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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관련자료/교육칼럼

김예슬 죽이는 더러운 세상

by 참교육 2010. 3.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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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끄러운 이야기 하나.

부끄러운 얘기부터 하나 해야겠다. 정년퇴임이 가까워오자 교무부장이 찾아와 훈장을 받는데 필요한 자료를 요구했다.

“저는 훈장을 받을 일을 못했는데요.”

“다 받는 훈장인데... 훈장을 거부하면 포기서를 제출해야 합니다.”

차마 그것까지 거절 할 수 없어 훈장 포기서를 제출했다.

훈장을 포기하고 소회를 개인 홈페이지에 올렸더니 조,중,동을 비롯한 신문과 방송들이 야단법석을 떨었다. 마치 훈장을 거부한 나는 용기 있는 양심적인 교사요, 훈장을 받는 교사는 그렇지 못한 교사로 분류해 곤욕(?)을 치러야 했다.

내가 훈장을 거부한 이유는 단순했다. 학교가 이지경인데 정년퇴직을 하면 개근상처럼 받아들이는 세태를 질책하기 위해서였다. ‘해방 후 지금까지 수십만명이 훈장을 받았는데 왜 교육이 이 모양인가?’라는 항의 표시이기도 했다. 제대로 된 사회라면 훈장을 거부한 사람이 아니라 훈장 받는 사람이 기사거리가 돼야할 텐데 내가 오히려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 부끄러운 이야기 둘.

교실 배식을 하는 학교에 근무하다 식당에서 공동식사를 하는 학교에 발령을 받았을 때의 일이다. 점심시간이 되면 식당이 없어 체육관에 식탁을 만들어 놓고 학생과 교사들이 함께 밥을 먹었다. 며칠이 지나면서 이상한 현상을 발견하고 너무 놀라서 이 사실을 고쳐야 되겠다고 생각하고 행동에 나섰다. 그 ‘이상한 현상’이란 밥값은 학생과 교사가 똑같이 내는데 반찬의 가짓수가 달랐던 것이다. 학생이 곁에서 함께 밥을 먹는 식탁에서 학생은 반찬이 3~4가지 정도였는데 교사는 5~6가지였다.

생각다 못해 몇몇 선생님들에게 문제제기를 했더니 이런 현상은 옛날(학교급식을 시작한 3,4년 전)부터 있었던 일로 그런 현상을 당연시 하는 분위기라는 것이다. 어떤 선생님은 그 꼬라지(?)가 보기 싫어 학교식당에서 아예 밥을 먹지 않고 바깥에서 사먹든가 아니면 아예 도시락을 사오기도 한다는 것이다.

‘밥값은 똑같이 내는데 반찬의 가지 수가 다르다’는 것은 학생이 낸 돈으로 자식 같은 제자들의 반찬을 빼앗아 먹는다는 얘기다. 그것도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딸 같은 제자들이 낸 돈으로 만든 반찬을 교사들이 빼앗아 먹는다?’

더 이상 그 ‘이상한 현상’을 묵과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다음 날부터 교사 줄이 아니라 학생들의 줄에 서서 배식을 받았다. 한 달 가까이 돌연변이 짓(?)을 하는 그런 ‘이상한 현상’(교사가 학생 밥을 먹는...)을 그 어떤 교사도 동참하지 않았다. 혹시난 백 명 가까운 선생님들 중에는 나와 같이 학생 줄에 서서 학생과 같은 반찬을 먹자며 동참하기를 기다렸던 내가 순진했던 것이다.

생각다 못해 교장선생님을 만나 이런 어처구니없는 현상에 대해 해결해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교장선생님 왈 “고생하시는 선생님들께 특별한 배려도 못해주는데 그 정도를 가지고 뭘 시끄럽게 구느냐?”는 것이었다. 기막힌 현실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나의 객기(?)는 선생님들께 설문지를 만들어 여론화시켰지만 ‘너만 양심적이냐?’ ‘학생과 선생님들의 식습관이 다는데...’라며 별난 놈 취급만 받고 500원을 올리는 것으로 타협해야 했다.

<사진 : 오마이뉴스에서 - 지난 11일 오후 서울시 성북구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후문에 자발적 퇴교를 앞둔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의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제목의 대자보가 붙어있자 지나가던 학생들이 발길을 멈추고 글을 읽고 있다.>
#. 부끄러운 이야기 셋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는 말로 시작한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3학년 김예슬씨의 대자보는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이 시대를 향한 경고요, 최고(催告)다. 아니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질서를 향한 질타요, 꾸중이다.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 둔다. G세대로 '빛나거나' 88만원 세대로 '빚내거나', 그 양극화의 틈새에서 불안한 줄타기를 하는 20대. 그저 무언가 잘못된 것 같지만 어쩔 수 없다는 불안과 좌절감에 앞만 보고 달려야 하는 20대. 그 20대의 한 가운데에서 다른 길은 이것밖에 없다는 마지막 남은 믿음으로....’로 시작하는 그의 글은 대학을 '자격증 장사 브로커'로 ‘글로벌 자본과 대기업에 가장 효율적으로 '부품'을 공급하는 하청업체’라 규정한다. 국가는 ‘대학의 하청업체’가 되어, 의무교육이라는 이름으로 12년간 규격화된 인간제품을 만들고 있다‘고 질타한다.

김예슬씨의 자발적 자퇴선언이 있은 지 한달이 가까워 오고 있다. 그런데 칼날 같은 논리로 정치를 말하고 경제를 분석하던 언론관계자들. 제자로부터 장사꾼이라는 오명(?)을 뒤집어 쓴 교수님들. 대학과 야합해 교육을 이 지경으로 교육관료님들. 뭐라고 변명이라도 좀 해야 하지 않을까? 변명을 하지 않겠다는 것은 인정하겠다는 뜻인지 아니면 말 같잖은 소리에 대꾸를 하지 않겠다는 묵살인지 아무도 밝히는 이가 없다.

돌이켜보면 숨 쉴 공기도 마실 물도 안심하고 먹을 먹거리도 없는 기막힌 세상이 됐다. 아니 그런 세상이 된지 오래다. 대학이 졸업장을 팔아먹는 장사꾼이 된 세상. 근대화를 외치고 경기전망을 논하고 정세를 분석하던 그 똑똑하신 학자님들.. 그 덕분에 특혜를 받고 살아오면서 권력 앞에는 알아서 비위를 맞추고 약자들의 절규에는 같잖은 인간(?)들의 하잖은 소리로 묵살해 왔다. 양심을 가르치는 이 땅의 교육자님들. 사랑과 신의 자비를 외치는 종교인들. 진리를 말하고 선을 말하던 그 입은 어디로 갔는가?

‘노동자도 사람이다’라고 외치던 전태일. 그의 절규는 이 땅의 잠자는 양심을 깨우고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자는 아름다운 메시지로 화답했다. 그는 죽었지만 이땅의 노동자를 살리고 잠자던 양심을 깨워 시커멓게 더러워진 세상을 정화하는 카타르시스 역할을 했다. 그런데 이예슬은 어떤가? 어쩌면 그의 당찬 저주(?)는 부끄러워해야할 사람에게 비수를 꽂았지만 아무도 비수를 맞은 사람이 없다. 내가 싫어하는 말이 몇가지 있다. ‘군대 갔다 오면 사람이 된다’는 말과 ‘가난은 나랏님도 못구한다’는 말이 그것이다. ‘폭력이나 권력 앞에 순종하는 가치관’을 내면화시키는 과정이 군대라면... 군 생활에서 ‘권력이나 폭력 앞에 알아서 기는...’ 사람으로 바뀐다면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학교는 왜 교칙이라는 이름으로 ‘통제와 규제’를 일상화 하는가? 왜 국정 교과서로 국가가 골라 모은 지식을 금과옥조로 내면화 하는가? 이예슬씨의 지적처럼 자본의 논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노동자에게 자본가의 논리를 주입시키기 위해, 돈 앞에 꼬리는 감추는 인간을 양성하자는 것은 아닐까?

어떤 논객이 말했던가? ‘돈만 아는 더러운 세상’이라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경쟁자가 적이 되는 세상은 더러운 막가파 세상이다. ‘양심이 법먹여 주냐’며 기고만장하는 세상에 도덕이나 윤리를 말하지 말라. 더 좋은 집에 더 고급 옷을 입기 위해 더 높은 지위를 위해 권모술수도 마다않는 사회는 더러운 세상이다. 자신을 과시하기 위해 약자 가슴에 못을 박으면서 통쾌해 하는 세상은 더더욱 더러운 세상이다. 김예슬선언 앞에 침묵하거나 외면하는 사회에서 희망을 말하지 말라. 부끄러워해야 할 사람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참을 수 없는 더러운 세상을 원하는 사람은 누군가?

부끄러운 논리를 정당화 해 온 대가로 특혜를 누리면서 그것이 능력으로 착각하는 지식인이 사는 사회는 후진사회다. 권력에 양심을 팔고 돈 앞에 비굴하게 사는 것이 능력으로 보이는 세상을 바꾸지 않고서는 김예슬은 반항아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권력의 이름으로 돈의 위력으로 신의 이름으로 약자의 눈을 감기고 짓밟는 세상은 진위가 뒤집힌 더러운 세상이다. 그런 사회가 아무리 국민소득이 높아도, 학력이 높아도 삶의 질은 그림의 떡이다. 부끄러워해야할 사람이 떳떳하게 사는 세상에 진실을 말하는 이는 부끄럽고 또 부끄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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