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교직원 회의를 시작하겠습니다. 모두 일어서 주십시오.”

“차렷, 경례!”

 

학교의 교직원 회의는 이렇게 시작한다. 출근하는 교문에는 선도생들이 버티고 서서 지각생이나 복장위반학생을 단속하고 있다가 선생님들이 출근하면 “성실!” 하는 구호와 함께 거수경례를 한다. 거수경례를 하는 선도생들의 훈련된 모습을 보면 학교가 아니라 군대의 위병소를 통과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든다.

 

                                                       < 이미지 출처 : 오마이 뉴스 >

 

학교는 아직 군국주의 문화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수학여행, 주번 제도, 교훈 체제(급훈-주훈), 등교지도, 규율부, 복장검사, 두발검사와 같은 식민지 교육 잔재가 그대로다. 학교에 따라서는 일주일에 한번씩 전교생을 모아 놓고 애국조례라고 하는 전체조례를 한다.

 

상장을 전달하거나 학교장이 10여분동안 훈화를 하기 위해 4~50분 이상의 시간을 소비한다. 물론 여기서도 예외 없이 “차렷, 경례!”라는 구호와 함께 학생들은 군대식으로 거수경례를 한다. 심한 경우에는 ‘학교장에 대한 경례!’라는 구호와 함께 팡파르가 울려 퍼지고 학교장은 군인처럼 거수경례로 답한다.

 

학생들에게 ‘학교생활에서 가장 자존심 상한 일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하나같이 두발검사에 걸려 머리카락을 잘렸을 때라고 한다. 머리카락이 잘린 순간 ‘죽고 싶었다’고 말하는 학생도 있다. 가위로 잘린 자국은 이발소에 가서 단장을 해도 가위자국은 그대로 남는다. 어떤 때는 학부모들의 심한 항의를 받거나 지도받던 학생들이 노골적으로 반항하기도 한다.

 

“왜 머리를 기르자고 학생회에서 의논하지 않았느냐”고 물으면 “그런 결정은 해도 필요가 없어요.”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지도교사인 학생부장의 한마디로 거절당하기 때문이다.

 

“학교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하나같이 “학생입니다.” 리고 대답한다. “주인이 자신의 일을 결정하지 못하면 주인이 아니구나” “?” 학생들은 대답을 못한다. 머리카락에 염색을 하거나 런닝 샤스를 입지않고 교복을 입는다는 것도 용납되지 않는다. 수십년 전부터 정해 내려온 교칙 ‘학생은 단정한 머리와 복장’이라는 성역(?) 규정에 도전할 용기도 용의도 없다.

 

                                                < 이미지 출처 : 오마이 뉴스 >

 

교육비젼 2002, 새학교 문화창조 추진계획에 의하면 「학교토론문화의 형성」 과제 중에서 ‘학교공동체의 공동 관심사항을 교원·학생·학부모들이 한자리에 모여 토론하고 합의 함으로써 구성원 모두가 자기할 일을 분명히 인식하고 자기 몫을 다하는 풍토를 조성한다’고 교정하고 학생회 일동의 활성화를 중심과제로 삼고 있다.

 

그러나 학교는 학생들의 최고 관심사인 ‘두발자유화’니 ‘교복자율화’같은 성역에 대해서는 불가침의 영역으로 남겨 두고 있다. 학교가 민주주의를 수련하는 장이 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하느 둘이 아니다. 자율이 없는 간섭과 통제는 교육이 아니라 순치나 노역일 수밖에 없다.

 

민주의식이 없는 교사는 민주주의를 가르칠 수 없다. 전통적인 가치가 절대적인 가치로 자리잡은 사회에서는 변화나 민주주의는 외면당할 수밖에 없다. 책임과 자율을 전재로 하는 생활의 습관화는 새 학교문호를 창조하는 교육개혁의 핵심이다. 학교는 아직도 민주주의를 체험하는 교육의 장으로서 한계가 많다.

 

직원회의가 지시전달의 장이 아니라 의결기구로 바뀌고 학생들의 동아리활동이 활성화 되는것. 민주주의는 여기서부터 시작해야한다. 지시와 통제에 익숙한 교사는 학생들을 민주적으로 가르칠 수 없다. 교과서에는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을 가르치고 자유를 배우지만 교문 안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통제와 간섭으로 민주주의는 질식한다.

 

관념적인 지식은 시합용으로는 쓰일지 몰라도 삶을 바꾸어 놓지는 못한다. 실천하지 못하는 지식인을 양성하는 학교는 머리만 있고 행동이 없는 기형인을 양산하고 있는 것이다.

 

-이 기사는 1999년 5월 27~ 6월 2일 주간지 창원신문에 썼던 글입니다.

지금의 학교 모습과 어떻게 달라졌는지 한 번 비교해 보십시오. 세상은 바끼어도 학교는 별로 달라진게 없습니다. 10여년 전의 학교 모습. 지금은 어떤지...

  

 

 

김용택의 참교육 이야기 - 10점
김용택 지음/생각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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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 예방 대책의 하나로 설치된 교실 안 CCTV가 말썽이다. 학교폭력이나 교실 내 도난 방지를 위해 교실이나 복도에 CCTV를 설치하는 학교가 늘어나자 서울시 교육청이 지난달 교실 내에 CCTV를 설치하는 것이 인권침해에 해당하는지를 인권위에 질의했다. 서울시 교육청의 질의에 대해 인권위는 "학교폭력 예방을 위해 CCTV를 설치했더라도 개인의 초상권과 사생활권, 학생들의 행동자유권, 표현의 자유 등 개인의 기본권이 제한되는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고 통보했다.

학교폭력문제가 한계를 넘고 있다는 것은 온 국민이 공감하고 있다. 다소 무리한 방법으로라도 학교폭력문제를 반드시 근절해야 한다는 게 국민들의 정서다. 인권위에서도 “개인정보보호법에서 ‘범죄예방 및 수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는 CCTV를 설치할 수 있도록 하고 있고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조사에서도 학생 30% 이상이 교실 내 범죄를 경험했다고 응답한 사실에 비추어 봤을 때 설치 목적의 정당성은 인정된다”고 했다.


인권위의 고민처럼 “교실 내 CCTV가 범죄예방 효과가 있다 하더라도 CCTV 설치로 인해 범죄 전이효과가 발생해 교실이 아닌 곳에서 범죄가 생길 가능성”도 있다. 뿐만 아니라 “교실 내 범죄예방을 위해 복도 측 창문의 시선 확보, 교사의 범죄예방 모니터링의 증대, 범죄예방 교육프로그램 등을 통해 학생과 교사의 자연 감시 수단을 확보할 수 있음에도 강력한 기본권 제약의 수단이라 할 수 있는 CCTV를 설치하는 것은 그 불가피성도 인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교실 안 CCTV설치에 관한 보도를 보고 있노라면 우리사회가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에 대한 자괴감을 지울 수 없다. 더구나 교육을 하는 학교에서, 사회성을 배우고 우정을 나눠야할 학교에서 폭력을 예방하기 위해 첨단 기기를 동원, 감시를 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은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학교폭력은 막아야한다. 그런데 CCTV라는 기계가 아니라 학교폭력을 교육적인 방법으로 해결해 보겠다는 노력을 얼마나 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삶을 배우는 학교 현장에서 통제와 단속으로 질서를 잡겠다는 것은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설사 그런 방법으로 폭력이 줄어들 수 있다고 하더라도 통제와 단속, 감시와 감독으로 비교육적인 방법을 학교가 해서 될 일이 아니다. CCTV로 감시해 줄이는 학교폭력을 줄이는 것은 임시방편일 뿐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더구나 학생들과 사전 논의나 동의도 없이 몰래 카메라처럼 설치한다는 것은 학생들을 감시의 대상으로 보는 비교육적인 학생관이다. 교육문제는 교육적으로 해결하는 게 순리다. 폭력을 근절한다는 명분으로 학생들의 사생활을 침해할 소지가 있는 CCTV를 설치하는 것은 모든 학생들을 잠제적인 범죄자로 취급하는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학교에 따라서는 학교운영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CCTV설치가 합법적인 절차를 거쳤다고 하지만 CCTV가 설치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학생들이 교실에서 폭력이나 범법행위를 할리 없다. 학교 구석구석에 수 십 개의 CCTV를 설치하면 학교폭력이 줄어들 것이라는 발상이나 정부가 CCTV를 설치하는 학교에 수백만원씩 예산을 지원하겠다는 발상 또한 비판 받아 마땅하다.

학교폭력은 근절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학교에서는 성적지상주의, 경쟁 만능주의로 수학문제까지 암기하는 천편일률적인 주입식 지식교육에 올인하고 있다. 선악을 분별하게 하거나 시비를 가리고, 무엇이 옳은 일이며, 무엇을 해서는 안 되는 일인지 가르쳐 주는 인성교육을 소홀히 하고 있다. 학교폭력문제는 감시를 통해 억제할 문제가 아니라 교육을 통해 잘잘못을 분별할 수 있도록 제대로 가르쳐야 하는 문제다.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소중함을 일깨우는 학생인권조례조차 거부하는 수준으로 어떻게 친구에 대한 사랑과 더불어 살아가는 가치관을 체화할 수 있겠는가? 통제와 단속, 감시가 아니라 선악시비에 대한 가치 내면화 없이 학교폭력을 근절할 수 없다. 늦기는 하지만 지금이라도 교실 내 CCTV 설치로 인권을 침해할 것이 아니라 교육과정 정상화를 통한 가치관 교육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이 기사는 충남인터넷신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http://news.chungnam.net/news/articleView.html?idxno=80027

 - 위의 이미지는 다음 검색에서 가져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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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인권 문제는 학교 구성원이 규칙을 만들어 자율적으로 판단해 해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던 교총이다. 학생인권조례 제정이 꼭 필요하다면 ‘교권신장조례도 함께 만들어야 할 것’이라던 교총이 이번에는 서울시의회가 ‘학생의 학습권 보호와 교육의 질 향상’을 위해 교권보호조례(교권조례)를 제안하자 반대운동을 벌이고 있다.

한국교총은 지난해 9월, 성명을 통해 “ 학생인권조례를 시행·추진함에 따라 가르치고 배우는 학교의 본질적 기능이 위축되고 있다”면서 “학생인권조례가 학생의 학습권은 물론 교권을 크게 훼손해 결과적으로 교실붕괴를 가져올 것이라며”며 학생인권조례 헌법소원 청구인단까지 모집해 반대운동을 벌여왔다.

교권조례 반대하는 교총, 교원단체 맞나...?

서울시의회 김형태의원등 11명이 제안한 서울시교권조례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

주요 내용은 ▲교원의 권리보장에 관한 기본원칙과 기본적인 권리 ▲교원의 교육활동 보호에 관한 사항 ▲교원의 차별을 금지하고 부당한 불이익 금지 및 종교의 자유 등이다.

학생이 수업을 방해하거나, 교사를 모욕하거나, 인권을 침해하거나, 학칙에 어긋나는 등의 행위를 할 때는 상담실, 성찰교실 등에서 교육적 지도를 받게 할 수 있게 했다.

구체적인 방식은 교사, 학부모, 학생이 제·개정 과정에 참여한 학칙으로 정하도록 명시했다.

학부모가 수업 및 교육적 지도를 부당하게 간섭하거나 교원의 정상적인 업무를 방해하는 행위 등을 할 경우에는 학교 밖 퇴거를 요구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게 했다....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20207_0010405729&cID=10201&pID=10200


교사들의 권리를 보호하겠다는 교권조례를 교총은 왜 반대할까?


학생인권조례가 교권을 침해한다며 교권조례제정을 요구하던 교총이 왜 교권조례를 반대하는 할까? 교총은 "교권조례가 '교원의 권리 보호'라는 명칭과는 달리 학교장과 평교사간 대립구도를 형성, 학교 내부에서 관리자와 교사간의 갈등을 양산시킬 우려가 크다"는 이유 때문이란다. 교권이란 교사들의 권리가 따로 있고 교장들의 권리가 따로 있는 게 아니다.  
교총이 반대하는 교권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교권과 인권은 상충되는 가치가 아니다. 교사에게 교권이란 교사들의 사적이익을 위한 권리가 아니라 학생들의 교육을 위해 필요한 권리다. 교권의 사전적인 의미는 ‘정치나 외부의 간섭으로부터 독립되어 자주적으로 교육할 권리’다. 다시 말하면 ‘교육자는 자신의 신념에 따라 교육’함과 동시에 ‘정치세력의 부당한 압력으로부터 벗어나 정치적 중립성을 지키며 교육할 수 있는 권리’를 말한다. 교권과 인권은 대립적인개념이 아니라 학생들의 인권을 지켜 교육다운 교육을 하기 위해 필요한 권리인 것이다.

교권이란 교사의 사적 이익이 아니라 교육의 중립성 실현을 위한 권리다 

진정한 교권이란 학생의 인권조례를 통해 지켜내야 한다. 그동안 교총은 교육의 중립성을 빙자해 유신정권이나 독재 권력의 시녀가 되기를 마다하진 않았다. 유신헌법을 지지하고 분단을 고착화하는 반공교육에 앞장섰던 교총이 권력으로부터 얻은 건 교권이 아닌 교장권강화였다. 이제 진보교육감의 등장으로 학생인권조례나 교권의 확립으로 교장들의 입지가 좁아지자 교권조례를 반대하는 자기모순에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학생들로부터 신뢰를 잃었으면 교장이나 교감에게 학교폭력을 조사할 수 있는 준사법권을 요구할까? 교권이란 교사의 사적이익이나 교장권의 강화를 위해 존재하는 가치가 아니다. 교육이란 교육자와 피교육자가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가치내면화를 통한 인간양성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통제와 단속으로 순종형 인간을 양성하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사고방식이다.

교장의 준사법권 요구는 교장권 강화를 위한 꼼수 아닌가?  

19세기의 교실에서 20세기의 교사들이 21세기의 학생들을 가르친다는 말이 있다. 전근대적인 학생관과 권위주의적인 인간관으로 지식기반사회의 학생들을 교육하겠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민주적인 가치관으로 성장시켜야 할 아이들에게 통제와 단속도 모자라 담임교사나 학생생활지도부장도 아닌 교감이나 교장에게 준사법권을 받아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교총이 학생인권조례를 비롯한 교권조례를 반대하는 것은 민주적인 인간교육을 포기하겠다는 의도 아닌가? 교육을 인격적인 만남으로 이끌어야 할 학생들을 통제와 단속으로 인권을 묵살하고 억압하겠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에 다름 아니다. 교육다운 교육이란 교권이 확립되고 학생들의 인권이 존중될 때 가능한 얘기다.

교육이 권력의 시녀노릇을 하던 시대는 마감해야 한다. 교원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미명으로 권력의 비위를 맞추며 공생관계를 맺어왔던 게 교총이다. 그런 교총이 광주와 경기도, 그리고 서울시에서 학생인권조례가 시행되자 교장권의 위축이 두려워 교권조례까지 반대하겠다는 게 아닌가? 교총은 지금부터라도 권력의 비위를 맞춰준 대가로 누리던 시혜를 버리고 학생인권조례와 교권조례를 실현을 통한 교육 살리기에 나서는게 교육자의 도리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 위 이미지들은 다음 이미지 검색에서 가져왔습니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교육정책2011.02.13 08:11



 학교! 무너지고 말것인가?
1999년 필자는 '학교애 무너져라'라는 글을 썼던 일이 있지만 아직도 학교는 건재합니다.

그러나 언재까지 학교는 이대로 버틸 수 있을까요?
필자가 13년 전에 썼던 글 한 편을 소개합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무엇일까요?


학교가 몸살을 앓고 있다. 신문, 방송, 잡지마다 야단이다. 교육이 무너진다고.....

무너질 교육은 무너져야 한다. 일제 식민지 시대의 교명을 그대로 두고 똑같은 교복에 똑같은 지식이 가치 있다고 외우기만 강요하는 교육은 무너져야 한다. 운동장에 전교생을 모아놓고 황국신민 정신을 가르치던 '월요연찬'이 애국조회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는 학교, 교과서의 내용에서부터 수학여행에 이르기까지 지시감독과 통제만 하는 교육은 무너져야 한다.


각종행사 때마다 연례행사가 되는 학생동원이며 등교시간마다 수배자를 찾는 것 같은 교문지도는 당연히 무너져야 한다. 순치를 거부하고 복종하지 않는 학생을 무조건 부도덕한 일탈 행동자로 규정하는 교육은 무너져야 당연하다.

국어, 영어, 수학을 잘해야 출세하는 교육도 그렇다. 더불어 살아가는 생각을 가진 건강한 사람들을 키우는 교육이 아니라 일등만 훌륭한 사람이라고 가르치는 학교는 용케도 무너지지 않고 지금까지 견뎌왔다.


세계는 지금 거대한 변화를 위한 대장정이 시작되고 있다. 다품종 소량생산과 신자유주의라는 적자생존의 이데올로기가 세계질서를 재편하고 있다.

회사는 관료주의의 때묻은 옷을 미련 없이 벗어 던지고 능률이라는 옷으로 갈아입고 있다. 회사마다 중간 계층이 없어지고 사장만 있고 모든 사원이 평사원으로 뛰는 체제로 바뀌고 있다.


거대한 변화의 물결 앞에 교육만 언제까지 문을 잠그고 변화를 거부할 수는 없다. 우리 교육은 지금 철학도 민족애도 없는 정책 이론가와 일부 교육관료들이 주도하는 교육개혁으로 만신창이 되어 있다.

교육여건도 교사들의 사기도 무시하고 학부모들의 정서도 외면한 채 선진국에서 폐기 처분한 교육이론을 도입하여 시행착오를 거듭하고 있다.

선진국에서 한 학급에 15명이 앉아 오손도손하는 열린교육이나 수행평가를 50명도 넘는 학생들을 모아놓고 획일적으로 실시하자는 것은 출발부터가 잘못이다.


학생들이 기존 질서체계와 통제권에 복종을 거부하는 것이 학생들만의 잘못일까? 모두들 변화를 거부하면서 학생들만 변화하기를 요구하는 것은 권위주의 교육으로 복귀를 꿈꾸는 보수적인 교육학자들의 희망사항은 아닐까?

교육은 이제 달라져야 한다. 정보와 통신기술의 발달로 모든 분야가 달라지고 있는데 학교만 기존의 교육방식의 틀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한 줄로 세우는 교육, 지식을 판매하는 방식의 교육은 거대한 변화의 물결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차례다. 획일적으로 지식을 암기하게 하고 서열을 매기는 교육이 그렇고 수우미량가의 평가의 방식이 그렇다.

교장이 되기 위해 점수에 목숨을 걸고 소신도 철학도 반납하고 평생을 점수 모으기에 목매는 승진제도가 그렇다. 현실을 외면하는 연수제도가 그렇고 관료주의의 교원 통제방식이 그렇다. 민주주의를 가르친다면서 민주주의를 교과서 속에만 가두어 두고 지시와 복종에 길들이 교육방식이 그렇다.


문제가 생기면 반성해야 할 사람, 책임져야 할 사람은 없고 힘없는 학생이나 교사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풍토도 바뀌어야 한다. 이제 학교는 학생이 주인이 되는 학교, 스스로 공부하는 학교, 학생이 인격적인 대접을 받는 학교, 민주주의를 배우고 실천하는 학교로 바뀌어야 한다.

교실붕괴를 과장하여 권위주의 교육으로 되돌아가자는 보수회귀의 논리는 경계해야 한다. 시대의 변화를 외면하고 교육다운 교육을 하지 않는다면 학교는 정말 언제 무너질 지도 모른다. (99.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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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숙아(가명), 너 어머니께 학교생활이 너무 힘든 다고 했었니?”
“예”
“뭐가 힘든지 선생님과 얘기 좀 하자”
희숙이 어머니로부터 ‘기숙사생활이 너무 힘들어 아이가 자퇴를 하고 싶다’는 전화를 받고 상담실에서 희숙이와 마주 앉았다.
“아침 여섯시 반에 일어나 운동장 열 바퀴를 도는 게 죽기보다 싫어요”
“그래? 많이 힘들겠구나. 중학교 때는 몇 시에 일어났는데?”
“일곱시 반이요”
“다른 인문계 고등학교는 몇 시까지 학교에 오는지 아느냐?”
“여덟시나 여덟 시 반에요”
“내가 알기로는 인문계 학교는 8시부터 자율학습이 시작되니까 늦어도 일곱시 전에 일어나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


올해 개교한 공립 기숙형 대안학교인 태봉고에서 기숙사생활이 힘들어 자퇴하고 싶다는 학생과 만나 상담을 하고 있다.
“왜 학교에서 기상시간을 여섯시로 정해 놓았을까? 요즈음 청소년들은 야행성(?)이라서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게 습관이 된 것 같더구나. 잘못된 습관이란 살아가는 데 평생 바꾸기 힘든거란다.
선생님의 딸(정희-가명) 얘기 한 번 들어 볼래? 지금은 초등학교 교사가 됐지만 우리 아이는 몸이 허약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아침에 일어나는 걸 너무 힘들어했단다. 중학생이 되고 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아침마다 깨워야 일어나는 게 버릇이 됐지. 딸의 잠버릇 때문에 가끔 부부싸움까지 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결국 대학생이 되고 나서도 혼자서 일어나지 못하고,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학교에 다니다가 결혼을 하고 초등학교 교사가 된 지금에도 아침에 일어나는 걸 너무 힘들어 하며 살고 있단다. 잠버릇을 비롯한 잘못된 버릇이란 이렇게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 고칠 수 없는 습관으로 굳어진단다. 특히 나쁜 버릇은 말이다. 그래도 늦잠을 자고 싶으냐?”
“그래도...”
맞는 얘긴 맞는 얘긴데 뭔가 좀 손해를 보는 것 같고 억울하다는 표정이다.
“힘 드는 건 맞지. 어른도 그런데, 한창 잠이 많은 청소년기에는 더더구나 힘들지. 교육이란 뭘까? 교육이란 자신을 바르게 세우는 일이야. 스스로에게 규칙을 정하고 그것을 습관화 하는 것, 생활화하는 거야.”
“학교급식을 왜 하는지 아니? 학교급식은 집에서 먹을 게 없어서가 아니란다. 방부제와 농약, 그리고 인스턴트식품으로 범벅이 된 식단은 입에는 즐겁지만 몸에는 해로운 음식이지 않니? 그런 음식에 길들여지면 건강을 잃게 되는 게지. 학교급식의 목적이 잘못 길들여지기 쉬운 입맛을 고치기 위해서란다.”
“그건 알고 있어요.”
“그래. 기상시간도 마찬가지야. 희숙이에게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무한정 자유가 주어진다면 감당할 수 있을까? 해야 할 일은 하고 하지 말아야할 일은 하지 않을 판단과 결단력이 있을까? 사람이란 개인적인 존재이기도 하지만 사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때로는 하고 싶지 않을 일도 해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단다. 절제할 수 없는 자유는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어.”
대안학교인 태봉고등학교에 입학하면 뭐든지 학생들이 하고 싶은 데로 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싱럽이나 인문계 학교 그러니까 지금까지 학교는 학생들이 지켜야할 생활지도 규정을 학생도 참여하지 않은 채 학교에서 일방적으로 정해 놓고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는..’ 그런 지도방식이었다. 그런데 태봉고등학교에서는 학생 스스로 교칙을 만들고 그 교칙을 지키도록 약속을 했다. 그런 과정에서 규칙이란 왜 필요하고 왜 지켜야 하는지 또 잘못된 규칙은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주는지 깨닫고 공동체 회의에서 규칙을 바꿔 스스로 행복한 학교를 만들 수 있도록 하고 있는 것이다.
희숙이는 이정도의 약속이나 규칙도 지키기 어려워 부모님께 응석을 부렸던 모양이다. 희숙이뿐만 아니다. 담배를 피우고 무단이탈하고 늦잠을 자고... 끊임없이 자신과 싸움에서 나약해지는 자신에게 패배하는 생활에 벗어나지 못하는 학생들. 이제 통제와 단속이라는 타율이 아니라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가치내면화의 교육을 하자는 것이다. 대안학교가 시도하는 교육의 이념은 스스로 자신과 싸움에서 자기를 찾아가는 배우고 가르치는 학교를 지향하고 있는 것이다.
학교는 지금까지 어떻게 생활지도를 해 왔는가? 가치내면화를 통한 행동의 변화가 아니라 타율과 복종이라는 군대식 통제와 단속으로 규제하고 주입식 교육, 상급학교진학을 위한 입시위주교육에 주력해 왔다. 말로는 민주주의를 말하고 인권을 말하면서 민주주의를 배우는 학교에는 인권도 민주주의도 찾아보기 어렵다. 타율과 복종이 지배하는 학교, 성적지상주의 학교에는 교육은 없고 일류대학을 위한 준비과정으로서 '효율과 경쟁이 살 길'이라는 구호만 난무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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