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2012.07.03 06:30


 

‘모르는 게 약’이라고들 한다. 알면 불편하니까 모르고 사는 게 편하다는 뜻이다. ‘담배가 해롭다’고 말해도 ‘평생 줄담배를 피워도 90넘게 사는 사람도 있다’며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을 경멸한다. ‘농약이며 방부제로 먹거리가 심각하게 오염되어 있다’고 걱정을 하면 ‘그런 거 먹어도 당장 안 죽는다’며 큰 소리 치는 사람도 있다. ‘살면 얼마나 살건데... 엄살이냐며...’ 오히려 핀잔이다.

 

이해관계와 가치관문제로 갈등이 그치지 않는 사회에서 ‘그런 건 몰라도 된다’든지, 우리가 몰라도 세상은 바뀌기 마련이라며 태평스런 사람도 있다. ‘세월이 지나면 세상이 바뀌기 마련인데 힘없는 우리가 나선다고 해결될게 뭐 있느냐며 ‘모른 채하고 사는 게 복장 편하다’고 태형인 사람도 있다.

 

출자총액제한제도가 폐지의 심각성이며, 정부의 민간인 사찰 문제, 4대강의 예산낭비문제, 학교폭력문제.. 등등 심각한 사회현상에 대한 심각성을 말해도 눈도 끔쩍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국가보안법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사람도 있고, 사상의 자유가 헌법에 보장되지 않는 현실도, 한·일간의 군사정보협정의 심각성 따위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며 강건너 불구경하듯 하는 사람도 있다.

 

‘못 올라갈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고 했다.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 못한다’고했다. ‘전생에 죄가 많아 여자로 태어났다’고도 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고도 했다. 요즈음 이런 소릴 하면 ‘미치광이’소릴 듣는다. 세상이 바꿨기 때문이다. 세상은 왜 바뀌었을까? 세상은 저절로 바뀌었을까? 아니면 신(神)이 바꿔 준 것일까?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다. 감나무 아래에서 입을 벌리고 쳐다보고 있다고 감이 입안에 저절로 떨어지지는 않는다.

 

 

'나비효과'라는 말이 있다. ‘ 브라질에 있는 나비의 날갯짓이 미국 텍사스에 토네이도를 발생시킬 수도 있다’는 말이다. 미국의 기상학자 에드워드 로렌츠(Lorentz, E.)가 주장한 이론으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하잖은 일이라도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말이다.

 

 ‘모든 것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변화한다.’는 게 만고불변의 진리다. 변화와 연관의 시각에서 세상을 보지 못하면 속(본질)은 보이지 않고 껍데기(현상)만 보일 뿐이다. 내가 가난한 것은 내가 게을러서일 수도 있지만 경제관념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낭비벽이 심해서일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경제행위와는 상관없이 국제경기나 국가의 경제정책, 혹은 체제에 따라 나의 생활이 가난해 질 수도 있고 좀 더 나아질 수도 있다는 얘기다.

 

‘모르는 게 약’이 아니다. 체질에 따라 담배를 하루 한 갑씩 피워도 90까지 건강하게 사는 사람도 있지만 하루 몇 개비씩만 피워도 건강에 치명적인 타격을 받는 사람도 있다. 이는 부분을 보고 전체라고 착각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다. 노동자와 국가보안법은 무관한 게 아니다. 국가 보안법이 있어 납북관계가 적대적인 관계가 되면 복지예산에 씌어야할 예산이 최신 무기 구입을 위한 국방비에 지출된다면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갈 예산이 줄어들어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

 

주인이 없는 사회에는 노예가 주인 행세를 한다. 민주주의에서 주인은 유권자인 백성이다. 백성들이 민주의식, 정치의식과 같은 주권의식이 없으면 일꾼인 국회의원이나 도민의 살림을 살아달라고 뽑아놓은 도지사가 주인행세를 한다. 노무현 대통령과 이명박 대통령을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위한 정치를 하는 대통령을 뽑아 놓으면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 지지 않은가? 

 

대선을 앞두고 말의 성찬이 시작됐다. 공약(公約)인지 공약(空約)인지 구별이 되지 않는 말의 성찬이 난무하고 있다. ‘정치는 정치인이 하고 농부는 농사나 짓고 상인은 장사나 하고 학생은 공부나 하고... 이렇게 하면 살기 좋은 세상이 될까? 민주주의는 ’모든 것이 연관되어 있고 변화한다’는 시각, 주인이 주인으로서 권리를 제대로 행사할 수 있는 주권의식이 살아 있을 때만 주인이 주인 대접받는 사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 이미지 출처 : 다음 검색에서...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부모가 자녀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가장 큰 선물이 무엇일까? 우리나라 1억 원 이상의 주식을 보유한 만 12살 이하 어린이가 무려 102명이나 된다고 한다. 골품제가 인정되는 사회나 봉건제사회에서는 부모의 신분이 자녀에게 대물림되지만, 민주주의사회에는 평등이 실현되는 사회일까? 자본주의사회는 돈만 있으면 하고 싶은 것, 갖고 싶은걸 다 갖고 살 수가 있다. 그런데 정말 돈이 행복의 절대조건일까? ‘돈이 없는 사람=불행한 사람’이라는 등식이 성립할까?

 

정치적으로 민주주의 사회는 계급이 없는 평등사회라고 한다. 과연 민주주의 사회는 계급이 사라진 사회일까?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도 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계급은 없어졌지만 계층사회라고 한다. 계층과 계급의 차이가 구체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는지의 여부는 사회학적인 검증을 거쳐야겠지만 봉건제사회에서는 신체적인 자유를 억압당했던 노예가 사라진 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제적으로 예속당하는 노예(?)가 등장하게 된다.

 

 

 

 

봉건제 사회에서는 부모의 계급이 자식에게 대물림되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계급이 없다는 자본주의사회에서는 양반이니 귀족이라는 신분이 아니라 돈이 그 사람의 계층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된다. 그래서 돈을 얻기 위해 평생 동안 노력한 성공이리라는 결실을 돈과 바꾸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하고 양심을 돈과 바꾸는 파렴치한 사람들도 자주 볼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는 돈이 주인(?)이 되는 사회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돈을 벌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가난한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가장 필요하누 방법은 권력을 쟁취하는 길이다. 권력은 사회적 지위를 획득하는 길이기도 하지만 돈을 가장 빨리 벌 수 있는 수단이기도 하다. 우리나라와 같이 학벌이 사회적 지위가 되는 사회에서 교육이란 바로 사회적 지위와 돈을 한꺼번에 가질 수 있는 가장 손쉬운 과정이기도 한다.

 

진부한 얘기지만 기러기 아빠며 사교육비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과열도 교육이 계층상승의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경쟁이라는 게 공정하기만 하다면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누리는데 누가 탓하랴! 문제는 경쟁이라는 방법이 공정하지 못하고 부모의 사회적 지위나 경제력으로 경기도 하기 전에 승부가 결정 나는 게임이 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경기 전에 승패가 결정 난 게임, 이런 경기란 경기로서의 흥미도 의미도 없다.

 

 

 

 

고액과외를 받은 아이와 학교에서 보충수업만 받은 아이가 차별받고, 서울에 사는 아이와 지방에 사는 아이가 차별받는 경쟁에서 패자는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억울하면 고액과외를 받든지 서울로 이사와서 살면 그만이 아닌가?’라고 말하면 할 말이 없지만 우리사회는 그런 정도가 아니다. 고교평준화는 사라지고 특목고, 외고, 과학고, 민사고, 국제고, 자사고...가 SKY 입학을 위한 준비과정이 된 나라에서 공정한 교육이란 새빨간 거짓말이다.

 

SKY출신이라는 이유로 실력과는 상관없이 취업이나 승진, 결혼이나 인격까지 차별화되는 세상은 골품제사회의 계급과 다를 바 없다. 건강한 사회라면 학벌이 아니라 개인의 노력과 창의성 그리고 인격으로 승부를 가려지는 풍토가 정착되어야 하지만 우리사회는 기득권층의 연고주의가 신카스트제도를 만들어놓았다. 과거 정권의 호남차별이나 이명박대통령의 영포라인 같은 연고주의가 사회적 지위를 결정하는 사회는 공정한 사회도 계급이 무너진 사회도 아니다.

 

 

 

지금은 사라졌을까? 몇 년 전, 인권위원회가 공개한 국내 4대 기업 중 하나인 A사의 ‘신입사원 서류전형 내부 사정기준’을 보면 100점 만점(서울대, 연세대·고려대 본교 캠퍼스, KAIST, 포항공대)부터 90점(한양대·성균관대·서강대 등), 80점(경희대, 홍익대 본교 캠퍼스, 광운대, 국민대, 인하대, 아주대, 이화여대), 70점(숭실대, 명지대, 상명대, 항공대, 숙명여대, 성신여대, 충북대, 충남대, 전남대 등), 60점(영남대, 창원대, 조선대, 전북대, 서울여대 등), 50점(기타대)까지 출신 학교에 따른 점수를 차별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나이·성별·경제적 지위 등과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동등한 교육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사회는 현대판 골품제 사회다. 성적표에 등수가 없는 나라. 시험은 정답을 매기고 등수를 확인하여 상급 학교로 진학시키는 서열화의 도구가 아니라, 자신이 무엇을 모르는지 확인하는 장치로 바뀌지 않는 한, 학교는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서열 화시키는 과정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연간 30조 원 이상의 사교육비를 지출함에도 불구하고 세계 최고 수준의 청소년 자살률을 기록. 세계 최고의 청소년 자살률에 세계 유례없는 연간 30조 이상의 사교육비 지출, 중고생 74%가 소위 ‘공부 잘하기 위한 약’까지 섭취하고 있다. 공부에 지치고 바뀌는 제도에 허둥대고 꿈꾸는 시간조차 부족한 아이들. 13~19살, 인생에 한 번밖에 없는 시기에 지구 한 편에서는 행복한 마음으로 잠을 자지만 한국에서는 24시간 가운데 20시간을 의자에 앉아 있는 불행한 청소년들이 사는 나라를 바꾸는 방법을 없을까?

 

  * 이미지 출처 : 다음 이미지 검색에서....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정치2012.01.14 07:00


 

                                                     <이미지 출처 : 다음 검색에서>

이성(理性)이 실종된 사회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막가파 사회다. 돈이 없다는 이유로, 가난하다는 이유로 왕따당하고 소외당하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가 아니다. 인격이 아니라 얼짱, 몸짱이 대접받고 얼마나 고급 옷을 입었느냐에 따라 사람대접을 달리하는 세상은 미개한 사회다.

가난한 사람들은 왜 생겨났을까? 게을러서...? 운명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은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못 배우고 못나서... 팔자가 기구하게 태어나서... 그래서 가난을 숙명으로 생각하며 살던 때가 있었다. 최소한 농경사회에는 그런 논리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었다. 아니 오늘날에는 매일같이 놀면서도 여유 있게 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죽으라고 일해도 가난을 면치 못하고 사는 사람도 있다.

 


열심히 일하는데 가난한 이유가 뭘까? 운명? 팔자소관? 계급사회에서는 노예들은 열심히 일해 주인에게 다 바치고 정작 자신은 굶주리며 살았다, 그들은 그게 운명이라고 알고 있었고 그런 삶을 불평없이 살았다. 전제군주사회, 계급사회에는 사람들은 그것은 하늘의 뜻이요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양반의 피를 타고 났기에 피를 속일 수 없다며 주어진 운명을 한탄하며 살아온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 금융자본주의의 사회는 어떨까? 오늘날 가난을 운명처럼 달고 사는 사람도 양반의 피, 상놈의 피가 다르게 타고 태어났기 때문일까? 부모를 잘못만나서일까? 뼈 빠지게 일해 자식들 공부시키고 나면 가난과 병든 몸을 안고 고통의 세월을 보내다 죽어가야 하는 사람들... 농부의 자식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혹은 부모가 가난하다는 이유로 가난을 대물림 받아야 하는 사람들...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사람에게 너는 운명이니까 가난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는가? 국가가 존재해야할 이유가 무엇일까? 그런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조정하고 배려하기 위해서다. 정의니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것이 필요한 이유는 능력이 부족한 사람, 못 배우고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국가가 필요하고 정치가 필요한 것이다. 힘이 지배하는 사회에는 국가가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

다른 나라는 어떨까? 평생 벌어서 집 한 채도 없이 셋방살이로 전전하며 운명으로 살아갈까?  자식 공부시키느라 평생 고생하고 정작 자신은 가난과 병든 몸으로 홀대받고 살까? 유럽의 선진국이라는 나라들.. 핀란드를 비롯해 덴마크며 독일이며 프랑스 같은 나라의 사람들도 그렇게 살까?

‘무상교육, 무상의료’ 아마 이런 얘기하면 빨갱이들이 하는 소리라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왜 같은 사람 사는 나란데 그 나라는 공부를 하고 싶으면 얼마든지 무료로 할 수 있고 우리는 자녀 교육비 때문에 평생을 허리한번 펴지 못하고 살아야 할까? 아니 평생 집한 채 마련하기 위해 먹을 것, 입을 것 못먹고, 못입고 살아야 할까?



 

 


이 지구상에는 땅은 모두 국가의 소유로 건물 값만 내면 평생 살아갈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해 주는 나라도 있고 자식 공부시키느라 걱정할 필요도 없는 나라도 있고 아프면 무료로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나라도 있다. 자신이 좋아하는 공부도할 수 있고 과외며 보충수업도 없고 얼마든지 싫건 잠도 자고 하고 싶은 취미생활도 할 수 있는 나라도 있다.

노후 생계가 어려워 휴지통을 뒤지며 살지 않아도 최소한의 굶주리며 살지 않아도 되는 사회, 몸이 아파도 병원비가 두려워 고통의 세월을 보내지 않는 불행한 노인들이 없는 나라도 있다.

빈부격차는 왜 생기는가? 재벌의 아들은 재벌이 되고 노동자나 농부의 아들은 평생을 가난을 운명처럼 달고 살아야 하는가? 완전한 평등 사회란 없다. 그러나 국가가 어떤 경제정책을 펴는가? 어떤 제도를 도입하는가에 따라 우리나라처럼 수백배 수천배 차이가 나는 빈부격차를 대물림하지 않아도 되는 나라도 있다.

좋은 사회냐 아니면 나쁜 사회냐의 차이는 ‘기회균등’이 얼마나 보장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 경기를 하는데 부자 아들이라는 이유로 노동자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특혜를 주면 그런 경기는 하나마나다. 여기다 사회적 가치 즉 희소가치를 누가 유리하게 배분받을 수 있느냐를 법으로 만들어 놓으며 그런 경기는 경기도 하기 전에 승패가 결정난 게임이다.

 


지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얼마든지 공정한 사회, 평등한 사회를 만들 수도 있고 반대로 차등사회, 빈부격차를 대물림시킬 수도 있다. 이름하여 소득 재분배정책 혹은 복지정책이다. 소득재분배정책이란 사회보험, 사회복지서비스와 조세, 공공부조가 있으며, 연금과 의료보험, 기초노령연금과 같은 공공부조도 있다.

돈에 대해 민감한 사람도 신문의 경제면을 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어려우니까, 그런 문제는 전문가나 정치인들이 알아서 해 줄 테니 서민들은 몰라도 될까? 4대보험이라고 일컬어지는 ‘국민연금, 건강보험, 고용보험, 산재보험’에 대해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부기관이 특정한 목적의 달성을 위해 국민 개개인에게 징수하는 조세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다.

소득재분배정책 중 조세에 대해서만 제대로 알아도 가난을 운명처럼 생각하거나 대물림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유럽의 선진국 즉 사회보장제도가 잘 되어 있는 나라에는 직접세의 비중이 높지만 우리나라와 같은 세계적으로 빈부격차가 두 번째 가라면 섧은 나라는 상품에 세금을 붙이는 간접세의 비중이 높다. 간접세의 비중이 크다는 것은 가난한 사람과 부자가 똑같은 세금을 내고 있다는 뜻이다. 빈부격차가 커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국가는 이런 사실을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다. 모르는 게 약이 아니다. 국가은 모르는 사람에게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줘야한다. 그러기 위해 의무교육기간을 두는 게 아닌가? 덧셈과 뺄셈만 가르치면 교육의 의무가 끝나는가?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를 가르치지 않은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열등의식과 운명을 배우는 학교에 어떻게 희망을 찾을 수 있는가? 내가 낸 세금이 어떻게 쓰이는 지 가르쳐 주지 않는 교육은 우민화교육이다.

정치와 도덕과 윤리와 법이 있어야 하는 이유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살 수 있고 나의 희생으로 네가 행복해지는 사회는 공정한 사회도 건강한 사회도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난하다는 건 불편한 게 아니라 죄다. 유전무죄 무전유죄라는 현실이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가난하면 사랑하는 아내와 자식에게까지 무시당하는 세상에 가난은 결코 미덕도 청렴도 아니다.

새끼 소 한마리에 단돈 1만원밖에 안하는데 쇠고기 값이 비싼 이유가 무엇일가? 유통구조가 잘못되면 소비자가 피해를 보는 게 상품이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재벌이나 의사 판검사 출신들이 만든 정당이 노동자나 농민들을 위한 법을 만들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재분배정책을  추진할까? 부자정당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지원정책을 도입하거나 부자들에게 상속세율을 높이는 법을 만들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런데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정당을 지지할까?     

국가의 주인을 국민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깨어나지 않는 국민들... 강자의 논리, 지배이데올로기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백성들이 사는 나라는 주객이 전도된 사회다. 주인이 노예로 사는 나라... 하늘은 스스로 돕는자를 돕는다는 진리를 믿지 못하고 세월만 지나면 다 좋아질 것이라는 운명론자들이 사는 사회는 병든 사회다. 깨어나지 않는 백성이 사는 사회에는 부자들의 노예만 득실거릴 뿐이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인성교육자료2010.10.16 13:21


국민소득 3만불시대를 자랑하는 나라에서 장애인의 아들이 복지혜택을 받기위해 자살하는 일용직 근로자가 사는 나라.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이라면서 절대빈곤층이 전체 인구의 15%이고 상대빈곤층이 7~8%인 나라...
이런 나라에 과연 '인간의 존엄성'운운하는 헌법이 지켜지고 있는지...
역사적으로도 그렇지만 세계는 아직도 피부의 색깔 차이로 인간의 가차가 다르다는 인종주의가 상존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인간을 존엄성을 강조하려고 썼던 글입니다.(1993년, 5월 12일)

기원전 2600년, 죽은 이집트의 케오프스왕의 무덤을 만들기 위해 매년 10만명이 3개월씩 20년간 작업하여 총무게 575만톤이나 되는 돌 250만개를 쌓아 피라밑을 만든다. 후세 사람들은 당사의 노예들이 죽음과 공포의 노동의 성과를 불가사의로 미화하고 있다.

우리나라 조선초기 까지만 해도 남자종은 포 100필,여자종은 포120필 정도 였다닌 노예의 값은 말값의 오분의 일 정도 였다는 계산이 나온다.
93년4월 LA에서는 로드니 킹 사건 평결을 놓고 연일 전쟁을 방불케하는 초 비상사태에 들어갔다. 1년전 흑인들에게 무자비하게 몰매를 놓은 백인들은 무죄 판결하고 백인을 구타한 흑인들은 유죄판결했으니 흑인들의 행위는 악마로 매도하면서 인종 분규는 심각한 상황까지 도달하게 된 것이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4.1일)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흑인지도자 크리스 하니가 백인 괴한에 의해 피살된 이후 4월14일에는 3백만 이상의 흑인들이 크리스 하니의 추도파업과 시위를 벌이다 경찰과 충돌해 5명이 죽고 수백명이 다쳤다고 한다.

26백만의 흑인들이 주거지역이나 학교,의료시설까지도 별도로 사용하고 투표권까지 제대로 주지 않는 인권 사각지대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다. 세계인권선언 제 1조에는 "모든 사람은 태어 날때 부터 자유로우며 존엄성과 권리에 있어서 평등핟"라고 규정하고 있고, 프랑스인권선언 제 2조에는 "모든 정치적이 단결의 목적은 소멸될 수 없는 인간의 자연권을 보전하는 것이다. 이들 권리는 자유,소유권, 안전및 압제에의 저항이다."라고 명문화하고 있다.

대한민국 헌법 제 10조에는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이들 권리는 자유, 소유권, 안전및 압제에의 저항이다"라고 규정하고있다. 유엔헌장을 비롯한 각국의 헌법에 피부의 색깔이나 성의 차에 의해 불리하게 대접받지 않는다는 명문 규정을 두고 있으나 현실은 엄연히 인종차별이 존재하는 것이다.

인종주의 학자들과 백인들이 지구상에 저지른 죄악상은 상상을 초월한다.
아프리카에서 1억5천만의 노예를 납치하여 노예시장에서 판매하고 그 노예노동으로 부를 축척한 것이다. 특히 미국은 원주민 인디안을 노예사냥대를 만들어 인디언 '없는 땅을 요구한다'면서 원주민을 학살하였다. 300만의 원주민이 콜롬부스가 발을 디딘지 30년만에 거의 멸종되었다고 통계자료에서 밝히고 있다.백인 우월집단인 K.K.K단에 의해 흑인들이 당한 수난을 말로 표현할 수 없다.

50∼60년대 미흑인들의 인종차별에 대한 저항 운동은 마틴루터 킹 목사에 의해 주도된 인권운동과 말콤엑스에 의해 주도된 블랙파워 운동의 두갈레가 있다. 두사람은 끝내 살해 당한다. 말콤엑스는 평화적인 루터킹의 인권운동을 거부하고 철저하게 "법을 지키라고 강조한다. 그러나 동시에 어느 누구도 자신의 빰을 마음대로 때리지 못하도록 행동할 것을 가르친다. 우리가 당하면 반드시 당한만큼 보복을 하는것이 백인에 의한 폭력을 줄이는 것이다" 라고 가르쳤다.

역사를 덮어 두고 LA에서 일어난 흑인폭력을 보고 흑인에게 퍼붇는 것이 온당한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흑인과 노예, 오늘날의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노동자는 과연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받고 있는가?' 힘을 가진 기득권자의 행복을 위해 다수의 약자가 억압받는 불평등의 사회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다. 언론에 의해 편파적인 약자의 폭력을 확대 왜곡보도해 언론재판을 받는 현실을 바꿔 모든 인간이 정당한 인권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길은 없을까?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