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세상에는 별별 사람들이 함께 산다. 키가 큰 사람, 작은 사람, 뚱뚱한 사람, 홀쭉한 사람, 돈이 많은 사람, 가난한 사람, 부지런한 사람, 게으른 사람.... 능력이나 개성만 각양각색이 아니다.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로 인연이 맺어지기도 하고 형제나 지매로, 또 친구 사이로 만나는 관계로 인연이 되어 사는 곳이 이 세상이다. 죽고 못 사는 사랑하는 사이가 있는가 하면 서로 미워하며 법정 투쟁까지 벌이는 앙숙(怏宿) 사이도 있다.
사람들은 어떻게 신분이나 재능이나 혈연으로 맺어져 한세상 더불어 사는 것일까? 일찍이 석가모니는 이러한 ‘개인의 운명이나 인간의 관계 맺어짐’을 업(業)이라고 풀이 했다. 업이란 원래 ‘행위’ ‘조작’ ‘일’ ‘짓’ 등의 뜻을 가진 말로 ‘전세 (前世)에 지은 악행이나 선행으로 말미암아 현세에서 받는 응보'를 이르는 말이다. 전생의 행위나 결과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이고 나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 업 사상은 수세기동안 계급사회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기독교에서도 우리사회의 불평등이나 개인의 능력이나 신분의 차이를 전능한 ‘신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도공(陶工)이 그릇을 만들 때 ‘귀하게 쓰일 그릇을 만들 수도 있고 천하게 씌어질 그릇도 만들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신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서야 자신의 처지를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합리적인 사고와 과학의 발달로 종교가 해석하는 이러한 논리는 신자들의 자유의지에 맡길뿐 과학적인 검증으로는 아직도 역부족이다.
내게 주어진 현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주어진 현실을 보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바꿔나갈 것인가는 개인의 신념이나 철학에 달려 있다. 인생을 일컬어 ‘유수(流水)’ 같다느니 ‘나그네’나 ‘풀의 이슬과 같다’는 말로 표현한다. 흐르는 물과 같기도 하고 잠간 있다가 떠나야 하는 나그네나 풀의 이슬처럼 ‘언제 그렇게 세월이 지났는가?’ 할 정도로 빨리도 지나간다는 뜻이다. ‘죽고 나면 끝’이기 때문에 살아 있을 동안 먹고 즐기자‘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사람마다 사는 방법이나 질이 달라진다. 철학하는 사람들은 이를 두고 ‘인생관’이라고 한다. 똑 같이 100년을 사는데 삶의 질이 천차만별인 이유는 능력이 아니라 의지요 신념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는 뜻이다. 운명론자나 허무주의자가 되어 실의와 좌절에 빠져 한평생 허송세월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보람 있게 보낼 것인가는 자신이 판단할 몫이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것이다. 지난 뒤 후회하는 사람보다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사람들은 어떻게 신분이나 재능이나 혈연으로 맺어져 한세상 더불어 사는 것일까? 일찍이 석가모니는 이러한 ‘개인의 운명이나 인간의 관계 맺어짐’을 업(業)이라고 풀이 했다. 업이란 원래 ‘행위’ ‘조작’ ‘일’ ‘짓’ 등의 뜻을 가진 말로 ‘전세 (前世)에 지은 악행이나 선행으로 말미암아 현세에서 받는 응보'를 이르는 말이다. 전생의 행위나 결과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이고 나의 운명을 좌우한다고 보는 것이다. 물론 이 업 사상은 수세기동안 계급사회를 정당화하는 이데올로기로 이용되어 왔음을 부인할 수 없다.
기독교에서도 우리사회의 불평등이나 개인의 능력이나 신분의 차이를 전능한 ‘신의 뜻’으로 풀이하고 있다. 도공(陶工)이 그릇을 만들 때 ‘귀하게 쓰일 그릇을 만들 수도 있고 천하게 씌어질 그릇도 만들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신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서야 자신의 처지를 운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합리적인 사고와 과학의 발달로 종교가 해석하는 이러한 논리는 신자들의 자유의지에 맡길뿐 과학적인 검증으로는 아직도 역부족이다.
내게 주어진 현실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주어진 현실을 보다 적극적이고 주체적으로 바꿔나갈 것인가는 개인의 신념이나 철학에 달려 있다. 인생을 일컬어 ‘유수(流水)’ 같다느니 ‘나그네’나 ‘풀의 이슬과 같다’는 말로 표현한다. 흐르는 물과 같기도 하고 잠간 있다가 떠나야 하는 나그네나 풀의 이슬처럼 ‘언제 그렇게 세월이 지났는가?’ 할 정도로 빨리도 지나간다는 뜻이다. ‘죽고 나면 끝’이기 때문에 살아 있을 동안 먹고 즐기자‘는 사람도 있다.
여기서 사람마다 사는 방법이나 질이 달라진다. 철학하는 사람들은 이를 두고 ‘인생관’이라고 한다. 똑 같이 100년을 사는데 삶의 질이 천차만별인 이유는 능력이 아니라 의지요 신념이다. 자신의 삶을 스스로 만들어 나간다는 뜻이다. 운명론자나 허무주의자가 되어 실의와 좌절에 빠져 한평생 허송세월을 보낼 것인가 아니면 스스로 삶의 의미를 부여하고 보람 있게 보낼 것인가는 자신이 판단할 몫이다. 자신의 인생은 자신의 것이다. 지난 뒤 후회하는 사람보다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
반응형
'인성교육자료' 카테고리의 다른 글
주관에서 탈피하기 (5) | 2010.11.24 |
---|---|
종교란 무엇인가?(종교관) (0) | 2010.11.23 |
사람은 왜 사는가(인생관) (0) | 2010.11.21 |
나는 누구인가(자아관)? (2) | 2010.11.20 |
역사공부 왜 해야 하지?(역사관) (0) | 2010.1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