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2020. 2. 26. 07:22


- 불교는 신이 없습니다 -


“인간이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절대자인 신에게 빌면 소원 성취할 수 있다”.... 대부분의 종교인들의 종교관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는 신을 섬기고 따르면 복을 받고 천국에 갈 것이라고 믿는다. 기독교의 경우가 특히 그렇다, 불교도 그럴까? 불교는 기독교처럼 전지전능한 신이 없다. ‘부처님이 신이 아닌가?’라고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부처님은 기독교의 예수처럼 절대자도 아니요, 신도 아니다. 불교는 ‘자신의 주인은 자신이요, 부처님에게 귀의할 뿐, 귀의하는 것과 신이나 주인으로 섬기는 것과는 다르다’거 가르친다. ‘부처님은 섬김의 대상이 아니라 다만 후원자요, 조력자’일 뿐이라고 가르친다.



“나는 절대 신이 아니다. 나는 평범한 인간이다. 절대로 내가 죽거든 나를 섬기지 말라” 부처님의 유언이다. 아난다는 라는 제자가 부처님께 물었다. “스승이여 당신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신이요 천사요”, 석가는 “나는 신도 천사도 아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 “나는 깨달은 사람에 불과하다. 나는 달이 아니라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하다. 절대로 나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너 자신과 진리를 위해 수도해라, 나를 의지하지 마라,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대답했다.


불상은 부처님의 모습이다. 불상의 변천 과정을 살펴보면 처음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불상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에 묵상을 하다 불상을 마들기 시작했다. 그것도 처음에는 목불을 만들다 다음에는 철불이나 청동불, 금불로 바뀐 부처님상을 어렵지 않게 만나 볼 수 있다. 충북 보은군 속리산에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5교구 본사인 법주사가 있다. 근대 이전에 만들어진 목탑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팔상전을 비롯한 금동미륵불상이나 각종 국보들을 많이 보유하고 있는 절이다. 법주사에는 높이 33m 순금 80kg으로 도금한 동양최대의 거대한 금동불상이 있다. 나무보다 철로 철보다 금동이나 금으로... 또 크기가 커면 더 영험이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일까? 거대한 부처님 상 앞에 위압감을 느끼게 된다.


불교의 교의는 무엇일까? 불교에서 붓다(Buddha)는 한자어로 부처(여래, 세존, 붓다) 즉 ‘깨달은 자’(눈을 뜬자)라는 뜻이다. 보통 부처라고 하면 석가모니불로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과거 가섭불, 현세 석가모니불, 미래 미륵불이 있다. 불교의 교의는 불타, 즉 카필라국 정반왕과 마야부인의 사이에서 태어난 고다마 싯달타의 도움을 받아 깨닫는 자(부처)가 되는 것이다. 오늘날 불교도는 이 깨닫는 자(부처)가 되는 게 신앙의 목표다. 신앙의 대상은 국보(불,법,승)인데, 부처가 되기 위한 과정인 3법인(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숙정)과 사성제(고성제, 집성제, 멸성제, 도성제)와 8정도(정어, 정사유, 정정, 정명, 정정진, 정염, 정견 정업)를 통해 부처가 되기 위해 수행하는 것이다.



불교는 기독교처럼 3위일체신인 절대신을 믿으면 구원을 받고 영생을 얻는 종교가 아니다. 불교의 구원관은 ‘존재가 없어지는 것’, 완전히 ‘무(無)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해탈(解脫) 즉 열반(涅槃)이라고 한다. 불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없어지는 것, 무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를 위해 3법인을 깨닫고 8정도를 통해 스스로 해탈하는 것이 불교의 교리다. 전생(前生)에 행했던 업보(業報)에 따라 일어나는 업인에 따라 천상, 인간, 수라, 아귀, 지옥, 축생에 태어나 죽고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벗어나는 것. 그것이 불자가 부처님의 도움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닌가? 불겨 어디에 돈이나 권세를 사랑하라고 가르쳤는가?


철저하게 무신론인 불교가 왜 입시철만 되면 자녀의 합격을 기원하고 가족의 건강회복을 기원하는 종교로 변했을까? 기독교가 그렇듯이 성경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자기종파의 교세확장을 위한 종교지도자의 잘못된 가르침 때문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이나 부처님의 가르침보다 목사나 승려의 능력을 믿는 신자들이 늘어나기 때문이 아닐까? 예수는 한 사람인데 왜 가톨릭교와 동방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로 분파되고 개신교만하더라도 무려 374개 교파 갈라져 있는가? 불교는 어떨까? 우리나라의 불교 교단은 개신교의 374개 보다 무려 108개가 많은 482개다. 한국불교 대표 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은 사찰수 3,185개, 태고종은 사찰 수 3,526개, 천태종은 사찰 수가 160개다.


‘타락한 종교는 마약보다 무섭다’고 했다. 1843년 카를 마르크스는 왜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을까? 버스 정류소나 기차 역 앞에서 전도지를 들고 ‘예수천국 지옥 불신’을 외치는 기독교인들... 공휴일이면 어김없이 광화문광장에 나타나는 태극기 부대를 보면 성서의 가르침과는 거리가 멀다. 불교도 예외가 아니다. 도박에 빠진 스님들... 최근 광화문광장에 나와 살불살조를 외치는 성호스님의 모습. 불교신문이 폭로한 “변태불교, 갱단, 빨대…”기사를 보면 이들이 종교인이 맞는지 의심이 든다. 종단 내분으로 태고종 소속 스님들이 상대편을 제압하기 위해 각목과 망치, 절단기 등 흉기를 들고 싸우는 모습은 사람들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내세를 준비하는 기독교인들이나 수도를 통해 부처가 되기를 바라는 스님들이 내세가 아닌 현실에 더 집착해 돈이나 권력을 교조의 가르침보다 더 사랑하는 추태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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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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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모든것은 내 마음에 달려 있는것 같습니다.

    2020.02.26 07:4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2. 요즘 힘든 상황이죠? 콜로나 바이러스때문에 온 국민이 공포에 떨고 있을 것 같아요.
    이런때 종교적 힘을 빌어서 극복하는 것도 좋은 방법인 것 같아요.

    2020.02.26 21:17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 그랴지요. 그런데 신천지교가 말썽입니다. 자신이 교인이라는 것을 감추고 명단제출조차 거부하고 있답니다.

      2020.02.27 06:10 신고 [ ADDR : EDIT/ DEL ]

종교/불교2019. 5. 12. 07:29


오늘은 2563년 전 부처님이 오신 날입니다. ‘성불하세요...^^’ 부처님이 오신 날, 오늘은 전국 사찰에서는 일제히 봉축법요식을 열고 ‘차별 없는 세상을 만들고 각자의 자리에서 주인공으로 살아갈 것을 서원’한다. 우리나라 불교는 삼국시대부터 한국에 상륙하여 포교가 시작되었고, 남북국시대를 거쳐 고려가 멸망할 때까지 약 1천년간 국가 단위에서 밀어주던 종교였다. 왕실과 불교는 깊이 유착되어 있었고 불교는 국교와 같았다. 2015년 인구주택총조사 표본조사 결과에 따르면 2015년 11월 1일 기준 종교인구수는 전체인구수 4905만 명의 43.9%인 2155만 명이다. 이 중 불교 인구는 전체인구의 35%인 8,059,624명이다. 부처님이 오신 날, 석가모니불의 생애와 부처님이 바라는 세상은 어떤 세상인지 알아보자.



<석가모니의 생애>

석가모니의 본래 이름은 싯다르타(達多 Siddhrtha)로서 고타마는 그의 성씨였다. 석가(釋迦 kya)족 출신의 성자라 하여 석가모니(釋迦牟尼 kyamuni) 혹은 간단히 석존(釋尊)이라 부르기도 한다. 석가족은 지금의 네팔과 인도 국경 부근에 있었던 하나의 조그마한 왕국이었으며 수도는 카필라바스투였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BC 560년경(460년경으로 보는 설도 있음)에 이 왕국의 정반왕(淨飯王 uddhodana)과 마야 부인(摩耶夫人 Mahmy)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왕궁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했으며, 야소다라와 결혼하여 아들 라훌라까지 두었으나 인생고의 문제를 깊이 자각한 후 29세의 나이에 왕궁을 떠나 출가 수행자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유행사문(遊行沙門)으로서 마가다 국에 가서 여러 출가 사문들을 만나 각종 명상법을 배우고 깊은 선정(禪定 dhyna)에 드는 체험을 했으나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독자적인 수행의 길을 걸으면서 극심한 고행을 통해 해탈을 얻으려는 노력도 해보았지만 몸만 극도로 쇠약해지고 아무런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는 고행을 포기했다. 수자타라는 처녀가 공양하는 우유죽을 먹고 몸을 회복한 후 나이란자나 강에서 목욕을 하고 그 물을 마셨다고 한다. 그와 함께 고행을 하던 수행자들은 그가 고행을 포기했다고 비난하면서 그에게서 떠났고, 그는 홀로 숲으로 가서 이른바 보리수(菩提樹:나중에 붙인 이름으로 avattha라는 무화과 나무의 일종) 밑에서 깊은 선정에 드는 체험을 하는 중에 깨달음(菩提 bodhi)을 얻어 부처, 즉 각자(覺者)가 되었다. 진리의 깨달음으로 인해 그의 마음은 모든 번뇌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해탈을 얻은 것이다. 이것이 석존의 성불체험이었고 불교가 시작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깨달음을 얻은 석존은 오랫동안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맛보면서 지냈으며 자신이 깨달은 진리(法 dharma)가 너무나 심오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설법을 주저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마음을 돌이켜 교화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석존은 제일 먼저 바라나시의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자기와 함께 고행을 하던 걸식승 다섯 비구를 찾아 그들에게 고행이나 쾌락주의의 양 극단을 피해 중도를 따라 수행할 것을 말하고 '4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와 '8가지 바른 길'(八正道)에 대한 설법을 하여 그들을 제자로 얻었다고 한다. 이것이 불교의 수도 공동체인 승가(僧伽)의 시작이었다.

<석가모니의 가르침>

석존의 가르침을 모아놓은 경장(經藏)과 율장(律藏)에 여러 가지로 전해지고 있으나 무엇보다도 그가 성도 후 다섯 비구들을 찾아가서 행했다고 전해지는 그의 첫 설법 내용인 사성제팔정도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이것을 기본으로 하여 석존의 교설과 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석존은 첫번째 거룩한 진리로서 인생의 고에 관한 고성제(苦聖諦)를 설했다고 한다. 사랑하는 자와 이별하는 괴로움, 미워하는 자와 만나는 괴로움,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는 괴로움, 그리고 색(色 rpa)·수(受 vedan)·상(想 sajñ)·행(行 saskra)·식(識 vijñna)의 5가지 요소들의 복합체인 인간존재 그 자체가 괴로움임을 설했다. 여기서 인간존재 그 자체가 괴로움이라 함은 인간존재를 구성하는 신체적 요소(色), 느낌(受), 생각(想), 의지(行), 인식(識) 등의 물질적·정신적 요소들이 모두 항시 변하는 무상(無常 anitya)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 어느 것도 항구적인 만족을 줄 수 없는 괴로운 것들이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라고 석존은 말한다. 뿐만 아니라 위에 언급한 5가지 묶음(五蘊)들 가운데 어느 것도 나의 불변하는 자아로 취할 것이 못 된다고 한다. 석존에 의하면 인간이란 다만 수시로 변하는 요소들이 화합하여 하나의 임시적인 존재를 산출하고 있을 뿐 인간에게는 항구불변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無我 antman)고 한다. 고·무상·무아는 그가 본 인간존재의 참된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괴로운 것을 즐거운 것으로, 무상한 것을 항구적인 것으로, 영원불변의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데도 존재하는 것으로 전도된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2번째 진리는 고집성제(苦集聖諦)로서 고가 발생하는 원인을 밝히는 진리이다. 인간 존재와 그 삶이 고인 것은 우리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욕구하는 갈애(渴愛)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갈애가 계속되는 한 인간은 집착(取)을 일으켜 행위(業)를 하여 그 결과(業報)로써 사후에 또다른 고통의 존재로 태어나 같은 과정을 또다시 반복하게 된다. 그런가 하면 갈애 또한 원인을 갖고 있다. 갈애는 인간의 실상을 모르는 무지(無明)와 이 무지를 조건으로 하여 생긴 전생에 있어서 누적된 업력(行)에 의해 생기는 것이다. 석존은 이와 같이 고를 일으키는 '복합적 조건'(集起)들을 분석적으로 설했으며 이같은 고의 조건적 발생을 연기(緣起)라 불렀다. 무지와 갈애로 인해 인간은 과거·현재·미래 세를 통해 끊임없는 생사(生死)의 악순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3번째 진리로서 석존은 이러한 고가 멸한 상태, 즉 무지와 갈애가 멸한 상태에 관한 진리인 고멸성제(苦滅聖諦)를 설했다. 이는 고가 멸한 상태(nirodha)가 있다는 진리이며 이러한 상태를 열반(涅槃)이라 부른다. 열반은 탐욕(貪)·성냄(瞋)·무지(痴 moha)의 3독(三毒)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로서 생사의 세계를 초월한 경지를 뜻한다. 열반은 과거세에 지은 업의 소산인 현재의 몸을 지닌 채로도 실현 가능하고(석존이 성도했을 때처럼) 사후에 신체를 떠나 실현되기도 한다. 후자를 반열반(般涅槃 parinirva)이라고 부른다. 석존의 입적시에 실현된 경지이다. 이런 사후의 열반에 대하여 석존 당시부터 제기되었던 문제는 인간에게는 영원불멸의 자아가 없는데 누가 열반을 체험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석존은 열반이라는 초월적 실재의 신비를 그대로 남겨두었으며 우리의 일상적 개념으로 규정하기를 원하지 않았던 것이다.



4번째 진리로서 석존은 고멸도성제(苦滅道聖諦), 또는 줄여서 도제(道諦)를 설했다. 즉 고의 종식인 열반으로 가는 길, 팔정도에 관한 설법이다. 팔정도는 정견(正見)·정사(正思)·정어(正語)·정업(正業)·정명(正命)·정정진(正精進)·정념(正念)·정정(正定)을 실천하는 것으로서 이 8가지 수행을 셋으로 크게 묶으면 계(戒)·정(定)·혜(慧)의 삼학(三學)이 된다. 도덕적 행위와 삶(戒), 흩어진 마음의 통일과 정화(定), 사물에 대한 올바른 통찰(慧)을 닦음으로써 열반을 실현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석존은 팔정도를 설함과 아울러 쾌락을 탐하는 삶과 육체를 괴롭히는 고행주의의 양극을 피해 중도의 길을 따를 것을 가르쳤다. 중도는 8가지 수행을 올바로 할 수 있도록 하는 기본태도인 것이다. 석존은 이같은 고락의 중도 외에 단상(斷常)의 중도, 혹은 유무(有無)의 중도도 가르쳤다. 즉 영원한 자아가 존재한다는 상주론(常住論)도 석존은 거부했고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죽으면 아무 것도 남지 않으며 업보도 내세도 없다는 단멸론(斷滅論)도 거부했다. 그러나 존재의 조건이 계속되는 한 인간은 조건적 존재로서 존속한다. 열반이란 이렇게 조건적으로 존재하는 무상하고 괴로운 인간존재 자체가 완전히 극복된 무조건적인 세계이며, 팔정도는 무지와 탐욕 같은 인생의 조건들을 극복하여 열반을 실현하는 길인 것이다.

영원히 살고 싶어하는 인간의 갈망... 그것이 오늘날의 종교가 출현하게 배경이다. 삶이란 무엇인가? 죽음이라 무엇인가? 사후의 세계란 실재하는 것인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한 절대자인 신은 실존하는 것인가?... 이 모든 물음에 대해 종교는 과학적인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 못하지만 종교를 통해 평등세상을 이루고자하는 인간의 보편적 진리는 모든 인류의 염원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종교는 종교가 지향하는 가치와는 다른 자본에 예속된 물질과 타협한 세속의 길을 선택해 타락의 길을 걷고 있다. 무신론이 불교가 구복신앙 혹인 기복신앙으로 변질된 것은 이를 반증하고 있다. 다시 부처님 오신 날을 맞으며 부처님이 바라던 세상 모든 불자가 성불의 길로 가는 꿈이 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대해 본다.

- 이 글은 jesusi 홈의 글을 편집했음을 알려 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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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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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저는 종교는 믿지 않지만 가르침은 받들고 있습니다.
    불교 믿으시는분들 정말 많으시더군요.^^

    2019.05.13 09:22 신고 [ ADDR : EDIT/ DEL : REPLY ]

인성교육자료2010. 11. 23. 21:49


지난 2006년 8일 일이다. 전남 순천의 선암사 경내에서 태고종 총무원 쪽 승려와 선암사 쪽 승려들의 모습을 보는 국민들은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부처가 되겠다고 수도하는 분들이 죽봉으로 치도 때리고 막가파들이나 할 모습을 연출한 것이다. 무엇이 이들로 하여금 폭행을 하게 했을까? 이날 몸싸움 과정에서 5명의 승려가 다쳐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직원과 26명의 승려가 경찰에 연행되는 추태를 보였다.


자비를 실천해야할 수행자가 이해관계 때문에 상대방에게 폭행을 가하는 저들이 ‘수도를 하는 사람들이 할 일인가?’ 의심이 간다. 싸움의 발단이란 게 총무원장이 누가 되느냐 주도권 다툼인데 막강한 재산이 걸려 있는 문제 때문이다.  

불교의 추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고려시대 불교의 번성과 타락상, 일제시대 친일불교, 해방 이후 이승만 정권의 ‘정화운동’과 비구 대처의 폭력적 종권다툼, 1980년 신군부에 의한 ‘10·27법란’과 군사정권에 순응했던 승려들….

        <선암사 승려들으 몸싸움-사진 SBS에서>

기독교는 어떤가? 기독교는 ‘사랑’과 용서’을 부르짖으면서도, 근대 세계사의 절반을 피로 물들이고 지금도 그 행위는 계속되고 있다. 서기 1096년부터 시작, 무려 200년동안 계속된 십자군 전쟁이 그렇고 이스람권 문화와 기독교 문화 간의 충돌은 지금도 피비린내 나는 살육과 보복이라는 전쟁이 그치지 않고 있다.

도대체 종교란 무엇인가? 종교문제를 말하려면 ‘신(神)이란 실제로 존재하느냐?’는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 BC. 6c 이후 그리이스의 자연철학 이래로 모든 철학의 가장 첫 물음은 ‘세상(만물)의 근원은 무엇인가?’였다. ‘물질과 정신 중 무엇이 근원적인가?’ 이것이 신학을 비롯한 철학의 근본문제요 사물을 보는 관점의 차이다. 이 질문에 대해 ‘물질은 정신과 관계없이 객관적으로 존재 한다‘고 보는 유물론과 ’물질은 정신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관념론으로 나뉘어 진다. 유물론에서 보면 신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관념론에서는 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유물철학에서는 신이란 ‘인간이 만들어 낸 존재‘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본다. 그러나 관념철학에서는 신이나 영혼은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유물론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스탈린은 ‘물질, 자연, 존재는 의식 외부에 독립하여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이고, 물질은 감각, 표상, 의식의 원천이므로, 물질이야말로 제 1차적인 것이다. 의식은 물질의 반영이고 존재의 반영이므로 2차적인 것이고 파생적인 것이다.’라고 풀이하고 있다. 정신이나 영혼이 객관적으로 존재한다는 관념론이 아니면 종교란 존재할 수가 없다. 기독교가 공산주의와 공존하지 못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종교는 신과 인간이 공존하는 현세구복적인 종교였다면, 서양의 기독교는 내세 지향적이다. 불교가 ‘스스로 부처가 되기 위한 고행의 과정’이라면 기독교는 우주의 창조주요, 전지전능의 신을 믿고 따르는 유신론의 입장에 선다. 공통점이 있다면 불교에서는 제화갈라보살(과거불), 석가모니불(현세불), 미륵불(미래불)이 존재하는데 반해 기독교는 성부인 야훼와 성자인 예수와 성신인 성령이라는 절대적인 신이 있다는 정도의 차이일까? 아니 불교가 무소유의 사상이라면 기독교는 공유사상의 차이정도가 아닐까?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부처님이나 예수의 가르침을 배우고 따른다는 이들이 부처님과 예수의 모습과는 정반대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대승불교의 경전인 <반야바라밀다심경>에는 ‘색즉시공.공즉시색,일체유심조‘라고 말이 있다. ’색(空)과 공(空)이 다르지 않고 공과 색이 다르지 않아,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이 공(空)인데 소유를 버리면 부처가 될 수 있는데 서로 많이 가지려는 불자는 부처의 제자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가 지향하는 세계 천국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분배’받는 공산주의의 이상과 닮았는데 공산주의는 기독교를 부인하고 기독교와는 전혀 다른 자본주의 세계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결론적으로 외피는 불교니 기독교니 하는 다른 형식으로 남아 있지만 교의는 실종되고 없다. 무소유를 지향하고 보시를 통해 중생을 구제한다는 불교가 그 많은 재산을 두고 다툼을 벌이는 것은 불교사상과는 거리가 멀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또한 ‘이 땅에 천국을 건설하라’는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자본의 논리를 정당화하고 있으니 ‘교회 안에만 예수가 없다’는 주장이 나올 법도 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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