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학교에는 성적이 90% 이상의 학생들이 들어와서 학교가 이 지경이 됐습니다.... 선생님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해 인문계 학교를 만드는 데 동참해 주십시오.”

 

임시직원회의가 있다기에 수업 마치고 손도 씻지 않고 교무실에 달려왔더니 어떤분이 하는 소리다. 교무부장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 있는 인사들의 면면을 보니 지역의 시의회의원, 도의원, 지역의 영향력 있는 기업가, 정당인 등등..... 이름만 들으면 ‘내노라’ 하는 지역의 저명인사(?)들이 앉아 있었다.

 

이게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가? 지역의 지성인들이라는 사람들이... 그 중에는 공무원인듯한 사람은 근무시간에... 선생님들을 모아놓고 자기 모교가 실업계 학교라서 후배들이 찌질한 아이들이 들어 와 학교를 버려놨다며 인문계 학교로 바꾸자며 선생님들의 협조를 구한다는 것이다. 말이 협조지 선생님들에게 반 강제적으로 서명을 받자는 수작(?)이다.

 

교장선생님의 소개로 일일이 한사람씩 인사를 마치고 대표자 격인 듯한 사람이 나서서 한다는 말이 가관이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그래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이것 저것 다 알만한 지식이이요 지역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다. 이 학교를 인문계로 버꾸면 이 학교에 들어오지 못하는 성적 하위의 아이들은 어디로 보내자는 것인가? 지성인이라는 사람, 사회 지도층 인사라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할 수 있을까?

 

몇몇 선배인사들의 설득(?)이 끝나자 사회를 맡은 교감선생님이 선생님들의 의견을 듣겠단다. 그렇잖아도 이 가당찮은 인사들의 꼴사나운 동문 살리기가 듣기 거북했는데 이대로 둬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속이 뒤틀려 있던 참이다. 눈치코치 막살하고 마이크를 잡고 일어섰다.

 

“학교 살리기는 저도 동감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00상고 후배들을 길러내는 사람들이 아니라 학생들을 교육하는 교사들입니다. 오늘 오신 분들도 다 자녀를 키우신 부모님들이잖아요?

 

장애를 가지고 있거나 선천성 질병을 가진 아이들이 더 가엾고 마음 아파가며 키우는 게 부모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로 혹은 말썽을 부리는 아이들이라고 팽개칠 수 있겠습니까?

 

이학교가 인문계가 되면 이 학교에 올 수 있었던 학생들은 어느 학교로 가야 하지요? 모교를 살리겠다는 마음은 모르는 바 아니자만 그런 여력이 있으시다면 학교가 왜 이지경이 됐는지 교과부에 달려가서 학교를 살려내는 정책을 펴라고 하는 게 옳지 않을까요?”

 

그 잘난 사람들의 눈에 꾀죄죄한 선생 따위의 말이 얼마나 비위에 거슬렸으리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러나 교육자의 양심으로 모교만 살리면 그만이라는 이 어쭙잖은 위인들에게 침묵한다는 건 내 양심이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친 김에 속에 있는 말을 다 하고 난 후에야 그 잘난 선배들과 교장선생님 얼굴을 쳐다봤더니 벌레 씹은 인상이었다.

 

명분이야 거창했다. '모교를 살리자' 이학교가 어떤 학굔데... 일제시대 이 지역에는 대조적인 두 개의 학교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학교가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하나는 인문계, 하나는 실업계 학교... ‘00고등학교’는 일본인 자녀들이 다녔던 학교로 인문계 학교다.

 

또 다른 ‘00상고’는 일제시대 가난하지만 머리 좋은 조선인 집안 아이들이 다니던 실업계 학교였다. 당시 실업계 학교였던 이 학교는 졸업과 동시 은행이나 기업체에 취업할 수 있는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다. 이 두 학교는 해방 후 정치계나 경제계 등에 진출해 성장하거나 토호세력이 되기도 했다.

 

 

 

 

필자가 마산에 살 때 이야기다.

 

고교평준화 시행 후 자기네 모교가 무너지는 참담한 모습(?)을 보고 견디다 못한 동문들이 모교 살리기 운동에 팔을 걷고 나섰다. 지역에서 똑똑하고 머리 좋은 학생들이 대를 이어 후배를 길러내야 한다는 갸륵한 마음(?)이 이들로 하여금 집단행동을 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 학교를 졸업 후 지역이나 서울에서 성공해 돈과 명예를 얻은 사람들... 가난 했던 지난 시절의 일은 기억하지 못하고 모교가 좋아야 동문이라는 연고주의 덕을 보겠다는 속 보이는 사람들이 얄팍한 속내를 드러냈던 것이다.

 

모교를 지극히 사랑하는(?) 이 잘난 선배님들의 꿈은 이루어졌을까? 당연히 막강한 파워로 교과부를 움직여 다음해 인문계 학교로 바뀌었다. 그리고 말썽피지우지 않고 성실하게 공부하는 좋은 학생들이 입학해 선배들이 바라는 학교가 됐을까? 그런데 그게 아니다. 교과부는 교육의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명분으로 교육을 상품이라며 시장판에 내놓았다. 당연히 고등학교가 "자립형 사립고, 특목고, 일반계, 실업계 고등학교 순으로 서열화됐던 것이다.

 

선배들의 꿈은 우수한 학생들은 자립형 사립고나 특목고로 뺏기고 그 나머지 아이들이 가는 학교로 서열이 하순위가 됐다. 마산을 떠나 온지 5년이 가까워 오는데 내가 근무했던 이 학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선배들은 지금쯤 뭘 하고 있을까? 또 자기네 후배들이 시원찮은 학생들이 들어온다며 일반계고등학교를 특목고로 바꾸기 위한 영향력을 행사하러 로비를 하러 동분서주 하러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이미지 출처 다음 검색에서....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