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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는 이야기

교사이기 때문에 느낄 수 있었던 감동적인 이야기

by 참교육 2012.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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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아, 내가 찾아가면 될 텐데....”

“아닙니다. 저희들이 당연히 찾아 가야지요”

 

 

한사코 만류하는 내 청을 거절하고 대구에서 왜관에서 인천에서 서울에서 달려 온 34년 전 제자들...

 

34년 전 12~3살짜리 6학년 꼬마들이 45세의 건장한 장년이 되어 나타났다. 그런데 어쩌랴! 처음 본 순간 한사람도 알아볼 수 없었으니.... “저 00니다. 전화로 연락했던 친구 한명은 이름을 들었기 때문에 이름만 기억했지 34년이나 지난 세월의 기억을 찾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런데 한명도 아니고... 열명이나 나타났으니....

 

“선생님, 00는 인천에서 지금 오고 있습니다. 차가 밀려서 좀 늦는 모양입니다. 00, 00는 서울에서 오고 있답니다.”

 

 

 

 

이사를 다니느라고 잊어버린 앨범을 제자들이 들고와 옛날 모습과 한 명 한 명 비교해 가며 옛 기억을 떠올렸다.

 

 

그런데 어쩌랴! 옛날 얼굴들을 보면서 그 때 개구쟁이 모습들은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지만 현재의 얼굴은 아무래도 매치가 안 된다. 그것도 그럴 것이 벌써 고등학교나 대학에 다니는 자녀를 둔 아버지 어머니들이 됐으니....

 

“어떻게 날 찾을 수 있었지?”

 

“ㅊ대학에 근무하는 000가 인터넷 검색에서 찾았답니다.”

다행이 내가 블로그 활동을 하고 있었기에... 그렇지 않았다면 평생 만나지 못할뻔 했던 소중한 사람들.... 인터넷이 좋긴 좋다.

 

“선생님은 옛날 모습 그대로 이십니다”

“선생님! 그 때는 정말 무서웠습니다”

 

허~ 내가 공포의 대상...?

 

 

 

 

시험을 친 후 석차를 내 게시판에 성적표를 붙이던 시절이었으니....그리고 내 성격에 지는 걸 죽기보다 싫어했으니.. 그랬을지도...

 

성적을 올리려고 퇴근 후 철판으로 시험지를 끍어 일일이 등사판으로 복사해 시험을 치던 시절이었으니....

 

34년 전의 기억이 소록소록 되살아난다.

 

이 친구들은 내 모습뿐만 아니라 34년 전의 수업시간이며 심부름했던 일까지도 잘도 기억하고 있었다. 과학주임을 하면서 시청각실에서 수업했던 일이며 기계체조를 했던 덕분(?)에 운동회 때마다 덤블링 연습을 하느라고 고생시켰던 일이며....

 

식당으로 옮겨 짧은 시간에 많은 얘기들을 나눴다. 인천으로 대구로 돌아가야 할 친구들이어서 오랫동안 잡고 있을 수 없었지만 마음 같아서는 밤새도록 살아 왔던 얘기며 살아가는 얘기를 듣고 싶었는데...

 

 

 

 

선생이 아니었으면 도저히 느낄 수 없는 행복한 순간들....

함께 오고 싶었지만 일 때문에 오지 못한 친구들.... 귀한 시간 천리를 멀다 않고 찾아 온 고마운 친구들... 더더욱 미안한 것은 인천에서 남자도 아닌 여자가 청주까지 혼자서 한걸음에 달려 왔다니... 또 늦은 시간에 다시 혼자서 돌아가는 걸 보니 너무나 고맙고 미안하고.....

 

 

 

 

그래도 이 친구들은 카페를 만들어 서로들 사는 얘기, 살아가는 얘기를 나누고 있다는 게 신기하고 고마웠다. 인연이란 게 뭔지... ?

 

평생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감동의 시간을 만들어 준 제자들의 고마운 마음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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