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불교2019.05.12 07:29


오늘은 2563년 전 부처님이 오신 날입니다. ‘성불하세요...^^’ 부처님이 오신 날, 오늘은 전국 사찰에서는 일제히 봉축법요식을 열고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고 각자의 자리에서 주인공으로 살아갈 것을 서원’한다. 우리나라 불교는 삼국시대부터 한국에 상륙하여 포교가 시작되었고, 남북국시대를 거쳐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약 1천년간 국가 단위에서 밀어주던 종교였다. 왕실과 불교는 깊이 유착되어 있었고 불교는 국교와 같았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표본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5년 11월 1일 기준 종교인구수는 전체인구수 4905만 명의 43.9%인 2155만 명이다. 이 중 불교 인구는 전체인구의 35%인 8,059,624명이다. 부처님이 오신 날, 석가모니불의 생애와 부처님이 바라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알아보자.



<석가모니의 생애>

석가모니의 본래 이름은 싯다르타(達多 Siddhrtha)로서 고타마는 그의 성씨였다. 석가(釋迦 kya)족 출신의 성자라 하여 석가모니(釋迦牟尼 kyamuni) 혹은 간단히 석존(釋尊)이라 부르기도 한다. 석가족은 지금의 네팔과 인도 국경 부근에 있었던 하나의 조그마한 왕국이었으며 수도는 카필라바스투였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BC 560년경(460년경으로 보는 설도 있음)에 이 왕국의 정반왕(淨飯王 uddhodana)과 마야 부인(摩耶夫人 Mahmy)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왕궁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며,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까지 두었으나 인생고의 문제를 깊이 자각한 후 29세의 나이에 왕궁을 떠나 출가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유행사문(遊行沙門)으로서 마가다 국에 가서 여러 출가 사문들을 만나 각종 명상법을 배우고 깊은 선정(禪定 dhyna)에 드는 체험을 했으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독자적인 수행의 길을 걸으면서 극심한 고행을 통해 해탈을 얻으려는 노력도 해보았지만 몸만 극도로 쇠약해지고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는 고행을 포기했다. 수자타라는 처녀가 공양하는 우유죽을 먹고 몸을 회복한 후 나이란자나 강에서 목욕을 하고 그 물을 마셨다고 한다. 그와 함께 고행을 하던 수행자들은 그가 고행을 포기했다고 비난하면서 그에게서 떠났고, 그는 홀로 숲으로 가서 이른바 보리수(菩提樹:나중에 붙인 이름으로 avattha라는 무화과 나무의 일종) 밑에서 깊은 선정에 드는 체험을 하는 중에 깨달음(菩提 bodhi)을 얻어 부처, 즉 각자(覺者)가 되었다. 진리의 깨달음으로 인해 그의 마음은 모든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탈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석존의 성불체험이었고 불교가 시작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석존은 오랫동안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맛보면서 지냈으며 자신이 깨달은 진리(法 dharma)가 너무나 심오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설법을 주저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마음을 돌이켜 교화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석존은 제일 먼저 바라나시의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자기와 함께 고행을 하던 걸식승 다섯 비구를 찾아 그들에게 고행이나 쾌락주의의 양 극단을 피해 중도를 따라 수행할 것을 말하고 '4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와 '8가지 바른 길'(八正道)에 대한 설법을 하여 그들을 제자로 얻었다고 한다. 이것이 불교의 수도 공동체인 승가(僧伽)의 시작이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

석존의 가르침을 모아놓은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에 여러 가지로 전해지고 있으나 무엇보다도 그가 성도 후 다섯 비구들을 찾아가서 행했다고 전해지는 그의 첫 설법 내용인 사성제팔정도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을 기본으로 하여 석존의 교설과 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석존은 첫번째 거룩한 진리로서 인생의 고에 관한 고성제(苦聖諦)를 설했다고 한다. 사랑하는 자와 이별하는 괴로움, 미워하는 자와 만나는 괴로움,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괴로움, 그리고 색(色 rpa)·수(受 vedan)·상(想 sajñ)·행(行 saskra)·식(識 vijñna)의 5가지 요소들의 복합체인 인간존재 그 자체가 괴로움임을 설했다. 여기서 인간존재 그 자체가 괴로움이라 함은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신체적 요소(色),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인식(識) 등의 물질적·정신적 요소들이 모두 항시 변하는 무상(無常 anitya)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것도 항구적인 만족을 줄 수 없는 괴로운 것들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고 석존은 말한다. 뿐만 아니라 위에 언급한 5가지 묶음(五蘊)들 가운데 어느 것도 나의 불변하는 자아로 취할 것이 못 된다고 한다. 석존에 의하면 인간이란 다만 수시로 변하는 요소들이 화합하여 하나의 임시적인 존재를 산출하고 있을 뿐 인간에게는 항구불변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無我 antman)고 한다. 고·무상·무아는 그가 본 인간존재의 참된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으로, 무상한 것을 항구적인 것으로, 영원불변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데도 존재하는 것으로 전도된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2번째 진리는 고집성제(苦集聖諦)로서 고가 발생하는 원인을 밝히는 진리이다. 인간 존재와 그 삶이 고인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욕구하는 갈애(渴愛)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갈애가 계속되는 한 인간은 집착(取)을 일으켜 행위(業)를 하여 그 결과(業報)로써 사후에 또다른 고통의 존재로 태어나 같은 과정을 또다시 반복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갈애 또한 원인을 갖고 있다. 갈애는 인간의 실상을 모르는 무지(無明)와 이 무지를 조건으로 하여 생긴 전생에 있어서 누적된 업력(行)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석존은 이와 같이 고를 일으키는 '복합적 조건'(集起)들을 분석적으로 설했으며 이같은 고의 조건적 발생을 연기(緣起)라 불렀다. 무지와 갈애로 인해 인간은 과거·현재·미래 세를 통해 끊임없는 생사(生死)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3번째 진리로서 석존은 이러한 고가 멸한 상태, 즉 무지와 갈애가 멸한 상태에 관한 진리인 고멸성제(苦滅聖諦)를 설했다. 이는 고가 멸한 상태(nirodha)가 있다는 진리이며 이러한 상태를 열반(涅槃)이라 부른다. 열반은 탐욕(貪)·성냄(瞋)·무지(痴 moha)의 3독(三毒)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로서 생사의 세계를 초월한 경지를 뜻한다. 열반은 과거세에 지은 업의 소산인 현재의 몸을 지닌 채로도 실현 가능하고(석존이 성도했을 때처럼) 사후에 신체를 떠나 실현되기도 한다. 후자를 반열반(般涅槃 parinirva)이라고 부른다. 석존의 입적시에 실현된 경지이다. 이런 사후의 열반에 대하여 석존 당시부터 제기되었던 문제는 인간에게는 영원불멸의 자아가 없는데 누가 열반을 체험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석존은 열반이라는 초월적 실재의 신비를 그대로 남겨두었으며 우리의 일상적 개념으로 규정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4번째 진리로서 석존은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 또는 줄여서 도제(道諦)를 설했다. 즉 고의 종식인 열반으로 가는 길, 팔정도에 관한 설법이다. 팔정도는 정견(正見)·정사(正思)·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이 8가지 수행을 셋으로 크게 묶으면 계(戒)·정(定)·혜(慧)의 삼학(三學)이 된다. 도덕적 행위와 삶(戒), 흩어진 마음의 통일과 정화(定), 사물에 대한 올바른 통찰(慧)을 닦음으로써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석존은 팔정도를 설함과 아울러 쾌락을 탐하는 삶과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주의의 양극을 피해 중도의 길을 따를 것을 가르쳤다. 중도는 8가지 수행을 올바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태도인 것이다. 석존은 이같은 고락의 중도 외에 단상(斷常)의 중도, 혹은 유무(有無)의 중도도 가르쳤다. 즉 영원한 자아가 존재한다는 상주론(常住論)도 석존은 거부했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죽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으며 업보도 내세도 없다는 단멸론(斷滅論)도 거부했다. 그러나 존재의 조건이 계속되는 한 인간은 조건적 존재로서 존속한다. 열반이란 이렇게 조건적으로 존재하는 무상하고 괴로운 인간존재 자체가 완전히 극복된 무조건적인 세계이며, 팔정도는 무지와 탐욕 같은 인생의 조건들을 극복하여 열반을 실현하는 길인 것이다.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갈망... 그것이 오늘날의 종교가 출현하게 배경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라 무엇인가? 사후의 세계란 실재하는 것인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절대자인 신은 실존하는 것인가?... 이 모든 물음에 대해 종교는 과학적인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지만 종교를 통해 평등세상을 이루고자하는 인간의 보편적 진리는 모든 인류의 염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종교는 종교가 지향하는 가치와는 다른 자본에 예속된 물질과 타협한 세속의 길을 선택해 타락의 길을 걷고 있다. 무신론이 불교가 구복신앙 혹인 기복신앙으로 변질된 것은 이를 반증하고 있다. 다시 부처님 오신 날을 맞으며 부처님이 바라던 세상 모든 불자가 성불의 길로 가는 꿈이 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 이 글은 jesusi 홈의 글을 편집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 


.....................................................................



제가 쓴 '사료와 함께 보는 한국 현대사 자료집'입니다. 전자책으로 나왔습니다.    


구매하러 가기 
==>> YES 24  알라딘,  

김용택의 참교육이야기 사랑으로 되살아나는 교육을를꿈꾸다 - ☞. 전자책 (eBOOK) 구매하러 가기... 예스24, 알라딘, 북큐브

김용택의 참교육이야기 교육의 정상화를 꿈꾸다 ☞. 구매하러 가기...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  인터파크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종교/기독교2018.07.03 06:25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세기 11)... 세상은 이렇게 신에 의해 창조되고 신의 뜻에 의해 운행되는 결정론적 세계관이 기독교의 세계다. 완전무결한 전지전능한 신 야훼와 예수 그리고 성령의 3위 일체 신이 지배하는 세계는 인간의 세계, 사후세계로 예수의 탄생 그리고 죽임을 당한 신, 재림, 심판 사후세계로 그려진게 기독교의 세계관이다.


<사진설명 :예수의 시신을 감쌌던 수의라고 알려진 ‘토리노의 수의’를 찍은 사진의 음화(감광액을 발라 현상한 것). 길이 4.36m, 폭 1.2m의 아마 천으로 예수처럼 보이는 남성의 형상이 또렷하게 보인다.>


예수가 신인가 인간인가를 두고 2000여년동안 논란이 계속되고 있지만 그 해석의 차이로 인간의 세계는 사랑과 평화가 아니라 전쟁과 공포, 증오와 고통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 예수는 신이라는 가톨릭과 선지자라는 이슬람교 그리고 가톨릭교도 종교개혁으로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고 있다. 이제 대한민국의 기독교는 누가 더 예수의 가르침대로 사는가보다 종파의 힘겨루기 국면을 맞고 있는듯 하다.

고등학교 재직시절의 얘기다. 특별실을 이동하다가 계단을 헛디뎌 발목을 삔 학생이 계단에 앉아 있기에 조심해서 다니지? 양호실로 가자면서 부축해 가는데 혼잣말처럼 이번 주는 주일예배에 안 나갔더니..." 한다. 어이가 없어 "! 하나님이 너를 밀어뜨려서 다쳤다는 말이냐? 하나님이 그렇게 할 일이 없어 너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시는 분이니?” 했더니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라서 다 아신다'는 것이다.

"설사 아무리 하느님이 전능하다고 하더라도 자비롭고 사랑이 넘치시는 분인데 어떻게 사랑하는 자녀를 넘어뜨리기야 하겠니? 너희 아버지나 어머니 같으면 네가 잘못했다고 그렇게 밀어뜨리겠니?" 했더니 선생님이 목사님보다 더 잘 알아요?” 하며 못 마땅해 한다. 언젠가 이 학생과 시간이 있어 마주 앉았는데 기독교 얘기가 또 나왔다.

명희(가명)? ‘하나님이 아니고 하느님이 어법상 맞지 않느냐?”

명희의 신비주의 종교관을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의도적으로 문제를 제기를 했다.

선생님, 성경에는 하느님이 아니고 하나님이라고 적혀 있는데요?”라고 했다.

그래, 성경을 번역한 사람이 잘못할 수도 있지 않니? 개정판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느님이라고 표기돼 있고 또 희랍어를 번역한 영문에는 하나님이 아니라 God로 기록되어 있는데...?”라고 했다.

목사님은 그게 아니라던데요?”

성경을 믿기보다 목사님의 설교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학생에게 장난기가 발동해 헌금이며 안식일 이야기를 꺼냈다.

헌금이란 정경일치시대에 국민들이 냈던 의무금이란다. 그래서 소득의 십분의 일을 내, 교회를 운영했는데 사용한 거였단다. 오늘날은 정치와 경제가 분리돼 세금을 따로 내는데 십일조를 낸다는 건 문제가 있지 않니?”

성경에 있는데요?"

"그럼 네가 알고 있는 십계명을 한번 외워 봐라고 했더니 글자한자도 틀리지 않고 외운다. 그래서 모세가 야훼로부터 십계명을 받고 호렙산에서 내려 왔을 때 유대인들은 황금 송아지 숭배하고 있었지? 그 모습을 목격한 모세는 격분한 나머지 손에 들었던 십계명 돌판을 산 밑에 내던져 깨뜨리고 야훼에게 십계를 다시 받았던 거야. 다시 받은 십계명은 이렇단다."


아모리족, 가나안족, 헷족, 브리즈족, 히위족, 여부스족과 계약도 맺지말고, 혼인도 하지 말것이며, 그들의 제단을 헐고 석상을 깨뜨리고 목상을 찍어 버려라.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숭배를 하지말라

아빕월에 누룩 안 든 빵을 먹는 무교절을 지켜라.

처음난 것은 다 내게 바쳐라. (첫 새끼 수컷은 다 여호와의 것으로, 처음 난 나귀 새끼는 양을 대신 바치고 싫으면 목을 부러뜨려 죽여라. 맏아들은 제물을 대신 바쳐라. 아무도 빈손으로는 여호와의 앞에 나타나지 못한다.)

안식일을 지켜라.

추수절과 초막절을 지켜라.

모든 남자는 한 해에 세 번씩 여호와 앞에 나타나라.

동물제물을 바칠 때 누룩 든 빵을 함께 바치지 말고, 과월절의 제물은 이튿날 아침까지 묵히지 말라.

농토에서 난 햇곡식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을 여호와에게 바치고, 숫염소 새끼를 제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

어때? 네가 외우고 있는 십계명과 많이 다르지?”

그럴 리가 없는데...”하며 어리둥절해 한다.

성경에 있는 십계명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단다.(성경의 장과 절의 구분은 편의에 따라 중세시대에 만든 것임)



1 이 모든 말씀은 하느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2 "너희 하느님은 나 야훼다. 바로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이다.

3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을 모시지 못한다.

4 너희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 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따 새긴 우상을 섬기지 못한다.

5 그 앞에 절하며 섬기지 못한다. 나 야훼 너희의 하느님은 질투하는 신이다.

나를 싫어하는 자에게는 아비의 죄를 그 후손 삼 대에까지 갚는다.

6 그러나 나를 사랑하여 나의 명령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 후손 수천 대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은 사랑을 베푼다.

7 너희는 너희 하느님의 이름 야훼를 함부로 부르지 못한다.

야훼는 자기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자를 죄 없다고 하지 않는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9 엿새 동안 힘써 네 모든 생업에 종사하고

10 이렛날은 너희 하느님 야훼 앞에서 쉬어라.

그 날 너희는 어떤 생업에도 종사 하지 못한다.

너희와 너희 아들 딸, 남종 여종뿐 아니라 가축이나 집 안에

머 무는 식객이라도 일을 하지 못한다.

11 야훼께 서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시고,

이레째 되는 날 쉬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야훼께서 안식일을 축복하시고

거룩한 날로 삼으신 것이다.

12 너희는 부모를 공경하여라. 그래야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주신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13 살인하지 못한다.

14 간음하지 못한다.

15 도둑질하지 못한다.

16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못한다.

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못한다. 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이나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네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지 탐내지 못한다."

어떤가? 십계명이 아니고 17계명이지? 이래도 성경의 일점일획도 바꿀 수 없다고 하겠니? 십계명이 하도 살벌하니 시대에 맞게 고친 것 아닌가? 초기 십계명은 나 외에 아무도 섬기지 말라고 했는데 부모의 효가 들어가야 대중에게 잘 먹히니 부모에게 효도하라고 고치지 않았니?

시작한 김에 확실하게 쇄기를 박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주일을 지키는 문제도 한 번 보자.

안식일의 근거가 되는 신명기 513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라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거룩하게 지키는 게 어떤 것인지 한 번 볼래?”

안식일에는 헛소리를 하지 않는다.

그의 이웃에서 아무것도 빌리지 않는다.

성 밖에서 천 걸음 이상 다니지 않는다.

안식일에는 헛소리나 빈말을 하지 않는다.

안식일에는 즐거운 일(돈벌이)을 하려고 들판을 걸어 다니지 않는다.

미리 준비한 것 외에는 안식일에 먹지 않는다.

거류지 이외에서 물을 마시지 않는다.

(가축을) 주먹으로 때리려고 손을 들어 올리지 않는다.

안식일에는 봉한 그릇을 열지 않는다.

안식일에는 나가고 들어오는데 향수를 몸에 지니고 다니지 않는다.

바윗돌이나 흙덩어리를 주워 내지 않는다.

안식일에는 남종과 여종과 고용인을 꾸짖지 않는다.

가축이 안식일에 새끼를 낳게 하지 않는다. 만일 (가축이 그 새끼를) 웅덩이나 구덩이에 떨어뜨려도 안식일에 그것을 잡아 올리지 않는다.

누구든지 안식을 속되게 하면 그는 죽을 것이다.(출애굽기 31, 14)

..........................

..........................



이런 안식일 규례를 다 지킬 수 있겠니?”

이런 일이 있고 난 후 이 학생은 나와 마주치면 형식적인 인사만하고 피해 다녔다. 후에 다른 학생에게 예기 들으니 명희가 내 얘기를 목사님께 했더니 마귀들린 사람과 얘기하면 시험에 든다고 만나지 말라고 했단다. 졸지에 필자는 마귀들린 사람이 되고 말았다. 아마 좋은 말로 마귀들린 사람이라고 했겠지만 사실은 마귀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느님은 신자들 수준만큼 보인다. 하느님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는 사람들은 사랑의 하느님이 아니라 공포의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격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부모님의 사랑보다 더 깊고 넓은 아카페 사랑이라고 하는데.... 인간의 과오나 실수도 이해하고 용서해 주시는 분이라고 믿어야 하지 않을까? 목회자들이 신자들에게 지옥을 강조하고 불안감을 심어주는 것은 목회자로서 올곧은 자세가 아니다. 성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32)'고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



오늘도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학생들을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가족들의 아픔에 함께 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손바닥헌법책 보급운동에 함께 합시다 - '헌법대로 하라!!! 헌법대로 살자!!!' 


==>>동참하러가기 [손바닥헌법책 선물하기 운동!!!"한 권에 500원 후원으로 최고의 선물을 할 수 있어요!!"

'김용택의 참교육이야기-공교육의 정상화를 꿈꾸다' 

☞. 구매하러 가기... 교보문고 바로가기yes바로가지, 알라딘 바로가기  인터파크 바로가기 


'김용택의 참교육이야기-사랑으로 되살아 나는 교육을 꿈꾸다'  

 ☞. 전자책 (eBOOK) 구매하러 가기.. 예스24 바로가기  , 알라딘 바로가기, 북큐브 바로가기 


<아리스토텔레스, 이게 행복이다> 생각비행이 출간한 1318청소년 시리즈 제 2탄  


방황 하는 아이들에게 삶이 무엇인지, 왜 사는지, 행복이란 무엇인지... 아리스토텔레스를 배울 수 있는 책. 구매하러 가기 ▶ 예스 24


제가 쓴 '사료와 함께 보는 한국 현대사 자료집'입니다. 전자책으로 나왔습니다.    


구매하러 가기 
==>> YES 24  알라딘,  반디앤루이스, 리디북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종교2008.12.07 22:56



교회를 나가보면 목회자들이 가장 강조하는 게 기도다. 그런데 참 이해 못할 일이 있다. 성서를 보면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마 6:8)라고 했는데 왜 자꾸 기도를 하라는 걸까? 다른 성경을 보면 이런 구절도 나온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아비 된 자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눅 11:9-13) 마가복음서에는 하나님이 다 아시는데, 구하기 전에 다 채워준다고 했는데 누가 복음서에는 구해야 주신다고 했다.

기도란 무엇인가? 목회자들은 기도를 많이 할 것을 주문하고 있지만 기도란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는 바르게 가르쳐 주지 못하고 있다. 사전을 보면 기도(祈禱)란 ‘인간보다 능력이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어떤 절대적 존재에게 빎. 또는 그런 의식’이라고 정의해 놓고 있다. 기독자라면 기도를 할 줄 알아야한다. 그렇다면 신에게 무엇을 빌 것인가? ‘내가 배가 고프니 먹을 것을 달라’고 앉아서 하루 종일 앉아 빌어도 밥을 차려다 줄 그런 신은 없다. 우리남편이 출세하고 내 아들이 유명대학에 합격하고.. 이런 기도를 들어 줄 신도 없다.

기독교나 불교의 교의는 샤머니즘에서 하는 ‘가정의 평안이나 개인의 부귀영화를 주문’하는 것을 기도라 하지 않는다. 불교에서 기도라면 해탈을 위한 자기희생이요, 중생을 위한 보시라고 이해할 수 있다. 기독교라고 별 차이가 있을 수 없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기도는 구복이 아니라 타인에 대한 자기 헌신이며 구체적인 봉사의 실천이 아닐까? 예수가 자신을 제물로 내놓아 속죄의 제물이 된 것처럼 말이다. 내 아들이 시험에 합격하기 위해서라면 이웃의 아들은 낙방해도 좋다는 건 기도가 아니라 주문(呪文)이다.  

내 아들이 합격하면 누군가 떨어져야 하고 내가 돈을 벌면 누군가는 손해를 봐야 하는 상대론적 시각이 없이 ‘내게 이익만 된다면...’ ‘무조건 복을 주십시오’라는 기도란 주문에 가깝다. 지도자의 책임이 크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일 게다. 나와 가정의 행복을 비는 것이 기도라고 아는 신자들이 사는 공동체는 진정한 신앙공동체가 아니다. 나의 희생으로 상대방에게 행복을 주겠다는 끝없는 사랑을 실천하는 기독교나 보시를 실천해 중생구제를 하겠다는 부처의 마음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나의 이익이나 추구하는 좀스런 기도를 하고 있다면 그런 기도를 들어줄 신이 있을까?
1987년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물고문을 당하다 비명에 갔다. 젊은이를 끌어다 수배된 친구의 행적을 대라며 온갖고문을 하다 죽자 ‘책상을 탁치니 억하고 죽었다’고 발표해 온국민이 분노했을 때다. 60항쟁의 발단이 되기도 했던 당시 감리교의 한 속회모임에서 필자는 이렇게 기도했다.

박종철의 죽음에 부쳐

주여 !
우리는 방관자들입니다.
21살의 꽃다운 젊음을 죽인 공모자들입니다.

그가 욕조에서 숨막혀 할 때
우리의 손들이 그의 목을 졸랐고
우리 눈들이 외면하고 우리 입들이 조소하였나이다.

그렇게도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고
정의를 외치던 작은 예수가
주님의 가신 길을 십자가를 지고 따라갔습니다.

주님 !
몇 명의 이삭이 더 있어야 이 땅이 하늘나라가 되겠습니까?
얼마나 많은 젊음이 피를 흘리고 질식하고, 피멍이 들어야
우리의 소원이 성취되겠습니까?

이제 우리는 박종철 열사와 역사 앞에
더 이상의 방관자가 될 수 없습니다.
침묵의 미덕을 운운할 면목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만 가슴을 치고 통회할 위선을 벗어야겠습니다.
불의의 들러리가 될 수 없습니다.
위선으로 화장하고 위선자의 가면을 쓰고 있을 면목이 없습니다.

주여 !
우린 이제 밥값을 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나이 값을 해야 할 때도 됐습니다.
피 값을 외면할 면목이 없습니다.

박종철 열사의 아픔이, 그 가족의 가슴에 맺힌 한을
우리들에게 나누어주십시오.
아 ! 그는 갔습니다. 우리의 불의를 꾸짖기 위해 갔습니다.

찬란한 승리자가 되어 고통도 죽음도 불의도 이기고
삼천리 방방곡곡에 부활의 씨앗이 되기 위하여 갔습니다.

주님 !
이제 그의 영혼을 쉬게 하시고
그가 못 다한 일들을 감당하는 도구로 저희들을 써 주십시오.


이 땅의 온갖 불의와 거짓과 위선의 껍질을 벗게 해주시고
이일을 계기로 주님의 살아 계심을 확인하게 해주십시오.
살아 있음이 그의 죽음을 욕되지 않게 해 주소서 !
예수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아 멘-

 생선장수에게는 생선냄새가 나야 하듯 예수를 믿으면 예수냄새가 나야 한다. 날아갈듯한 옷을 입고 성당에 앉아 짜여진 형식에 맞춰 가슴을 치고 울부짖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다. 최루탄 냄새가 천지를 진동하고 죄없는 젊은이가 고문으로 혹은 녹화사업으로 죽어 가고 있을 때 가장 확실한 기도는 불의한 자들을 향해 돌을 던지는 일이다. 총을 들고 무고한 시민을 학살하고 있는데 성당에서 거룩하게 ‘내탓이오, 내탓이오‘하고 가슴을 치는게 어떻게 기도라고 할 수 있는가? 나의 기도가 이루어진 셈일까? 필자는 이 기도 후 구속수배를 당하면서 해직의 길을 걸어야 했다.

 신은 어떤 존재일 때 찬미의 대상이 되는가? 십자가의 길이나 외우고 묵주기도 몇 단을 바치면 하느님이 기뻐하실까? 울부짖고 매달리는 사람에게 더 많은 축복을 주는 신은 찬미의 와 존경의 대상이 아니다. 신이 전지전능하다면 이미 구하기 전에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고 있어야 옳다. 신앙은 신자의 신앙수준에 따라 신의 수준도 달라진다. 이름은 같은 하는님이지만 신자들은 각각 다른 신을 섬긴다면 이는 목자의 책임이다. 어떤 이는 구복 신을, 어떤 이는 공포의 신을, 어떤 이는 사랑의 신을, 어떤 이는 자비의 신을 섬기면서 같은 천국에 가기를 바랄 수 있을까? 어떤 신을 섬기든, 기도는 주문(呪文)이 아니고 사랑의 실천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은 스스로 돕는 이를 돕기 때문’이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종교2008.11.03 20:00


“교회를 다닌다고 다 기독교인인가. 아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이 기독교인이다.” 요한복음 강해를 앞두고 1월 31일 기자들과 만난 김용옥 교수(세명대 석좌)가 당신은 “기독교인이 아니지 않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지식인은 참 편리해서 좋겠다. 입장이 곤란하면 어려운 말로 적당히 지나가면 된다. 김용옥교수의 대답도 그렇다. 이번 회견에서 김교수는 당신은 ‘예수를 믿는가?’라는 질문에는 “나는 예수를 믿는다. 내 안에 예수에 대한 심상이 있다." 이렇게 알듯 모를 듯한 말로 적당히 지나갔다.



만약 김교수에게 내가 질문을 할 기회가 있었다면 “예수님은 사람인가 신인가?” 이렇게 물어보고 싶다. 민감한 문제, 논란이 될 문제는 대중언어가 아니라 언술적인 유희로 통과하는 게 지식인의 장기일까? 사실 예수가 ‘신인가? 아니면 사람인가?’는 해묵은 그러나 끝나지 않은 논쟁이다.

크리스트(구세주) 탄생을 학수고대하던 유대인들도 ‘나는 하느님의 아들’라는 예수의 말에 신성을 모독했다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기독교인들조차 “예수는 신이다”와 “예수는 신성이 있다”는 말은 전혀 성격이 다르지만 이것을 거의 구별하지 않는다. ‘신이다‘라고 간주하는 것과 ’신성이 있다‘는 표현은 결론이 같을 수 없다.


예수를 신이라고 보는 측에서도 예수님께서 "나는 신이다"라고 직접 말씀하셨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요 1:) 『1절: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는 구절을 인용해 삼위일체, 혹은 ‘예수=신‘으로 추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 밖에 마태복음은 왕이신 예수, 마가복음은 노예이신 예수, 누가복음은 사람이신 예수, 요한복음은 신성 방면에서의 ’하나님과 하나‘라는 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측에서는 성서만으로는 예수가 신이라는 증거도 없고, 신이 아니라는 증거도 없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믿음’으로써 예수의 신성을 인정할 뿐이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크리스천이자 수도사였던 윌리엄 오브 오캄은 ‘예수는 신이 아니라는 것이 해답’이 된다고 말하고 ‘그래야만 수수께끼 같은 삼위일체, 복음서의 억지스런 구약인용, 압제 세력인 로마의 미화, 예수의 수많은 이적을 목도하고 들었음에도 예수의 메시아임을 부인하고 십자가에 매달아버린 유대인의 안타까운 선택이 설명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밖에도 ‘비록 예수님이 하나님 자신이 아닐지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이라고 볼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은 유리병과 꿀이 따로 있었는데 어느 날 유리병 속에 꿀을 담아 놓았다. 이를 무엇으로 불러야 하는가? 이를 두고 ‘예수님 속에 임한 하나님’이며 ‘그 분을 하나님이라고 불러도 무방하지 않느냐?’는 ‘신인합일(神人合一) 사상’이다.

신인이 합일되어 있다면 그 사람을 보고 신이라고 불러도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은 ‘예수님을 하느님과 완전 동일하게 보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꿀과 유리병이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수가 신이 되는 과정은 니케아 종교회의시대를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마르키아누스황제가 소집한 제4차 종교회의에서는

「1.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에도 완전, 인성에도 완전하다.

2.그리스도는 참 신이며 참 인간으로 이성 있는 영혼과 육체를 소유하였다
3.신성은 성부와 같고 인성은 우리와 같으나 죄가 없다.
4.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성으로 동정녀에게 출생하심」을 결의하게 된다.
예수가 신인가 아니면 사람인가 즉 삼위일체논쟁은 기독교가 존재하는 한 끝나지 않을 논쟁으로 보인다.

예수님이 신이기 때문에 두려워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신앙에 진정 도움이 될 수 있을까? 신성을 강요하면 하느님은 두려움의 대상, 공포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 신이기 때문에 두려워서 섬기도록 하는 신앙은 구복신앙으로 만들 가능성이 크다.

물론 신앙이란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생겨났지만 신의 두려움이 아니라 이성을 통해 자신을 절제하는 성숙한 신앙을 갖도록 가르치는 것이 목자가 해야 할 일이 아닐까? 예수님은 인간이라는 측면을 강요하면 더더욱 존경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의 권력 앞에 고개를 숙이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데 그분만이 유일하게 권력과 맞섰지 않은가?


과거에 잘잘못이 있어도 현재 제대로 옳은 길을 가고 있다면 덮어두고 싶은 게 나의 개인 적인 심정이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한국교회는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이성을 잃고 막가파식으로 가고 있다는 감을 지울 수 없다. ‘천국과 지옥을 강요해 착한 사람을 겁주고 제정일치시대가 아님에도 십일조를 강조해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고 있다고 십일조를 강요하고 있다.

김용옥교수가 말한 것처럼 ‘예수가 ’신인가 인간인가‘ 하는 것과 예수처럼 사는 것’ 중에 어떤 것이 중요할까? 주객이 전도됐다고 해야 하나? 예수 없는 교회, 예수 없는 신앙... 그게 오늘날 한국교회 모습이다. 천국과 지옥을 강요하고 헌금의 액수나 신자의 수로 교세를 과시하는 그래서 '이 땅이 하늘나라가 되기를 바라면서' 오염된 세상에는 침묵하고 개인 구원만 강요하는 교회가 한국교회다.


한국교회가 타락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신부나 목사들이 져야 한다. 솔직히 말하면 대부분의 목자들은 성서를 바로 가르치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인들 중에는 하느님을 믿는지 샤머니즘을 신봉하는지 구별이 안 된다. 교회나 성당에 나와 복이나 빌고 죄의식에 사로잡혀 반 주체적인 운명론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솔직히 같은 성당이나 교회에 나오는 사람치고 같은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이러한 혼란은 모두 목회자가 책임져야할 문제다. 죽어서 천국에 가기 위해 준비나 하는 교인은 예수가 바라는 인간상이 아니다. 교인들을 예수처럼 살도록 가르치지 않고 내세구복사상을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떻게 살았는가? 예수님은 불의를 보고 무섭게 화를 내신 분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온유하기만 하신 분인 줄 알지만 교회당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었다, 내쫓으셨다, 쏟으셨다, 또 엎으셨다’ 라는 표현에서 그는 불의를 보고 불같이 화를 내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의 불의를 못본 채 하고 내세만 준비하라고 가르치는 목자는 참 목자가 아니다. 식민지시대를 거쳐 독재정권과 군사정권 아래서 ‘권력은 위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다’며 그들을 위해 조찬기도나 하고 사회의 부정과 비리에 침묵하게 만드는 목자는 목자가 아닌 적그리스도다.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권력을 도둑질한 전두환을 위한 조찬기도회는 하는 목사님들>

이러한 왜곡된 신앙은 결국 신에게 돌아 가야할 찬미를 목회자인 신부나 목사가 가로채 자신이 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독재자는 민중이 비판의식을 가지거나 합리적인 사고를 하기를 원치 않는다. 자신의 입지가 좁아지기 때문이다. 기독교도 그렇다. 근시안적인 안목에서 보면 신지들이 내세나 준비하고 복이나 비는 그런 신앙이 편하고 좋을지 모르지만 역사는 변하고 민중은 깨어난다.

그럴 경우 기독교는 한꺼번에 무너지고 말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른 건 모두 덮어두더라도 이 한 가지. 예수를 신으로 가르치더라도 그 신은 ‘전지전능의 공포의 신이 아닌 사랑의 신’이라는 사실. 그리고 예수가 신인가 아닌가? 그게 아니라 나는 과연 예수처럼 살고 있는가? 그게 문제다. 분명한 사실은 지옥을 강조해 순진한 신자들을 겁주는 종교지도자는 양을 인도하는 목자가 아니다.... (계속)


- 2007년 2월 8일 썼던 기사입니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TAG , 예수, 인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