고 있었다. 부끄러운 교사. 보다 많은 지식을 암기하도록 끊임없이 주입하고 줄 세우고 희열을 느끼던 성실한 교사(?)였던 나. 나는 부끄러운 교사였다.

2) 나는 한 때 ‘교사’였던 시절도 있었다.

1989년을 전후한 한국사회는 민주화의 열기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이 거대한 태풍은 무풍지대였던 학교에서도 바람으로 다가왔다. 교과서를 덮고 ‘너희들도 똑같은 사람이다!’ 메시지는 간단했다. 여자로 태어나 운명적으로 순종이 미덕으로 알고 살아야 했던 아이들에게 이 작은 메시지 ‘너희들도 똑같은 사람이다’이 한마디가 그들의 운명을 바꾸고 있었다.

이 한마디가 잠자는 아이들에게 들씌워진 위선의 껍질을 벗기고 ‘시비’를 가리고 ‘분노’할 줄 아는 바람으로 만들 수 있었다. 지식을 암기시키고 줄 세우든 교사가 아니라 그들의 순수를 배우고, 삶을 안내하고 토론하는 교사. 교사가 본분을 다할 때 이보다 더 행복한 교사는 없다.

2. 교육인가? 야만인가?

 

거꾸로 된 현실을 사는 양심적인 사람들에게 순종을 강요하는 것은 거세(去勢)나 다름없다. 청맹과니로 만드는 교육은 앞을 보지 못하게 하는 마취요, 야만이다. 민족 반역자가, 돈이 주인이 된 세상, 그들이 선이라고... 순종하라고 가르치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어떻게 학교만 교육을 하는가? 어떻게 교사만 교육을 하는가? 이 땅의 모든 구성원은 2세들에게 교사요, 삶의 안내자다. 학교의 구성원 모두는 교육자다. 그런데 어떤가? 모범을 보여야할 어른들이 아이들을 ‘인간’이 아니라 돈벌이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노동 착취의 대상으로 길러지기를 바라고 있다면 교사의 할 일은 무엇인가?

옳은 것은 ‘옳다’고 가르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가르쳐야 한다. 불의를 보면 분노할 줄 알고, 감동할 줄 알고, 감사할 줄 알고, 사랑할 줄 알게 해야 한다. 내가 소중한 존재라는 것, 나의 친구가, 내 부모가 소중한 존재라는 것, 나의 민족, 내가 몸담고 사는 고장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도록 가르쳐 줘야 한다.

Ⅲ. 이 땅의 교사는 교육을 할 수 있는가?

 

1. 교육은 ‘인간을 사회적인 존재로 키우는 일’이다.

‘환경결정론자들은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며, 사회생활을 통해 축적한 문화를 흡수함으로써 비로소 인간적이 된다.’고 주장한다. 바꿔 말하면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답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땅의 부모들, 이 땅의 교사들은 인간을 사회적인 존재로 키우는가? 아니면 개인적인 존재로 키우고 있는가? 아니, 키울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어 있는가? 성장과정에서 보고 배우는 그 어떤 것도 교육적인 것은 없다. 학교폭력은 사회상의 반영이며 자본주의의 구성요소다.

 

2. 학교는 교육이 가능한가?

이 땅의 교사들은 내가 맡고 있는 아이들이 이대로 자라면 ‘인간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믿는가? 이기적이고 관념적 인간을 만드는 경쟁교육으로 인간 교육은 불가능하다.

교문을 한발짝만 나서면 교육내용과는 정반대현상을 만나 아이들을 이중인격자로 만들고 있다. 학교폭력을 비롯한 사회의 구조적인 모순이 아이들을 통해 교실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3. 교육은 학교에서만 하는 게 아니다.

무너진 가정, 어른들의 부도덕한 생활, 아이들을 돈벌이의 대상으로 이용하는 상업주의는 이이들을 나락으로 내몰고 있다. 수구언론은 ‘무너진 교실’을 탓하며 교사들의 무능을 질타하고 있다. 무너진 교육이 교사 때문일까? 교육은 교실에서만 하는 게 아니다. 가정과 학교 그리고 사회 삼위일체가 교육을 의도적으로 하지 않으면 결코 교육은 성공할 수 없다.

 

4. 교사인가 노예인가?

21세기 교사! 로마시대 노예로 돌아갈 것인가? ‘농부는 농사나 짓고...’ ‘노동자는 열심히 일이나 하고...’‘교사는 아이들이나 가르쳐라’ 사회유기체설에서 말하는 사회란 이렇게 기능론을 정당화시킨다. 사회란 각자가 맡은 일만 열심히 하면 균형을 이뤄 사회가 발전한다는 논리다.

만들어 준 교과서나 열심히 가르치는 교사, 내 자식 출세시켜주는 교사, 이기심을 충족시켜주는 잊지 못할 선생님이 존경받는 교육은 병든 교육이다. 가르치라는 내용만 전달하는 교사는 교육자일까?

 

5. 교육을 위기로 몰고 간 주범은 누군가?

약을 먹고 효과가 없다면 약을 조제한 약사의 책임이 클까? 아니면 제약회사의 책임 더 클까? 물론 교육이 무너진 책임이 교사에게 없다고 할 수 없으나 보다 큰 책임은 교육내용을 만들고 국정교과서라는 딱지까지 붙인 제약회사(교육부)의 책임은 자유로울 수 없다. 교육의 정의조차 내리지 못하는 교육부가 교육위기의 책임을 교사에게 전가하기 혈안이 된 사회.

여기다 내 아들 출세를 위해서라면... 어떤 불의라도 용서하는 어머니의 사랑(?)이 있고, 돈이라면 청소년을 돈벌이의 대상으로 만드는 상업주의 또한 주범이 아니라고 발뺌할 수 없다.

잘잘못을 가리고 바로 잡아야할 언론은 한 술 더 뜬다. 학원을 운영하면서 ‘사교육비를 잡아야 한다!’고 기염을 토하는 언론. 언론이기를 포기한 사이비 언론이 있어 교육은 더더욱 깊은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Ⅳ. 교육운동, 성공인가 실패인가?

 

전교조는 찹립이래 최대의 위기에 직면해 있다. 전교조는 왜 위기인가? 이명박대통령이 전교조에 대해 자신감을 가지고 칼질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서민들이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교사들로부터 초기와 같은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 아닐까?

전교조를 이 지경으로 만든 근본적인 원인은 무엇일까?

 

1. 비판을 허용하지 않은 교육운동

흐르지 않는 물은 썩는다. 모든 운동이 그렇지만 전교조 또한 비판을 용납하지 못하고 있다. 연단을 거치지 않는 쇠붙이는 겉은 멀쩡하지만 시련을 만나면 쉬 부러지거나 부서진다. 전교조가 국민들로부터 외면 당하게 된 근본 이유를 ‘교원 평가’ 때문이라는 게 중론이다. 교원평가가 국민들의 정서에 반하는 정책이라는 것을 선배들은 왜 침묵했을까?

2. 정파싸움이 만든 예정된 실패

비판을 욘납하지 못하는 조직과 연관된 또 하나의 취약점은 정파적인 입장의 차이다. 사업의 선순위를 채택하는 과정에서 제국주의문젠가 아니면 재벌구조의 문젠가가 NL, PD로 대결하면서 끝없는 대립과 반목을 반복해 왔다. 결국 민주노동당은 진보신당이 탈당, 새롱누 정당으로 춟머했지만 민주노총을 비롯한 대부분의 진보운동이 한 지붕 두 가족 살림을 하고 있는 셈이다. 결국 전교조도 현 집행부와 입장의 차이를 가지고 있는 교찾사의 힘겨루기 양상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3. 권력의 본질에 대한 객관적 이해 부족

정책의 부재. 정세판단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의 차이도 문제지만 자본주의라는 체제에 대한 이해가 전망의 실패로 정파간의 입장의 차이로 사업의 실패, 지지율 하락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4. 조합원 교육을 외면한 지도부의 오류

전교조 창립 초기, 지도부들의 한결같은 소망이 ‘전교조 학교’를 만는 일이였다. 권력의 통제에서 벗어나 학교다운 학교를 만들고 싶은 꿈은 아직도 유효하다. 그런데 그 꿈을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몇 억정도면 폐교를 활용한 대안학교를 만들어 전교조의 이념을 실현하는 꿈같은 학교를 만들 수도 있을텐데....

5. 교사들의 한계

참교육은 아이들을 향한 논제가 이니다.교사들의 자질문제, 교육자로서의 철학문제 또한 방치할 수 없는 한계다. 교육의 위기를 말하면서 교사들에 대한 비판 또한 만만찮다. 인간적인 한계도 있겠지만 교사 선발이나 양성과정에서 잘못되도 뭔가 한참 잘못된게 있다. 교원양성정책의 한계가 교육현장으로 이어져 방관하는 교사, 기회주의적인 교사가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대안은 무엇인가? 교원들의 재교육문제다. 일당 백! 조직은 구성원의 수준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전교조는 조합원 교육을 방기했고 그 결과 오늘날과 같은 취약한 조직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이는 회피할 수 없는 지도부의 책임이요, 오류임을 부인할 수 없다.

 

.마치면서

 

‘꿈을 심어주는 교육자가 될 것인가? 아니면 민족과 역사 앞에 죄인으로 남을 것인가’이것이 오늘날 교육을 담당하고 있는 교사의 고민이다. 교사의 고민이 교원의 자질문제라면 교육에 대한 희망은 교육운동을 통한 교육개혁이다. 위기에 처한 전교조는 지금 무엇을 할 것인가? 권력으로부터 짓밟히고 학부모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초라한 모습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인가? 아니면 국민들로부터 성원과 사랑을 받는 제 2의 교육운동단체로 거듭 날 것인가?

전교조의 진로와 정체성에 대한 고민! 그건 조합원 모두가 함께 풀어야 할 과제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정치2009.04.12 09:01


인간이 사회를 만들어 ‘개인이 사회의 구성원이 됐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개인의 삶이 그 개인에게 책임이 있는 원시적인 존재일 때는 생존에 대한 책임뿐만 아니라 존재의 의미도 개인에게 있었다. 그러나 사람이 사회를 형성하면서 그 구성원이 됐다는 것은 개인은 그 사회가 어떤 사회인가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됐다는 의미를 지니게 된다. 한 인간이 ‘어떤 제도에서 사느냐’에 따라 한 개인은 건강을 비롯해 인품이나 삶의 질까지도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개인의 존재는 ‘사회적’이면서 성숙하지 못한 사회에서 개인의 삶에 대한 모든 ‘결과’를 개인의 책임으로 돌린다. 예를 들어 보자. 자본주의라는 제도에 살고 있는 어떤 사람이 광우병에 걸렸다고 치자. 이 사람이 병에 든 이유는 개인에게만 있는 게 아니다. 생존을 위한 ‘먹거리’가 상품이 되는 제도에서는 그 상품의 질은 제도의 법적 규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소를 사육하는 양축업자가 초식을 하는 소에게 육식사료를 먹였다면 이 소를 도축해 상품화된 고기를 사 먹은 개인은 ‘광우병’에 걸릴 확률을 안고 있는 것이다.

건강뿐만 아니다. 인품도 마찬가지다.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며 산아제한이 미덕인 사회에서 자란 개인은 사회적인 존재로 자라기는 어렵다. 사람을 사회적으로 키우지 못하는 교육제도 아래서는 개인은 ‘왕자 병’에 걸리거나 ‘마마보이’로 자랄 수도 있다. 더불어 사는 게 미덕이 아니라 ‘승자가 선’이 라는 경쟁교육을 받고 자란 사람은 이타주의자가 아닌 ‘이기주의자’가 될 확률이 높다는 뜻이다. 인간의 가치가 돈으로, 학력으로 혹은 연(緣)으로 평가받는 사회에서는 개인이 사회적 가치로 성장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제도는 사회적이면서 책임은 개인에게 지우는 룰은 공정하지도 객관적이지도 못하다.

다수의 희생으로 소수가 행복한 사회가 아니라 다수가 골고루 행복해지는 세상을 만들 수는 없을까? 날이 갈수록 살기 어렵다고들 한다. 절대적 빈곤이 아니라 상대적 박탈감으로 삶의 의욕을 잃어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루 평균 자살자 34명. OECD가입국 중 자살률 1위의 국가.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한국인 자살률은 2007년 10만명당 24.8명으로 전년보다 13% 증가했고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다. OECD 평균 11.2명보다 두 배가 높고, 최저인 그리스(2.9명)에 비하면 무려 10배에 가깝다고 한다. 경제대국 운운하며 삶의 질을 말하면서 왜 세상은 자꾸 각박해지고 살맛을 잃는 사람들이 날이 갈수록 늘어날까?

열심히 일해도 희망이 없는 사회는 불행한 사회다. 오늘날 우리사회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는 ‘경제 살리기가 아니라 ‘사람 살리기‘다. 열심히 일해도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회. 아니 정의가 통하지 않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회, 법도 원칙도 없는 야만의 사회로 회귀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돈과 권력을 얻기 위해 양심이며 도덕이며 윤리 따위는 헌신짝처럼 내팽개치는 막가파식 경쟁과 시장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성이 상품이 되고 돈이 필요하다고 연약한 어린아이와 여성을 납치해 살해하기도 하는 무서운 사회로 바뀌고 있다.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돈만 있으면 투사도 되고 민주 인사도 되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사회.

갓난아이가 먹는 분유에서부터 과자류는 물론 서민들의 주식이며 반찬, 과일류는 안심하고 먹어도 좋을까? 돈이 되는 일이라면 사람의 생명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식품 첨가물을 넣어 상품을 만드는 것쯤은 양심 따위는 폐기처분 대상이다. 절대빈곤에서 벗어났다고들 하지만 농약이며 항생제며 유해색소로 뒤범벅이 된 먹거리.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 유전자변형식품이 밥상에 오르고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물조차 없는 세상. 살고 있는 집의 벽지며 장판이며 가구들이 환경호르몬으로 뒤범벅이 되고 문명의 이기인 전자제품에는 전자파라는 괴물이 사람들의 건강을 옥죄고 있다.

미래의 꿈나무, 아이들을 길러내는 학교는 어떤가? 연중행사로 나타나는 학교급식 식중독이며, 하루가 멀다 하고 터지는 학교폭력이며 죽기 살기로 공부해도 점수가 올라가지 않는 학생들에게 낙인을 찍는 줄 세우기. 학교와 교사는 있어도 교육이 없는 학교. 아이들이 보고 자라는 학교 밖은 차라리 요지경이다. 안방의 주인행사를 하는 텔레비전에서는 ‘당신의 사는 집이 당신의 신분을 말해 줍니다.’라며 가난한 이들의 가슴에 못을 박는다. 싸구려 웃음을 강요하는 저질 코미디며, 선정적인 드라마와 외모지상주의를 충동질하는 프로그램. 소득재분배정책은커녕 끝도 없이 치닫는 사회 양극화며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는 실업자 100만명의 시대.

어느 한쪽만 잘못됐으면 살아가면서 바꾸고 고치면 될 일이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그게 아니다. 총체적인 병, 그것도 불치의 중병상태다. 아니 보다 무서운 건 사람들의 마음이 병들어 날이 갈수록 회복불능 상태로 오염되고 있다. 돈이며 출세를 위해서는 의리니 신념 따위는 고려의 대상조차 아니리고 생각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돈이며 변절자도 유명인사가 되고 군사독재나 되지 않는 의좀 더 솔직히 말하면 그런 세상을 정당화시키는 마약(이데올로기)에 마취돼 전 국민이 혼돈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누가 이런 세상을 고집하는가? 세상이 썩으면 모두가 피해자가 되는 게 아니라 그 썩은 세상으로 덕을 보는 사람이 있어 이들이 주도권을 잡고 그런 세상을 바꾸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그 세력이 힘이 바뀌기를 기대하는 힘보다 컬 때는 바뀔 리 없다.

건강한 사회란 소수가 아니라 다수가 행복한 사회다. 지금은 날이 갈수록 다수가 아니라 소수가 행복한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다. 철학이 없는 지도자. 아니 돈이 사람을 만드는 세상에서는 지도자조차 돈이 만든다. 돈이 있으면 영양사도 고용하고 미용사도 고용한다. 개인 주치의며 재산관리인, 변호사도 고용해 ‘3대 부자가 없다’는 옛말은 헛말이 됐다. 결혼조건이 돈이 우선조건이 되고 보니 2세는 머리 좋고 건강하고 잘생긴 사람.. 그런 배필을 만나면 2세 3세는 더 우수한(?) 자녀가 탄생하게 된다. 여기서 만들어지는 벌이 지배하는 사회를 상상해 보라.

다수가 살기 좋은 세상은 물 건너 간 것일까? 진부한 얘기 같지만 독재자들이 써먹던 ‘3S정책(Screen, Sex, Sports)'이란 게 있다. 가난의 대물림을 정당화시키고 바닥인생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마취제... 그게 아직도 효과가 있다는 거다. 나와 지역이 같다는 이유로 어느 편 야구 팬이 되어 경기가 있으면 천리가 멀다않고 관람하러 다니는 야구며 축구며.. ’나는 연속극 드라마 보는 재미로 산다‘는 순박한 안방마님도 돈벌이에 혈안이 된 장사꾼은 여성을 눈요기 거리로, 돈벌이 대상으로 끊임없이 옷을 벗기고 있다.

3S뿐일까? 민중의 눈을 감기는 예술이라는 외피를 쓴 사이비 예술인. 굿에는 관심도 없고 잿밥에 눈독 들이는 곡학아세하는 사이비 학자들이 있다. 시민운동을 한답시고 출세(?)를 하고 싶어 호시탐탐기회를 노리는 변절 대기자도 무진장이다. 천국을 팔아먹는 사이비 종교인이 있고 이름은 교육잔데 교육은 않고 지식판매상이 된 교육자가 출세하고 큰소리치기는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사회적인 존재인 인간을 개인적인 존재로 키우면서, 운명론자를 키우면서 교육으로 착각하는 교사와 국,영,수 점수 몇 점으로 사람의 가치를 서열 매겨 대물림시키는 교육은 바뀌지 않는다.

‘내가 너보다 키가 5Cm 더 크다, 내가 너보다 돈이 몇천만원 더 많다. 내가 너보다 더 좋은 대학 나왔다......’ 이러한 조건으로 차별받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일까? 회칠한 무덤같이 외모로, 학벌로, 경제력으로 사람을 평가하고 줄 세우고 차별하는 사회를 만들어 누가 행복할 것인가? 건강한 사회란 어떤 사회일까? 건강한 사회란 좋은 제도를 바탕으로 구성원들의 정신과 육체가 건강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사회는 병든 사회다. 병이라도 불치의 중병에 걸린 사회다. 보다 더 큰 문제는 이 병든 사회를 보는 구성원들이 '문제의식'도 없이 무한경쟁에 매몰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계속 -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