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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관련자료/교육칼럼

내가 교육위원을 승계 못한 이유

by 참교육 2010. 3.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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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택선생님 휴대폰이 맞습니까?”

“그렇습니다”

“여기는 경상남도선거관리위원횐데요, 선생님은 주민등록을 옮긴 일이 있지요?”

“그렇습니다. 지난 10월 마산에서 청주로 옮겼던 일이 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선생님은 안타깝게도 교육위원승계권이 상실돼 교육위원직을 맡을 수 없게 됐습니다. 비록 5개월이기는 하지만 실정법이 그러니 저희들도 어쩔 수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현 경상남도 교육위원회 의장인 박대현위원이 지병으로 타계하신 후 공석을 승계할 차순위자인 내가 주민등록 주소를 마산에서 청주로 옮겨 승계권이 상실됐다는 선거관리이원회의 통보다.

며칠 전, 지인을 통해 주거지를 옮기면 ‘교육위원 승계권’이 상실된다는 것을 들어서 알고는 있었지만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직접 통보를 받고 보니 착잡하다. 현 교육위원은 교육감과 교육위원을 학교운영위원이 투표권을 행사는 간접선거를 통해 선출, 오는 6월로 임기가 끝난다. 선거 당시 나는 2006년 선거당시 경남의 제2선거구인 마산,고성,통영,거제에서 2명을 뽑는 선거에 출마해 3등으로 낙선됐다.

선거 결과를 보면 타계하신 박대현 교육위원이 685표(37.3%), 옥정호 교육위원은 453표(24.7%)를 득표해 2위로 교육위원이 됐다. 나는 옥정호위원보다 2%가 적은 416표(22.6%)를 얻어 3위로 낙선했다. 현행 규정에 의하면 교육위원 중에 결원이 생기면 지방자치법(78조)에 따라 승계자를 정하도록 되어 있다. 승계권은 교육위원의 규정에는 없지만 시․도의원의 피선거권과 같은 기준에 준용된다는 것이다.

(오마이뉴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311607 )

나는 지난 해 10월 야반도주하듯이 마산을 떠나왔다. 30년을 살던 고향(?)을 두고 이삿짐을 사들고 훌쩍 떠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것도 나이가 60을 훨씬 넘어서 말이다. 내가 미운정, 고운정이 든 마산을 떠난 이유는 개인적인 건강 문제 때문이기도 했지만 외손자가 어린이집에 적응하지 못하고 고전하는 모습을 차마보지 못한 아내의 성화 때문이기도 했다. 전기밥솥과 이부자리만 싸들고 원룸을 얻어 청주로 옮긴 지난 4월. 무려 8개월 동안 비워둔 집을 돌아보느라 청주에서 마산까지 한달에 한두번씩 드나들었다. 결국 ‘비워 둔 집을 전세내면 가계에도 보탬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 결행한 판단이 승계권 상실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교육위원을 하라는 팔자가 아닌가 보다, 하고 잊어버리시오!”

미련을 버리지 못해 여기 저기 전화를 하는 나를 보다 못한 아내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안타까운 마음은 쉬 가시지 않았다. 비록 5개월이긴 하지만 4년 전 현직교사로 재직하고 있으면서 출마해 고전을 했던 일을 생각하면 포기가 쉽지 않았다. ‘자의반 타의반’으로 출마한 교육위원 선거였지만 모든 출마자가 그렇듯이 내가 교육위원이 되면... 나름대로 교육을 바꿀 수 있다는 원대한(?) 꿈이 있었다.

▲ 김용택 교사 부부가 제자들이 주는 꽃다발을 받고 있다.
ⓒ2007 윤성효

나의 교직생활은 참으로 파란 만장 그대로였다. 초등에서 중등학교로, 공립에서 사립으로, 남자학교 여학교, 남녀공학을 두루 다닌 것도 그렇지만 전교조 가입으로 해직과 복직 그리고 끝내는 정년퇴직자에게 주는 훈장까지 포기했던 38년 6개월간의 교직생활. 제자들에게 삶의 안내자로서 역할을 못한 선생으로서 최소한의 양심이 나로 하여금 별난 선생으로 낙인찍힌 생활을 하게 했던 것이다. 교사가 된다는 것! 나의 경험으로는 ‘전생의 죄가 얼마나 많았으면 선생으로 태어났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가 한두번이 아니었다. ‘대충하면 그만’일 교사노릇을 그렇게 할 수 없다는 나름대로 지론이 나로 하여금 파란만장한 교직생활을 하게 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나이 40이 넘도록 나는 ‘교과서만 열심히 가르치기만 하면 좋은 교사’라고 수준을 넘지 못했다. 문제의식 없이 가르치라는 것만 가르치며 살아 온 교직생활의 변화는 80년대 ‘민주화의 봄’ 영향이 컸다. 15~6년의 교직생활동안 아이들에게 ‘죄를 지었다’는 부끄러운 생각 때문에 ‘사회교육’에 동참하게 되면서 남이 하지 않은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전교조에 가입하면 목이 잘린다’는 이유 때문에 또 간부를 맡으면 그만큼 위험부담이 커진다는 것도 알면서 뛰어들어 5년 가까운 세월을 길거리를 헤매기도 하고 구속수배를 당하기도 했다.

‘조용히 살면 세상이 변할 텐데, 왜 선생이 돼가지고 데모나 하고 그렇게 사느냐’는 충고(?)에 상처를 받기도 하면서...

언론이 바뀌면 세상이 바뀔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에 지역신문 창간에 뛰어들기도 하고 남이 싫어하는 방송이나 신문에 얼굴내기도 마다하지 않았다. 찍히면 근무평가 점수며, 승진조차 포기하고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게 현실인 나라. 먼저 앉은 버스 자리도 양보하지 않는 세상에 자신이 손해 보는 일을 한다는 것은 순진한 선생이나 하는 일(?)이다. 왜곡된 현실을 바꿔야겠다는 생각 때문에 전교조에 가입, 해직 구속수배를 당하고 복직 후, 학교운영위원회에서 교장과 맞붙어 많이도 싸웠다. 재직하는 학교에서 교장과 싸움을 한다는 건 동료들과 등져야 하는 이중의 고통이 따랐지만 ‘아이들을 위하는 일이라면...’ 하면서 마다하지 않았다.

위기의 교육을 바꿔야한다는 순진한 교사의 사명감(?)에서일까? 아이들과 소통하고 선생님들께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겠다는 욕심으로 홈페이지를 만들어 운영하기도 하고 심지어 교육이 달라질수만 있다면 하는 마음에서 주민자치위원이 되어 뛰어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라진 게 없자 용감하게도(?) 교육위원으로 출마하게 됐던 것이다. 낙선의 고배를 마시고 정년, 중병까지 얻어 투병생활을 하며 처음으로 자신과 가족을 돌아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전교조 탄생 30년! 아직도 교육은 한밤중이다. 여전히 학생은 인권의 사각에서 고통을 받고, 삶을 가르치는 학교가 아니라 시험성적으로 사람의 가치를 서열화하는 반교육이 강행되고 있는 것이다.

‘심은대로 거둔다’고 했던가? 그런데 이명박정부 출범 후 그렇게 많은 민중의 희생은 도루묵이 되고 30년 전으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수많은 선생님들이 민주주의를 외치다... 참교육을 외치다 혹은 잡혀가고 죽고 혹은 해직의 고통을 당하면서 빨갱이가 되어야 하는 고통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교육위원은 목표가 아니다. 작은 힘이지만 혼신의 힘을 다할 때 ‘심은 대로 거둔다’는 것은 학교생활에서 얻은 소중한 경험이다. 교육위원이 교육을 바꾸겠다는 철학도 없이 사리사욕에 눈이 먼다든지, 교육감이 되겠다는 꿈이나 꾸는 한 척박한 교육이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교육이 이지경이 된 것은 학부모의 자식사랑 과욕도 그렇지만 교사들의 무관심이나 교육위원이나 교육감, 혹은 교육당국자의 책임이 더 크다. 세월이 지나면 세상이 좋아질 것이라는 운명론자도 교육을 황폐화시키기데 일조하기는 마찬가지다. 교육의 황폐화는 부메랑처럼 사교육비부담과 가정파괴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언제까지 무너지는 교육을 방관만 하고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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