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주간] 6·10 사람책방 "참교육의 함성으로"...평범한 교육자들이 살아낸 민주주의의 시
5월 26일 저녁, 세종시 보람동 금강시티타워 7층 세종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사무실 유리벽에는 사진 여덟 장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해직자 원직 복직', '우리가 교육을 바꿉시다', 전교조 깃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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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주간] 6·10 사람책방 "참교육의 함성으로"...평범한 교육자들이 살아낸 민주주의의 시간
5월 26일 저녁, 세종시 보람동 금강시티타워 7층 세종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사무실 유리벽에는 사진 여덟 장이 나란히 붙어 있었다. '해직자 원직 복직', '우리가 교육을 바꿉시다', 전교조 깃발을 앞세운 거리 행진, 정치기본권 보장을 요구하는 집회 현장. 그 아래 테이블에는 전교조 해직교사의 역사를 담은 책과 사진첩이 펼쳐져 있었다. 누군가의 기억들이 놓여 있었다.
참가자들은 테이블을 둥글게 배치하고 앉았다.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의 기억과 경험이 주제인 '6·10 사람책방' 첫 번째 순서, "참교육의 함성으로" 시간이 시작됐다. 5·18~6·10 세종기념행사위원회가 주최하고 (사)세종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역사위원회(위원장 김진문)와 전국교직원노동조합 세종지부(지부장 이상미)가 공동주관한 이 자리에는 1989년 전교조 창립 당시 해직교사였던 김용택 선생과 같은 시대 교육 현장을 걸어온 가명현 전 온빛초 교장이 '사람책'으로 함께했다.
◆ 6.10 사람책방 시리즈1: ‘민주주의의 씨앗’을 뿌린 초창기 전교조 해직교사 김용택
"저처럼 살지 말았으면 좋겠다"
김용택 선생이 첫 마디를 꺼낸 것은 화면에 자신의 PPT 자료가 뜨기도 전이었다. "나이를 이렇게 먹어놓으니까, 드러낼 만큼 자랑스럽게 한 일도 없는데." 그는 잠시 멈췄다가 덧붙였다. "오늘 소화시키고, 저처럼 살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 말씀을 드리고 싶어요."
1944년생, 스스로 "8학년 3반"이라 부르는 나이다. 화면에 먼저 뜬 것은 병력 목록이었다. 맹장 수술, 대장암 3기 초, 스텐트 시술, 전립선암, 소장 폐색 수술. "제 소장의 반을 잘라냈어요. 4미터를 잘라내고 소장이 반밖에 없어요." 거기에 대상포진이 귀를 타고 들어와 청력과 기억력까지 뺏어갔다. "이렇게 아프면서 사람이 살아 있을 수 있는가 싶었어요." 그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화면은 다음 슬라이드로 넘어갔다.
37년 6개월의 교직 생활 가운데 해직 기간이 5년 끼어 있다. 1989년 전교조 가입을 이유로 쫓겨났다. "그때 전교조는 잡혀가는 자리, 감옥 가는 자리였어요." 출석요구서가 날아오고 교사들이 거리로 내몰리던 시절이었다.
그의 얘기 중 가장 탄식을 자아내게 했던 얘기는 훈장 포기에 대한 이야기였다. 정년퇴직 교사에게는 재직 기간에 따라 훈장이 주어진다. 그는 옥조근정훈장을 받을 차례였다. "내가 선생님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못 했으니까 포기한다고 하니, 그렇게는 안 된다며 가정사적인 이유로 포기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럼에도 그는 훈장 포기각서를 썼다. 명예로운 훈장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은 전국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기에 조선일보부터 국방일보까지 일제히 보도되었다.
국가는 그를 5년 동안 교단에서 내쫓았다가, 정년이 되자 다시 훈장을 내밀었다. 그러나 5년의 빈자리는 아직 메워지지 않았다. 해직 기간 동안 받지 못한 임금, 호봉에서 빠진 5년, 그로 인해 줄어든 연금 등을 추산하면 대략 7억 원이 넘는다고들 했다. 그는 지금도 1인 시위를 하고 재판을 이어가고 있다. 훈장은 거부했지만, 정당하지 못하게 빼앗긴 시간은 돌려받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6·10 사람책방'에서 첫 번째 사람책으로 나선 김용택 선생이 자신의 삶을 담담히 풀어내고 있다. 사진=이소정 시민기자
철학은 "나는 누구냐"를 묻는 것
병력 이야기를 마치고 김용택 선생이 꺼낸 것은 동네 아이들 이야기였다. 세종 첫마을에 살던 시절, 그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놓고 무료로 철학과 헌법 교육을 했다. "처음에는 가득 차도록 왔어요." 학교에서 안 가르쳐 주는 것을 선생님이 가르쳐 준다 하니 아이들이 몰렸다는 이야기였다.
"철학은 어려운 거 아니야." 그는 말했다. "제일 쉬운 게 철학인데, 나는 누구냐, 왜 사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가. 그게 철학이잖아요. 근데 학교에서 안 가르쳐 줘요." 왜 안 가르쳐 주는가. "못된 권력자들은 주권자가 똑똑해지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이걸 안 가르쳐 주는 거죠."
그에게 헌법 교육은 같은 맥락이었다.
그는 평소에도 "철학이 없는 지식인이 되면 부끄러운 지식인"이라고 말해왔다. 그리고 이 말을 헌법에도 그대로 연결했다. 헌법을 모르는 주권자는 자기가 주인인 줄 모르는 주인이라는 것이었다.
2016년, 그는 손바닥 헌법책 운동을 시작했다. 헌법 전문과 본문 130조, 부칙까지 담은 작은 책자를 시민들에게 나눠주는 운동이었다. "독일이나 프랑스처럼 집집마다 헌법책 한 권쯤 있으면 좋겠다 했더니만, 뜻이 맞는 사람들이 한번 해보자 해서 만들었어요." 이후 전국 시도 지부를 돌며 교육감, 시장, 전교조 지부장 등을 만나 MOU를 체결하고 헌법책을 보급했다. 블로그 누적 방문자는 천만 명을 넘어섰다. 대구·경북에서는 오지 말라는 연락도 왔다.
그의 명함에는 직책 대신 이렇게 적혀 있다. "대한민국 주권자 김용택"
"대한민국의 주인이 국민이라는 걸 아는 시민이 많아질수록 민주주의도 강해져요. 주인 행사 못하는 주인은 노예잖아요."
오랫동안 제주도부터 강원도까지 강의를 다녔다. 지금은 몸이 따라주지 않는다. 귀가 잘 안 들리고, 기억력이 떨어졌다. "금방 했던 일도 또 모르겠고." 그래도 찾는 사람이 있으면 언제든 갈 거라고 했다. "8학년 3반이면 살 만큼 오래 살았잖아요. 남은 기간은 부끄럽지 않게 살아야 되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역사 속 한 페이지를 살아낸 김용택 선생의 목소리에 참석자들이 숨을 죽인 채 귀를 기울이고 있다. 사진=이소정 시민기자
◆ 6.10 사람책방 시리즈1: 전교조에서 교장실까지, 학교 구조를 바꾼 교육운동가 가명현
확약서를 쓰고 한 복직
가명현 선생의 이야기는 시작부터 결이 달랐다. 충남 천수만 바닷가, 소 먹이고 굴 캐던 어린 시절, 35리 길을 걸어 중학교를 다닌 기억. 그는 자신이 소외된 사람의 처지를 몸으로 이해하게 된 것이 그 환경 때문이었다고 했다. "3자적인 입장이 아니라 내 가슴으로 상대를 이해하게 된 계기가, 이런 환경 때문에 그런 게 아닌가…."
교대에 가서 처음으로 마주친 것은 유신헌법이었다. 당시 교수님이 교대 강당에서 유리컵에 물이 반쯤 든 것을 들어 보이며 유신헌법을 옹호하는 강연을 했다. "손을 들어서 질문하고 싶었는데 끝내 못했던 기억이 있어요." 그 답답함이 시작이었다. 창작과비평, 리영희, 박현채 같은 분들의 책들을 읽으며 민주주의에 눈을 떴다.
첫 발령지였던 시골 학교에서 그는 전두환의 쿠데타를 몸소 경험했다.
"단상에 올라가서 저는 김대중은 빨갱이다, 정의사회 구현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얘기해야 하는 그런 환경이었어요." 젊은 교사들은 기숙사에서 모여 맥주를 한 바퀴씩 돌렸다. "하도 괴로워서 술을 얼마나 먹었는지…."
1989년 방학이 시작되자마자, 그는 교사협의회발기추진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았다는 이유로 직위해제를 당했다. 전교조가 창립되며 가입 교사 명단이 공개될 때, 그는 이미 직위해제 상태였기 때문에 명단에 이름조차 올리지 못했다.
문제는 그가, 당시 6학년 담임이었다는 점이다. 학부모들이 교육청으로 몰려가니 교육청에서 조건을 걸었다. 앞으로 교원단체 가입을 신중히 판단해서 행동하겠다는 확약서를 쓰면 복직시켜 주겠다고 했다. 그래서 확약서를 썼다. 6학년 담임으로, 교단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그 과정 속에서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그러나 그 뒤로 그는 더 열심히 했다고 말했다. 부담감이 오히려 더 단단한 사람으로 만들었다.
'6·10 사람책방'에서 두 번째 사람책으로 나선 가명현 선생이 참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했던 전교조 초창기 활동을 생생하게 회고하고 있다. 사진=이소정 시민기자
전교조는 “이념 조직”이 아니었다
그가 전교조 활동을 통해 가장 힘쓴 것은 그렇게 거창한 이념이 아니었다. 가장 신경 쓴 문제는 촌지 거부, 부교재 채택 비리, 수학여행 커미션 구조 등이었다. "학년 회비가 많이 들어오면 선생님들이 술 먹으러 가고 이렇게 하더라고요. 참 괴로웠어요." 수학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알고 보니 다 커미션 관계더라고요."
그는 MBC에 학생들을 데리고 나가 촌지 안 받기 운동을 알렸다. 다음 날 학교에 갔더니 동료 교사들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선생님들이 그렇게 무서운 걸 처음 봤어요." 말을 꺼내다 잠시 멈췄다. "앞으로 책을 내게 되면 그 내용을 자세히 쓸 텐데."
공립학교 최초로 전교조 분회를 공개 설립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대전 서부초등학교에서였는데 KBS에도 보도가 되었다. 학교운영위원회가 제도화되자 그는 운영위원회를 정상화하기 위해 열심히 뛰었다고 한다. 위원회 신문을 분기마다 내고, 도서관을 바꾸고, 수학여행 구조를 바꿔나갔다. 그러자 교장들이 모이는 자리에서 급기야 투정섞인 말들이 나왔다. "가명현 때문에 학교 운영을 못하겠다."
전교조 전임으로 2년을 나갔다가 현장으로 돌아오니 분위기가 되돌아가 있었다. 운영위원회도 다시 형식화됐다고 했다. 그때 깨달은 것이 있었다. "전교조만 가지고는 학교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데 한계가 있구나. 관리자도 들어가야 하고, 밑에서도 같이 하고, 이렇게 해야 변화가 되는구나." 그래서 그는 교감 시험을 준비했다. 섬 학교 근무 점수, 대학원 연구 점수를 더하니 2년 안에 승진이 가능했다.
꿀차를 들고 급식실에 갔다
교감으로 첫 발령을 받은 봉산초등학교에서 그는 교장의 권한을 대부분 넘겨받았다. 교장이 알아서 맡겼다. 모든 회의가 협의체 방식으로 바뀌었고, 학교운영위원회도 다시 살아났다.
그리고 명절이 되자 의례적인 선물이 들어왔다. 그는 두 배로 포장해서 돌려보냈다. "다시는 이런 거 하지 마시라고 했더니, 두 번 정도 하니까 그 풍토가 없어지더라고요."
아침마다 그가 먼저 간 곳은 급식실이었다. 꿀차를 타가지고 급식실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민주노총에 소속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친목 모임처럼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교장 선생님이, 우리 급식실의 비정규직들은 교감이 맡으라고 했는데, 저는 오히려 잘 지냈고, 그분들이 겪는 문제의 해결점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어요."
세종으로 와서는 혁신학교 온빛초의 교장을 맡게 되었다. 교육 목표부터 교육과정 목표까지 공모로 결정했다. 그렇게 학생, 학부모, 교직원이 함께 만드는 학교를 만들었다. "수직 구조를 공동체 구조로 바꾸면 선생님들이 신바람이 나요."
'6·10 사람책방'에서 참가자들이 자리를 당겨 앉은 채 두 사람책이 들려주는 삶의 궤적에 깊이 몰입하고 있다. 사진=이소정 시민기자
전교조 교사 식별법
이날 참가자들의 반응이 가장 컸던 순간은 1989년 노태우 정부 시절 문교부가 전국 교육청에 배포했던 이른바 ‘전교조 교사 식별법’ 공문 자료가 소개됐을 때였다.
촌지를 받지 않는 교사.
학급 문집이나 학급 신문을 내는 교사.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과 상담을 많이 하는 교사.
지나치게 열심히 가르치려는 교사.
학생들에게 자율성과 참여성을 어필하는 교사.
탈춤, 민요, 연극을 가르치는 교사.
직원회의에서 원리원칙을 따지며 발언하는 교사(소위 벌떡 교사).
아이들에게 인기 많은 교사.
학부모 상담을 자주 하는 교사.
한겨레신문이나 경향신문을 보는 교사.
웃음과 탄식이 동시에 터졌다. 한 참가자가 말했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모범교사 목록이잖아요." 가명현 선생은 잠시 웃다가 말을 이었다. "그때 우리가 싸웠던 건 저 목록이 당연한 세상을 만들자는 거였어요. 근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교육이 교사들 승진 도구가 됐잖아요." 씁쓸한 웃음이 방 안을 돌았다. 하지만 이러한 식별법을 통해 실제로 1,527명의 전국 초중등 교사가 파면 해임을 당했다.
가명현 선생은 현재 교육 현실에 대한 고민도 털어놓았다. "예전에는 민족·민주·인간화 교육이라는 방향이 분명했는데, 지금은 교육의 가치 방향성이 흐려진 느낌이에요. 교육이 승진 도구가 되어버렸고." 그는 말을 이었다. "앞으로는 민주시민교육 차원에서 다시 교육의 목표를 세우는 운동이 필요합니다."
두 선생의 이야기가 끝나자 참가자들이 의자를 당겨 앉았다. 질문이 이어졌다.
'6·10 사람책방' 강연이 끝난 후에도 참가자들은 자리를 뜨지 않은 채 세종의 교육 미래를 위한 질의응답과 소통을 이어갔다. 사진=이소정 시민기자
헌법을 모르고 사는 것은
질의응답이 시작되자 한 교사가 손바닥 헌법책 이야기를 꺼냈다. 소담초에서 3년간 5학년 아이들과 사회 시간마다 함께 읽었다고 했다. "처음으로 헌법을 읽으며 자신이 왜 대한민국 시민인지 고민하는 모습을 봤어요."
김용택 선생이 답했다. "우리가 도로교통법 없이 운전 못하잖아요. 그런데 모든 법의 법인 헌법을 모르고 살아요.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그런데 민주주의가 뭔지, 공화국이 뭔지 딱 물으면 대답을 잘 못해요. 그걸 안 가르쳐줘, 학교에서 선생님이."
학부모 참가자 한 명은 분노를 숨기지 않았다. "중3 수학 시험지를 갖고 왔는데 저도 못 풀겠더라고요. 두 번 세 번 꼬아놓은 문제들, 분명히 학원을 다녀야만 풀 수 있는 유형이에요. 세종이 인구 대비 학원 수가 전국 2위라고 하던데, 왜 공교육에서 충분히 담지 못하고 사교육 시장으로 내몰리는 건가요?"
전교조 세종지부에서 나온 교사가 답했다. "중학교부터는 모두 100점을 맞으면 난리가 나요. 등급을 매겨야 하는데, 그래야 대학 연결이 되기 때문에. 이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계속 갈 수밖에 없어요." 대화는 대학 서열 구조로, 노동시장으로 번졌다. 학교 안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학교 밖 사회 구조와 맞닥뜨리는 시간이었다.
민주주의는 현재진행형이다
행사가 끝나도 참가자들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늦은 밤까지 이야기가 이어졌다.
이날 사람책방을 기획한 한 관계자는 "민주화운동을 연표로 정리하는 것과, 그 시절을 살아낸 사람의 목소리를 직접 듣는 것은 전혀 다른 경험"이라며 "기억을 다음 세대와 연결하는 시민 아카이브로 계속 이어가고 싶다"고 밝혔다.
김용택 선생과 가명현 선생이 이날 들려준 이야기는 영웅담이 아니었다. 한 사람은 소장 절반을 잘라내고도 헌법책을 들고 다녔다. 한 사람은 확약서를 쓰고 복직해 꿀차를 들고 급식실 문을 두드렸다. 참가자들은 늦은 밤까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오늘날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런 방식으로도 만들어졌다.
질의응답이 끝난 뒤, 김용택 선생이 마지막으로 마이크를 잡았다. 바라는 것이 있다고 했다. 세종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 사무실이나 소담동 교육장 등에서, 여름방학 동안 초등학생과 중학생, 학부모들을 모아놓고 철학과 헌법을 무료로 가르치고 싶다고 했다. "PPT 파일이 다 있어요. 그걸 하고 싶습니다. 제 마지막 꿈입니다."
평범한 교육자들이 일궈낸 역사적 기억을 공유하고, 더 나은 교육의 미래를 다짐하며 한 자리에 모인 세종의 주권자들. 사진=이소정 시민기자
[알림] ‘6·10 사람책방’ 시리즈는 앞으로도 계속된다. 오는 6월 23일에는 '6·10 민주항쟁과 유병진 열사'를 주제로 양동철 전 충남대 문과대 학생회장과 황규원 유병진열사기념사업회 회장이 시민들과 만난다. 이어 7월 14일에는 이혜선 전 민주노총 부위원장과 이인배 세종민회 이사가 ‘어둠의 한복판에서 빛의 혁명을’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갈 예정이다. 각 행사는 해당일 저녁 7시, 세종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보람동 금강시티타워 708호)에서 열린다.
뉴스피치는 이 모든 소중한 기록을 민주주의 주간 기획 코너인 [피치캠페인: 빛의 혁명을 일상으로]에 지속적으로 담아낼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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