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 ‘어둠의 철학자, 혹은 ‘난해한 철학자’라고 불리기도 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말이다. 변증법의 원조로 불리는 헤라클레이토스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고 한 말은 ‘강물은 끊임없이 흐른다. 그래서 첫 번째 발을 담궜던 물은 이미 하류로 흘러가 버리고 두 번째 발을 담근 물은 첫 번째 담근 그 강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러한 변증법은 학자들의 노력으로 “변화와 연관‘이라는 철학의 법칙성을 찾아내기에 이른다.
<이미지 출처 : 임승수님의 블로그에서...>
공자의 논어 중에 '지지위지지(知之爲知之)요, 부지위부지(不知爲不知)가 시지야(是知也)' 라는 논어의 '위정' 편에 나오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아는 것'과 '아는 듯' 한 것 모두를 안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렴풋이 아는 것은 진정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을 확실히 구분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앎(知)'이라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아는 것을 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것, 이것이 진정으로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렴풋이...가 아니라 진정으로 어떻게 세상을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세상의 근본은 물질이라는 시각에서 출발해야 한다.
<세계의 근본은 물질이다>
세계의 근본은 물질이다. 나무와 산, 거리와 상점 등등은 우리의 의식과는 별도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이러한 물건들이 존재한다는 것은 눈이나 손과 같은 감각기관을 통해 알게 된다. 다시 말하면 물질이란 인간의 감각으로부터 독립하여 존재하면서 우리 감각에 의해 복사되어 인지된다. 존재하는 물질은 변화한다. 운동하지 않은 사물과 현상들은 하나도 없다. 물은 수증기로 안개로 되며, 안개는 구름으로 되고, 구름은 비로 된다. 내린 비는 흘러서 강을 이루며, 강은 모여서 바다를 이룬다. 우리가 사는 집은 분명히 한자리에 정지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지구상에 있는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에서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건물 자체는 부단하게 변화가 일어난다.
이러한 물질은 물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역학운동에서부터 열 현상, 빛 현상, 전기 및 자기현상, 원자력현상...과 같은,,. ‘물리적 운동’, 그리고 석회석이 카바이트나 시멘트로, 카바이트가 고무로, 엔진 속에 기름이 타고 물이 썩어서 거름이 되고... 하는 ‘화학적운동’, 동식물이 자라며 사람들이 크고 늙는 현상과 같은 ‘생물학적운동’, 원시사회- 노예제사회- 봉건제 사회- 자본제 사회로 변화하는 ‘사회적운동’으로 변화한다.
<물질세계의 연관>
만물은 ‘원인과 결과, 필연과 우연, 일반연관과 특수연관...’으로 서로 연관되어 ‘양적변화에서 질적변화로 이행한다. 온도가 높아진다는 것은 양적변화이다. 물이 수증기로 바뀌었다는 것은 질적변화를 가져왔다는 증거다. 사물의 진화와 발전이란 이렇게 양적변화가 질적변화를 일으키며 또 질적변화가 새로운 양적변화로 부단하게 이행하는 과정이다. 전기에는 양전기와 음전기가 있고, 자석에는 북극과 남극이 있다. 이렇게 모든 사물은 대립물로 이루어져 있다. 대립물들은 이와같이 서로 연관되고 의존하고 있으면서도 서로 투쟁하며 배척한다. 긍정과 부정이 서로 배척하면서도 선과 악도 서로 배척한다. 서로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서로 배척하고 서로 투쟁하는 두 대립물들간의 관계를 모순이라고 한다.
<모순은 사물발전의 원천이다>
모순이란 사물을 이루고 있는 대립되는 측면들, 대립물들 간에 있는 상호관계이다. 모순이 없다면 변화란 존재할 수 없다. 사물의 변화란 이와같이 ’두 대립물, 즉 새것과 낡은 것, 진보적인 것과 보수적인 것, 간의 상호관계에서 새것과 낡은 것, 진보적인 것과 보수적인 것‘과 같이 대립하는 성질이 변화하는 겻이다. 모순은 낡은 것을 소멸하고 새것을 창조하는 추동력이며 사물을 발전시키는 원천이다. 이러한 모순은 내적 모순과 외적 모순, 기본모순과 주요모순, 적대적 모순과 비적대적 모순이 서로 대립, 투쟁과정에서 변화와 진화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자연과학이든 사회과학이든 ‘보이는 것이 전부’라는 관념적 시각으로는 진실(본질)을 이해하지 못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변증법적 인식의 맹아는 ‘원인과 결과, 필연과 우연, 일반연관과 특수연관...’이라는 연관의 법칙성을 통해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기에 이르게 된다. 인간 사유의 모든 영역에서 작용하는 가장 일반적인 합법칙성은 ‘원인과 결과’, ‘본질과 현상’, ‘내용과 형식’, ‘필연성과 우연성’, ‘가능성과 현실성’이라는 법칙성을 바탕으로 인식할 때 진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아는 것'과 '아는 듯'한 것을 모두 안다고 하는 것은 인식의 오류일 뿐, 객관적인 진실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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