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차례 14년이 걸린 한일협정
6·3항쟁은 1964년 6월 3일에 일어난 한일회담 반대시위와 관련된 일련의 항쟁이다. 이 항쟁이 전개된 기간은 서울에서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최초로 벌어진 1964년 3월 24일부터 비상 계엄령이 내려진 6월 3일까지를 지칭한다. 야당과 사회단체들은 ‘매국외교 중지, 일본의 경제적 식민지화 반대’ 등을 주장하며 회담을 반대했다. 3월 24일 서울시내 각 대학에서 시작된 반대시위는 6월 3일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박정희정권은 국민적인 반대운동에 대해 계엄령과 위수령으로 국민들의 입을 막고 손발을 묶은채 1965년 2월 28일을 기해 기어코 한·일회담을 발효시킴으로써 을사늑약 60년 만에 다시 한국교를 열었다. 정부 탄압으로 계엄이 선포된 55일 동안 구속된 수는 총 348명에 이르렀다. 6·3항쟁은 이후 한일협정비준서 조인 때까지 한·일협정반대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학생들은 ‘한·일협정’을 왜 반대했을까
이승만정권부터 시작한 ‘한·일협정’이 1951년부터 시자됐다. 10년에 걸친 교섭에도 일본측의 고자세로 타결점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자유당 정부에 이어 4월혁명으로 집권한 민주당 정부도 한일회담을 추진하여, 60년 10월 25일 제5차 한일회담이 열렸으나 이후 5·16쿠데타로 중단되고 말았다. 박정희 군사정부는 미국의 원조가 대폭삭감된 상황에서 무엇보다 5개년 경제개발계획에 따른 대규모 투자재원의 확보가 필요했다. 여기에 미국의 지역통합전략, 일본의 자본 해외진출 욕구 등이 맞아떨어져 한일회담이 적극적으로 추진되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그밖에도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박정희를 비롯한 군사정권 핵심 요인들의 심정적인 친일성향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이 일본육사와 만주군관학교 출신들로서 일본에 대해 다분히 애정과 향수를 갖고 있었다. 이런 요인들로 인해 61년 10월 20일 제6차 한일회담이 재개되었는데, 합의사항을 둘러싸고 한일 양국의 이견과 양국 내의 격렬한 반대분위기로 타결이 늦어지고 있었다. 이에 정부는 비밀리에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을 특사로 파견, 이케다 수상과 비밀회담을 갖고 타결조건에 대한 이면 합의를 이루도록 했다. 그러나 한국의 거듭된 양보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여전히 고자세의 버티기 전략으로 맞섰다.
■ 굴욕적인 ‘김종필·오히라(大平) 회담’ (클릭하시면 보실 수 있습니다)
박정희 정권에 있어서 62년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의 첫해로서 시급한 자본도입이 요구되었고, 충분한 검토과정없이 감행한 화폐개혁의 실패로 경제상황이 매우 불안정한 관계여서 한일회담의 조기타결을 서둘렀다. 그래서 김종필이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김종필·오히라(大平) 회담을 열고 여기서 비밀메모(김·오히라 메모)를 통해 대일청구권문제 등에서 우리에게 크게 불리한 합의를 해주었다. 이에 따라 청구권 협상의 타결의 조건으로 ‘한국에 무상공여 3억달러, 유상정부차관 2억달러, 민간차관 1억달러 이상을 제공한다’는 메모를 교환했다. 이 액수는 일본이 불과 몇 년을 침략한 동남아 각국에 지불한 액수보다 적었다.
한일문제는 민족적합의가 절실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밀실에서 졸속 처리되었다. 그들은 국민들의 배상요수를 일본이 주장하는 몇푼의 독립축하금으로 바꿔치기했으며 조선인 징용과 징병, 일본군 ‘위안부’,학도병 등 일제하 강제동원 피해자들에 대한합당한 배상이나 보상대신 뒤로 은밀하게 불법적인 정치자금을 받아 챙겼다. 일본 기업들로부터 받은 막대한 자금은 공화당과 대통령 선거자그믕로 유용됐음은 물론이다. 대신 일본 기업은 한국에서 각종 특혜와 독점권을 제공받았다.
이때 대일청구권이라는 용어도 사용하지 못하고 일본이 '독립축하금'이란 이름으로 무상 3억 달러에 일제 36년 식민통치에 따른 모든 배상문제를 마무리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독도를 폭파해서 분쟁의 요인을 없애자는 등 그야말로 굴욕적인 협상이 이면에 깔렸다. 이때 대일청구권이라는 용어도 사용하지 못하고 일본이 '독립축하금'이란 이름으로 무상 3억 달러에 일제 36년 식민통치에 따른 모든 배상문제를 마무리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독도를 폭파해서 분쟁의 요인을 없애자는 등 그야말로 굴욕적인 협상이 이면에 깔렸다.
■ 한·일 국교정상화는 현재 진행형
외교는 내정의 연장이지만, 외교를 정치수단으로 활용하면 돌이키기 어려운 국가적 재난에 가깝다. 친일정부가 만든 굴욕적인 한외교는 내정의 연장이지만, 외교를 정치수단으로 활용하면 돌이키기 어려운 국가적 재난이 될 수도 있다. 한일관계가 그렇다. "대동아 공영권을 이룩하기 위한 성전(聖戰)에서 나는 목숨을 바쳐 사쿠라와 같이 훌륭하게 죽겠습니다."라는 가미가제식 자폭성 혈서를 썼던 다카키 마사오(박정희). 이런 박정희가 저지른 한·일국교정상화는 박정희를 따라배우겠다는 제 2의 친일 정부 윤석열 대통령으로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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