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 어떻게 생각하세요? 어릴 때 박사라면 그야말로 모르는 게 없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박사제도가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르지만 텔레비전에 이름 다음에 박사가 붙으면 그만큼 권위가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실제로 박사란 학문을 가장 깊이 있게 알고 연구하는 전문가를 일컫는 호칭이다.

 

 

박사를 영어로 ‘Ph. D’로 표기한다. ‘Doctor of Philosophy’의 준말이다. 그런데 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아도 ‘Ph. D’, 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아도 ‘Ph. D’. 박사제도가 생길 때 철학자에게 수여했던 게 시초가 됐는지 모르지만 모든 박사는 모두 ‘Ph. D’로 표기한다. 그런데 이름대로 Philosophy에 대해 잘 알고 있기나 할까?

 

택시를 타고 회의에 참석했다가 볼일이 있어 먼저 나왔는데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딘지 전혀 감이 안 잡히던 황당한 일을 경험했던 일이 있다. 낯선 길도 아니고 가끔 다니던 곳인데 어디가 어딘지 구별이 안 됐다. 몇 번이나 헤매다가 결국 택사를 탈 수밖에 없었던 일이 있었다. 살다가 이런 일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머릿속에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방향감각을 잃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박사학위를 비롯한 온간 스팩을 쌓은 사람인데 사는 걸 보면 영 아니다. 하긴 박사라는 칭호가 이효석의 생애에 대한 연구로 학위를 받은 사람도 있고 한국의 인사행정에 대한 고찰로 학위를 받은 사람도 있다. 이 복잡한 인문계나 무한한 자연계의 비밀을 눈곱만큼 아는 걸 박사라는 호칭하나 달랑 붙인다고 학문을 가장 깊이 있게 알고 연구하는 전문가’라고 인정해도 좋은? 아니 그런 사람들이 삶을 제대로 살기나 할까?

 

철학이란 사람과 세계의 관계를 밝혀주고 사람들에게 관점과 입장을 갖도록 하는 학문인데 학교는 이런 철학교육을 왜 하지 않을까? 하긴 중·고등학교에 도덕이나 윤리라는 과목이 있다. 도덕이나 윤리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키거나 행해야 할 도리나 규범을 일깨워 주는 학문이다. 윤리교과서에는 윤리사상과 사회사상의 의의, 동양과 한국윤리사상, 서양윤리사상, 사회사상이라는 단원이 설정 돼 있다. 동양의 사상인 유교나 불교, 도가·도교를 알면 삶의 방향감각을 깨달을 수 있을까? 서양의 그리스도교의 윤리사상이나 목적론적 윤리설이나 의무론적 윤리설을 배우고 외우면 도덕적인 사람이 될까?

 

 

살아가는 데 정말 필요한 것은 지식보다, 지혜요, 철학이다. 도덕점수나 윤리점수를 잘 받는 학생이 도덕적이고 윤리적인가?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데, 본질을 볼 수 있는 안목이 필요한데 학교는 철학을 가르치지 않는다. 외모나 현상을 보고 본질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는 누가 유리할까? 지혜롭지 못한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는 누가 덕을 보게 될까?

 

철학 없는 사회는 막가파가 판치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거나 상업주의가 활개를 친다. 우리사회를 보자. 공맹사상이 유교철학 외에 이렇다 할 철학이 없는 우리 국민들에게 국적불명의 외래철학이 물민 듯이 밀려와 활개를 치고 있다. 수많은 철학박사들이 내로라하며 권위를 자랑하지만 그들이 내놓은 철학이란 것은 결국 서양의 실용철학이나 실존철학, 신토마스주의, 인격철학, 신실증철학 등이 전부다.

 

얼마나 철학이 궁핍했으면 무분별하게 도입한 철학이 마치 우리철학 행세를 함으로서 한국은 구미사상의 시궁창이라는 야유까지 받을까? 설사 서구사상이라고 하더라도 내 삶을 안내하는 지침서라도 된다면야 배척하고 비판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그렇게 무분별하게 들어 온 철학이라는 게 어떤 것일까?

 

우리나라에 유입된 서구 철학의 대표적인 철학이 실용철학(Pragmatism)실존철학, 분석철학(신실증철학), 신학철학 4대 철학 사조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죤듀이로 대표되는 실용주의 철학이란 이기주의를 찬양하고 절대화하는 대표적인 철학으로 인간의 이기심을 천성으로 본다. 실용주의에 점령당한 교육은 극단적인 이기주의와 미국식 민주주의, 미국식 생활양식을 정당화하는 철학이다. 오늘날 '내게 이익이 되는 게 선'이 되는 상업주의와 사회적인 존재의 인간을 이기주의인간으로 길러내고 있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실존주의는 어떤가? 실존주의 철학하면 학생들은 윤리시간에 키에르케고르나 야스퍼스 하이데크나 샤르트르라는 철학자 이름이나 달달 외우던 기억이 남아 있다. 솔직히 말하면 실존주의철학이란 죽음의 철학이다. 2차 세계대전당시 일본이 대동아공영권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죽음을 미화하던 철학이 실존주의 아닌가? 어차피 사람은 한번 죽기 마련인데 형편이 돌아가는 대로 살아보자는 죽음을 운명으로 받아들이라는 논리가 숨겨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실용철학이 인간의 이기심을 절대화하는 철학이라면 실존철학은 죽음을 절대화하고 이상화하며 예찬하는 철학이다.

 

 

 

스콜라철학, 신토마스철학이란 운명론적 세계관을 정당화하는 신학철학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 또한 분석철학이니 과학철학, 신실증주의 철학이란 꽁트가 철학을 거부한다는 뜻에서 과학철학이니 분석철학, 논리적 실증철학으로 불리기도 한다. 이들은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지식만 믿을 수 있으며 감성의 세계를 벗어난 지식은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철학을 거부한다.

 

학창시절 윤리를 배워 남아 있는 게 무엇인가? 기껏해야 시험에 대비해 철학자 이름이나 외운 게 전부다. 이렇게 관념철학자들은 산다는 게 무엇이며 왜 사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삶인지를 안내해 주지 못한다. 의식과 물질 중 의식이 먼저이기 때문에 의식이 없으면 물()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철학이 관념철학이다. 관념론으로는 세계를 인식할 수 없다. 과학적 세계관을 배우지 못한 서민들은 이기주의와 허무주의에 빠져 자본의 충실한 소비자로 혹은 운명론자로 살다 인생을 마치게 된다. 과학적 세계관이 없는 인생은 자본의 소모품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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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4월 16일...

오늘도 세월호 참사로 희생된 학생들을 생각하며 하루를 시작합니다. 

가족들의 아픔에 함께 합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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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교육정책2011.06.27 05:00



사람이 태어나서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고 혼자서 자라면 어떤 모습이 될까? 당연히 사람 짓을 할 수 없는 망나니가 되고 말 것이다. 한 인격체가 제대로 된 인간으로 성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람은 사람으로서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을 배우지 않으면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한다. 그걸 사회학에서는 ‘사회화’라고 한다. 인간으로서 사회화하면 인간이 되고 동물로서 사회화하면 동물이 되는 것이다.

학교가 무너졌다고 야단이다. 교육학을 했다는 학자님들, 평생을 교육을 한다는 교육자들, 교육정책을 입안하는 교육 관료들... 무너진 교육을 살리겠다고 온갖 이론을 개발하고 도입하고, 시범학교, 연구학교를 만들고 법석을 떠는 연구자들... 그 많은 전문가들이 엄청난 예산과 인력을 투입해 공들이는 교육, 그런 학교는 아직도 살아날 가능성을 보이기는커녕 점점 더 위기로 치닫고 있는 것이다.

                                                             <이미지 출처 : 다음 이미지 검색에서>

교육이 무너지는 이유는 뭘까? 그 이유란 간단하다. 가르치지 않는데... 배우지도 않는데 어떻게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는가? 아니 가르치기는 가르치는데 사회적인 존재인 개인을 개인적인 존재로 키우고 있는데 교육이 교육의 기능을 제대로 할 리가 없다. 가정은 어떤가? 대부분의 가정에서는 부모와 대화시간조차 없이 새벽같이 등교해 12시가 가까워서야 집으로 돌아온다. 자기 자녀와 대화조차 단절된 가정에서 어떻게 가정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배울 수 있는가?



여성가족부가 지난해 청소년 자녀를 둔 전국의 2,500가구를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 "아버지와 대화가 부족하다"고 답한 청소년은 33.5%, "어머니와 대화가 부족하다"고 말한 자녀는 11.7%(YTN)나 된다. 가정에서 교육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가정에서 머무는 시간이 있어야 하고 구성원들 간에 만나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 상호작용이 없는 가정은 생물학적인 욕구충족의 기능 외에 교육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사회적인 존재로 자라야할 아이들이 가족간의 대화시간이며 놀이문화까지 빼앗겨 학원으로 또 학원으로 내몰고 있는 상황에서 가정교육을 기대할 수 없다. 학교나 학원에만 많이 다니면 사회적인 존재로 성장할 수 있는가? 학원이나 학교는 유능한 개인. 개인적인 능력을 길러 줄뿐 사회적인 존재로서 역할을 가르치지 않는다.

사회는 어떤가? 가정이나 학교 밖을 한 발 짝만 나가도 만화방이며 오락실, 게임방이 기다리고 있다. 교육은 학교에서만 하는 게 아니다. 성장기의 아이들은 버스에서, 시장에서, 관공서에서, 도서실에서... 눈에 보이는 것, 만나는 게 모두가 교육이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청소년들에게 교육적인 배려를 하는 곳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오히려 청소년을 대상으로 돈벌이를 하겠다는 상업주의가 시퍼렇게 기다리고 있다.     


인간은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기 때문에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사회적인 존재로서 개인이 할 일을 가르치는 것이 올바른 교육이다. 그러나 오늘날 학교교육은 더불어 살아가는 역할이나 공존의 윤리를 가르치지 않고 경쟁 속에서 개인이 살아가는 길, 이겨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서바이벌 식 경쟁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천국에 못갈 사람은 모두 지옥에 가야할 사람‘이라는 이분법적 논리로 ’승자가 아니면 모두가 패자가 되는 교육‘을 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만 가르쳐 승자만이 살아남도록 가르치는 사회에서 교육의 위기는 사필귀정이다. 교육은 학교에서만 하는 게 아니다. 가장 기본적인 사회화는 가정에서 맡아야 한다. 다음 학교와 지역사회 그리고 미디어를 통한 다양한 측면에서 입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교육적인 효과를 기대할 수 없다. 학교에서 옳은 일이 사회에서 틀리면 학교교육은 효과가 없을 뿐만 아니라 피교육자로 하여금 이중인격자로 만든다. 남편의 역할, 아내의 역할, 시부모의 역할을 모르는데 어떻게 훌륭한 아내 훌륭한 시어머니가 될 수 있겠는가? 성인교육의 필요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좋은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준비한 청소년기의 지식으로 평생 동안 살아가는 사회는 좋은 사회가 아니다. 비싼 가구들만 잔뜩 모아 두었다고 살기 좋은 집이 아니듯, 판단의 기준(철학)이 없는 지식만으로는 삶의 질을 향상시킬 수 없다. 더구나 오늘날과 같이 급변하는 사회에서 수십년 전의 지식으로 변화에 적응하며 살기란 쉽지 않다. 목적이 없는 경쟁이 공허하듯 시험을 위해 준비한 지식은 시험이 끝나면 폐기 처분해야할 대상이다.

사회적인 존재인 인간을 개인적인 존재로 키우는 교육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학교가 가정이나 사회와 괴리된 곳으로 남아 있는 한 학교의 위기를 극복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격변하는 사회에서는 가정과 학교와 지역 사회와 메스 미디어가 함께 하는 교육, 교육 대상자가 어린이와 청소년만이 아니라 성인들도 교육으로 대상으로 하는 그런 교육이 필요한 때다. 교육적이지 못한 환경에서 상업논리의 대상이 된 피해자들에게 삶의 길을 안내해주지 못하는 교육은 피교육자로 하여금 피해자가 되게 할 뿐이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교육정책2011.03.10 21:57


사람을 늑대가 키우면 사람행세를 할까? 늑대행세를 할까? 이러한 의문은 프랑스에서 사냥꾼이 발견한 ‘아베뇽의 야생소년’ Victor에게서 확인된바 있다. 몸은 사람인데 사람의 행동을 하지 못하는 사람. 그는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사회화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간으로서 해야 할 행동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약 Victor라는 소년이 인간이 길렀다면 동물의 모습이 아닌 인간의 행동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사진자료 :  '꽃처럼 예쁜 아이들...' 교육희망에서> 

 인간의 행동이란 무엇일까? Victor는 나름대로 개인적인 존재로서는 살아가는 방식을 터득하고 있었다. 인간도 다른 동물과 마찬가지로 환경에 적응하는 방식을 배운다. Victo도 배가 고프거나 잠이 오면 본능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스스로 체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으로서 인간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당연히 인간으로서 사회화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해야 할 역할을 배우지 못한 인간은 사회적인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람이 사람다워지기 위해서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행동양식이나 생각을 배우고 가르쳐야 한다. 그 ‘사람다움을 배우는 것’은 꼭 학교여야 할 이유는 없다. 학교가 없었던 시절에는 가정과 지역사회가 그 기능을 감당해 왔다. 물론 사회가 복잡하고 전문화 되면서 학교가 사회화의 기능을 전문적으로 감당하고 있지만 오늘날 학교는 이런 면에서 낙제점을 면하기 어렵다. 오늘날의 학교는 사람을 사회적인 존재로 키우기보다 개인적인 존재로 키우고 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교실붕괴니 학교의 위기는 학교가 인간을 사회적인 존재로서 사회의식을 가르치지 못해 나타난 당연한 결과다.

 사람이 사회적인 존재로서 양성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학교에서 가장 중요한 교육의 핵심은 ‘관계’를 가르쳐야 한다. 인간이 혼자 살아간다면 동물적인 욕구만 충족을 하는 것만 가르쳐 주면 족하다. 그러나 사람이 개인적인 존재가 아닌 사회적인 존재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와 가족, 나와 친구, 나와 이웃 그리고 직장에서 인간관계나 결혼 후 이성과 배우자의 부모친척과의 관계 특히 고부간의 관계를 배워야 한다. ‘나에게 좋은 것이 선(善)이요, 나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정도의 의식으로는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오늘날의 교육은 가정에서부터 잘못되고 있다. ‘공부만 잘하면... 점수만 잘 받아 오면 모든 것이 용서’되는 가치관으로 길러진 아이는 정상적인 생활인이 되기 어렵다. 특히 고생하면서 살아온 부모세대들은 내 자식만은 나처럼 고생시킬 수 없다는 생각으로 버릇없는 아이‘로 키운다. 더구나 사회의식을 싹트는 유희집단 또는 또래집단과의 만남의 관계를 차단하고 학원으로 내몰아 경쟁을 시키는 부모들은 사랑하는 자녀를 건강하게 자랄 기회를 빼앗고 있는 것이다. 부모의 잘못된 교육관이 아이들의 정상적인 성장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또래집단에서는 또래들과 만나 자신의 존재를 알고 그들과의 관계를 맺는 초기 사회화 과정이다. 상대방을 이해하고 그들이 나와 같이 소중한 존재라는 걸 배우면서 우정이 싹트고 서로를 이해하고 양보하면서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의식을 습득하는 것이다. 가정에서 마마보이로 자란 아이는 사회의식이 없다. ‘자기가 왕’이기 때문이다. 마마보이로 키우는 부모들은 왜곡된 사랑을 부모가 해야 할 임무라고 착각한다. 자신이 할 일을 스스로 처리하는 기회를 차단하고 가족구성원으로서 임무와 역할을 배울 수 있는 사회의식을 잘라버리는 무모함으로 아이들이 병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여기다 놀이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사회의식조차 빼앗아 학원으로 내모는 부모는 과연 부모로서의 역할을 다한 것일까?

 학교는 어떤가? ‘학교의 우등생이 사회의 열등생’이라는 평가는 무엇을 말하는가? 오늘날 학교는 한 인격체를 개인적인 존재로서도 사회적인 존재로서도 양성하는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 수평적인 관계가 없는 사회 그게 학급 사회다. 사회의식을 길러 서로가 서로를 배우는 그런 기회가 없다는 말이다. HR이니 CA니 그런 시간이 있기는 하지만 그게 입시교육으로 교육으로서 자리잡지 못한다. 국,영,수 점수가 개인의 능력으로 평가되는 학교에서는 수평적인 인간관계가 중요할  리 없다. 학교는 ‘친구의 소중함’에 대해 가르치지 않는다. 우정이 어떤 것인지 친구간의 신의나 의리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다.

 학교는 지식도 가르쳐야 하지만 그 지식을 쓸 수 있는 기준(철학)을 가르치는 일이 더 중요하다. 자신의 소중함과 부모나 민족의 소중함을 가르치지 않는 교육은 교육이 아니다. 나보다 남이 더 잘나 보이고 내부모보나 우리 민족문화보다 남의 부모나 남의 나라 문화가 소중하다는 것을 보고 배우는 아이는 건강한 국민이 될 수 없다. 미국의 문화가 더 소중하고, 영어를 잘해야 유능한 사람이 되는 그런 인간을 길러 놓고 교육을 다 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사회적 존재인 인간을 개인적인 존재로 키우는 교육은 교육실패다.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
인성교육자료2009.08.21 23:21


학교에서 가르쳐 주지 않는 이야기

1. 개인적인 존재로서의 나와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 -

학교에 재직하고 있을 때 수업 시작하기 전 잠도 깨울 겸 가끔 엉뚱한 질문을 하곤 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게 뭘까?”

이 질문에 가장 먼저 나오는 대답이 “돈”, “권력”, “지위”, “명예”, “보석”.....등등이다.

‘귀하다, 소중하다’는 것을 ‘물질적인 것’에서 찾는 답이다. 어쩌다 “자기 자신” 혹은 “나”라고 대답하는 학생도 간혹 있다.

이야기를 정리하면서 “그런 것들이 아무리 많아도 내가 없으면 소용없지 않은가?”라고 하면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소중하고 귀하다면 더욱 가꾸고 다듬어야 한다. 그런데 나는 ‘나를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배가 고프면 먹고 잠이 오면 자고....’ 그런 건 본능적인 것, 동물적인 욕구 충족이다. 물론 본능적인 것, 동물적인 것이 기본이라는 데는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본능적인 욕구충족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인 나를 가꾸는 최선의 노력일까? 나의 본능적인 욕구충족을 하기 위해서라면 지금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의 교육이 반드시 필요한 일일까?

나는 누구인가? 세상에서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라고 한다. 과연 그럴까? “나"‘주관적인 나’ ‘객관적인 내’가 있다.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자신’이라 했을 때 자신은 ‘주관적인 나’다. ‘주관적인 나’는 개인적인 존재로서의 나다. 인간이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존재로서의 나’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존재로서의 나’도 있다.


보석은 가꾸고 다듬을수록 가치가 커진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존재인 나를 가꾸는 방법은 무엇일까?

‘주관적인 나, 본능적인 나’도 팽개치면 그 진가가 나타나지 않는다. 가꾸고 다듬는 일. 그건 순전히 자신의 몫이다. 상업주의와 환경오염으로 뒤범벅이 된 사회에서 보석은 그 진가를 잃을 수도 있다. 편식이나 과식으로, 또는 농약과 환경호르몬으로 뒤범벅이 된 음식을 어떻게 가려 자신의 건강을 지킬 것인가는 순전히 자신의 책임이다. 절제 할 줄 모르는 감각적인 생활, 상업주의가 만들어 둔 유혹이나 호기심에 자칫 돌이킬 수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적절한 운동과 규칙적인 생활습관은 나의 삶을 풍성하게 한다. 남이 버리기 전에 자신을 먼저 팽개친 사람은 스스로 불행을 자초한다.

‘객관적인 나,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는 어떻게 다듬고 가꿀까? ‘자유’로 포장된 자본주의 사회에서 한 개인이 사회적인 존재로 성장하기는 지난(至難)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가정에서 혹은 교회에서 혹은 학교에서는 끝없이 사회적인 존재가 아닌 이기주의적인 인간이기를 강요(?)한다. 개인의 가치는 ‘개인적인 존재로서의 나보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내가 어떤 모습인가?’에 따라 평가되기 마련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다듬는 사회화기관인 가정과 사회, 학교는 사실상 사회화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 아니 하지 않고 있다고 해야 옳은 표현일 것 같다. 사랑의 이름으로 사회적 존재가 아닌 이기적인 인간이기를 강요하는 부모들, 목적은 ‘전인 인간 운운...하면서 개인 출세를 교육이라고 강변하는 학교,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어린 것들을 대상화시키는 상업주의가 우리아이들을 병들게 하고 있다. (계속)

Posted by 참교육 참교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