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정부수립'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5.11.17 권력의 야망, 살육과 전쟁의 잔혹사 (15)
  2. 2012.08.12 미국은 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원했을까? (8)
정치2015.11.17 06:55


어제 마산 YMCA에서 현대사 특강을 하고 왔습니다.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는 현대사... 학교는 왜 현대사를 잘 가르쳐 주지 않을까요? 

정부의 눈에 가시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노동조합.. 그 중에서도 정부는 전교조를 제일 싫어합니다. 왜 그럴까요? 아이들에게 자기네들의 알키레스 근인 치부를 가르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럴리가 있느냐고 반문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것은 사실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역사를 공부한 사람치고 4. 3제주민중항쟁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 얼마나 될까요? 일제강점기 일본이 저지른 잔악한 역사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이승만이 무슨 짓을 했으며 전두환이 광주시민을 어떻게 학살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까요? 박정희가 위대한 지도자인지 사악한 지도자인지 판단할 줄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을까요? 


그런걸 순진한 학생들에게 가르치면 안된다고요? 성서를 읽어본 사람들은 다 압니다. 구약 사무엘서에 나오는 다윗왕과 밧쎄바의 애정행각을... 3류 포르노 잡지에나 나올법한 이야기를 유대인들의 역사서이기도한 성경에 적어 수천년동안 후세 사람들에게 읽히게 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역사는 감추고 자랑스런 역사만 가르쳐야 한다...? 그렇습니까?


역사공부를 하는 이유가 뭘까요? 과거의 사실 그게 자랑스러운 일이든 부끄러운 일이든 오늘을 사는 사람들, 내가 그 사실을 알아서 내가 앞으로 살아가는데 도움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영욕의 역사...영광의 역사는 긍지와 자부심으로... 앞으로 나도 그렇게 살도록 배우고, 욕의역사는 반면교사로 삼이 그런 삶을 살지 않기 위해 배우는 것입니다. 


어제 강의를 끝내고 질의응답시간에 수강생 중에 한 사람이이런  질문을 하더군요. "현대사를 알기가 겁이 난다." 이런 이야길를 어떻게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가? 우리 조상이 나쁜 사람이었다는 게 부끄럽다고..." 제가 이런 대답을 했습니다. "오늘 공부한 내용... 이렇게 사람 목숨을 파리 목숨처럼 죽이고 잔인한 짓을 밥먹듯이 한 인간이 몇이나 되는 줄 아느냐고...? 일본의 편에 붙어 수많은 동족을 피를 빨아먹은 인간은 극소수라고... 그리고 대부분의 국민들이 선량하고 착하고 순진해서 그들에게 당했다고...."


우리선조들은 참 지혜롭고 좋은 분들입니다. 5천년 세월동안 거의 1천번의 크고 작은 외침을 당하고도 남의 나라를 한 번도 침략하지 않았던 착하고도 착한 사람들이 우리 선조들이었지요. 그분들이 입고 있는 옷이며 살던 집들... 얼마나 예술적인 안목이 있얶던 분인지 이제 어렵풋이 깨닫기 시작했잖아요? 어디 건축이나 복식뿐이었겠어요? 세상 사람들이 놀라는 소리글자, 한글을 어떻고요. 평화를 사랑하고 서로 나누며 서로 돕고 정겹게 살던 사람들입니다. 대부분의 선조들이 그렇게 살았다는 얘깁니다. 아주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 그 사람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 순진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배신하고 속인게지요


다시는 이런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할까요> 감추고 덮어두는게 옳을까요? 아니면 민족을 배산한자를 엄벌에 처해 다시는 그럴 짓을 못하게 해야할까요? 우리나라의 모든 모순의 근원을 '식민지 잔재청산'을 못했기 때문이라고 학자들이 입을 모으지 않습니까? 부끄러운 배신자. 친일 분자들이 한 짓은 낱낱이 밝혀 후손들에게 알려느느게 살아 남은 사람드리 해야할 일이 아닐까요?         


상대방이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모른다면 어떻게 자신을 지킬 수 일을까요? 나를 찾는 공부..내가 행복한 삶을 아니 우리가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전두환이 착한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구별을 못하기 때문에 전사모(전두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라는 단체를 만들어 놓지 않았습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이 아무리 삭막하고 사악하더라도 살인자를 사랑할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가해자들은 이런 말을 합니다. 

"지난일을 가지고...." "부정적인 걸 학생들에게 가르치겠다는 이유가 뭔가..." 

그럴까요? 당신의 가장 사랑하는 자녀나 부모가 당했다고 해도 그럴까요? 


"너희가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치리라" 성서에 이런 귀절이 나옵니다. 당신이 순진해서 "좋은 게 좋다"고 하며 살고 있을 때 사악한 자들은 제 2의 제 3의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당신은 알고 있는지요? 


저는 역사를 전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나 움직일 수 없는 사실... 역사 속에 숨겨진 가해자들의 잔인한 짓을 밝히고 말하고 다닐 것입니다. 그들이 반성하고 회개하지 않는한... 그것이 한 때 교직에 몸담았던 사람으로서 해야할 일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가기  친일의 역사, 그 속살을 들여다보니...

바로가기 ▶ 후안무치 아베총리, 그는 왜 안하무인일까?


친일세력이 없었으면 36년간 통치가 가능했을까

우리는  부끄러운 역사, 아픈 역사를 안고 산다. 너무나 착하기만 했던 사람들... 우리 아버지 어머니.. 그들이 모든 세상 사람들이 자기처럼 착하기만한 줄 믿고 있다가 이런 끔찍한 일들을 당했다. 가해자보다 더 잔인하고 사악한 사람들이 있었으니 그 이름은 '친일 인사'다. 이제 관념화된 '친일 인사'는 우리 머리 속에 파편화된 관념으로 남아 았지만 그 일을 직접 당했단 사람의 입장에서 역사를 보자, 그것이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다. 내 부모, 내형제 내 자식이 당했던 이루 말로 다할 수 없는 잔인한 원한의 역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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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 보국대>

1941년 일제는 '국민근로보국령'이라는 미명으로 국민학교(지금의 초등학교) 고등과에서 전문학교·중등학교 고학년에 이르는 학도보국대, 형무소 재소자들로 구성된 남방파견보국대 및 농민들로 조직된 강제노역보국대를 조직했다. 보국대는 징용·징발·징병에서 제외된 1938년부터 1944년까지 762만명을 강제동원 철도·도로·비행장 및 신사(神社)의 건립·확장공사에 투입, 강제 노역시켰다.



<정신대>

일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전시체제 하에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근로정신대'가 조직되어 전쟁 수행을 위한 노역에 투입하기 위해 '국가를 위해 몸을 바치는 조직'이라는 이름으로 결정된 조직이다. 조선의 여자근로정신대는 1943823,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포되면서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가 없는 조선 여성들을 동원, 군수공장 등에 투입되었다. 근로정신대로서 동원된 일본과 조선의 여성은 20만명이며, 그 중 조선인은 5만에서 7만명이다.


<위안부>

2차 세계 대전 동안 일본군의 성적 욕구를 해소하기 위한 목적으로 강제적이거나 집단적, 일본군의 기만에 의해 징용 또는 인신매매범, 매춘업자 등에게 납치, 매수 등 다양한 방법으로 일본군에 징용 또는 납치, 매매되어 성적인 행위를 강요받은 여성들이다. 생존한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하루에 30번 이상 성행위를 강요당했다. 식민지 조선에선 1940년대 남녀 각 조직에 정신대라는 이름이 붙여지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성노예로 차출된 꽃다운 10대 어린 여자아이들은 전국적으로 약 20여 만 명에 달했다. 이러한 사실은 20047월 국가기록원이 일제시대 45만 건에 이르는 판결문을 새로 분류,정리하는 과정에서 성노예 모집 상황 등을 가늠하는 판결문 9건에서 밝혀졌다. (숨겨진 한일역사 위안부관련)


<731 부대>

일본 제국 관동군 소속의 731부대는 생화학 무기 개발과 연구 과정에서 1만 명에 가까운 중국인과 한국인을 비롯한 식민지 주민과 전쟁 포로를 반인륜적인 생체 실험을 통해 살해하였다. 이외에도 중국과 동남아시아 지역의 여러 일본군 특수 부대에서도 비슷한 생체 실험이 이루어졌다. 731부대에서 개발한 무기로 수십만의 중국인이 학살되었다. 전후의 일본제약 산업 기술의 원동력이 되었다.


<강제 징용과 징병>

일본 제국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인력 확보를 위해 조선인 학생을 대상으로 강제 징병을 실시하여 학도병이란 이름으로 전쟁에 동원하였다. 1965년 한일국교정상화 당시 한국 정부에 따르면 노동자, 군인, 군속으로 강제 동원되었거나 총알받이로 강제로 끌려 간 한국인 피해자는 20126월 현재 1049475명이라고 하였지만, 실제로 강제 징병 징용, 학도병 등으로 끌려간 한국인들의 숫자는 5, 162, 041명에 달한다.


<문화재 약탈 착취>

문화재청과 관련 기관의 통계에 따르면 일본, 미국, 프랑스, 영국, 러시아, 프랑스 등 20개 국에 총 75,000여 점의 우리 문화재가 있다고 한다. 이 가운데 일본에서 확인된 것이 약 35,000여 점이나 된다. 일제는 경주, 부여, 공주, 평양 등 전국 곳곳에서 고분을 불법 도굴해 갔을 뿐만 아니라 조선총독부가 반출해 간 고분 출토품과 일본인이 개인적으로 약탈 해 간 문화재만 무려 4,479점에 달한다.

조선총독부가 반출해간 고분 출토품 689(도쿄국립박물관, 도쿄대 소장), 통감 및 총독이 반출해 간 도자기 103, 데라우치 총독이 소장한 서화 245, 불상 8, 통감부 전적 1,015, 일본 국유에 해당하는 분묘 출토품과 체신관련 문화재 758, 오쿠라 컬렉션 80, 기타 개인 소장품 1,581점 등이다.


<인적물적 자원의 약탈>

일제는 전쟁 수행을 위해 국가 총동원령을 발표해 그들이 패망할 때까지 우리 민족을 전쟁터로 동원하고, 식량과 각종 물자를 빼앗아 갔다. 침략 전쟁의 규모가 커지자 일제는 금속 회수령, 미곡 국가 관리 실시 요강, 농업 통제령 등을 만들어 쇠붙이와 식량 등을 빼앗아 갔다. 또한, 군수미를 확보하기 위해 중단되었던 산미 증식 계획을 다시 추진하고 강제 송출 제도를 시행하였다. 이와 같은 식량의 수탈로 인해 우리 민족의 식량난은 더욱 나빠져 굶주림에 허덕일 수밖에 없었다.

 

<해방정국의 역사>

 

1945해방 ~ 3년간 미군정 1948년 정부수립(이승만 정부) 1950. 6. 25 동족상잔의 전쟁 1953, 7. 27 휴전 1960 4. 19혁명 19615. 16쿠데타 1979. 10. 26 박정희 시해 1979. 12. 12. 1212사태 전두환, 노태우 반란 19805. 18 광주민중항쟁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정권

 

<1945년 한반도 분단과 미소의 군정기>


조선 주민에 대한 태평양 미육군 총사령관 포고문 제 1

- 조선 주민에 대한 태평양 미육군 총사령관 포고문 제 1조선 주민에 포고함.”

태평양 미국 육군 최고 지휘관으로서 하기와 같이 포고함. 일본국 천황과 정부와 대본영을 대표하여 서명한 항복 문서의 조항에 의하여 본관 휘하의 전첩군은 북위 38, 이남의 조선 지역을 점령함.


치스챠코프 대장의 포고문 조선 인민들에게!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 연합국 군대들은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하였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오직 신조선 역사의 첫 페이지가 될 뿐이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노력과 고려의 결과이다.

 

<신탁통치문제>

찬탁=애국, 반탁=매국인가?

얄타회담에서 루즈벨트는 20년 내지 30년간의 조선에 대한 신탁통치를 제안하였으나 스탈린은 기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신탁통치 기한은 5년으로 하되, 필요하면 4개 통치국간의 협정으로 다시 5년을 연장할 수 있다.(미 국무장관 번즈가 제출한 한국 신탁통치 원안)

조선은 독립국가로서 재건하는 것을 전체로 하고 조선 임시 민주정부를 수립한다.(미국측 안에 대한 소련이 제출한 대안)


<대한민국정부수립>

신탁통치안 결렬 - 38도선 이북의 입국을 거부함으로써 유엔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가결(1948.2.26)하고 38도선 이남에서만 선거(1948.5.10)가 실시되고, 헌법이 제정(1948.7.17)되어 정부 수립(1948.8.15)이 선포됨으로써 분단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이 탄생함.


510일 단독 선거는 선거 당일, 비상계엄이 발효되고 부산과 인천 앞바다에 급파된 미군 군함이 위협 시위를 벌이고 있었고 하늘에는 미공군기가 가공스런 공포 분위기를 자아내며 무장한 경관이 요소 요소에 배치되어 살벌한 두 눈이 번쩍이고 있었다.

 

일제 경찰에 종사한 8,000명중 5,000명이 군정 경찰에 복무하고 있었고, 이들을 핵으로 군정 경찰이 구성되었으며, 경찰 간부의 80%가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경찰 간부의 경우 경찰 청장 8명중 5(63%), 국장 10명중 8(80%), 총경 30명중 25(83%), 경감 139명중 104(75%), 경위 965명중 806(83%)이 고등 경찰을 비롯한 일제 경찰 출신었고, 경찰 최고직인 치안감(1)도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군인의 경우

이 름

계 급

비 고

이응준

신태영

이종찬

채병덕

신응균

김정렬

김창규

이형근

정래혁

박원석

장창국

장지량

대 좌

대 좌

중 좌

소 좌

소 좌

대 위

대 위

대 위

소 위

소 위

소 위

후보생

대 육군 참모총장

3대 육군 참모총장, 국방장관

6대 육군 참모총장, 국방장관

2, 4대 육군 참모총장, 국방부 참모총장

국방장관

초대, 3대 공군 참모총장, 국방장관, 국무총리

5대 공군 참모총장

초대 합참의장, 9대 육군 참모총장

국회의장

8대 공군 참모총장

9대 합참의장

9대 공군 참모총장

 

정부 수립 후 19604월까지 즉 이승만 정권 12년간의 각료는 국무총리 이하 115명이다. 재임 장관들을 제외하면 96명인데 이중 독립 운동가는 단 4, 국내 민족 투사 8명을 합해서 그 비율은 12.5%이다. 반면, 부일 협력 전력자는 34.4%33명이나 된다.

 

 



한라산 - 이산하

움직이는 것은 모두 우리의 적이었지만

동시에 그들의 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는 보고 쏘았지만

그들은 보지 않고 쏘았다.

학살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날

하늘에서는 정찰기가 살인 예고장을 살포하고

바다에서는 함대가 정적을 울리고

육지에서는 기마대가 총칼을 휘두르며

모든 처형장을 진두 지휘하고 있었던 그날


빨갱이 마을이라 하여 80여 남녀 중학생들을

금악벌판으로 몰고 가 집단 몰살하고 수장한데 이어

정방 폭포에서는 빨가벗긴 빨지산의 젊은 아내와 딸들을 나무 기둥에 묶어 두고 표창 연습으로 삼다가

마침내 젖가슴을 도려내 폭포 속으로 던져 버린 그날


한 무리의 정치 깡패단이 열 일곱도 안된

한 여고생을 윤간한 뒤 생매장해 버린 그 가을 숲

서귀포 임시 감옥 속에서는 게릴라들의 손톱과 발톱 밑에 못을 박고

몽키 스패너로 혓바닥까지 뽑아 버리던 그날, 바로 그날


관덕정 인민 광장 앞에서는 사지가 갈갈이 찢어져

목이 짤린 얼굴은 얼굴대로

팔은 팔대로

다리는 다리대로

몸통은 몸통대로

전봇대에 전시되어 있었다...

 

<학살의 시작-빨갱이 토벌작전 - 서북청년단의 활약>

1947. 4. 3 제주민중항쟁 여순사건. 1948. 4. 3항쟁 이탈한 좌익계 사병이 주축 지리산 빨치산 토벌 6.25전쟁(유엔군은 공군의 98%, 해군의 83.3% 지상군의 88%가 미국 군인으로 구성되었다.)


<6.25전쟁의 피해>

남한에서만 610,000채의 일반 주택, 15,000동의 학교, 17,000개의 기업체, 9.315km교량, 293만 두의 가축 소실되었다. 미군의 파괴력이 19501952까지 3년 동안의 미국의 이윤이 태평양전쟁 5년간 이윤을 82억 달러나 상회하는 570억 달러에 달하였다. 미군의 파괴력이 전쟁의 전기간에 걸쳐 가장 철저하게 발휘된 곳은 북한 지역이었다. 매일 500대에서 1,500대까지의 폭격기, 전투기가 비행하였고, 개전에서부터 19534월까지 26만 발의 대중형 폭탄, 2억만 발의 탄환, 40만 발의 로켓트탄, 150만 발의 네이팜탄이 사용되었다. 이 폭탄량은 태평양전쟁 중에 미군이 사용한 총 폭탄량을 상회하는 것이었다.


직접 전투에 의한 사망자 수는 미군, 중국 인민 지원군 수만명을 빼고도 쌍방 합해서 46만 명이 넘는다고 추정한다(한국 공보처 발표). 게다가 비정규 전투원 사망자 수는 그 이상으로 많아 80만 명이 넘는다고 한다. 당시 한국 전체 인구 중 25명당 1명 꼴로 죽은 것이다. 나아가 남북의 전투원 비전투원을 합한 부상자 수는 200만 명이 넘고 그 외에 포로 행방 불명자, 강제 납치자도 200만 명에 달한다고 추정된다. 이상의 내용을 통틀어 보면 전 한국인 중 8명당 1, 즉 거의 한 가족당 1명이 직접 희생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보도연맹사건>

해방 후 남로당원이었거나 남로당원이 아닌데도 다수의 체제 비판적, 양심적 민족주의자들이 공산주의자로 몰려 보도 연맹에 가입되었다. 625 후퇴 시 이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집결, 학살되었다. 그 수는 다만 추산될 뿐이며 10만을 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 1951.2.10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 1951. 2. 10. 719명의 양민을 경찰이 빨갱이로 몰아 기관총으로 무차별 학살한 사건. 그 중 많은 노령자와 특히 3세 이하의 젖먹이가 1백 여명, 410세의 어린이가 191, 1114세가 68명으로 14세 이하가 모두 359명이었다. 이 사건은 한국 정부가 조선 인민군 및 빨치산 잔당의 만행이라고 한국군이 빨치산과 내통하고 있다는 이유로 주민을 학살한 것이었다.

 

<새누리당의 정체>



 

이승만을 국부로 8.15를 건국절로...?

 

이승만은 그는 누구인가?

'친일파 면죄부 발행', 최소 20만에서 많으면 100만 정도의 인명이 희생된 보도연맹사건, 한강철교폭발사건( '정부는 서울을 사수할 것이며 국군은 북진중.'이라며 녹음방송을 틀어놓고 남쪽으로 도망), 국민방위군 사건, 종신독재 기도(사사오입개헌), 3. 15부정선거...

 

박정희가 저지른 범죄

친일 매국(혈서), 5. 16군사반란, 사법살인(인혁당사건), 10월유신 선포, 베트남전쟁, 김지하의 오적(대미종속외교, 고질적인 정경유착과 재벌의 족벌 경영, 빈익빈 부익부 현상과 만성적인 외채경제...), 국가보안법으로 정적 제거, 중앙정보부(국정원의 전신)

 

전두환, 노태우의 민주정의당

사망자 166, 행방불명 54, 상이 후 후유증으로 사망자 376, 부상자 3,139명을 낸 5. 18광주민중항쟁으로 집권한 전두환은 놀랍게도 민주정의당이라는 당명을 간판으로 내거는 코미디같은 집권을 시작한다. 12. 12쿠데타로 권력을 장학한 것도 모자라 민주는 무엇이며 정의는 웬 말인가? 이런 전두환이 밑에 고개를 처박고 용비어천가를 부르고 내시가 되기를 자청한 수많은 지식인과 언론인들, 학자들이 참여한 민주정의당은 전두환이라는 인간을 대통령을 만들어 낸다.

천황폐하만세를 위치던 조선일보는 광주시민을 학살한 전두환을 "위대하신 우리의 영도자"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송한다. - 대한민국 일등신문 종편과 합세

 

이명박이 저지른 범죄

http://blog.daum.net/_blog/BlogTypeView.do?blogid=0Jglu&articleno=4218368&categoryId=0&regdt=20110405211224

 

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115&articleId=3328322&pageIndex=1

 

박근혜..그는 누구인가?

독재자의 딸... http://chamstory.tistory.com/2146

거짓말.... 그리고 거짓말.... http://chamstory.tistory.com/1945

박근혜는 의료민영화, 교육민영화, 철도민영화로 그의 임기를 마무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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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오늘도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학생들을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가족들의 아픔에 함께 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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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정치2012.08.12 06:30


 

 

 1945년 12월 27일 모스크바3상회의의 결의로 ‘일본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한반도는 '앞으로 5년 동안 4개국(미국·영국·중국·소련)에 의한 신탁통치를 한다’

 

신탁통치를 처음 제안한 나라는 소련이 아닌 미국이라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은 2차세계 대전 중인 1943년 3월 27일 워싱턴 회담에서 한국의 신탁통치 구상을 처음으로 발표했다. 미국이 구상했던 신탁통치 안은 ‘미, 중, 소 3국이 향후 20~30년간 한반도를 신탁통치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안은 얄타회담(1945.2.11)에서 재확인되었다.

 

신탁통치의 내용도 모르는 국민들은 무조건 정부의 반탁을 지지하는 좌익 사람들과 유혈충돌까지 빚는 격렬한 혼란정국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게 된다. 결국 미국의 의지대로 '반탁=매국=빨갱이'의 논리가 정당화되면서 60년이 지난 지금도 통일의 가능성조차 가늠할 수 없는 역사의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얄타회담에서 제출된 신탁통치안대로 시행됐으면 어떻게 됐을까? 당연히 신탁통치가 끝난 1950년에는 6.25동족상잔의 비극이 아니라 한반도는 통일된 대한민국이 건설됐을 것이라는 학자들의 주장이 설득력있게 다가 온다.  그러나 돌이킬 수 없는 분단정부의 수립과 6.2전쟁... 그 후 대립과 갈등은 줄어들기는커녕 날이갈수록 군비경쟁을 통한 적대관계에서 벗어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1948년 5월 10일, 당시 유권자(25세이상 유권자) 7.840.071명. 투표율 95.5%, 이 중 96.4%가 유효표였다.

 

오늘은 대한민국의 정부수립과정에대한 졸고 '현대사 사료집에 담긴 대한민국정부수립과정을 살펴보자

 

대민국 정부의 수립

 

신탁통치안이 결렬되자 미국은 “조선 문제가 유엔총회에 상정됨에 따라 신탁통치를 거치지 않고 조선을 독립시키는 수단이 강구되기를 바란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러한 미국의 입장에 대해 소련은 미·소협정을 위반한 것이라고 반대하는 가운데 “유엔 임시한국위원단을 설치하고 그 감시 하에 1948년 3월말까지 남북간의 자유 총선거를 실시하여 국회 및 정부를 수립하고, 미, 소 양군이 철수한다”는 결의안을 유엔에 제출했다. 

 

이 안이 가결되자 8개국(호주,캐나다,중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으로 구성된 유엔 위원단의 선거를 감시하러 오게 됐다. 그러나 38도선 이북은 감시단의 입국을 거부하게 된다. 이에 유엔은 “가능한 지역에서의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안을 다시 제출, 통과(1948.2.26)하게 됐다. 결국 북쪽의 거부로 38도선 이남에서만 5.10선거(1948.5.10)를 실시, 헌법이 제정(1948.7.17)되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1948.8.15)이 선포됨으로써 분단국가로서의 대한민국이 탄생하게 되었다.

 

 

※ 참고글 및 자료

 

 

【망국적인 단독 정부의 수립】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돌베게. p.121-122)

 

5월 10일 단독 선거는 선거 당일 비상 계엄이 발효되고 부산과 인천 앞바다에 급파된 미군 군함이 위협 시위를 벌이고 있었고 하늘에는 미공군기가 가공스런 공포 분위기를 자아내며 무장한 경관이 요소 요소에 배치되어 살벌한 두 눈이 번쩍이고 있었다.

 

대다수의 애국 인사들이 불참을 선언하고 오직 이승만과 한민당 일파만이 입후보한 가운데 이루어졌다. 이와 함께 온갖 회유와 협박으로 민중들을 투표장으로 내몰았건만 다분히 과장되었으리라 보여지는 미군정의 공식 집계조차 '전체 남한 인구의 3분의 1에도 못 미치는 숫자만이 투표에 참여'했음을 밝혀 주고 있다.

 

5월 7일에서 10일 까지 단독 선거 반대 투쟁으로 인하여 무참히 학살된 민중의 수는 도합 350명, 그리고 검거 투옥된 숫자는 무려 5,425명에 이르렀다.

 

선거 직후 모든 정당 사회단체가 “공포와 불안 속에서 강요당한 금번 선거는 무효화되어야 하며, 그러한 불법 선거에 의 조작된 단독 정부 역시 결코 승인할 수 없다”고 선언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조치였다.

 

 

【유엔 임시위원단 5. 10 선거 감시】

 

(위의 책 P.123)

유엔 임시 위원단의 수는 전부 20명이었다.

임시위원당은 전체 2%에 해당하는 전국의 투표소를 대충 살피며 지나갔다. 이것이 위원단이 시행한 감시 활동의 전부였다. 이들은 5월 10일 선거 당일 20명 남짓 되는 임시 위원단은 전체의 2%에 해당하는 투표소를 대충 살피며 지나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종 보고서에서 ‘한국의 모든 지역이 위원단의 영향하에 있었다.’ ‘ 1948년 5월 10일 선거 결과는 위원단의 활동을 허용하고 거주 인구가 한국 인구의 3분의 2를 구성하는 지역 내 유권자의 의사를 정당하게 표현한 것이다’라는 등 뻔뻔스런 허위 보고를 일삼았다.

 

【한국 문제와 유엔】

 

(해방전후사의 인식, 한길사, p.89)

 

모스크바 협정이 미·소공위를 통해 해결할 수 없게 되자 미국은 1947년 9월 17일 제 3차 유엔총회에 한국 독립 문제를 제출, 가능한 지역에서 총선거를 가결시켰다. 선거 감시 9개국(유엔 한국 임시위원단) : 호주․캐나다․중국․엘살바도르․프랑스․인도․필리핀․시리아·우크라이나가 결정되었다.

 

유엔 정치 위원회에서 미국 측은 - 신정부 수립 후 외국군 철수, 남북한 대표 선출을 한 후에 한국 임시 위원회 설치 등을 주장, 소련 측은 선 외국군 철수, 후 정부 수립, 유엔 토의에 대한 남북한 대표들의 동시 초청 안이 대립, 총회에서 미국 안이 43대 9(기권 6)로 가결되었다.

 

 

- 이미지 출처 : 다음 검색에서....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